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국 정치론]
제6부 제2장 중국적 사회주의의 미래는 무엇인가
1. 서언: 사회주의 미래에 대한 두가지 견해
지난 1989년 세계는 동양과 서양에서 두 가지 놀랄만한 사건을 경험하였다. 하나는 동구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이란 역사적 대변혁이었고, 또 하나는 중국의 천안문 유혈사태였다.
그러나 중국에서 민주화운동의 운명은 동구 및 소련에서와는 달리 비극적인 좌절을 경험하였다. 1976년 모택동의 사망과 1978년 등소평의 개혁정권이 등장한 이후 대담한 개혁, 개방정책이 실시되면서 간헐적으로 표출되었던 중국의 민주화운동이 호요방의 사망을 계기로 대규모적인 민주화운동으로 발전하자, 등소평을 중심으로 한 혁명 1세대 원로 지도자들은 1989년 6월 4일 강경한 무력진압을 단행함으로써, 중국에서 민주화운동은 패배하였고 공산당지배는 계속되었다.
사회주의의 역사적 실험의 대실패와 역사의 종말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중국이나 일부 현존 사회주의 국가들의 운명도 우여곡절은 있겠지만, 결국 소련이나 동구 사회주의국가들의 전철을 밝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민주화운동의 좌절을 목도한 서방 학자들은 소련 및 동구와 중국의 역사적 환경의 차별성에 주목하면서 상당기간 중국적 사회주의의 생존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이 두가지 견해가 반드시 대립적인 것은 아니다. 중국적 사회주의의 몰락을 예견하는 사람들도 중국에서 공산당의 지배가 동구나 소련에서 처럼 하루 아침에 갑자기 붕괴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도 중국에서 사회주의의 몰락은 상당한 기간이 걸릴지도 모르며, 또한 공산당지배의 붕괴가 곧바로 중국의 민주화로 연결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 사회주의체제의 붕괴과정은 대단히 복잡다기하고 장기간에 걸친 정치적 혼란을 수반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또한 중국적 사회주의의 생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중국이 현재와 같은 공산당 지배체제를 언제까지나 견지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도 중국의 개혁과 개방정책이 지속되면서 중국사회에서 공산당 일당 지배체제에 대한 저항과 변화요구는 계속 축적, 심화될 것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중국의 당국가체제도 근본적으로 변화할 것이며, 궁극적으로 중국에서도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실현될 것이란 점을 부인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2. 경제개혁과 정치개혁, 그리고 시민사회
중국적 사회주의의 종국적 몰락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또는 중국적 사회주의의 생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회주의체제에서의 경제개혁과 정치개혁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그리고 중국의 공산당정권이 가지고 있는 정통성과 통제능력과 중국의 시민사회의 역량에 대하여 중요한 인식론적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사회주의의 종국적 몰락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명시적으로, 또는 묵시적으로 사회주의체제에서 정치와 경제, 그리고 이념체계의 상호 연계성을 강조하면서, 정치개혁을 수반하지 않는 경제개혁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역설하고 있다. 특히, 소련과 동구의 개혁사회주의가 대담한 경제개혁을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성과를 산출하지 못한 이유는 바로 경제개혁에 상응하는 정치개혁을 단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폴란드의 수상을 역임했던 비에레키(Bielecki)는 폴란드가 경험하고 있는 경제적 좌절의 원인을 대담한 경제개혁을 모색하면서도 정치적인 타협주의노선을 견지했던 연대노조의 전략적 실패에서 유래한다고 지적하면서,시장경제에로의 전환를 모색하는 경제개혁의 성공과 실패는 결국 정치변화의 정도에 달려 있다고까지 주장하였다.
이처럼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의 직접적인 상응관계를 강조하지 않더라도 근대화론의 연장선에서 사회주의체제의 개혁과 개방은 결국 사회적 다원화와 자율영역의 증가를 초래할 것이며, 그것은 마침내 공산당 일당체제의 변화를 수반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대담한 경제개혁과 개방을 추구하면서도 당국가체제를 고수하려는 등소평의 중국적 사회주의는 결국 실패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경제개혁과 개방이 심화, 확대될수록 경제사회의 개방화, 자율화, 다원화는 더욱 촉진될 것이고, 그러한 경제사회의 다원화, 개방화, 자율화의 진전과 더불어 획일적이고 위계적인 정치사회와의 모순과 갈등은 더욱 첨예하게 악화되어 마침내 당국가체제는 붕괴하게 될 것이라는 추론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중국이 이미 지난 10여년간의 경제개혁과 개방으로 말미암아 모택동시대의 중국사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모하였고, 기존의 이데올로기와 당국가체제의 정통성과 통제능력은 상당한 정도로 훼손되었으나, 시민사회의 역량은 상당한 정도로 성숙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따라서 이와같이 변화된, 그리고 계속 변화하고 있는 중국사회에서 기존의 당국가체제를 고수하기 위해서는 더욱 더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수단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은 1989년의 천안문사건을 바로 시장경제와 다원적 정치체제를 요구하는 중국의 변화된 사회세력에 대한 정치적 기득권 세력, 특히, 소수 원로 당간부들의 폭력적 대응이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처럼 중국의 정치질서가 변화하는 중국사회의 요구를 수용하지 못하고 시대착오적인 소수의 당원로들에 의하여 전단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의 민주화는 일시 중단되거나 유예되었지만, 정치적 모순은 그만큼 더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소수의 혁명 1세대가 퇴진한 이후 중국적 사회주의는 정치적 민주화를 요구하는 밑으로부터의 변혁운동을 더 이상 억압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중국사회의 내부적 사정도 그렇고, 세계적 역사적 추세도 중국적 사회주의의 최종적인 몰락을 더 이상 억제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적 사회주의의 특이성과 강고성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경제개혁과 정치개혁의 1:1의 대응관계를 부인하고 있다. 이들도 장기적인 역사과정에서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경제개혁과 정치적 민주화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개혁이 반드시 정치개혁을 선행조건으로 요구하는 것도 아니며, 더구나 특정한 형태의 정치질서를 직접적으로 결과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시장경제와 자본주의적 요소를 대담하게 수용하는 경제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경제발전을 촉진하려는 것이 반드시 민주주의의 실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이들은 제 3세계에서 등장한 개발독재의 경험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것처럼, 경제분야에서 개혁과 개방을 추구하면서도 공산당의 영도를 고집하는 등소평의 중국적 사회주의의 생존 가능성을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이들은 중국사회에 대한 당국가체제의 통제능력에 대한 과소평가와 시민사회의 역량에 대한 과대평가를 모두 경계하고 있다. 이들도 중국사회가 지난 10여년간의 개혁, 개방으로 말미암아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었고, 사회적 다원화와 자율화의 영역도 상당한 정도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사회와 경제발전 정도를 고려한다면, 동구와 소련과 비교하여 아직도 중국 시민사회의 역량은 제한적이며 취약하고, 국가부문의 영향력은 여전히 크다. 더구나 중국의 정치문화와 전통은 국가중심적이기 때문에, 밑으로부터의 민주화운동이 당국가체제를 위협할 만큼 성숙되려면 상당한 역사적 시간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끝으로, 이들은 중국사회에서 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와 당국가체제의 정통성이 상당히 훼손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대치할 만한 이념이나 정치세력이 아직 존재하고 있지 않으며, 더구나 민주주의와 인권과 같은 추상적인 가치보다는 실리적인 개인과 집단의 이익 추구에 만족하려는 경향이 지속되는 한 경제발전을 강조하는 중국적 사회주의는 앞으로 상당기간 생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3. 탈사회주의의 다양한 경로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현존 사회주의의 개혁과정에서 주로 소련과 동구의 경험은 사회주의의 종국적 붕괴론을 정당화시키는 근거가 되고 있으며, 중국에서 민주화운동의 좌절은 현존 사회주의체제의 장래에 대한 보다 조심스러운 접근을 강조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특히, 중국적 사회주의는 경제개혁과 정치개혁의 상관관계, 그리고 탈사회주의의 이행경로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을 예시하는 역사적 실험의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소련, 중국, 그리고 동구 등 ‘현존 사회주의체제’의 변혁과정은 장기적인 역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궁극적으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확대를 지향하고 있으며, 공정한 자유경쟁이 보장되는 시장경제와 다원적인 시민사회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가 결합된 정치체제인 폴리아키(Polyarchy)를 최종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장의 「탈사회주의의 다양한 길은 열려 있는가」라는 논문에서 상세하게 설명한 바가 있지만, 이같은 최종 목표에 이르는 경로는 다양하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즉, 아래의 <도표-1>에서 제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서구와 소련, 그리고 중국의 역사적 경험은 시장경제와 정치적 민주화의 상호관계에 관한 3가지 상이한 유형이 있을 수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대체로 서구의 역사적 경험은 시장경제의 발전과 정치적 민주화가 상호 조응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면, 소련의 경험은 대담한 정치개혁을 통하여 경제적 변화를 선도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적 사회주의는 소련과는 달리, 적극적인 경제개혁을 통하여 시장경제를 꾸준히 발전, 확대해 가면서도 정치적 변화를 억제한다.
<도표-1>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의 상관관계
시장화의 정도
폴리아키
경 서구
제 중국
개
혁 소련 정치개혁
이와같이 중국과 소련의 경우는 시장경제와 정치적 민주화 사이의 ‘불균등 발전'의 경험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불균등 발전’이란, 경제개혁과 정치개혁이 동일한 속도와 범위로 조응하면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소련과 같이 정치개혁이 경제적 변화에 선행하기도 하고, 또 중국과 같이 경제개혁이 정치적 변화에 선행하기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중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의 역사적 경험을 거시적인 차원에서 분석한다면, 경제적 변화가 일정한 정치적 변화를 촉발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다만, 구체적인 정치적 변화의 속도와 범위는 변화의 ‘물적 토대’인 경제적 변화의 정도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기 보다는 여러가지 매개적 변수, 이를테면 중국사회의 성격과 전통, 그리고 리더쉽의 전략적 선택 등과 같은 매개적 변수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특히, 민주화의 진전과 탈사회주의의 경로와 관련해서 소련, 동구, 중국 등의 역사적 경험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매개 변수가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경제발전과 근대화등으로 촉발된 시민사회의 형성과 밑으로부터의 민주화 요구 수준이 하나의 축을 형성한다면, 개혁정치를 주도하고 있는 리더쉽의 성격과 역량이 또 다른 변수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래의 <도표-2>는 시민사회에서 분출하는 밑으로부터의 민주화 요구 강도와 개혁적 리더쉽의 개혁의지와 능력에 따라서 탈사회주의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변화의 4가지 상이한 유형을 보여주고 있다.
<도표-2> 시민사회와 개혁적 리더쉽의 관계
강한 개혁적 리더쉽 약한 개혁적 리더쉽
강한 시민사회 평화적 이행 아래로부터의 혁명
약한 시민사회 위로부터의 혁명 현상유지
지난 1980년대 이후 현존 사회주의국가들에서 추진되었던 개혁정치와 체제변화의 과정을 <도표-2>에서 제시한 4가지 범주로 분류해 본다면, 소련과 헝거리가 전형적인 ‘평화적 이행’의 유형에 속한다면, 동독과 루마니아 등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란 범주에, 중국과 베트남은 ‘위로부터의 혁명’이란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하여 북한은 지도부의 개혁의지도 의심스럽고 시민사회의 역량도 약하기 때문에 ‘현상유지’가 지속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같이, 정치적 리더쉽의 개혁의지와 역량, 그리고 시민사회의 성숙도라는 두 가지 변수에 따라서 정치적 변화의 유형이 다르게 나타나지만, 이와같은 리더쉽의 역량과 시민사회의 힘의 관계가 항상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치도 ‘위로부터의 혁명’에서 출발했지만, 개혁정치의 과정에서 시민사회의 요구가 분출하고 리더쉽 내부의 분열이 심화되면서 ‘아래로부터의 혁명’에 접근하는 양상을 보여주었고, 이런 과정에서 개혁적 리더쉽과 시민사회의 대립과 갈등이 정치적 타협점을 찾음으로써, ‘평화적 이행’을 실현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개혁정치로 활성화된 시민사회의 민주화 요구가 분출하는 시점에 보수파와 개혁파간의 갈등으로 개혁적 리더쉽이 약화됨으로써, 1989년의 천안문사건과 같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적 상황’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결국 등소평의 강력한 체제수호 의지와 시민사회의 제한적인 역량으로 중국은 다시금 ‘위로부터의 혁명’의 범주를 회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변화의 유형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리더쉽과 시민사회의 역량간의 역동적인 관계에 따라서 다양하게 변화한다고 하겠다. 따라서 중국적 사회주의의 장래도 개혁적 리더쉽과 시민사회적 역량이란 두 가지 변수의 역동적인 관계를 통하여 추론할 수 있다고 하겠다.
4. 중국의 개혁적 리더쉽과 시민사회: 민주화운동의 한계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중국의 경제개혁은 단계적이면서도 가히 혁명적이었다. 경제개혁 1단계 (1978-84)에 등소평정권은 대대적인 문호개방정책을 추구하면서 미국 및 일본 등 서구 선진자본주의국가들로부터 자본과 기술을 적극 유치하기 시작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중국사회의 압도적인 다수를 점유하고 있는 농민들의 “자본주의적 성향”을 이용하여 농촌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농업생산책임제 등을 추진함으로써 모택동시대의 유물인 인민공사의 해체와 농민들의 ‘생산력 해방’을 동시에 실현하였다.
농촌경제의 성공에 힘입은 등소평정권은 도시지역의 국영기업을 주요 대상으로 하는 2단계 경제개혁(1984-1988)을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계획적인 상품경제의 발전’을 표방하면서 개혁파들은 기업의 소유와 경영 형태의 다원화와 자율화를 추진하였고, 계획경제의 범위를 점차로 축소하는 대신 시장경제의 영역을 확대하는 경제구조와 경제관리체제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동시에 조자양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파들은 ‘국제순환론’을 제창하면서 본격적인 수출주도형 개방경제를 추구하였다.
중국은 단계적인 대담한 경제개혁과 개방화를 추진함으로써 괄목할 만한 경제적 성과를 산출하였다. 거의 모든 중국경제의 전문가들이 인정하고 있듯이 중국경제는 1979년이후 1995년까지 年平均 9.9% 성장율을 기록하였고, 1991년부터 1995년 사이에는 11.9%라는 놀랄만한 경제성장율을 기록함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활기있고, 고도성장하는 경제라는 점을 과시하였다. 물론, 그동안 중국경제가 성장과 번영만을 구가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989년의 천안문사건을 전후로 중국경제는 유례없는 물가상승율과 무역수지의 적자로 심각한 사회, 정치적 불안을 낳았고,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의 경제제제라는 악조건으로 일부에서는 중국경제의 위기론까지 제기되었다. 그러나 천안문사건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치리정돈(治理整頓)’의 정책을 꾸준히 추진하여 예상외로 빠른 시간내에 정치적‧경제적 안정을 되찾고 다시 고도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이처럼 중국은 경제개혁으로 놀랄만한 경제발전을 이룩하면서, 국민생활 개선에도 상당한 정도로 성공하였다. 물론, 고도성장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역적, 계층간의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이 새로운 문제점으로 대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농촌과 도시지역 모두 경제개혁으로 괄목할 만한 소득 증가를 달성하였고, 소비수준도 다양화 되었다. 이러한 경제발전과 더불어 중국의 경제개혁은 중국사회 전반에 중요한 영향을 주는 구조적 변화를 가져왔다.
중국경제에서 국가부문의 역할이 축소되었고, 비국가부문의 비중이 증대되고 있다. 특히, 경제구조의 개혁과 더불어 다양한 소유구조가 등장하고 있으며, 비국영부문이 중국경제의 발전을 선도하고 있다. 중국의 경제사회에서, 향진기업과 같은 집단소유의 기업, 개인소유의 기업, 그리고 합작기업 및 외자 독립기업 등 다양한 소유형태의 경제단위들의 비중이 놀랄만큼 빠른 속도로 발전하면서 중국경제의 활력과 성장을 선도하고 있다.
따라서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중국경제의 ‘사령탑(Commanding Height)’이라고 알려졌던 국유기업의 비중과 역할이 급속하게 하락하고, 향진기업을 중심으로 한 집체기업과 개인이나 합작기업이 중국경제를 주도하게 되었다. 이미 일부 지역에서는 1990년대 초반에 사적 경제부문이 국가부문을 능가하고 있다. 예를 들면, 전국에서 사영기업이 가장 빨리 발전한 절강성(浙江省) 온주(溫州)의 경우, 1980년도 총공업생산중에서 국영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31.44%이었지만, 1985년에는 18.45%에 불과하게 됨으로써, 사적 경제가 지역경제를 주도하고 있음을 증명하였다. 이와같이 사적 경제가 이 지역에서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게 된 배경에는 이 지역의 역사적, 지리적 특수성도 중요하게 작용하였지만, 지방간부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무시할 수 없다.
이처럼 지방의 당정간부들이 해당지역의 사유기업이나 향진기업을 지원하는 이유는 사적 경제가 지방정부의 주요 재원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당정간부들이나 그들의 대리자들이 이들 사유기업을 소유하고 있거나, 또는 사유기업이나 향진기업으로부터 여러가지 물질적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지방관료와 사기업간의 공생관계는 여기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경제결정권이 지방분권화되면서 거의 모든 지역에서 지방정부와 지방관료들은 사유기업이나 향진기업의 발전을 촉진함으로써, 개인적, 지방적 이익을 모색하고 있다.
이와같이 중국경제의 구조개혁은 소유형식의 다원화와 더불어 사적 경제영역의 확대와 발전을 촉진하고 있으며, 동시에 중국경제의 ‘시장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그것은 국가의 통제품목의 감소, 공업생산액에서 차지하는 지령성 계획의 비중 축소, 그리고 가격조정의 감소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공업생산에서 국가계획위원회의 지령계획 제품은 1978년에 120종이었지만, 1986년에는 60종으로 축소되었고, 지령계획 제품이 공업생산액중에서 점유하는 비율도 40%에서 20%로 감소하였다. 상업부문에서도 지령계획의 통제를 받는 상품이 188종에서 25종으로 대폭 감소하였다.
이처럼 국가의 통제영역이 축소되고 시장메카니즘이 작용하는 부문이 확대되면서 중국경제의 ‘시장화’가 점차로 확대되고 있다. 물론 ‘시장화’의 정도는 앞에서 지적한 지령성 계획 품목의 축소가 암시하는 것처럼 대폭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또 히로유끼의 분석에 의하면, 중국의 사회노동자수에서 시장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1981년에 4.69%에 불과했지만 1991년 현재 16.93%로 증가하였다. 다시 말해서 노동분야의 ‘시장화’는 지난 10년간 거의 4배로 증가했지만, 1991년 현재 아직도 전통부문이 60%, 계획부문이 23.07%를 차지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국의 경제개혁은 괄목할 만한 고도성장을 이룩하였고, 경제사회의 다원화, 자율화, 시장화를 대폭적으로 증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국사회 전반의 근대화도 촉진하였다. 흔히 근대화의 지표로 사용되는 산업화와 도시화, 대중매체와 코뮤니케이션 수단의 확산률 등을 고려한다면, 개혁, 개방이전의 중국과 오늘날의 중국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면, 중국의 GDP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980년에 30.4%였으나, 1990년 현재 23.2%로 축소된데 비하여, 공업은 49.0%에서 52.7%로, 그리고 서비스부문은 20.6%에서 24.1%로 증가하였다. 도시인구의 비율도 1978년의 11.9%에서 1991년에는 29.9%로 증가하였다. 특히 흥미있는 것은 아래의 <표-3>이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이 경제발전과 더불어 커뮤니케이션과 대중매체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표-3> 커뮤니케이션과 대중매체의 발전 (1978-1989)
1978년 1989년 증가율
100인당 TV 보유수 0.3 14.9 4,865%
100인당 라디오 보유수 7.8 23.6 202.56%
100인당 전화 보유수 0.43(1980) 0.8 127.9%
일간신문 발행부수 (10억부) 186 852 358%
잡지 발행부수 (10억부) 0.76 2.55(1988) 235.5%
자료출처: Minxin Pei, op. cit. (1992), p. 307
이와같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지표를 살펴보면 중국사회가 개혁, 개방정책으로 엄청나게 변화하였고, 모택동시대와 비교하면 상당한 정도로 다원화, 자율화, 개방화가 진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중국사회의 변화는 중국에서도 자율적인 시민사회가 형성되고 있다는 추론의 근거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중국에서도 소련이나 동구에서 처럼 공산당의 일당지배에 저항할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시민사회적 역량이 성숙되고 있는가? 이런 종류의 질문에 대하여는 누구도 확언할 수 없다. 그러나 중국의 경제발전 정도, 근대화의 정도를 비교론적인 시각에서 검토하고, 중국적 ‘시민사회’의 성격과 역량을 냉정하게 분석해 볼 필요는 있다.
첫째, 중국은 개혁, 개방정책으로 모택동시대와 비교하면 놀랄만한 경제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경제발전과 근대화의 정도에 있어서 아직도 제3세계의 개발도상국가 수준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중국은 1990년도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이 360달러인 저소득 국가이며, 중국사회의 생산구조와 수요구조, 그리고 교육수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면, 전형적인 저소득 국가군의 평균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즉, 중국의 경제발전과 근대화의 수준은 붕괴 전의 소련과 동구의 수준에 훨씬 못미칠 뿐만 아니라, 인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아세안국가들과 비교해도 상당히 낙후한 상태다.
과연 이와같이 경제적으로나 사회문화적으로 낙후한 중국사회에서 밑으로부터의 정치적 변혁을 주도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역량을 기대할 수 있을까? 헌딩턴에 의하면, 1974년부터 1989년사이에 약 31개국에서 권위주의체제가 붕괴하고 민주주의에로의 이행이 진행되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경제적으로 중위권 국가들이었다고 지적하였다. 특히, 1976년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이 1,000-3,000달러 수준에 도달했던 비민주적인 국가들 중에서 3/4이 1989년에 민주화에로의 이행이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경제발전의 정도와 시민사회의 성숙도, 그리고 민주주의로의 체제변혁이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시민사회의 등장과 민주화운동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물적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중국의 경제발전과 근대화의 정도를 고려할 때, 과연 1989년 당시의 소련이나 동구, 또는 탈권위주의의 이행기에 들어선 한국이나 대만, 그리고 일부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들과 동일한 수준에서 중국의 민주화를 기대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하겠다.
둘째, 탈사회주의와 탈권위주의에로의 이행과 같은 역사적 변화과정에서 소수 권력엘리트들의 ‘전략적 선택’도 중요하지만, 변화를 추동하는 새로운 사회계급과 사회세력의 등장이 중요한 전제조건이라는 데에는 이론이 없다. 따라서 동구와 소련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비판적 지식인 그룹과 자율적인 노동운동의 등장, 그리고 이들의 변혁운동을 뒤받침한 광범위한 중간계층과 시민사회의 존재가 중요한 분석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과연 중국에서도 체제변혁을 주도할 수 있는 그런 사회세력이 존재하는가?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중국에서도 비판적인 지식인 그룹이 형성되고 있으며, 경제개혁과 더불어 등장한 광범위한 사적 경제영역에 뿌리를 둔 새로운 형태의 ‘중산계급’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면, 천안문사건을 전후로 중국의 학생과 지식인 사회에서는 대담한 정치변화를 요구하는 다양하고도 활발한 단체들과 조직이 형성되었으며, 중국공산당과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불신과 도전이 확산되고 있었다. 그러나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1989년 민주화운동의 한계는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학생과 지식인들이 ‘전통적’인 행위패턴을 여전히 보여주고 있다는 데에서도 확인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비판적 지식인들이 기존의 권력엘리트들이나 국가에 대항하여 새로운 대체 이념이나 정치세력을 형성하려고 하기 보다는 과거의 비판적 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권력엘리트로부터 자신들의 도덕적 정당성을 인정받으려고 하였고, 스스로 대중과 거리를 둠으로써, 밑으로부터 분출하는 민중들의 민주화의 요구를 조직화하는데 실패했다.
이와같이 중국의 지식인 사회가 아직도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비판적 정치세력을 형성하기 보다는 기존의 권력엘리트와 국가에 의존적인 성향을 보여주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개혁으로 열려진 사적 경제의 영역에서 성장한 중국의 ‘신흥 기업가들이나 상인계층’ 또는‘자영노동자’들도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율성을 쟁취하려고 하기 보다는 국가권력과의 공생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려고 하기 때문에 중국의 ‘시민사회’는 아직도 국가부문에 대항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개혁은 중국사회에서 다양한 새로운 사회집단과 세력들이 등장할 수 있게 하였지만, 현재로는 이들이 자율적으로 정치변화를 추진할 동기도 능력도 갖추고 있지 않다. 다만, 권력엘리트 내부의 갈등과 분열과 더불어 일부 권력엘리트들의 암묵적 지원이나 동원에 힘입어 간헐적으로 집단적인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고 하겠다.
셋째, 중국의 정치적 변화와 관련하여 중요한 변화중의 하나는 기술관료들의 등장이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중국의 개혁파 지도자들은 개혁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당정간부의 4화(革命化, 年輕化, 知識化, 專門化)를 강조하면서 과감한 인사개편과 세대교체를 단행함으로써 하급단위에서 뿐만 아니라, 중앙의 주요 당과 정부기관에서 실무 기술관료들이 대거 등장하게 하였다. 따라서 현재 중국의 당정기구는 소수의 혁명 1세대의 후원하에서 등장한 이들 실무 기술관료출신들이 권력 엘리트들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실무 기술관료들은 과거의 당정관리들과는 달리, 정치와 이념문제보다는 실제적인 경제와 행정문제에 관심이 많으며, 실용주의적인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이 앞으로 모택동시대와 같은 좌파노선에로 회기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이들이 중국사회의 민주화를 지지할 것인지는 의문이라고 하겠다. 오히려 한국이나 대만등 관료권위주의국가에서 찾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중국의 실무기술관료들도 정치적 안정과 경제발전 제일주의를 표방하는 신권위주의를 지지할 성향이 더 많다고 하겠다.
5. 결언: 신권위주의정권의 등장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중국은 지난 10여년간 지속된 등소평의 대담한 개혁, 개방정책으로 유례없는 경제발전과 인민들의 생활개선을 달성하였다. 또한 등소평정권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경제개혁과 경제발전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국사회의 다원화와 근대화도 상당한 정도로 진행되었고, 시민사회적 요소도 어느 정도 발전하였다. 따라서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도 과거와 같은 ‘전체주의적 모델’로는 더 이상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 국가의 통제와 규제 영역이 축소되고 있으며, 그 자리에 다양한 사회집단과 조직들이 등장하여 국가부문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공생관계를 형성함으로써 독특한 국가와 ‘시민사회’의 이중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국가와 시민사회의 대립과 갈등을 전제로 하고 있는 서구의 민주화 이론이나 소련 및 동구의 탈사회주의 이행론을 중국적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중국의 경우는 비록 현존 사회주의의 이념과 제도에 대한 정통성과 능력이 현저하게 훼손되었지만, 전통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국가부문의 영향력은 여전히 크고, ‘시민사회’의 역량도 아직은 제한적일 뿐만 아니라 국가부문과의 공생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시민사회에 의한 당국가체제의 혁명적인 붕괴보다는 ‘위로부터의 혁명’이 지속되면서 ‘신권위주의 정권’에로 단계적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많은 것 처럼 보인다. 지난 1992년 10월에 개최된 14차 당대회의 노선도 바로 이같은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하려면, 정치적 안정이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공산당 지배하의 정치권력의 집중과 독점을 유지하면서도 제한적인 범위에서 경제적, 사회적 다원화와 자유화, 자율화를 인정하는 ‘신권위주의 정권’ 또는 ‘사회주의 발전국가’에로의 변화가 지난 14차 당대회에서 결정된 중국 미래에 대한 당지도부의 구상인 것 같다.
그러나 중국이 현 개혁 지도부가 구상하고 있는 것 처럼, 공산당 1당 지배체제와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결합하는 방식의 ‘위로부터의 혁명’을 계속 추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두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개혁지도부의 단결과 합의가 중요한 전제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천안문사건과 같은 대규모 민주화운동이 폭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현존 사회주의가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한편으로는 대안적 세력의 부재, 또는 시민사회적 역량의 취약성으로도 설명될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등소평을 중심으로 당 지도부가 체제수호를 위해 단결하고, 대담한 경제개혁과 개방을 지속적으로 실시하면서 경제안정과 경제발전을 실현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도 이같은 조건, 즉, 지도부의 단결과 경제발전이란 조건을 유지할 수 있다면, 상당기간 중국적 사회주의는 생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만일 등소평의 사망과 더불어 당지도부내에서 심각한 권력투쟁과 노선투쟁이 전개된다면, 그리고 중국경제가 또 다시 경기후퇴와 경제적 혼란에 직면하게 된다면, 제 2의 천안문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하겠다. 사실, 권력 엘리트 내부의 분열과 갈등은 과거에도 중국사회의 다양한 집단과 세력들로 하여금 정치무대에 등장하여 당의 지배체제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문화대혁명이 그렇고, 또한 89년의 천안문사태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지난 10여년간의 경제개혁과 경제발전으로 성장하였고, 문화혁명이나 천안문사건과 같은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단련된 중국의 시민사회는 등소평이후 당지도부의 분열과 갈등이 심화되고 당국가체제의 통제력이 이완된다면, 과거보다 더 적극적이고 급진적인 정치적 변혁을 모색할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따라서 등소평이후 중국지도부가 단결과 안정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그동안 억제되었던 민주화의 요구가 폭발적으로 분출하면서 중국에서도 ‘밑으로부터의 혁명’이 발생하거나, 또는 소련이나 헝거리에서와 같이 당지도부내의 급진적 개혁파와 시민사회의 민주화 요구가 결합하면서 ‘합의에 의한 평화적 이행’이 실현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만일 이같은 사태가 발생한다면, 다시 말해서 ‘밑으로부터의 혁명’이나 ‘평화적 이행’의 형태로 당국가체제가 붕괴한다면, 중국에서도 소련에서와 같이 정치적 혼돈과 해체의 과정이 되풀이 될 우려가 있다. 이미 앞에서도 여러번 지적한 바와 같이 개혁, 개방과 더불어 지역 이기주의와 지방 할거주의가 부활, 강화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국가체제의 붕괴와 더불어 중앙정부의 권력 공백이 발생하면, 지방단위에서 ‘독립왕국’이 등장함으로써 정치적 혼돈과 무질서가 초래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같은 위험성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의 지식인들 가운데에서는 중앙정부의 권력집중과 독점을 어느 정도 용인하면서 경제적, 사회적 자유화를 확대하자는 신권위주의론이나, 또는 민주화에 이르는 제3의 길을 제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신권위주의정권에서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제발전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동시에 다양한 사회세력을 정치과정에 흡수함으로써 점진적으로 당국가체제의 변화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강택민을 중심으로 구성된 현재의 중국지도부가 이와같이 단계적이고 안정적인 탈사회주의에로의 이행을 실현할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이 있는지가 의문이기 때문에 중국의 장래는 여전히 불투명하고 불확실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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