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 후한後漢 ( 25~220 ) - 후한後漢 왕조계보, 제1대 광무제 光武帝

지식창고지기 2009. 6. 3. 18:19

후한後漢 왕조계보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25~57/58 

명제(明帝)                                    57/58~75/76 

장제(章帝)                                    75/76~88 

화제(和帝)                                    88~105/106 

상제(帝)                                       105/106 

안제(安帝)                                    106~125 

소제(少帝) 의(懿)                          125 

순제(順帝)                                    125~144/145 

충제(沖帝)                                    144/145~145 

질제(質帝)                                    145~146 

환제(桓帝)                                    146~168 

영제(靈帝)                                    168~189 

소제(少帝:弘農王)                        189 

헌제(獻帝)                                     189~220 

 

 

제1대 광무제 光武帝

BC 4 ~AD 57


신나라(新 : 9~25)를 세운 전한(前漢)의 재상 왕망(王莽)에게 찬탈당한 한(漢)나라를 재건한

황제(25~57 재위).

이름은 유수(劉秀), 묘호는 세조(世祖).

그가 재건한 왕조를 후한 또는 동한(東漢 : 25~220)이라고 한다.


광무제는 황실 유(劉)씨 가문의 일원으로, 한조의 창시자인 고조(高祖:BC 206~195 재위)의

후예로 추정된다.

22년 왕망의 급진적인 개혁조치로 신나라에 대한 평판이 나빠지게 되자, 그는 곧 군대를

일으켰고 강력한 유씨 문중과 다른 부유한 호족가문들의 지원을 받아 23년에 왕망을

격파했다.


2년 뒤에 수도를 중국 동부에 있는 자신의 고향 뤄양으로 옮기고 스스로 황제임을 선포했다.

동한이라는 이름은 이같이 수도를 동쪽으로 천도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그뒤 10년간 통치권을 강화하고 적미(赤眉)의 난을 비롯한 많은 국내반란을 진압했다.

또한 중국 북쪽 국경지대에 있는 유목민족을 진압했고, 중국 남부 변방지역에 대한 제국의

통치권을 되찾았다.

제국에 평화가 회복되자, 그는 전쟁에 지쳐서 전쟁이란 말조차 꺼내지 못하도록 했다.


광무제는 낙양을 수도로 정하고 서기 26년 고조 유방의 사당을 세움으로써 한왕조의

부흥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하였다.


한편 왕망 정권의 부패와 잇다른 농민봉기로 백성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하였으므로,

광무제는 백성의 민심을 먼저 수습하기로 하였다.

그 방안으로 전한 문제때 실시하였던 30분의 1세(稅) 제도를 부활 시킴으로 세금을

가벼이하고, 장병의 수를 줄여 그들을 생산활동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그런 광무제의 정책이 차츰 활기를 띄기 시작하자 국가는 안정화 되었고, 공신들에게는

서열에 해당하는 토지와 식읍을 하사하고, 상을 내려 그들을 공을 치하하였다.

또한 대신들의 정치참여에도 제한을 두었으므로 왕권의 혼란을 없앴다.


뿐만아니라, 국내의 실정에 따라변방 이민족과 외국에 회유책을 시행하여 사신들이 줄을

이었다.

이에따라 후한의 경제는 발전을 이루었고, 국가는 부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