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대 선제 宣帝
기원전 74 ~ 기원전 48
창읍왕의 뒤를 이어 유거의 손자 병이 즉위하니 이가 곧 선제(宣帝)이다.
그런데 민가에서 자란 인물을 그대로 황제로 옹립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으므로,
일단 양무후로 임명하는 절차를 거쳐 황제에 오르게 했다.
선제는 민간인으로 지낼때 아내로 삼은 허씨부인을 황후로 삼았다.
하지만 당시의 실권자인 곽광은 그의 딸을 황후로 삼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2년후 허황후는 임신한 몸으로 여의사가 바친 환약을 먹고 독살되었다.
곽광의 아내가 사주하여 독살한 것으로, 그뒤 곽광의 딸이 황후의 자리에 올랐다.
선제가 제위에 오른 6년뒤 곽광이 죽자, 선제는 그때까지 권력을 독점하던 곽씨 일가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그들의 전유물이던 군대 지휘권을 분산시켰다.
또한 그 이듬해에 독살당했던 허황후 소생의 석을 황태자로 세웠다.
그러자 곽광의 아내는 곽황후에게 황태자 석을 독살하도록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한편 군대의 지휘권은 박탈당하고 변방으로 내몰렸던 곽씨 일가는 모반을 획책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황태후의 이름을 빌어 승상과 허황후의 아버지를 연회에 초대하여 없애고
선제를 폐위시킨후 곽우를 즉위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이 음모는 미리 발각되어 곽씨의 삼족이 몰살당하였으며, 곽황후는 폐위되었다.
그후 북쪽의 오랑캐 중 하나인 강(羌)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전에도 강족은 반란을 도모하여 한나라는 고전끝에 진압한 적이 있었는데, 또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선제는 유능한 장수를 파견하여 다시는 반란을 도모치 못하도록 하고자 중신회의
를 소집하였는데, 쉽사리 결정이 나지 않았다.
생각다 못한 선제는 이미 퇴역해 있던 장군 조충국에게 뛰어난 자를 추천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자 조충국은 자신이 직접 출전하기를 원했다.
원래 조충국은 무제때부터 이름을 날리던 맹장중의 맹장이었다.
하지만 그의 나이 이미 76세였다.
선제는 그의 청을 물리치려 하였으나, 그 의기와 거듭 자청하는 모습에 할 수 없이
수락하였다.
이에 조충국은 군대를 이끌어 현지에 도착한 후 정황을 세밀히 시찰한 후 작전에 임하여
강족을 대파하였으며, 강족의 영토에 둔전병 제도를 실시하여 다시는 강족이 반란을
도모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선제는 여염집에서 몸을 일으켜 제위에 오른 사람인 만큼 서민생활의 괴로움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의 정치는 주도면밀하였으며, 법제도가 훌륭히 적용될 수 있었다.
게다가 자사나 태수등을 임명할 때에는 몸소 그를 만나보고 정치에 대한 의견을 묻기도
하였다.
또한 선제는 지방 정치를 매우 중시하였다.
태수를 자주 교체하는 것은 백성을 불안케 하는것이라 여기고, 태수가 공이 있으면
그때마다 포상을 내려 격려하여 한 지방에서 오랜기간 안심하고 정치에 힘을 쏟도록
하였다.
선제의 이런 정책 덕분으로 한나라 시대에 훌륭한 관리들이 대거 배출되었다.
선제는 즉위한 지 25년 되던해 미양궁에서 죽었다.
그 뒤를 태자가 이어 즉위하니, 이가 원제(元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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