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현대중국 정치론] 제5부 제1장 중국의 근대화와 대외 정책

지식창고지기 2009. 7. 2. 17:00

[현대중국 정치론]

제5부 제1장 중국의 근대화와 대외 정책

 

 

1. 중국정치의 변화와 대외 정책

 

이미 잘 알려진 바와같이 등소평정권이 등장하면서 중국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특히 등소평정권은 경제발전과 4개현대화를 당과 국가의 최고․최대과제라고 선언하면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정책노선을 추구하였다. 대외정책에 있어서도 자력갱생을 강조하는 모택동시대의 폐쇄주의적 정책노선을 배격하고 과감한 문호개방정책을 추진하였다. 더욱이 미국, 일본 등 소위 선진 자본주의 국가와의 관계 정상화를 통하여 경제발전과 4개 현대화에 필요한 자본과 기술을 대규모로 도입하려고 했다는 것은 모택동 시대의 좌파적 대외정책과 비교해 볼 때 충격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이 등소평 정권의 등장은 국내외 정책의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혁명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등소평은 여전히 사회주의 노선의 견지, 프롤레타리아 독재, 공산당의 영도권 견지와 마르크스ㆍ레닌주의, 그리고 모택동 사상을 견지할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대외정책에 있어서도 문호개방과 더불어 자주독립의 외교정책을 강조함으로써 모택동의 자력갱생 노선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와같이 서로 모순되는 듯한 대외정책 노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중국 근대화와 대외정책에 관한 뿌리깊은 정책 논쟁을 조명하고 둘째로 1949년 이후 대외정책의 변화의 패턴을 살펴본 다음, 끝으로 중국이 대외정책을 통해서 추구해온 기본적인 목표가 무엇인가를 구명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명함으로써 우리는 중국 대외정책의 변화요인과 변화하지 않은 목표를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근대화와 대외정책에 관한 3가지 시각

 

아편전쟁(1839-1842)이후 중국은 서구세계가 주도하는 세계질서 속에 편입되기 시작하였고, 이때부터 중국의 대외정책에 관한 논쟁은 중국 사회의 근대화 문제에 대한 보다 근본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논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왔었다. 즉 중국 사회가 당면한 문제점과 그 해결방법에 대한 기본적인 역사인식의 차이가 대외정책에 대한 논쟁에도 반영되었다는 말이다.

 

중국의 전통적 질서가 붕괴되고 서구의 도전이 가중되면서 근대 중국의 지식인들과 정치지도자들 사이에서는 근대화와 대외정책에 대한 논쟁이 격화되었는데 , 이들의 논쟁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상이한 시각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로 중화주의(中華主義), 또는 국수주의적인 관점이다. 이와같은 관점을 표방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중국의 문제는 순수한 중국문명의 정신과 가치를 회복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 사회의 위기는 이와 같은 중국 문명과 정신을 상실했기 때문에 야기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중국문명의 순수성을 위협하는 만주족과 서구제국의 간섭과 지배를 배격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중화문명에 대한 깊은 자부심과 서구문명에 대한 불신과 경멸감에서 한편으로는 배타적이고 고립주의적인 대외정책을 표방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중화주의적 대외정책을 추구하기도 하였다.

 

둘째로, 서구세력과 일본의 위협이 가중되고 중국사회의 근대화가 불가피하게 되자, 일부의 지식인들은 중화문명의 기반위에서 서구의 군사 및 산업기술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이같은 자강운동(自彊運動)의 이론적 배경은 유명한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으로 압축된다고 하겠다. 중체서용론자들은 서구의 현대기술과 산업 경제의 강점을 인정하면서도, 서구의 물질문명은 중국의 정신문명에 비하여 저급한 것이며 부패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서구의 산업기술을 선택적으로 도입하여 중국의 근대화를 촉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서구문명의 파급효과를 억제하고 중국의 정신문명이 지닌 우월성과 순수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들은 선별적인 근대화와 자주적인 대외정책을 표방하였다.

 

셋째로, 국수주의자나 중체서용론자와는 달리 중국의 전통적인 정신문명의 우월성도 부정하고 전면적이고 급진적인 근대화를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즉 신문화운동 당시의 진독수나 호적 같은 지식인들은 전통문명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통해 신중국의 건설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고 과학과 민주주의 같은 서구적인 가치와 기술에 의하여 중국사회를 개혁하고 근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근대화론자들도 중국사회가 완전히 서구화되는 것에는 반대를 하였으며 오히려 서구적인 가치와 기술을 통하여 중국의 자강과 자주독립의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물질적인 기반이 마련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다시말해서 이들은 모두 중국의 자강과 자주를 공동목표로 하면서도 중국사회의 근대화 방향과 충격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서로 상반되는 대외관을 보였다. 이와 같은 근대화와 대외관계에 대한 상이한 견해는 중국 혁명이 성공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더구나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에 관한 중국 지도층 간의 노선투쟁이 격화되면서 대외정책은 좌파와 우파의 주요한 쟁점중의 하나로 등장하였다.

 

중국혁명의 특이성과 모택동 사상의 보편적 가치를 강조하는 좌파의 견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과거의 국수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물질문명보다는 정신문명을 강조하고 혁명 가치의 순수성을 오염시킬지도 모르는 수정주의 또는 자본주의적 영향이 외부로부터 침투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좌파는 과학기술과 경제발전을 강조하는 우파의 입장을 모택동사상으로 무장한 중국인민들의 역량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며 , 선진산업국가의 물질문명만을 숭상하는 양노철학(洋奴哲學)을 반영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좌파에 의하면 중국인민들의 자력갱생과 근고분투(勤苦奮鬪)의 정신에 의거하여 비약적인 경제발전도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외부의 이질적인 영향력을 강력히 배제하고 중국의 혁명전통에 입각하여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강변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경제발전을 촉진하여 물질적인 기초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우파는 대외정책에 있어서도 개방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즉 경제발전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선진국가의 발달된 과학기술과 자본을 도입할 수밖에 없으며 상호의존적인 현대의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국력을 배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우파에 의하면 좌파가 주장하는 자력갱생과 혁명정신만으로는 경제발전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하면서 경제적으로 낙후한 중국의 경우에는 선진 산업국가로부터 가장 발달된 과학기술을 습득할 수밖에 없다는 견지에서 문호개방정책을 합리화하였다.

 

이와같이 좌파의 폐쇄주의적 정책과 우파의 문호개방 정책의 날카로운 대립과 충돌을 중화하기 위해서 중국의 지도층 내에서는 모택동의 자력갱생론을 융통성 있게 해석하려는 노력이 있어 왔다. 과거의 중체서용론자들처럼 이들은 모택동 사상과 중국 혁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경제발전과 현대화의 필요성을 인정하며 따라서 외국으로부터 기술과 자본을 도입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었다. 1956년 모택동이 「논십대관계」(論十代關係)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들은 중국의 자주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외국의 좋은 점을 학습하는 것이 자력갱생의 진정한 정신이라고 주장하면서 무분별한 개방정책과 폐쇄적인 고립주의를 모두 경계하였다.

 

어떻게 보면 중국의 지도자들은 항상 이와같은 선별적인 개방정책을 통해서 중국의 자주성을 지켜가면서도 점진적인 근대화를 달성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와같은 선별적인 개방정책은 항상 국수주의자와 전면적인 근대화론자들의 도전을 받아온 것도 사실이다. 사실 급진적인 경제발전과 근대화를 요구하는 세력이 등장하거나 또는 중국 혁명의 가치를 강조하는 세력이 등장하게 되면 선별적인 개방정책을 주장하는 중체서용론자의 입장이 약화되고 대외정책의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면서 전면적인 문호개방 정책이나 고립주의적 정책으로 전환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1949년 이후의 중국의 대외정책은 중국사회의 근대화 문제에 대한 지도층간의 인식에 따라서 앞에서 지적한 세가지 관점의 대외정책정향이 번갈아 가면서 등장하는 양상을 보여 주었다.

 

3. 중국 대외정책의 변화

 

1949년 이후 모택동을 비롯한 거의 모든 중국지도자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해온 목표는 중국을 자주독립적이고 부강한 사회주의 국가로 건설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본다면 중국의 국내외 정책도 어느정도 일관성 있는 공통적인 정책목표를 추구해 왔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 사회의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문제점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말미암아, 그리고 중국의 국내외 여건의 변화로 말미암아 중국의 대외 정책도 여러차례 혁명적인 변신을 경험해 왔다. 특히 1950년대의 친소일변도(親蘇一邊倒)정책과 1980년대의 친서방 정책을 비교해 보면 중국의 대외정책이 냉전구도하에서도 엄청난 변화의 폭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이와같이 중국의 대외정책의 변화는 국제환경변화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중국 사회가 당면한 근대화 문제와 관련하여 대외정책의 변화가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즉 근대화 문제에 대한 상이한 관점이 번갈아 가면서 나타났다는 말이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1949년 후의 중국의 대외정책의 변화는 대략 다음과 같이 구분해 볼 수 있다.

 

즉 1950년대의 친소일변도의 전면적 근대화 시기, 1950년대 후반부터 문화혁명 직전까지의 자주노선의 모색 시기, 문화혁명 시대의 고립주의 정책 시기, 1970년대의 자주노선의 모색 시기, 모택동 이후의 친서방 문호개방 정책 시기, 1982년 중공당 제12차 전당대회 이후의 자주노선의 모색 시기,천안문 사태와 동구권의 몰락 이후 ‘전방위외교’를 통한 자주독립노선의 강화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이와 같은 시대 구분에서 나타나듯이 중국은 1950년대와 1970년대 후반기에는 급진적인 경제발전과 근대화를 강조하면서 선진국가로부터 과학기술과 자본의 도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 당시의 중국의 지도자들은 모두 중국의 경제적인 낙후성을 극복하지 못하고서는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주독립국가로서의 중국의 지위도 향상시킬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현대 산업 분야를 중심으로 하는 급진적인 경제발전 계획을 추진하였고, 이와 같은 경제발전 계획에 필요한 자본과 기술을 모두 선진 산업 국가에서 도입하려고 하였다. 1953년의 급진적인 산업화를 목표로 한 제1차 5개년 계획이나 1978년 2월에 채택된 야심적인 4개 현대화 정책의 구체적인 표현인 10개년 경제발전 계획은 모두 중국을 공업 선진국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본과 발달된 선진 기술의 도입이 필요하다는 전제로 입안된 것이었다.

 

이러한 급진적인 경제발전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서 중국 지도자들은 자주독립의 외교노선을 강조하기 보다는 선진 산업 국가에 의존하여 그들로 부터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발달된 과학 기술과 자본을 도입․학습하고자 하였다. 1950년대의 국제정치적 입장에서 중국의 경제발전과 근대화에 필요한 자본과 기술을 제공할 수 있는 국가는 소련 뿐이었기 때문에 모택동을 비롯한 중국의 지도자들은 당연히 소련 일변도의 정책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중ㆍ소 분쟁으로 중국과 소련이 거의 국교단절의 상태로까지 발전된 1970년대에 중국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서방 산업국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국제정치상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1950년대와 1970년대 후반기에는 경제발전과 근대화를 강조하면서 중국의 대외정책이 소련이나 미국, 또는 서방세계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와같은 대외의존 정책은 오래 계속될 수 없었다. 오랜 문명과 독특한 혁명 경험을 지닌 중국인에게 일방적인 대외 의존상태는 그것이 아무리 현실적인 필요성 때문이라고 하지만 장기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외국의 발전전략을 중국에 그대로 적용하려 할 때 생기는 부작용이 누적되면서 대외의존 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재고가 있게 되었다. 이미 1950년대 중엽부터 모택동을 비롯한 중국의 지도자들은 중국의 현실에 알맞는 새로운 경제발전 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하였고 소련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을 경계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1956년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는 소련식 발전전략을 부분적으로 수정하려 하였고 1958년에 모택동은 완전히 중국적인 방식에 의하여 비약적인 경제발전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즉 자력갱생과 대중의 혁명정신을 동원하여 농업과 공업을 다같이 발전시킬 수 있다는 대약진운동이 그것이다. 비록 대약진 운동이 실패하였지만 대부분의 중국지도자들은 대외 의존 경제의 한계와 문제점을 인식하고 1960년대에도 자력갱생의 원칙을 재확인하였다. 즉 중국의 경제발전은 중국의 구체적 조건에 따라서 먼저 중국 인민의 노력과 창의력에 의존하고 중국의 자원을 충분히 동원하는데 주력해야 하고, 그래도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만 해외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말해서 대외 교역 관계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수입 대체 산업을 적극 육성하여 가능한도 내에서 중국 경제의 대외의존도를 극소화해햐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와같은 자력갱생의 경제발전 계획에 반영된 자주노선은 대외정책에서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즉 1963년에 중소분쟁이 공개적으로 진행되면서 모택동은 종래의 양대진영론을 수정하고 처음으로 미ㆍ소 양대강국과 구별되는 중간지대론을 제창함으로써 제3세계의 일원으로서 중국의 위치를 재정립하려고 노력하였다. 다시말해서 문화혁명 직전까지 중국의 대외정책은 방대한 제3세계를 배경으로 반미, 반소 연합전선을 구축함으로써 미국과 소련을 동시에 견제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당시 중국의 주요 관심사는 반미연합전선에 보다 큰 비중을 두고 있었지만 소련이 지배하는 사회주의 진영으로부터도 독립하며 독자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해 왔던 것은 1950년대의 대소의존 정책과 비교해 보면 혁명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은 자주노선의 추구는 문화혁명으로 말미암아 일시적으로 좌절 또는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다. 문화대혁명은 모택동 사상에 입각하여 모든 정책 분야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추구하려는 좌파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이 당시 좌파는 유소기, 등소평 등 우파의 경제발전 정책을 수정주의적 또는 자본주의적 성향을 지닌 것이며, 이들의 개방정책을 양노철학의 표현이라고 비판을 하면서 대약진 운동에 나타난 모택동의 발전전략을 부활하려고 하였다. 특히 모택동의 자력갱생의 원칙을 극단적으로 적용하여 거의 자급자족적인 고립주의를 고수하였다.

 

이와같은 문화혁명 시대의 고립주의는 소위 좌파의 혁명적인 국수주의적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그것은 세계혁명의 중심이 이제 소련이 아니라 중국이며 중국만이 제3세계에서 혁명을 지도해 갈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새로운 중화주의로까지 발전되었다. 따라서 1964년까지만 해도 모택동 사상이 마르크스ㆍ레닌주의를 창조적으로 변형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이제는 모택동 사상만이 유일한 정통적인 마르크스ㆍ레닌주의라고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은 혁명적인 중화주의 입장에서 좌파는 모든 기존의 대외관계를 부정하고 조반(造反)외교를 바탕으로 새로운 대외관계를 형성하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아시아, 아프리카의 혁명세력을 지원하여 제3세계의 혁명지도자로서 중국의 입장을 정립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좌파의 조반외교는 중국의 국제적 고립을 자초한 나머지 중국의 자주독립을 오히려 위협하는 결과가 되었다. 특히 중소분쟁이 무력충돌로까지 약화되자 중국의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문화혁명의 고립주의에서 벗어나고자하는 노력이 진행되었다. 더욱이 문화혁명으로 중단되거나 파괴되었던 경제발전의 문제가 다시 강조되면서 정상적인 대외관계를 회복해야한다는 근대화론자들의 견해가 대두하게 되었다. 따라서 경제적인 영역에서 중국의 대외관계가 점차로 개선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서방국가와의 교역 관계의 비중이 1960년대에 비하여 괄목할 만큼 성장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중국 경제의 대외의존을 경계하는 좌파의 영향력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외국자본이나 소비재 상품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자력갱생의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부분적이고 선별적인 개방정책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1970년대는 1960년대 초와 유사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반미ㆍ반서방의 기본방향을 유지하던 1960년대 초에 비하여 1970년대의 중국의 대외정책은 1972년 상해 공동성명을 계기로 전략적인 전환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혁명적인 변화가 있었다. 즉 반미ㆍ반소의 자주독립 노선을 표방하면서도 점차 반소정책이 강조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는 점이 1970년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에 모택동은 1960년대의 중간지대론을 수정ㆍ보완하여 세계3분론(世界三分論)을 발표하고 중국의 독자적인 대외정책의 이론적인 바탕을 제공하였다. 등소평이 1974년 2월에 개최된 UN 총회에서 공포한 세계 3분론에 의하면 발전도상국인 제3세계와 미국과 소련을 제외한 서구와 동구 및 일본으로 구성된 제2세계는 체제와 이념의 차이에 관계없이 모두 미국과 소련의 정치적 경제적 패권주의에 저항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중국은 제3세계의 일원으로서 초강대국의 패권주의에 대항하는 세계적인 연합전선에 합류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따라서 중국은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미국과 소련의 패권주의를 동시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월남전 이후 미국의 세력이 퇴조하고 소련의 영향력이 팽창하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반소 연합전선을 더욱 강조하였다. 따라서 미국, 일본, 그리고 서구의 자본주의 국가와의 경제적 정치적 협력 관계를 확대하려는 추세가 나타났다. 이와같은 추세는 중국의 대외무역관계에서 그대로 반영되었다. 예를 들어 중국과 비공산국가와의 교역량은 1970년에 35억불이었던 것이 1975년에는 122억불로 대폭 증가되었으며 같은 시기에 일본을 비롯한 서방의 선진 산업 국가로부터 중국의 수입도 16억불로 증가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은 서방과의 교역관계가 확대되자 서방세계의 이데올로기적 경제적 영향력이 침투할 것을 우려하는 좌파의 반발을 야기하여 중국의 대외정책은 다시금 격렬한 지도층간의 노선투쟁의 쟁점으로 되었다.

 

즉 좌파는 제4기 전인대에서 주은래총리가 제기한 4개 현대화에 대하여는 직접적인 공격을 하지 않으면서도 4개 현대화를 실현하기 위해서 외국의 선진기술을 습득해야 한다는 등소평의 개방정책은 모택동의 자력갱생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맹렬하게 비난했다. 등소평은 외국으로부터 발달된 기술과 장비를 수입해야만 4개 현대화를 촉진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중국인민의 창의력을 과소평가 했으며, 결과적으로 중국을 반식민지 국가로 전락시키고 자본주의적 세계경제에 예속시키려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와같은 좌파의 비난에 대하여 등소평은 경제발전과 4개현대화를 조속한 시일내에 달성하려면 외국으로부터 발달된 산업기술과 시설을 도입하여 중국의 국민경제를 발전시키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좌파의 폐쇄주의를 비판하였다. 등소평에 의하면 경제적으로 낙후한 중국이 발전하려면 외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그것을 중국의 실정에 알맞게 이용하는 길밖에 없다고 지적하면서 적극적인 개방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좌파와 우파의 논쟁은 모택동의 사망과 문화혁명 4인방의 제거로 말미암아 개방론자의 승리로 끝났다. 1976년 이후 중국은 4개 현대화와 서방 세계에 대한 문호개방 정책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특히 1978년 이후 등소평 정권이 등장하면서 4개 현대화를 달성하기 위해서 그 어느 때 보다도 적극적인 대외경제의 개방노선이 추진되었다. 과학과 기술은 계급적인 성격이 없는 것이며 생산력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합리화하면서 개방론자들은 자본주의 국가에 의하여 축적된 선진 과학 기술을 도입하여 중국경제의 발전에 이용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외부 세계에 대한 폐쇄적이고 인습적인 모든 좌파적 사고 방식을 비판하고 경직된 자력갱생의 원칙을 재해석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와같은 개방노선에 따라서 중국은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서구의 선진 산업국가와의 기술협력과 자본협력을 대폭 확대하고 세계경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따라서 1980년에 중국의 대외무역은 1970년에 비하여 10배 이상 증대되었으며 막대한 규모의 외국자본을 도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같은 대담한 개방정책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제기되면서 친서방 일변도의 대외정책을 수정하려는 경향이 대두되었다. 즉 등소평 정권의 경제주의와 개방정책의 부작용이 노출되면서 중국의 지도층 사이에서는 다시금 사회주의 정신문명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맹목적으로 외국의 문물을 숭상하는 사조를 비판하기 시작하였으며 모택동의 자력갱생을 강조하는 경향이 다시 대두되었다. 특히 대만 문제로 미국과의 관계가 냉각되면서 모택동의 세계삼분론이 재강조되고 미국과 소련에 대하여 독자적이고 자주적인 입장을 견지해야 된다는 견해가 강조되었다.

 

따라서 등소평과 호요방은 중국공산당 제12차 전국대표자대회에서의 연설을 통하여 중국의 기본외교노선은 자주독립과 자력갱생에 있으며 중국은 제3세계의 일원으로서 미국이나 소련의 패권주의에 모두 반대한다는 입장을 재천명함으로써 1980년대의 중국의 대외정책은 1960년대초와 1970년대의 자주독립 노선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물론 1970년대의 자주노선과는 달리 1980년대의 자주독립 노선은 4개 현대화와 문호개방 정책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같은 경제발전 전략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어느 국가에도 예속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천안문 사건과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은 대외개방정책을 추진한 중국의 정치지도부에 심각한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 일대 대사건이었다. 호요방의 죽음을 계기로 시작된 중국의 학생운동 세력은 정치적 민주화와 다당제 도입까지를 주장하면서 대내적 정치개혁을 실시할 것을 중국 공산당에게 요구하였다. 초기의 북경을 중심으로한 학생운동의 시위는 전국적으로 노동자 계급까지를 아우르는 전국적 시위로 확산되었다. 천안문 사건은 그 동안의 개혁개방 정책이 가져온 대내적 모순의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4개 현대화를 위한 대외적 문물의 수용은 긍정적으로 검토하면서도 이러한 개혁개방의 테두리를 4개항의 견지로서 제약하고 있던 중국의 발전전략은 이미 모순을 잉태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중국 지도부는 인민해방군의 개입이라는 정치적 강수를 두지 않을 수 없었고 서방 세계는 중국의 이런 행동에 경악하였다. 미국을 위시한 서방세계는 중국의 인권상황과 정치적 민주주의의 탄압문제를 제기하면서 경제적 제재를 위협 하기도 하였다. 중국은 이에 명백히 내정간섭이라고 선언하면서 제국주의의 ‘화평연변’(和平演變) 전략이라고 경계하였다. 대내적 개혁도 보수파 중심의 정책이 선도하였다. 잠시 개혁 개방 정책이 비틀거리는 듯이 보였다.

 

더군다나 1989년 중반부터 동구 사회주의권의 해체와 1991년의 소련의 붕괴는 중국지도부를 아연실색하게 하는 대사건으로 인식되었다. 외교적으로 비록 소원한 시기가 있었으나 사회주의라는 이념을 동시대에 지녔던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은 중국의 집안 단속을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새로운 국제질서 상황은 중국 지도부의 인식의 변환을 요구하였다. 중국 지도부는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의 내적 원인으로 당의 부패와 경제몰락을 들면서 당부패의 근절과 경제건설이 가장 중요한 국가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경제와 과학기술의 국제적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정권 생존의 핵심임을 새롭게 인식하였다. 또한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을 가져온 외부적 요인으로서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개입과 전복 공작이며 이에 기승한 부르죠아적 요소의 준동이라고 인식하고 ‘화평연변’에 대한 경계와 당의 사상적 통제를 강조하였다.

 

미국과 서방 국가의 인권을 이슈로 하는 공세에 맞서 중국은 ‘전방위 외교’를 통하여 자주독립 노선을 관철해 나갔다. 소련과의 관계 개선이라든과 인권 문제에 덜 비판적인 제3세계 국가와의 다각적인 교류와 협력을 통하여 미국과 대서방 공세에 우회적으로 대처해 나간 것이다.

 

1992년 등소평의 ‘남순강화’(南巡講話)는 대내적으로 천안문 사태와 대외적으로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대내외적 혼란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개혁파에 힘을 실어준 사건이었다. ‘성자성사’(姓資姓社)의 논쟁에서 나타나듯이 경제적 근대화를 위해서는 자본주의 시장 논리도 과감히 수용한다는 정책은 천안문 사태 이후 보수파에 의해 추춤거렸던 개혁ㆍ개방 정책이 다시금 세를 획득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혁파의 입론은 급속한 개혁 개방 정책을 통한 경제적 근대화만이 중국이 향후 부강한 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또한 달라진 국제환경하에서 중국이 강력한 국가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경제적 근대화밖에 없고 중국 공산당의 권위와 정당성을 보전하고 치유하는 길은 경제적 발전을 통한 성과를 인민에게 보여주는 방법밖에 없다고 중국지도부는 인식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14차 당대회 보고에서 강택민이 행한 연설에서 나타난다. 즉 중국은 중국의 개혁ㆍ개방과 근대화를 위하여 우호적 국제환경을 지속적으로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탈냉전 이후 국제사회에서 독자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경계임과 아울러 경제발전을 위하여 유리한 국제 환경을 조성한다는 독립자주노선 강화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4. 결론

 

모택동 체제에서건 등소평 체제에서건 중국 지도부는 대외정책에서 어떠한 강대국이나 국가 집단에 의존하지 않으며 또한 어떠한 강대국의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는 자주독립의 정책을 견지해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국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소련이나 미국에 한 때 의존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1950년대의 중국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완전히 소련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1970년대 후반부 이후에 중국은 4개 현대화를 추진하면서 미국이나 서구에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의존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중국의 대외의존은 중국 사회를 근대화해야 한다는 필요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자주독립과 자력갱생이라는 공통적인 목표에도 불구하고 상당 정도 지속되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경제적 상호의존의 심화를 촉진하고 있는 현 국제정치경제적 상황에서 중국이 미국이나 대서방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면서 고립주의적 정책을 행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권 수립 초기의 지나친 대소의존과 조급한 근대화 작업의 부작용이 문화혁명과 같은 혁명적인 중화주의와 국수주의 반동으로 나타났다는 교훈을 잘 알고 있는 중국의 지도자들이 친서방 일변도의 정책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없다. 이러한 사실은 중국이 천안문 사태와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을 경험하면서 ‘전방위 외교’를 통하여 여러나라들과 다각적인 협력과 교류를 꾀하면서 자주독립 노선을 지속하고 있는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중국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이미 미국이나 소련과 같은 강대국으로부터 최소한 정치적 독립과 자주노선을 선언하였고 1980년대에 와서도 그와 같은 자주노선을 여러번 표방하였다. 그런데 탈냉전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1990년대 중국의 위상은 이제 국제 사회에서 하나의 극(極)을 형성할 정도로 국력의 신장을 보이고 있다. 급속한 경제발전과 현대화를 지향하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중국은 독자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제사회의 강대국의 위치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중국의 국력이 성장하면서 중국사회내부에서 ‘중화민족주의’가 재등장하고 있으며, 이러한 성향은 배타적인 대외관계로 전이될 위험성 있다. 그러나 중국 정권 수립 이후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보거나 경제발전 제일주의로 나타나고 있는 현 국정 목표에 비추어 볼 때 중화민족주의가

대외 관계를 악화시키면서까지 표출되지는 않을 것이다.

 

요컨대 그동안 중국 대외 정책의 특징처럼 지적된 혁명적 변화는 세계정세와 중국사회의 근대화의 필요성에 따라 중국 지도부의 전략적인 적응의 표현에 불과하며 자주독립의 외교정책의 기본자세는 변한 것이 없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도 중국의 4개 현대화에 대한 국가 목표의 추진 상황에 따라서 중국의 대외전략은 얼마든지 변모할 수 있겠지만 그 동안의 자주노선의 기본 정신은 지속되리라고 예측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