역사의 숨결/역사(한국)

[신비의 고대왕국 .13] 해상왕국, 우산국

지식창고지기 2010. 11. 10. 09:56

[신비의 고대왕국 .13] 해상왕국, 우산국
 암각화에 새겨진 선사시대 고래잡이 어부들이 우산국의 시조?
북면 천부리 출토 목걸이. 청색과 황색의 유리옥으로 제작됐다. 신라장군 이사부가 군주로 있던 강원도 일대의 세력과 교류하면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북면 천부리 출토 목걸이. 청색과 황색의 유리옥으로 제작됐다. 신라장군 이사부가 군주로 있던 강원도 일대의 세력과 교류하면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해의 외로운 섬 울릉도. 그곳에 우산국이란 고대국가가 있었다. 우산국의 역사는 대략 BC 300년 전부터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한 512년까지로 추정된다. 다른 고대국가와 달리 오랜 역사를 간직할 수 있었던 데는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울릉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들은 어디서 왔나

BC 300∼1년 추정 고인돌 발굴…기원전 문화 갖춘 부족 존재…한반도 내륙서 이동 추측


울릉군 북면 현포리와 서면 남서리, 울릉읍 저동리에 남아 있는 고인돌을 통해 우산국의 시발점을 추측할 수 있다. 학계에서는 울릉군에서 발견된 고인돌이 청동기 후기인 BC 300~1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고인돌은 지배자의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선사시대 울릉도에 있었던 공동체의 존재와 기원전에 시작된 우산국 역사를 증명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곡식을 갈아먹는 청동기시대 유물인 갈돌과 갈판이 발굴됐다. 북면 천부리에서 발굴된 다량의 토기 파편을 분석한 결과 화산암 토양이 검출됐으며, 제작시기는 청동기시대로 밝혀졌다.

이러한 사실들은 기원전 울릉도에 공동체가 존재했음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 즉, 울릉도와 독도에는 이미 기원전부터 문화적인 소양을 갖춘 부족이 존재했다는 것.

'그렇다면 이들이 어디에서 왔을까'란 의문이 든다. 이들의 출발점은 한반도 내륙 암각화와 해류상황을 보면 추측이 가능하다. 울산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의 그림에는 20명까지 탈 수 있는 포경선이 그려져 있다. 선사시대 이미 연안을 벗어나 대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항해술과 이에 필요한 조선술이 발달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동해의 해류상황도 기원전 한반도 내륙에서 울릉도까지 인적·물적 이동이 가능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해 남쪽에서는 대마난류에서 분기한 동한난류가 한반도 남동연안에서 출발, 울릉도 해역으로 흐르는 점과 함경도 연안을 따라 남하하는 북한한류가 울릉도 해역까지 흐르고 있다. 고대의 해상루트는 선사시대 우산국에 거주한 정착민의 유래와 당시의 해상활동을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우산국의 흔적 그리고 멸망

삼국지 위지동이전 243년 첫 등장…독립된 해상왕국 추정…512년 신라 장군 이사부가 정벌


울릉도를 언급한 것으로 추측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는 삼국지 위지동이전 옥저조다.

'고구려 동천왕 19년(243). 고구려에 쳐들어온 위나라 장수 관구검은 현도군의 태수 왕기로 하여금 동천왕을 남옥저(지금의 함남 남부지역)까지 쫓게 하였다. 거기까지 온 왕기가 바다 동쪽에도 사람이 사느냐고 묻자, 그 지방 사람이 "언젠가 풍랑을 만나 동쪽의 한 섬에 도착한 적이 있었다. 섬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말이 잘 통하지 않았고 칠월이면 소녀를 골라 바다에 빠뜨리는 풍습이 있다고 들었다"란 대답이 돌아왔다.'

이에 대해 일본인 역사학자 이케우치 히로시 박사는 "그 섬은 틀림없이 울릉도를 가리키는 것이며, 이 기록은 울릉도에 대해 가장 오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고대국가 우산국은 기록으로는 아주 짧게 중국의 역사 속에 243년 동해안에 사는 언어가 다른 부족으로 잠깐 언급됐고, 512년에 가서야 신라 정복사의 한 페이지에 이사부와 함께 우산국이란 이름이 처음 등장했다.

우산국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 성과는 이사부의 정벌이 있기 전에도 울릉도 나름의 독자적 문화권을 발전시키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문헌을 근거로 할 경우 최소한 243년에 울릉도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산국은 언제 누가 세운 국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울릉도와 부속도서를 영역으로 하면서 바다를 무대로 생활하던 독립된 해상왕국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역사적으로
기원전 우산국의 도읍지로 추정되는 울릉군 북면 현포리에는 40여기의 고분이 남아있다2
기원전 우산국의 도읍지로 추정되는 울릉군 북면 현포리에는 40여기의 고분이 남아있다
서면 남서리 횡혈식석실 고분은 땅이 좁고 흙이 귀한 울릉도의 환경적 요인이 만들어낸 독특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3
서면 남서리 횡혈식석실 고분은 땅이 좁고 흙이 귀한 울릉도의 환경적 요인이 만들어낸 독특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북면 천부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토기들. 통일신라 토기가 주를 이루며, 붉은색 계통의 연질토기와 회청색의 경질토기로 구분된다. 대부분 울릉도에서 제작된 것이며, 경질토기는 바닷길을 통해 울릉도로 유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4
북면 천부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토기들. 통일신라 토기가 주를 이루며, 붉은색 계통의 연질토기와 회청색의 경질토기로 구분된다. 대부분 울릉도에서 제작된 것이며, 경질토기는 바닷길을 통해 울릉도로 유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북면 현포리 절터에서 출토된 금동 장신구.5
북면 현포리 절터에서 출토된 금동 장신구.
정확하게 기록돼 있는 것은 없지만, 여러 가지 문헌과 우산국의 비애가 담겨 있는 서면 남양리 등지에서 우산국의 존재를 찾을 수 있다.

우산국은 신라장군 이사부가 정벌하기 전까지는 본토 한반도와 밀접하면서도 독자적인 문화권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삼국유사 지철노왕(三國遺事 智哲老王)에는 '하슬라주 동쪽 바다 중에 순풍을 타고 2마일 거리에 울릉도가 있는데, 둘레는 2만6천730보(步)다. 사람들이 바닷물의 깊음을 믿고 교만, 공조하지 않아서 이찬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삼국사기(三國史記) 4권 신라본기(新羅本紀)4 지증마립우(之證麻立于)에 따르면 '13년 6월 우산국이 해마다 토산물을 바치기로 했다. 우산국은 명주(강릉의 옛 이름)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인데, 울릉도라고도 한다. 섬 둘레는 100리인데 지세가 험함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다. 이사부가 하슬라주(강릉의 옛 이름)의 군주가 된 뒤 우산인들은 어리석고 사나워 힘으로 굴복시키기 어려우니 계책을 써야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신라군은 나무로 사자를 많이 만들어서 전함에 나눠 싣고 우산국 해안에 도착해 우산국인에게 거짓으로 말하기를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를 풀어놓아 모두 밟아 죽일 것"이라고 했더니 그 나라 사람들이 겁을 먹고 곧 항복했다고 했다.'

#섬전체가 자연적 요새…독립왕국으로 존속…이사부 정벌 후 문물교류…독자적 문화 발전

잊혀진 해양왕국 우산국의 성격과 문화를 생각해 볼 때 이상의 고고학적 자료와 문헌 이외에도 간과할 수 없는 자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우산국에 대한 설화와 그와 관련된 지명들이다.

울릉군 서면 남양리 해안의 사자바위는 우산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던 목각사자가 변한 것이란 설화가 있다. 또 신라장군의 투구바위, 우산국의 마지막 왕인 우해왕이 대마도에서 데려온 공주가 죽자 슬픔을 달래기 위해 비파를 켰다는 비파산 등이 있다. 남서동 고분군 일대에는 우산국의 읍성이 자리잡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우산국에는 본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위적으로 축조된 성이 없다. 섬 전체가 자연적으로 형성된 요새가 될 수 있음을 감안하면, 오늘날의 나리분지 일대를 고대 우산국의 훌륭한 도읍지로 추정이 가능하다.

우산국은 비록 작기는 하지만 당당했던 독립적 해양왕국, 해양의 독립주체였음을 알 수 있다. 육지에서는 독립이 불가능했지만, 사방이 바다로 격리된 천혜의 자연 조건을 이용해 독립왕국으로 존속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에 말을 잘 듣지 않은 우산국이 이사부의 정벌에 항복한 뒤 해마다 토산물을 바치기로 했다는 기록은 전쟁의 종결을 의미하지만, 반(半)독립 상태를 장기간 지속했으리라 추측할 수도 있다. 따라서 우산국은 이사부의 정벌과 함께 사라진 국가가 아닌 것이다. 학계에서는 신라가 정벌에 나선 목적은 완전히 멸망시키기보다,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동해안의 유일한 해상세력인 우산국과의 연합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울릉도의 고분은 한반도에서 발견된 다른 고분과 달리 돌로 쌓은 적석묘란 점이다. 땅이 좁고, 흙이 귀한 환경적 요인이 만들어낸 우산국만의 독특한 고분형식이다.

우산국은 이사부와의 만남 이후 신라의 선진문물을 자국의 문화에 접목시켜 해상왕국으로 더욱 강성해지기에 이르렀고, 문화는 통일신라의 수준에 거의 도달하기에 이르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사실은 울릉도 북면 일대에서 발굴된 7~8세기 유적과 유물을 통해 파악된다.

이승진 독도박물관장은 "울릉도·독도가 고대 해상왕국 우산국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수 있는 고고학적 유적과 유물의 추가적인 출토가 필요한 실정이다. 또 울릉도의 전통문화 자산인 신석기시대의 유적과 고분, 투막집과 같은 집단 거주지역을 활용한 전통생활을 문화콘텐츠로 개발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2010-08-18 08:07:38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