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 전한前漢 ( BC206~25 ) - 한漢의 제2대 혜제, 제3대 여후 呂后

지식창고지기 2009. 6. 1. 10:03

제2대 혜제 惠帝


고조가 태자에 대한 교체건을 채 매듭짓기 전에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영이 즉위하였다.

그는 어리고 성격이 유약하였으므로, 사실상 실권은 여후가 장악하게 되었다.

고조가 죽자 가장 난감한 상태에 빠진 사람은 다름아닌 척부인(戚夫人)이었다.

척부인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고조가 죽자 그녀는 외톨이 신세가 되었고, 태자의

폐위문제와 고조가 자신을 멀리하고 척부인만을 총애한 것또한 여후는 상당히 불쾌하였다.

마침내 여태후는 척부인을 죽이기로 결심하였는데, 간단히 죽이는 것으로는 직성이 풀리지

않을듯하여 먼저 척부인의 두 손과 두 다리를 잘랐다.

그런후 눈을 도려내어 장님으로 만들고 귀를 잘라 귀머거리로 만들었다.

뿐만아니라 약을먹여 벙어리로 만들었다.

그런후 그녀를 변소에 넣어놓고 ‘인간돼지’라 이름 붙였다.

그리고 척부인의 아들 여의를 장안으로 불러 독살하였다.

또한 여태후는 자신의 아들인 영(혜제)에게 이 광경을 보여주었는데, 혜제는 이 인간돼지가

척부인임을 알고는 충격을 받은 나머지 병석에 눕게 되었고, 그 이후 정치를 멀리하고

술과 여자를 가까이 하였다.

그리되자 조정의 모든권력은 여태후 에게로 집중되었고, 혜제가 즉위후 7년만에 세상을

떠나자 그 뒤를 소제(小帝) 공(恭)이 이었으나, 그도 얼마지나지 않아 여태후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또한 그 뒤를 소제(小帝) 홍(弘)을 세웠다.

조정의 권세가 모두 여태후에게 집중되자 그녀는 유씨 이외에는 왕을 세우지 말라는

고조의 명을 어기고 여씨 일족을 왕으로 세우기 시작했다.

둘재 오빠인 조왕(趙王) 여록(呂祿)을 상장군으로 삼아 북군의 지휘를 맡겼고, 양왕(襄王)

여산(呂産)에게 남군의 지휘를 맡게 했다.

하지만 기원전 180년 여태후가 세상을 뜨면서 상황은 급반전 되었다.

제왕(齊王) 유양(劉襄)등은 여씨를 타도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고, 각 제후들이 이에

호응하므로 마침내 여씨 세력을 몰아내고 유씨의 한 왕조를 재건하였다.

그리고 고조의 아들 유항(劉恒)을 맞아 제위를 이으니 이가바로 문제(文帝)이다.

 

 

제3대 여후 呂后

?~BC 180


중국 전한(前漢)의 시조 유방(劉邦:高祖)의 황후.

성 여(呂). 자 아후(娥?). 이름 치(雉). 산양[山陽] 출생.

무명의 유방과 결혼하여 평정사업(平定事業)을 도왔고, 유방이 죽은 뒤 아들 혜제(惠帝)를

즉위시키고 실권은 자신이 잡았다.

혜제가 23세의 나이로 죽자, 혜제의 후궁에서 출생한 여러 왕자들을 차례로 등극시키면서 황제를 대행,

여씨 일족을 고위고관에 등용시켜 사실상의 여씨정권을 수립하였다.


또 유방의 총비(寵妃) 척부인(戚夫人)의 수족을 자르고 변소에 가두는 등 횡포를 자행하였다.

특히, 유씨(劉氏)만을 후왕(侯王)으로 책봉하라는 유방의 유훈(遺訓)을 어기고 동생 여산(呂産),

여록(呂祿)을 후왕으로 책봉하였는데 이것이 유씨 옹호파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그녀가 죽자

곧 여씨 주멸(誅滅)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이 여씨의 난(실제는 미수에 그쳤다)이며, 여씨 정권은 붕괴하고

고조의 차남 유항(劉恒)이 즉위하여 문제(文帝)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