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대 무제 武帝
BC 156~87/86.
기원전 141년 경제가 죽고 황태자 철(徹)이 그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으니 이가 바로
전한(前漢)의 황금시대를 이룩한 무제(武帝)이다.
무제는 한의 제6대 통치자인 경제(景帝)의 9번째 아들이다.
맏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상적으로는 제위에 오를 수 없었으나, 황족들은 7세인 그를
황태자로 책봉해 후계자의 지위를 확보해주었다.
무제는 즉위하자 제일먼저 중앙집권의 강화를 시도하였다.
그리고 화폐제도를 통일하여 정부가 화폐를 주조하도록 하였고, 소금, 철, 술등은
정부가 전매토록 하였다.
또한 균수법(均輸法)과 평준법(平準法)과 같은 경제정책을 실시하여 물가를 조절하였다.
그는 친척과 스승들로부터 기본적인 사상이 상반되는 두 학파인 도가(道家)와 유가(儒家)의
영향을 받았다.
도가에서는 법률 만능주의 철학을 받아들여 편의주의적 통치를 바탕으로 한 독재적 통치를
가능하게 할 수 있었고, 유가에서는 전례(典禮)를 비롯한 여러 가지 통치 수단을 받아들여
점점 커지는 한나라 군주들의 권력을 억제하려고 애썼다.
또한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를 받아들여 오경박사(五經博士:다섯가지 유교경전에 관한학자)
와 국립대학인 태학(太學)을 설치하였고, 유교적 덕목에 의해 관리를 등용하는
효렴제(孝廉制)를 개설하였다.
BC 133년에 중국 북부의 국경지방을 끊임없이 침략해 중국을 크게 위협하던
유목민족인 흉노족에대하여 강경책을 실시하여 위청(衛靑),곽거병(?去病)으로 하여금
흉노를 공격케했으며, 그후로는 제국의 영토확장에 전념했다.
그는 병사들의 어려움보다는 전쟁의 승패를 더 중시했기 때문에 BC 101년에 이르자
중국의 지배력은 사방으로 확대되어 있었다. 중국 남부와 베트남 중·북부 지역이
한 제국에 병합되었다.
무제는 또한 흉노족의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고비 사막 건너편으로 군대를 보냈지만,
이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이러한 일들이 가능해진 것은 바로 장건(張騫)의 서역여행이 주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장건은 서역으로 2회에 걸쳐 파견되었는데, 이것은 서역제국과 동맹을 맺어 흉노를
무찌르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장건은 월지국(月氏)으로 가던 도중 흉노에게 사로잡혀 10년동안이나 억류생활을
하였고, 가정을 꾸려 흉노의 경계심이 누그러진 틈을타 탈출하였다.
그후 대완(大宛:중앙아시아 동부 페르가나 지방)을 지나 월지에 도착하여 월지국왕을 만나
설득하였으나, 월지왕은 한나라와의 동맹을 거부하였다.
하는 수없이 귀국길에 오른 장건일행은 돈황(敦煌)이 이미 흉노의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차이담 분지를 지나 농서(?西)에 이르는 길을 택했다.
하지만 이또한 흉노의 세력권하에 있었으므로 또다시 흉노에 억류당하게 되었다.
1년후 흉노의 내분을 틈타 탈출에 성공한 장건일행은 기원전 126년 무려 13년만에
고국땅을 밟게 되었다.
주목적인 월지국과의 동맹은 수포로 돌아갔으나, 그가 흉노에서 억류생활을 하는동안
그는 초원, 사막, 호수, 도로 등 흉노의 세력권하의 지역들을 모두 기억해 두었고,
이는 곧 한나라의 흉노토벌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장건의 역할은 흉노토벌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서역여행으로 인해 처음으로 오손(烏孫), 야랑(夜郞), 대완(大宛)등 중앙아시아
각국의 사정과 문물이 전해져, 차츰 교류가 시작되었고, 이를 토대로 서아시아와 로마
까지도 교류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교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빈번해져 이른바 비단길(실크로드)이 개통되기에
이른다.
한편 한의 군대가 가장 멀리 원정을 떠난 것은 중앙 아시아의 페르가나로 진군했을 때였다.
BC 104년의 제1차 원정은 실패했지만, 무제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비타협적 태도는 말을 얻고 싶은 욕망과 자존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의 군대는 만성적인 군마(軍馬) 부족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그가 페르가나에서 얻고자 한 말은 전쟁 도구로 쓰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원한 말들은 주로 '한혈마'(汗血馬)로 피부출혈을 일으키는 기생충에 감염되어 피를
땀처럼 흘리는 말이었는데, 이런 말은 그에게 신비로운 의미가 있었다.
한혈마를 갖는 것은 하늘의 축복을 받은 증표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BC 101년에 떠난 제2차 원정대는 이 유명한 말 3,000여 필과 페르가나 왕의 목을 갖고
돌아왔다.
또한 중국과 페르가나 사이에 있는 작은 나라들도 중국에 복속되었다.
무제는 이제 중국에서 아주 멀다고 생각하는 지역을 제외하고는 모든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무제는 오랜 전쟁과 그밖의 사업으로 국고를 탕진했기 때문에 다른 수입원을 찾아야 했다.
그로 인해 백성에게 새로운 세금을 부과했고, 소금·철·술에 대한 국가 전매제도를 시행하게
된것이었다.
그러나 통치 후반기에는 심한 재정 곤란과 민중봉기에 직면했다.
국가기구에 대한 통치도 그의 경제적 통제와 보조를 맞추어 점점 더 엄격해졌다.
관료들을 철저히 감독하기 위한 제도를 마련했고, 정상적인 관료체제 밖에 있는 사람들을
심복으로 끌어들여 관료들이 그의 뜻에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는 대개 자신처럼 가혹하고 엄격하며 무자비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측근으로 발탁했다.
무제는 대외적으로 침략적 정책을 취했지만 유교를 정통국교로 채택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유교는 인자한 아버지 같은 인물을 이상적 통치자로 여겼는데, 그는 이런 통치자의
모습에는 별로 감명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유학자들의 문학적 아름다움은 높이 샀고, 특히 의례를 강조하는 부분을 높이
평가했다.
이런 형식적 의례는 종교에 대한 그의 관심을 충족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무제가 실행한 의례는 대개 2가지 기능을 갖고 있었다. 의례는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한조(漢朝)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불멸을 얻으려는 무제의
끊임없는 노력을 나타내는 경우도 많았다.
그는 영생불사(永生不死)의 비결을 알고 있는 신선들을 소개해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사람들을 여러 곳에 보내어 신선들이 살고 있는 섬을 찾게 했고, 혼령을 끌어들일 수
있도록 정교하게 설계한 궁전과 탑을 지었다.
그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세계의 대부분을 정복했고, 그 세계를 떠나고 싶지 않다는 열망
때문에 엄청난 돈을 투자했다.
한편 그는 의심이 많아서 개인적으로 큰 손실을 입었다.
BC 91년 한 측근이 황태자가 그를 죽이려고 마법을 썼다고 모함하자, 궁지에 몰린
황태자는 봉기를 일으켰다.
그결과 수천 명이 살해되고 황태자는 자살했다.
무제는 죽기 직전에 8세 된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어린 황태자의 어머니인 조씨(趙氏)를 없는
죄를 뒤집어 씌워 옥에 가두었다.
조씨는 '슬픔 때문에 죽은 것'으로 전해졌지만 무제는 어린 황제가 자신처럼 외척들에게
지배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내가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내버려두었고 어쩌면 아내의
죽음을 유도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BC 87년 오작궁에서 71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무제는 군사적 정복으로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죽은 뒤 '무력'을 의미하는
무제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의 행정 개혁은 중국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고 유교만 인정한 정책은
그후의 동아시아 역사에 끊임없는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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