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원나라를 중흥시킨 원세조-쿠빌라이

지식창고지기 2009. 6. 22. 09:46

원나라를 중흥시킨 원세조-쿠빌라이

 

 

 쿠빌라이(忽必烈)는 원(元)나라 시조인 칭기스칸의 손자이다. 1251년 쿠빌라이는 형 몽케(蒙哥)가 제 4 대 칸 자리에 오르자 쿠빌라이는 남송(南宋)을 정벌하는 원정군 대총독에 임명되었다. 몽케가 남송의 조어성을 포위 공격하는 싸움에서 포석에 맞아 숨진후 쿠빌라이는 동생 아리크부카 세력을 제압하고 1271년 즉위해 국호를 원(元)이라 고치고 원세조로 되였다. 그는 도읍을 연경(燕京 지금의 베이징)으로 옮겨 대도(大都)라 했다.

 

 쿠빌라이는 즉위하기 전부터 한족 선비들을 널리 받아들여 국가의 대사를 돕게 하는데 주의를 돌렸다. 그는 열심히 한족 문화를 익히면서 한족 지식인 유병충(劉秉忠) 등을 모사로 등용해 큰 위망을 얻었다. 쿠빌라이가 자신을 황제라 자칭하고 국호를 원이라 정한것도 유병충의 제의에 따른것이였다.

 

쿠빌라이는 즉위한후 남송이 협정을 집행하지 않았다는 구실로 군사를 일으켜 남송 정벌을 시작했다. 1279년 남송을 멸망시키고 여러 민족 경제 문화 교류와 발전에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쿠빌라이는 남송을 멸한후 일본 정벌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 정벌은 실패로 돌아가 원나라는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대부분을 영역 안에 넣었다.

 

 쿠빌라이는 통일을 이룩한후 농업발전에 대해 큰 중시를 돌리였으며 한나라의 세습적 봉건 제후제를 폐지하고 중앙집권제를 확립하였으며 금(金)나라와 당나라 제도를 본받아 관제(官制)를 정하고 세제(稅制)를 정비하였다. 1291년 5월 쿠빌라이는 상서성(尙書省)를 취소하고 우승상(右丞相) 아래 부서를 죄다 중서성(中書省)으로 고치였다. 이런 행성(行省)제도에 의해 원나라는 전국에 요양, 하남, 섬서, 사천, 감숙, 운남, 강서 등 10개 행성을 설치했다. 행성제의 설립은 정치적으로 나라의 통일을 공고히 했고 중앙집권이 행정체제상 담보를 받게 했다. 이 제도는 중국정치제도사에서 중대한 변혁으로서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쿠빌라이는 화폐를 통일하고 티베트에 대해 직접 관리를 실시하는 등 변방지역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면서 다민족 국가의 통일을 추진했다. 쿠빌라이는 외국과의 연계에 중시를 돌려 동남아시아, 인디아 차대륙, 서남아시아 등 나라들과의 경제무역 발전을 추진했다. 이밖에도 쿠빌라이는 라마교를 숭상하면서 기타 종교에 대해서도 보호했으며 정주이학(程朱理學)을 제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