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국 정치론]
제5부 제2장 모택동시대의 대외정책: 중․소 분쟁의 원인과 현실
1. 중․소관계와 세계정치
한국전쟁 직전에 체결된 중․소 우호동맹조약은 동북아시아를 본격적인 냉전체제로 변형하게 한 중대한 요인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기부터 내연화되기 시작하던 중․소분쟁이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공개적이고 감정적인 이데올로기 논쟁으로 확대되더니, 마침내 1969년에는 무력충돌로까지 악화됨으로써 사실상 중․소동맹을 전제로 구축되었던 냉전체제는 붕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련의 영향력 팽창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이익과 소련에 대항할 수 있는 반패권 통일전선을 구축하려는 중국의 이익은 미국과 중국, 그리고 중국과 일본의 국교정상화와 같은 극적인 변화를 가져옴으로써 1950년대의 냉전체제에서 형성되었던 적과 동지의 개념을 완전히 무의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2차대전 이후의 국제관계 중에서 중국과 소련의 관계만큼 극적인 변화를 보여준 것도 찾기 힘들고, 또한 세계정치, 특히 동북아시아의 정치질서에 중․소관계만큼 심각한 영향을 준 것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중․소관계의 변화는 동북아시아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정치질서의 기조를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여 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한편 1949년 중국 공산당에 의한 정권 수립 이후 중국 외교정책의 기조라고 하는 것은 50년대와 60년대를 거치면서 중국과 소련과의 관계 변화를 통하여 형성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건국 초기의 대소일변도 정책이 어떠한 시대적 상황과 연계되면서 이념적 현실적 갈등으로 비화되는 지를 검토하면서, 1956년 이후 중․소분쟁의 주요 쟁점을 중심으로 중국과 소련간의 갈등의 이념적인 차원과 현실적인 차원을 동시에 파악해보는 것이 모택동 시기의 외교정책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관건이 된다 할 것이다.
2. 중․소분쟁에 대한 시각
1960년대 초 중․소분쟁이 처음으로 외부세계에 노출되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중․소관계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1963년에 1959년 이후 중국과 소련의 갈등을 가장 집중적으로 분석한 자고리아 교수와 같은 학자들도 중․소관계가 그토록 급격하게 악화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었다. 중국과 소련이 공통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동질성, 그리고 서방세계와의 대결이란 관점에서 양국은 결국 근본적인 목적과 이익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갈등의 확대를 억제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과 소련의 현실적인 문제에 관한 갈등은 이데올로기의 통합능력과 냉전체제의 당위성을 모두 부정한 셈이 되었다. 이데올로기는 문화와 역사가 다른 두 사회에 공동의 목표와 세계관을 제공함으로써 결합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반면에 현실적인 이익의 충돌이 이데올로기적인 갈등을 통하여 보다 격화되는 경향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또 한편 1950년대의 냉전체제에서 민족국가의 이익과 차이는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양대진영의 대결로 말미암아 무시되거나 억제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지만, 바로 그와 같은 냉전체제의 작위적인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중․소분쟁의 심각성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중화주의의 오랜 전통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거의 소련의 지원없이 독자적인 혁명과정을 통하여 성장한 중국이 언제까지나 소련을 정점으로 한 위계질서를 받아들이리라고 기대한 것조차 잘못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중국의 지도부는 초기의 중국공산당운동에 대한 소련의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소련의 간섭은 결국 1920년대의 좌절을 초래했으며, 1930년대에 들어와 소련으로부터 별다른 지원이나 간섭을 받지 않고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보편적인 진리를 중국의 구체적인 진실에 창조적으로 적용’ 함으로써 비로소 성공적으로 공산혁명을 달성할 수 있었다고 믿고 있다. 이와 같이 자신들의 혁명경험과 전통에 대하여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중국지도층이 1950년대에 소련의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영도력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당시의 국제정치 현실에서 불가피한 것이었고, 따라서 일시적인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사실 민족국가의 권리와 독자성을 무시하고 획일적인 질서를 강요하는 냉전체제의 논리에 대한 저항은 일찍이 ‘티토’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문화적인 전통이나 인구와 영토로 보아 강대국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중국이 소련의 영도력에 대하여 이견을 제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라 하겠다. 따라서 중국의 국제적 위치와 국내정치의 안정이 달성된 1950년대 후반기에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소련의 해석이 중국의 국가이익, 혁명전통과 위배된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중․소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다만 이데올로기적 정통성과 단결을 고집하는 공산체제에서 두 거인의 분쟁을 조정할 수 있는 절차와 규범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또한 중소분쟁이 점차로 양국의 국내정치의 노선투쟁과 밀접하게 연결되면서 중국과 소련의 갈등은 더욱 확대되고 심화되었다고 하겠다.
3. 전환기에 선 중․소관계
「소련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의 견해 차이의 근원과 발전」에 대한 㰡”人民日報㰡• 사설에 의하면 중․소분쟁은 1956년에 소련공산당 제20차대회에서 행한 유명한 흐루시초프의 비밀연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사실 1956년은 소련과 중국에 있어서 모두 중대한 전환기였다. 스탈린의 사망 이후 소련 사회는 스탈린의 테러정치의 불안감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욕구와, 급격한 사회주의 건설사업과 산업화정책으로 억압되어 왔던 국민들의 정치적 경제적 욕구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또한 핵무기의 등장으로 혁명적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국제정치의 새로운 현실과, 제 3세계의 등장과 공산체제 내에서 대두하기 시작한 민족주의적인 성향으로 말미암아 소련은 세계정책과 공산국가와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흐루시초프는 1956년 2월에 개최된 소련공산당 제 20차대회에서 스탈린을 맹렬하게 비판하면서 평화공존과 평화적인 정권획득 가능성을 인정하고, 소련의 국내외 정책의 극적인 전환을 선언하게 되었다. 스탈린의 개인숭배와 전제정치에 대한 비판과 무산계급의 독재에 대한 이론을 수정하고 부분적인 자유화정책을 추구하는 흐루시초프의 ‘수정주의’에 대한 경계심도 있었지만, 1956년의 중국 지도층들은 소련의 세계전략의 변화, 특히 대미정책의 변화 가능성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표명하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흐루시초프 비밀연설의 여파가 폴란드사태와 헝가리 위기를 조성하게 되자 사회주의진영의 약화와 변질 위험성을 경고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봉쇄정책의 표적이 되고 있으며, 대만 문제로 미국과 군사적인 대결상태에 있는 중국으로서 당연한 반응이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의 지도층은 흐루시초프의 비밀연설 직후에 중앙 정치국 확대회의를 개최하고 㰡”人民日報㰡•를 통하여 두 차례에 걸쳐서 장문의 사설을 게재하였다. 「무산계급 專政의 역사경험」이라는 제하의 사설에서 중국 지도층은 스탈린의 착오는 적과 동지간의 모순과 인민 내부의 모순을 구별하지 못하고 획일적으로 처리하려고 한 것과, 군중노선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개인적으로 전단하려한 공작방법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하면서, 성질이 다른 모순의 정확한 처리와 집단지도체제의 수립, 군중노선의 확립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사회주의국가간의 모순과 사회주의국가와 자본주의국가간의 모순을 혼동하는 흐루시초프의 평화공존론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인 동시에, 사회주의국가간의 모순관계를 강압적으로 전단해왔던 스탈린과 소련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국 지도층은 전체적으로 보아 스탈린의 착오는 부분적이며, 무산계급 독재를 확립하고 사회주의 진영의 결속을 공고하게 한 스탈린의 공헌은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과 평화공존 정책에 대하여 제동을 걸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중국의 태도는 폴란드사태와 헝가리 위기에 대한 견해, 그리고 1957년 11월에 개최된 국제공산당대회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즉 폴란드 사태에 대한 소련의 간섭에 대하여는 사회주의 국가간의 평등과 상호존중의 원칙에 입각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였던 중국은 헝가리 위기에 대한 소련의 우유부단한 태도를 비판하면서 단호한 개입을 촉구하였다. 이것은 헝가리 위기가 수정주의적 요소와 자본주의세력의 영향으로 조성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세력에 대한 단호한 대결을 주장하는 중국의 태도는 ‘동풍(東風)이 서풍(西風)을 제압하게 되었다’는 모택동의 선언을 통하여 극적으로 표현되었다. 국제공산당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모스크바를 방문한 모택동은 사회주의 진영의 단결을 강조하면서 소련은 사회주의진영의 영도자로서 사회주의의 승리를 위하여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모택동의 연설은 평화공존을 주장하면서 미국과의 타협을 모색하는 소련에 대한 도전이었다.
당시의 중국의 입장은 소련의 세계전략이나 국내정치에 대한 정면도전을 회피하면서 간접적인 비판을 통하여 소련 지도층의 주의력을 환기시킨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중국은 소련의 영향력을 부인하지도 않았고 소련의 ‘수정주의적 경향’을 정면으로 문제삼지도 않았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에 대한 소련과 중국 지도층간의 이데올로기적인 차이와 세계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견해의 차이는 인민공사와, 대약진정책, 대만해협의 위기, 그리고 핵무기에 대한 정책 등을 통하여 어쩔 수 없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인민공사에 대한 논쟁을 계기로 중․소분쟁은 중국의 국내정치와 연결되면서 더욱 격화되었다.
4. 인민공사(人民公社)와 대만문제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1956년은 소련의 정치사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의 정치사에서도 중대한 전환기였다. 1950년의 중․소 우호동맹을 계기로 소련일변도 정책을 추구하고, 스탈린의 경제발전모델에 입각하여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하던 중국의 지도층은 1956년을 전후로 소련의 세계전략과 스탈린의 경제발전 모델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1956년에 발표된 모택동의 㰡”論十大關係㰡•에 관한 연설과 1957년에 발표된 「인민내부의 모순을 정확히 처리하는 데」에 관한 연설은 바로 중국 지도층의 문제의식을 표명한 것이었다. 특히 공업과 농업, 도시와 농촌,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불균형 발전에서 파생하는 경제적 정치적 부작용을 제거하고 공업과 농업의 동시적이고 균형있는 발전을 통하여 사회주의사회를 건설하려는 중국 지도층의 노력은 마침내 소련방식의 경제발전전략을 수정하고 중국의 혁명경험을 바탕으로 한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운동을 추진하게 하였다. 따라서 1958년과 1959년 사이에 중국 지도층은, 특히 모택동을 중심으로 한 좌파 지도층은 대중의 사회주의적 적극성을 동원함으로써 급진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라’(敢想敢幹), ‘중요한 것은 인간이지 무기가 아니다’, 또는 ‘제국주의는 종이 호랑이다’라는 구호는 당시의 유토피아적인 분위기를 나타내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일부 중국지도층은 공산주의의 도래가 눈앞에 다가왔다고 주장하면서 인민공사야말로 공산주의의 맹아라고 선전을 하였다. 또한 이들은 인민의 혁명정신에 입각한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운동이야 말로 중국과 같이 경제적으로 낙후한 농촌사회에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므로 모든 제3세계의 사회주의 운동에 모범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경제적으로 발전된 소련의 경험보다는 중국의 경험이 제3세계의 현실에 더 적합하다는 것이었다.
이와같은 중국의 주장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회의 단계적인 발전을 주장하는 소련의 정통적인 해석에 대한 중대한 수정을 의미하는 것인 동시에, 소련의 이데올로기적인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따라서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운동의 이데올로기적인 중대성을 인식한 1959년에 소련의 지도자들은 일제히 중국의 ‘유토피아적인 좌익주의’를 비난하게 되었다. 중국의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운동은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객관적인 경제법칙’을 무시한 것이며, ‘생산력의 발전과 물질적인 기반’을 조성하여 단계적으로 사회주의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역사발전’의 법칙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비판을 하였던 것이다. 1959년 7월에 폴란드를 방문 중이던 흐루시초프는 소련의 경험을 들면서 중국의 인민공사운동의 비현실성을 지적하고 모택동을 비롯하여 중국의 일부 지도자들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또 공산주의 사회를 어떻게 건설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난을 하였다.
이와같은 흐루시초프의 비난은 중국 지도층 내에서 대두되고 있던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운동에 대한 노선투쟁에 대한 간섭으로 간주되었다. 사실 1959년 8월에 중국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가 여산(廬山)에서 개최되었을 때 당시 국방상이던 팽덕회(彭德懷)는 흐루시초프의 비난과 같은 맥락에서 모택동의 대약진정책과 인민공사운동을 비판했던 것이다. 이러한 소련의 내정간섭은 중국의 지도층을 자극하여 팽덕회의 숙청과 더불어 반수정주의운동을 전개하게 하였으며, 동시에 소련의 대국주의에 대한 중국 지도층의 저항을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더구나 이 당시에 소련의 평화공존정책이 보다 구체화되면서 중국과 소련의 국가이익과 세계관의 정면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미 1958년 8월에 발생한 대만해협의 위기에서 소련은 결정적인 순간에 중국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표명하지 않음으로써 중국 지도층의 분노를 유발하였고, 또한 티베트 문제로 발생한 중국과 인도의 분쟁에서 소련은 제3세계에 대한 정책에 미칠 영향을 고려한 나머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자 중국 지도층들은 사회주의 국가(중국)에 대한 소련의 배신을 규탄하였다.
1958년과 1959년에 소련의 지도층들은 사회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의 대결과 제3세계에서 폭력혁명을 주장하는 중공의 ‘호전적인 모험주의’에 대하여 경계하면서 중국에 대한 군사적 지원, 특히 핵기술의 지원을 주저해왔다. 1958년에 소련은 보다 긴밀한 군사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중국에 대하여 중․소연합함대의 설치를 요구하고, 중국의 핵개발에 대한 간섭권을 주장함으로써 소련의 의도에 대한 중국의 의구심을 심화시켰다.
사실 소련은 대만문제 등으로 미국과 정면대결을 하고 있는 중국을 전폭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국제적인 긴장이 야기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더구나 1956년 이후 소련은 소련이 추진해 왔던 평화공존과 대미화해정책을 중국의 국가이익 때문에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1959년에 개최된 소련공산당 제21차대회에서 ‘흐루시초프’의 평화공존정책을 재확인하고 미국과의 적극적인 데탕트를 추구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이와 같은 소련의 정책으로 마침내 역사적인 캠프 데이비드 미․소 정상회담이 개최되어 본격적인 미․소협력시대가 시작되었다. 캠프 데이비드 회담 직후 귀로에 북경을 방문한 흐루시초프는 중국 지도층에 대하여 자본주의세력(미국)과의 정면대결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대만문제를 성급하게(무력을 사용하여) 해결하려 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소련은 또한 1957년에 중국에게 약속한 핵기술의 제공을 거절함으로써 중국의 ‘군사적 모험주의’를 저지하려고 하였다.
이와같은 소련의 정책은 중국 지도층으로 하여금 소련과 중국의 기본적인 세계관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시켜주었으며, 소련은 자국의 국가이익을 위하여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포기하였으며, 사회주의 동맹국, 즉 중국의 기본적인 국가이익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1959년을 기점으로 중․소관계는 거의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5. 전인민국가와 수정주의 논쟁
1960년대에 들어와 중․소분쟁은 본격적인 이데올로기논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제 중국과 소련의 의견대립은 비단 세계전략과 국가이익의 충돌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사회주의사회의 건설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차이를 드러내게 되었고, 양국의 국내정치질서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1960년 4월에 중국공산당의 이론지인 㰡”홍기㰡•(紅旗)는 「레닌주의 만세」라는 사설을 통하여 소련의 평화공존정책과 수정주의적인 견해에 대하여 맹렬하게 비판하였다. 비록 소련을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무산계급 전정(專政)’과 ‘계급투쟁’에 관한 레닌의 이론과 제3세계의 사회주의 혁명, 그리고 자본주의진영과의 대결에 관한 이데올로기를 소련이 배신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중국의 공개적인 비난에 대한 보복으로 소련은 1960년 7월에 중국의 경제건설에 참여하고 있던 모든 소련 기술자를 갑자기 소환하여 중국의 주요 산업활동에 막대한 손실을 주었다. 당시의 중국은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의 실패로 경제적으로 최악의 조건에 있었던 만큼 소련의 기술자 철수와 경제원조의 중단은 심각한 경제적 위협이 되었다. 흐루시초프의 의도는 바로 이때 경제적 압력을 가해 중국측 후퇴를 강요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소련의 압력은 오히려 중국지도층의 단결을 가져왔으며, 자력갱생에 대한 결의를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중국은 경제적인 곤란에도 불구하고 소련에 대한 부채를 모두 상환하였고, 소련기술자를 다시 파견하겠다는 흐루시초프의 제의를 완강히 거절하게 되었다.
경제적인 압력을 통하여 중국을 굴복시키는 데에 실패한 소련은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중국을 고립시키는 소련의 입장을 강화하려고 노력하였다. 1960년 8월에 소련은 “평화공존은 전체 공산진영 외교정책의 기본노선”이라고 선언하면서 중국의 모험주의를 비난하였다. 소련은 또한 알바니아와 루마니아의 교조주의를 맹렬하게 비판하고 스탈린의 오류를 다시 강조함으로써 모택동의 극좌사상과 개인숭배사상의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1961년의 소련공산당 제2차대회는 흐루시초프의 평화공존정책을 재삼 확인하면서 무산계급 전정(專政)과 계급투쟁에 관한 소련의 입장을 공표하였다. 소련사회에서 적대적인 계급은 이미 존재하지 않으며 무산계급 전정의 역사적 임무는 완수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련공산당과 소련의 국가기구는 계급의 이익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인민의 이익을 대변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이와 같은 소련의 전인민국가론(全人民國家論)은 “현대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과학적인 사상에 대한 가장 중요한 발전”이라고 선언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은 소련의 주장은 사회주의사회에서도 계급이 존재하며 계급투쟁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중국의 입장, 특히 모택동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좌파 이데올로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사실 1960년대 초에 중국 지도층 내부에서는 대약진운동 실패로 파생된 경제적 위기를 수습하기 위하여 전체인민의 단결과 동원이 필요하다는 실용주의노선이 대두하고 있었으며, 모택동의 계급투쟁 이론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었다. 그러나 1962년의 중국공산당 제8차 10중전회(中全會)는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계급의 존재와 계급투쟁의 지속, 그리고 자본주의 부활의 위험성에 관한 모택동의 중요연설을 당의 기본노선이라고 선언 하였다. 따라서 중․소분쟁은 중국내부의 노선투쟁과 밀접하게 연결되면서 더욱 첨예화되었으며, 1962년에는 국경문제에까지 확대되어 양국의 감정적인 대립을 유발하였다. 즉 홍콩과 마카오에 대한 중국의 유화적인 태도를 지적하면서 중국의 반제국주의노선을 조롱한 흐루시초프의 언동에 자극을 받은 중국이 제정(帝政)러시아와 중국의 불평등조약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양국의 국경문제가 중․소분쟁의 쟁점으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1962년과 1963년의 중․소분쟁은 국경문제, 국내정치의 문제와 관련되면서 가열되더니 1963년 7월에 미국과 소련의 부분적인 핵실험 금지조약이 체결되면서 완전한 파국을 맞게 되었다. 미․소의 협력은 마침내 핵의 독점을 중심으로 군사적 정치적 차원으로 확대되었다고 중국이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은 1963년과 1964년에 걸쳐서 9편의 논문을 㰡”人民日報㰡•와 㰡”紅旗㰡•에 게재하고, 소련의 국내외정책을 집중적으로 공격을 했던 것이다. 중국측에 의하면 소련의 평화공존정책은 소련사회가 수정주의적 세력에 의하여 지배되었기 때문에 산출되었다고 주장하였다. 1964년 7월 14일에 발표한 「흐루시초프의 사이비 공산주의와 세계에 준 그 역사적 교훈」이란 장문의 논설을 통하여 중국 지도층은 소련의 외교정책의 근원인 소련사회의 수정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즉 소련사회는 1956년의 제20차 전당대회 이래로 흐루시초프에 의하여 수정주의적인 정책이 도입되었고, 그 결과 ‘신자산계급’이 대두하여 사회주의로부터 자본주의에로 퇴보되었다는 것이다. ‘부르조아문화’의 부활을 허용한 문화정책이나, 물질적 자극방법이나 시장의 역할확대, 그리고 이윤추구를 통한 경제적 활동을 유도하려는 ‘자본주의적 경제정책’ 등은 소련사회의 불평 등을 심화시키고 새로운 특권계급층을 산출하였으며, ‘자본주의의 복귀’를 가능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사회경제구조의 변질은 당과 국가에까지 침투하여 주자파(走資派)로 하여금 정권을 장악․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무산계급 전정(專政)’을 포기하고 ‘계급투쟁의 종식’을 선언하는 대신에 ‘전인민의 국가’ 또는 ‘전인민의 당’이라는 수정주의적 이데올로기를 표방함으로써 소련사회 내의 수정주의 세력을 옹호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같은 수정주의세력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소련은 ‘프롤레타리아혁명’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원칙을 배반하고 평화공존과 평화적인 방법에 의한 사회주의 사회로의 이전을 주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련의 외교정책과 국내정책의 변질은 소련사회의 구조적인 변질의 결과라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측은 소련의 정책이 쉽게 변경될 수 없다고 판단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소련의 정책은 흐루시초프 개인의 의사를 반영한 것이 아니라 소련사회 내에 존재하는 모든 ‘수정주의세력’의 이익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중국지도층, 특히 모택동은 소련의 변질을 교훈으로 삼아 중국사회와 정치체제에서 수정주의적 세력이 등장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고 더욱 강조하게 되었고, 그것은 문화혁명으로 폭발하게 되었다.
6. ‘양대진영론’에서 ‘세계3분론’으로
1964년에 흐루시초프가 실각하자 중․소간의 이데올로기논쟁은 잠시 중단되고 타협을 모색하는 듯했다. 그러나 중․소분쟁은 이미 사회주의 국가간의 의견대립이라는 범위를 벗어나 기본적인 세계관의 차이와 국가이익의 충돌이란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중국의 지도층들에 의하면 소련이 엘리트 중심적이고 관료적이며 부르조아적인 지배계층에 의하여 통치되는 동안에는 계속 세계혁명보다는 소련의 이익을 추구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소련측은 중국의 유토피아적이고 인민주의적인 경향은 현실과 유리된 반마르크스주의적인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중국은 혁명적 메시아니즘을 통하여 사실상 중화주의(中華主義)를 추구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와같이 중국과 소련은 각각 상대방을 반마르크스주의자이고 편협한 민족주의자, 또는 종족주의자라고 비난하였다. 이것은 중․소 논쟁이 순수한 이데올로기적인 논쟁의 차원을 벗어나 국가이익의 차원에서 군사적 정치적 대결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1962년에 국경문제가 제기된 이후, 중국과 소련은 군사적인 긴장관계에 있었고, 1965년 이후 소련이 중․소 국경지대에 병력을 증강하자 중국과 소련의 군사적인 대결 가능성이 높아졌고, 1969년에는 마침내 진보도(珍寶島)에서 양국의 무력충돌로 발전했던 것이다.
소련은 또한 중국의 국제적인 고립화정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동남아시아의 반중국 감정을 이용하여 1969년에 브레즈네프는 아시아집단안전보장조약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소련의 군사적, 정치적 압력이 가중되면서 중국은 점차로 종전의 양대진영론을 수정하고, 중간지대론 또는 세계3분론을 제안하면서 반소 반미 통일전선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1965년에 중국의 국방상이던 임표(林彪)는 「인민전쟁만세」라는 논문을 통하여 제3세계에서의 민족해방전쟁을 찬양하고, 세계의 농촌국가들은 도시국가를 포위하여 세계혁명을 완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제 중국 지도자들에 의하면 세계의 주요 모순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아니라 제국주의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광대한 농촌국가’의라고 규정하면서 중국은 제3세계를 대변하여 미국과 소련의 제국주의에 저항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특히 1969년 무력충돌 이후 중국 지도자들은 소련을 ‘사회제국주의국가’라고 주장하면서 퇴조하는 미국의 제국주의보다 소련의 신흥 사회제국주의의 위협에 대하여 더욱 강조하였다. 이와같은 이론적인 배경에서 중국은 1970년대에 미국과 일본, 그리고 서유럽 제국과의 반소협력체제를 구축하였다.
7. 중․소의 상이한 세계관
모택동의 사망과 문화혁명 좌파의 제거, 그리고 등소평을 중심으로 한 실용주의 정권의 성립으로 중․소관계가 호전될수 있는 계기를 맞이하였다. 사실 1978년 이후 중국의 실용주의적 지도자들은 소련을 수정주의국가라고 비난하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소련이 사회주의국가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형편이다. 한편 소련지도자들은 중국이 사회주의국가라고 인정하면서 조심스럽게 중․소관계의 개선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서방세계에 대해 문호개방을 선언하면서도 중국 지도자들은 여전히 소련을 ‘사회제국주의국가’라고 표현하였으며, 중국과 소련은 기본적인 세계관의 차이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것은 중․소분쟁이 단순한 에데올로기 차이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상이한 문화와 혁명경험, 그리고 상반되는 국가이익 등과 같은 복합적인 요인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를 제거해도 여전히 분쟁이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 중․소분쟁은 1960년대 초에는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이 강했지만, 1960년대 중반 이후, 특히 1970년대에 와서는 군사적, 정치적 대결의 양상으로 변모되면서 국가이익과 세계관의 차이가 더욱 강조되었다. 실제로 1960년대 초의 이데올로기 분쟁의 배후에도 중국과 소련 지도자들의 상반되는 세계관과 양국의 상충하는 국가이익이 이데올로기적 분쟁을 격화시켰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면 소련과 중국의 기본적인 세계관의 차이는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1950년대 후반기에 들어오면서 소련은 이미 세계질서의 급격한 변화를 원하지 않게 되었고 현상유지 속의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련은 이미 미국과 견줄만한 초강대국으로 성장하였으므로 현존의 국제정치질서 속에서 소련의 국가이익이 보장될 수 있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은 변화를 추구하는 세력이었다. 모택동의 ‘천하대란(天下大亂)은 좋다’는 말은 혁명적인 세계질서의 변화를 통하여 중국의 국가이익이 증대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다는 중국 지도층의 세계관을 대변한 것이다. 실용주의 지도층이 등장하면서 천하대란이 좋다는 모택동의 어록은 수정되고 현대화 사업을 위하여 안정을 강조하면서도 중국 지도층은 여전히 세계정치질서와 경제질서의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중국의 좌우파는 세계질서의 점진적인 변혁이냐 또는 혁명적인 변혁이냐 하는 방법상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지만 기본적인 세계관에서는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현대화를 위해서 중국은 산업국가와 협력을 하면서도 정치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제3세계와 입장을 같이 하는 것도 변화 추진세력으로서의 중국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중국의 세계관 때문에 중국과 소련, 중국과 미국의 협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다. 따라서 중․소관계는 설사 ‘수정주의 논쟁’이 없었다 하더라도 냉전체제에서 일시적으로 형성되었던 위계적인 동맹관계를 지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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