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 전한前漢 ( BC206~25 ) - 한漢의 제11대 원제

지식창고지기 2009. 6. 1. 10:12

제11대 원제 元帝

기원전 48~ 기원전 33



원제는 태자때부터 성품이 온순하고 인자하였으며, 학문을 숭상하여 유학자들을

좋아하였다.

하지만 원제는 패도(覇道)와 왕도(王道)를 조화시켜 정치를 이끌어 가는 것 보다는

덕치(德治)만을 주장하는 유학자들을 대거 등용하여 정치를 펼치고자 하였다.

이에 선제는 장차 나라를 어지럽히는 자가 태자일 것이라며 탄식하였다.

그러면서도 태자를 폐출하지 못하였는데, 이는 선제가 젊은시절 태자의 어머니인 허씨의

친정에 몸을 의탁했으며, 허황후는 뒤에 곽광의 아내에게 독살 당하였으므로 태자를 가엾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한편 원제는 선제의 황후인 왕씨를 황태후로 받들었다.

원래 선제는 곽광의 딸을 황후로 맞았는데, 곽씨일족이 멸문당할 때 황후도 폐출되었다.

이후 선제는 후덕한 여자를 얻어 황후로 삼으니 이 여자가 바로 왕씨부인이었다.

원제 역시 왕씨를 부인으로 두었는데, 이가 바로 원후였다.

이후 원후에 의해서 왕씨 일족은 외척으로 절대적인 권력을 잡게된다.


원제는 유교를 좋아하여 유가 출신의 인물을 등용하여 유교이념에 따라 정치를 펼쳤다.

하지만 그 이상과는 달리 나라안에 매년 흉작이 들어 백성들의 생활은 피폐해져 갔다.


원제 2년에 소망지와 주감, 유향(『전국책』의 저자) 이 면직되어 옥에 갇혔다.

이들은 상서로 있던 원제의 외척인 사고의 부관이었는데, 유향이 황제의 고문으로 추천되어

시중 김창과 함께 원제를 보필하였다.

그리되니 자연히 국정은 소망지, 주감, 유향, 김창 네사람에 의해 결정되었고 사고의 지위는

이름뿐으로 전락하여 사고와 소망지의 사이가 벌어졌다.

한편 중서령 홍공과 복야 석현은 선제때부터 오랫동안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원제는 왕위에 오른뒤에도 자주 병으로 누워있었는데, 석현은 환관출신으로 매우 영리하고

이치에 밝았으며, 어떤 당파에 어울리지 않았다.

이에 원제는 석현에게 국정의 대부분을 일임하였다.

이로인해 궁중에서는 석현이, 조정에서는 사고가 나라의 근본을 좀먹어 들어갔다.

그리되자 소망지와 주감, 유향등은 이들의 전횡을 참다못해 원제에게 글을 올렸다.

하지만 원제는 이들의 의견을 묵살하였고, 이 일을 알게된 홍공과 석현은 이들을 옥에

가두게 하였다.

이후 강직한 성정의 소망지는 스스로 독약을 먹고 목숨을 끊었다.


원제는 재위 16년만인 기원전 33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이해에 흉노의 호야한 선우가 내조하여 황녀에게 장가들기를 청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많은 후궁들 중 누구를 선우에게 시집보낼것인가를 두고 고심하다가

의논끝에 화공을 시켜 모든 후궁들의 얼굴을 그려 올리도록 하였다.

이 소문이 돌자 용모에 자신이 없던 후궁들은 앞다투어 화공에게 뇌물을 주어 예쁘게

그려줄 것을 부탁하였는데, 왕소군(王昭君)만은 한푼의 뇌물도 주지 않았다.

아이러닉 하게도 심사결과 왕소군이 선우의 아내로 뽑혔다.

막상 왕소군을 보게된 황제는 그녀의 아리따운 모습에 크게 당황하였으나, 이미 결정된

일이므로 어쩔 수 없이 그녀를 흉노로 보내었다.

이후 이 사건에 뇌물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후궁을 그린 화공은 처형되었으며,

머나먼 길을 떠나 흉노의 아내가된 왕소군은 자신의 사무치는 심정을 담아 시로 읊었다.

『오랑케 땅에는 화초가 없으나

  봄이와도 봄같지 않구나 』


이해에 원제가 죽고 장남이 그 뒤를 이어 즉위하니 이가 한나라 12대왕 성제(成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