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歷代王朝 개요 및 특징 : 元(원)
蒙古帝國 (몽고제국)
1206 ~ 1259 13세기 초 칭기즈칸[成吉思汗]이 세운 몽골민족 지배 아래의 제국.
12세기 중엽 몽골고원의 오논·케룰렌 두 강 사이를 중심으로 각지에서 유목생활을 하며 할거(割據)하고 있던 몽골계·투르크계의 씨족 및 부족 중의 한 몽골 씨족 출신의 테무친[鐵木眞]은 1189년경 자기 부족과 이어 몽골 여러 씨족을 통일하고 그 맹주(盟主)로 추대되어 1206년 칭기즈칸이라는 칭호를 받고 즉위하였다. 그 후 그는 주변의 타타르·메르키트·케레이트 등 부족들을 정복하여 복속시키고, 또한 서방의 알타이 방면에 근거지를 두고 대항하던 투르크계의 나이만 부족을 멸망시켜 세력을 확대하여, 몽골고원을 통일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후 칭기즈칸은 몽골을 지배하는 대칸[大汗]의 지위에 오르자, 그때까지의 씨족 및 부족제도에 바탕을 두었던 국가 기구를 개혁하여, 국내 유목민을 95개의 천호(千戶)로 하는 집단제로 분할하였다. 그가 구성한 천호 및 그것을 구성하는 백호(百戶) 집단은 행정단위이면서 군사단위였는데, 천호란 약 1,000명, 백호는 약 100명의 병사를 제공하도록 정해놓은 것이다.
천호장(千戶長)과 백호장(百戶長)에는 공신(功臣)을 임명하고, 그것을 좌익(興安嶺 방면)·중군(中軍)·우익(알타이 방면)의 총지휘관 만호장(萬戶長)의 지휘하에 두었다. 만호장·천호장·백호장의 자제는 케시크티라 불린 대칸의 친위대를 구성하고, 칭기즈칸 일족에게 충성을 맹세함과 동시에 각종 특권이 부여되었다.
칭기즈칸은 국가의 재정적 기초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 금(金)나라·서하(西夏) 등 남쪽방면의 농경지역에 침입하여 말·낙타·재물 등을 약탈하고, 그곳의 직업적 기술자나 농민들을 잡아 유목지대로 강제 이주시켜 촌락을 이루었다. 또 유라시아 대륙을 통하는 동서무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서방으로 대군을 진격시켰다. 먼저 그는 나이만 부족 족장의 왕자 쿠츨루크가 서요(西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왕이 되었으므로 이를 토벌하여 이 지역을 병합하였다.
이어 서(西)아시아 이슬람 세계의 보호자로 자임(自任)한 호라즘 샤왕조에 통상사절단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사절단 일행이 학살된 것을 계기로 삼아 서방세계에 대한 대원정(大遠征:1219∼1225)을 감행하였다. 그 결과 호라즘 국왕은 전사하고, 그의 왕자도 패하여 인도지방으로 도망쳤다. 몽골군은 진격을 계속하여 러시아 제공(諸公)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크림반도를 침공하여 약탈을 자행한 후 귀국하였다. 칭기즈칸은 다시 서하를 토벌하다가 1227년 진중에서 병사하였다.
칭기즈칸은 서방 원정에서 승전하고 개선한 후, 영토 중 유목지역은 그의 여러 아들과 동생들에게 각각 분할 통치하게 하였다. 즉, 몽골 본토는 칭기즈칸 자신의 직할지로 하여, 넷째아들 툴루이에게 계승하기로 결정하였고, 맏아들 주치(Juchi, 朮赤)에게는 카스피해(海)와 아랄해 북방의 영토, 즉 남(南)러시아의 킵차크 초원지대를 분할하여 주었으며(후의 킵차크한국), 둘째아들 차가타이에게는 아무강(江) 평지이며 서요(西遼)의 옛 땅인 중앙아시아를 나누어 주었다(후의 차가타이한국).
또 셋째아들 오고타이(후의 제2대 황제 太宗)에게는 일리강 유역을 중심으로 외몽골 서부에서 톈산산맥[天山山脈]에 걸친 나이만 부족의 옛 땅인 몽골고원 일대를 나누어주었다(후의 오고타이한국). 그리고 동부 몽골고원과 중국의 북동지구(만주지방) 방면은 동생들에게 나누어주어 통치하게 하였으며, 남방의 농경지대는 그것을 그들 일족의 공유재산(共有財産)으로 하고, 거기에 다루가치[達魯花赤:총독]와 주둔군을 배치하여 치안유지와 징세(徵稅) 임무를 맡게 하였다.
1. 확대와 분열
칸(汗)은 원래 유력한 부족장들의 회의인 쿠릴타이에서 선출되었으나, 칭기즈칸의 즉위 후 이 관례는 형식적인 것이 되었고, 그가 죽자 쿠릴타이는 칭기즈칸이 죽기 전에 이미 지명한 오고타이를 대칸에 즉위하도록 결정하였다. 오고타이는 금(金)나라와 대규모 전쟁을 재개하여 이를 멸망시키고, 1234년에는 화이허강[淮河] 이북의 중국을 점령하였다. 한편 서방에 대해서는 주치의 둘째아들 바투에게 명하여 러시아 및 유럽 각지를 1235∼42년에 토벌하게 하였다. 그 결과 남(南)러시아는 몽골제국 지배하의 킵차크한국이 되었다. 태종(太宗) 오고타이칸은 오르혼강 상류지역에 수도 카라코룸성(城)을 구축하고, 이곳을 기점으로 하여 전영토로 통하는 도로를 건설하고 그 연도(沿道)에 역전(驛傳)제도를 정비하였다. 이 제도로 광대한 영토 내의 교통이 용이하게 소통되고 편리하게 되었기 때문에 동서문물의 교류가 활발하게 촉진되었다.
또 오고타이칸은 옐뤼 취치이 등 정복지역의 학자나 문화인 등을 등용하여 행정기구를 정비하고, 또한 최초의 정액세법(定額稅法)을 시행하였다. 오고타이칸의 사후 그의 황후가 섭정을 한 다음, 오고타이의 큰아들 구유크가 제3대의 대칸위에 오른 뒤 3년 만에 죽자 다시 황후가 섭정이 되었다. 이처럼 대칸위의 공백시대가 계속되었던 것은, 오고타이 일가와 바투를 지지하는 툴루이 일가와의 대립이 치열하였기 때문이었다. 오고타이 일가에서는 다음 대의 대칸위에 오고타이의 손자인 쿠주크 시레문을 추대하였고, 이에 대항하여 바투는 툴루이의 큰아들 몽케를 추대하여 싸움이 계속되었는데, 결국 툴루이측이 승리를 거두어 몽케가 제4대의 대칸위에 올랐다. 그 후 툴루이의 자손이 몽골제국 → 원조(元朝:1271∼1368)의 대칸위를 독점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족 내부에서의 대립과 항쟁은 몽골제국을 분열시키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몽케칸은 오고타이칸의 사후 약 10년간 난맥상태를 이룬 통치기구를 쇄신하여 관제를 개혁하였으며, 중국의 화북(華北) 지방과 투르키스탄의 요지를 확보하고, 호구조사를 실시하여 세제(稅制)를 개정하였다. 그는 국내의 재통일에 성공하자, 동생 쿠빌라이에게 중국의 쓰촨[泗川] ·윈난[雲南] 및 안난[安南] ·티베트[西藏] 등의 토벌을 위해 대군을 출동하게 했고, 셋째동생 훌라구를 이슬람국가 정복을 위해 파견하였다. 훌라구는 1253년 서방정벌에 나서, 이란에 침입하여 바그다드를 공략하고, 58년 아바스왕조를 멸망시켜 이곳 이란 지역에 일한국(1258∼1393)을 건국하였다. 한편 1231년 이래 3차례의 공략에도 굴복하지 않은 고려를 정벌하기 위해, 53년 대군을 파견하여 고려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몽케칸도 남송(南宋) 토벌작전에 참가하였으나 쓰촨성[四川省]에서 병사하였다. 제4대의 몽케칸이 죽자, 수도 카라코룸에서 몽케칸의 부재 중 대리로 일을 맡고 있던 막내동생인 아리크부카는, 그의 부하와 오고타이계 제왕(諸王)의 지지를 얻어 대칸위에 오르려고 시도하였다. 쿠빌라이는 남송과 일시적인 화평조치를 취하고 급히 귀환하여, 그의 신복들로 구성된 쿠릴타이의 추대를 받아 제5대 대칸위에 올랐다. 그후 아리크부카의 반란을 진압하고 71년 국호를 원(元)으로 개칭하였다. 한편, 쿠빌라이에게 불만을 품은 일파는 오고타이의 손자인 하이두를 칸으로 추대하여 쿠빌라이칸과 대립함으로써 이때부터 30년에 걸친 국내전이 시작되었다. 내전을 계기로 킵차크한국과 차가타이한국은 하이두의 편에 서고, 일한국은 쿠빌라이측에 가담함으로써 칭기즈칸이 이루어놓은 몽골제국은 분열하였다.
결국 쿠빌라이칸이 승리하였지만(1303), 이때에는 이미 쿠빌라이나 하이두가 모두 죽은 뒤였다. 이 싸움은 유목 ·농경 양 지역을 영유함으로써 크게 개화(開化)한 원조(元朝) 및 일한국과, 유목지대를 본거지로 삼고 종래의 유목적 전통생활을 보존하려 한 여러 한국과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그 후 원조와 대립하였던 여러 한국도 점차 개화됨으로써 원조와 화의를 맺게 되어, 몽골제국의 상호 연대성이 부활되었다. 원조는 몽골제국의 정통을 계승한 종주국(宗主國)이 되었고, 1310년 멸망한 오고타이한국을 제외한 다른 킵차크 ·차가타이 ·일 등 3한국이 서로 연합함으로써 그로부터 거의 60년간 유라시아 대륙은 ‘타타르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또 아시아와 유럽 세계 사이의 문화교류도 활발해졌다. 그러나 몽골제국은 몽케칸의 치세(治世)까지 몽골고원의 대칸의 권력과 혈연적 연관에 의해 보존하고 있던 통일성을 잃고, 다만 원나라를 종주국으로 하여 그 정권 밖에서 독립국을 형성한 3한국으로 구성된 연합왕국이었다. 이 연합왕국도 원나라의 멸망(1368)과 함께 붕괴하였다.
元 (원)
1260 ~ 1370 13세기 중반부터 14세기 중반에 이르는 약 1세기 사이, 중국 본토를 중심으로 거의 동(東)아시아 전역을 지배한 몽골족의 왕국(1271∼1368).
13세기 초, 칭기즈칸에 의해 구축된 몽골제국(蒙古帝國)은 유러시아 대륙의 북방초원에 정치적 기지를 두고, 대륙남방의 농경지대를 그 속령(屬領)으로 삼아 지배한 유목국가(遊牧國家)로, 속령으로부터의 가혹한 수탈과 부정기적인 약탈로써 경제적 욕구를 충족하였다. 그러나 유목제왕(遊牧帝王)과 그를 둘러싼 유목봉건영주층(遊牧封建領主層), 또는 유목민 지배층과 농경민 피지배층 사이에 정치적 ·경제적 모순이 발생하여 제국은 끊임없이 동요되었다.
이와 같이 유목제국에 잠재된 근본적인 결함을 극복하려고 유목과 농경이 공존할 수 있는 중간의 아건조지대(亞乾燥地帶)에 새로운 정치적 기지를 찾아서 강대하고 집권적인 제국(帝國)을 영위하려 한 것이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世祖]이었다. 그는 형 몽케칸[憲宗]를 계승하려 하였던 막내동생 아리크부카를 제거하고 북방의 초원에 웅거한 유목봉건세력의 진출을 막아, 수도를 몽골 고원의 카라코룸에서 화북(華北)에 가까운 상도(上都)와 화북 안에 있는 대도(大都:北京)로 옮겨 화북의 건조농경지대를 중심으로 한 중국식 집권적(集權的) 관료국가의 확립을 꾀하였다.
그가 시도한 정치적 사업이 거의 완성단계에 이른 1271년 《역경(易經)》의 ‘大哉乾元’을 따서 국호를 대원(大元)이라 하고 중국 역대왕조의 계보를 잇는 정통왕조임을 내외에 선언하였다. 이어 74년에서 79년에 걸쳐 화이허강[淮河] 이남 지역에 있던 남송(南宋)을 평정해서 명실공히 중국전토를 영유하게 되었는데, 이에 멈추지 않고 일본 ·베트남 ·미얀마 ·자바 등지에도 침략군을 보냈다.
원나라는 쿠빌라이칸이 다스리는 동안에 동아시아 전역의 대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쿠빌라이칸은 몽골제국의 종주권(宗主權)도 계승한 것이라며 서방의 한국(汗國)들(킵차크 ·차가타이 ·오고타이 ·일 한국 등) 위에도 군림하려 해서, 유목적 전통을 고집하는 한국들은 그를 마땅치 않게 여겨 원나라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대항하였다.
특히 오고타이한국의 왕 카이두는 이웃 차가타이 ·킵차크 한국의 왕들을 설득해서 반(反)쿠빌라이 동맹을 결성하여 원나라 북서변의 요지를 공략하여 쿠빌라이 정권을 위협하였다. 항쟁은 쿠빌라이칸이 죽은 뒤에도 계속되었는데, 1301년 카이두가 사망함으로써 전운(戰雲)이 가셨다. 이로부터 원나라는 한국들과 친교를 맺고 제국(帝國)의 종주권을 회복하였다. 아시아 전역에는 이른바 ‘몽골족 지배하의 평화’가 찾아와 동 ·서의 문물이 자유롭게 교류하게 되어 국제무역이 번창하였다.
그러나 원나라 내부의 국정이 해이해지기 시작하여 사회적 여러 모순들이 심화되어 갔다. 이에 편승해서 여러 지방에서 크고 작은 폭동이 일어났는데도 중앙에서는 권신(權臣)들이 정쟁(政爭)에 여념이 없었다. 폭동은 확대되어 한족(漢族)에 의한 민족적 반란으로까지 발전하여 주원장(朱元璋:洪武帝)에 의한 명조(明朝)정권이 출현하였다.
68년 원나라는 수도 대도를 명나라의 군대에 빼앗겨 순제(順帝:토곤 테무르)가 몽골 본토에 쫓김으로써 원나라의 중국지배는 끝이 났다. 그뒤 몽골본토에 터를 잡은 원군은 얼마 동안 명군과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쇠퇴하여 내분(內紛)으로 소멸되었다. 이를 북원(北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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