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국 정치론]
제6부 제3장 등소평 이후 중국정치 전망: 4가지 시나리오
1. 무엇이 문제인가
최근 국내외에서 등소평 이후의 중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개혁․개방의 ‘총설계사’이며, 중국정치의 ‘해결사’로 알려진 등소평의 사후 ‘중국적 사회주의’가 과연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 것인가는 대단히 흥미있으면서도 중요한 문제임에 틀림없다.
등소평 이후에도 중국은 과연 대담한 개혁과 개방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도 사회주의적인 정치체제를 견지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모택동이나 등소평과 같은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부재한 상황에서 권력투쟁이 심화되고 정치적 혼란이 야기되어 마침내 천하대란의 소용돌이에 빠질 가능성은 없는가.
이런 문제는 비단 중국인들만의 관심사항은 아니다. 세계 최대의 인구, 세계 3위의 영토, 그리고 최근에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기록하면서 경제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핵무기와 300만명의 병력을 보유한 군사대국으로 등장하고 있는 중국의 향방은 아시아는 물론, 전세계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탈냉전시대를 맞이하여 유동적인 세력개편이 진행되고 있는 동북아시아에서 중국의 변화는 가장 중요한 변수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등소평 이후의 중국정치의 전망에 대하여 우리는 특별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더구나 중국과 같이 거대하고도 복잡하고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변화할 것인지는 아무도 자신있게 추론할 수 없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여기에서 등소평 이후 중국의 정치적 전망을 다음과 같은 세가지 문제의식, 또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방식으로 시도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등소평 이후의 중국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제기하고 있는 1차적인 의문은 체제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등소평 이후에도 ‘중국적 사회주의’는 생존할 수 있을 것인가, 사회주의와 시장경제의 결합은 성공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중국정치의 장기적 전망을 시도하려고 한다.
둘째로, 등소평 이후 등장할 정권유형과 관련된 문제의식이 역시 제기되고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등소평 이후 중국의 정치사회는 어떻게 변화할 것이며, 어떤 유형의 정치엘리트들에 의하여 통치될 것이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해답을 모색하려고 한다.
셋째로, 앞의 질문보다 더 구체적이고 단기적인 차원에서 누가 그리고 어떤 정치세력이나 파벌이 등소평 이후의 중국정치를 지배하게 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도 제한된 범위에서 해답을 찾아 보려고 한다.
이런 질문이나 의문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등소평 시대의 유산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시작하겠다. 모든 미래에 대한 사회과학적인 예측이 그러한 것처럼 미래는 과거와 현재의 연장선에서 파악될 수 밖에 없다는 전제에서 등소평시대의 개혁․개방정책이 중국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분석하려고 하는 것이다.
먼저, 등소평 시대의 개혁․개방정책으로 말미암아 중국사회는 모택동시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변화하였고, 그런 사회경제적 변화는 중국의 정치사회의 변화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따라서 먼저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이 중국의 경제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켰으며, 어떤 과제와 문제점을 산출했는가를 분석함으로써 등소평 이후 전개될 중국정치의 구조적 성격과 한계를 알아보려고 한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앞장의 「중국적 사회주의의 미래는 무엇인가」라는 단락에서 중점적으로 살펴보았으므로, 뒤의 두가지 문제에 보다 주목하고자 한다.
둘째로,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은 중국사회의 구조적 변화와 더불어 중국의 정치사회도 과거와 다른 모습으로 변화시켰기 때문에 등소평시대에 등장한 정치엘리트들의 구성과 성격 변화, 그리고 정치적 균열구조의 변화를 살펴 봄으로써 등소평 이후 등장할 정치세력이나 정권유형을 알아보려고 한다.
셋째로, 이상의 등소평시대의 경제사회와 정치사회의 변화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몇가지 시나리오를 설정해 보고, 나름대로 각각의 시나리오가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개연성을 검토함으로써, 등소평 이후 중국에서의 체제변화, 정권변화, 정치세력이나 인물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 나름대로의 판단을 제시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작업은 여전히 여러 가지 한계와 문제를 안고 있다. 그것은 이런 사회과학적 예측이 기본적으로 안고 있는 한계와 문제일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저자 개인의 주관적 편견이나 역량 부족에서 비롯되는 것이 많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등소평이후 중국정치의 전망과 관련해서 필자가 제시하고 있는 시나리오는 앞으로 여러 전문가들에 의하여 많은 보완과 수정이 필요하다.
2. 등소평시대의 유산: 경제사회의 변화와 과제
지난 15, 6년간 등소평정권은 여러차례의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지속적으로 경제분야에서 개방화, 자율화, 시장화를 추진함으로써 전통적인 사회주의 경제체제에서 벗어나 괄목할 만한 경제발전을 이룩하는데 성공하였다. 등소평 시대의 최대의 업적은 모택동 시대에 침체되었던 중국경제를 짧은 시간안에 재편하여 세계에서 가장 활기있고 고도성장하는 경제로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이처럼 중국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중국경제의 규모도 엄청나게 확장되었다. 1978년부터 1989년 사이에 중국의 국민총생산량은 2배이상 증가되었고, 일부 서방세계의 추산에 따르면, 중국경제의 규모는 이미 1990년대 초에 미국이나 일본 다음으로 큰 경제대국이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이 중국경제는 총량적인 차원에서 그야말로 비약적으로 발전했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경제생활수준도 상당히 향상되었다. 개혁기간 동안 절대빈곤층은 그 이전과 비교하여 절반 이상 감소하였고, 국민소득도 대폭 증가하였다. 1978년 1인당 국민소득은 379원에서 1995년에는 4,757원으로 약 12.6배가 증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식적인 국민소득은 다른 개발도상국가들에 비하면 낮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발표되는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에 대한 통계만으로는 중국 국민들의 경제생활수준을 정확히 추론하기 힘들다. 이를테면, 공식적인 환율에 의하면, 1993년 1인당 국민소득은 370 달러에 불과하지만, 실제 구매력을 중심으로 평가하면, 1,600 달러수준에서 2,600 달러 수준이라고 추정될 만큼 중국 국민들의 실질소득은 향상되었다.
등소평시대의 개혁․개방정책은 중국경제의 비약적인 발전과 더불어 부강한 신중국의 건설을 실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지만, 동시에 중국의 경제와 사회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변모시켰다. 등소평시대에 개혁논자들은 이른바 ‘사회주의 초급단계론,’ ‘계획적 상품경제론,’ 그리고 ‘사회주의 시장경제론’등을 내걸고, 자본주의적인 시장경제와 개방적인 경제제도와 정책을 과감하게 도입, 실천하였다. 이와 같은 시장화, 자율화, 개방화를 지향하는 경제개혁과 대외개방정책으로 말미암아, 중국경제는 더 이상 사회주의 경제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변화하였다.
무엇보다도 개인과 개별 기업, 그리고 각 지방들의 경제적 자율권이 대폭적으로 확대되었고, 중국경제의 시장화가 상당한 정도로 진행되면서 국가의 통제영역도 축소되고 있으며, 사유경제를 비롯하여 다양한 소유형태의 경제단위들과 계층들이 등장하였다. 중국경제에서 비국가부분의 역할이 증대하면서 중국사회의 계층분화도 급속하게 촉진되고 있다. ‘신흥 기업가들이나 상인계층’ 과 ‘자영노동자’들과 같이 국가의 통제로부터 어느 정도 자율성을 확보한 ‘중국적 중산계층’의 등장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중국경제와 중국사회의 자율화와 다원화와 더불어 개방화도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특히, 경제영역에서 중국의 대외경제관계가 급속히 확대되면서, 중국경제의 대외무역 의존도도 증가하고 있다. 예를 들면, 중국의 총무역액이 1978년에는 206억 달러 수준에서 1991년에는 1,656억 달러 수준으로 증가함으로써 대만이나 한국을 앞지르고 세계 10대 교역국이 되었으며, 대외무역 의존도도 1978년에는 10% 수준이었지만, 1993년에 38%, 그리고 1994년에는 45%로 증가하였다. 이처럼 중국경제가 빠른 속도로 대외개방형 경제로 발전하면서 중국사회의 개방화와 자유화도 촉진되었다. 특히, 서방세계와의 관계가 확대되면서 ‘자본주의적 자유화 사상’이 지식인 사회를 중심으로 확산됨으로써 정부에 대하여 비판적인 세력들이 등장할 수 있는 사회적 토양과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등소평시대에 중국사회는 경제개혁과 개방에 힘입어 과거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근대화, 다원화되고 있으며, 미약하나마 ‘시민사회적 요소’들이 성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등소평시대의 유산이 모두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흔히 지적되고 있는 바와 같이 등소평의 경제발전 제일주의는 중국사회에 황금만능사조를 확산시켰으며, 심각한 관료들의 부정과 부패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공산당 지배의 정통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하였다. 또한 모택동시대에 강조되었던 평등주의와 공동체주의가 파괴되면서 사회적 갈등과 분열을 심화, 확산시켰다. 특히, 경제특구와 개방구를 중심으로 추진된 분권적 방식에 의한 경제발전정책은 지역간, 계층간의 불평등성과 갈등을 증폭시켰으며, 동시에 지방정부와 중앙정부간의 마찰과 대립을 증대시켰다.
경제적인 차원에서도 중국은 시장화와 가격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인플레의 위협에 시달리게 되었다. 가격구조의 자율화와 과열경기 등 복합적인 요인의 산물로 나타나는 인플레는 지난 89년 천안문사건을 촉발시킨 배경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천안문사건 이후 중국 지도부는 강력한 긴축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어느 정도 물가안정을 유지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금 인플레가 재연되는 경향이 나타남으로써 고도성장하는 중국경제와 중국사회의 장래에 암영을 던져주고 있다. 지난 1994년의 소비자물가지수는 전년대비 24.2% 증가하였으며, 최근에는 도시지역보다 농촌지역에서의 물가 상승율이 증대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그렇지 않아도 심각한 도시와 농촌간의 격차를 심화시키고 농촌사회의 동요를 초래하고 있다고 하겠다.
인플레와 더불어 경제개혁의 부산물로 나타나고 있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는 실업문제라고 하겠다. 1995년의 경우 공식적인 도시지역 실업율은 2.8%로 발표되었지만, 불완전고용인구를 포함하여 도시지역의 실질적인 실업율은 17%에 육박하고 있으며, 농촌지역에서는 1억 5천만명 이상의 유휴인구를 포함, 실질적 실업율이 35%이상으로 추산됨으로써 실업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하고 있다. 특히 농업부문의 부진과 실업문제는 대단히 심각한 사회불안 요인이 되고 있다. 1984년이후 농업생산 증가추세가 둔화되면서 농촌사회에서의 잉여노동력의 문제가 심각한 경제적, 사회적 문제를 낳고 있다. 현재 약 3억 7천만명의 농업인구 중에서 30%이상이 잉여노동력으로 분류되고 있는 농촌사회에서 농촌기업의 활성화를 통해서 흡수할 수 있는 역량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일자리를 찾아 매년 수천만명이 도시지역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는 이른바 ‘맹류(盲流)’ 현상이 발생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유민’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이처럼 경제개혁과 고도성장의 과정에서 파생되는 부작용, 특히 관료의 부패와 황금만능주의적 사조, 인플레와 실업문제, 그리고 지역간, 계층간 불평등성의 증대 등은 모두 등소평 이후의 중국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적 불안정의 요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현상적인 문제보다 등소평 이후 중국 지도부가 당면한 근본적인 과제와 도전은 경제개혁에 조응하는 정치개혁에 대한 요구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해 갈 것인가의 문제라고 하겠다. 특히, 중국사회의 현대화가 진행되면서 ‘시민사회적 요소’들이 증대하고 정치개혁에 대한 압력이 고조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경제개혁과 정치개혁간의 갈등은 등소평 이후 중국정치의 근본적인 불안요인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3. 등소평시대의 유산: 정치사회의 변화와 과제
등소평 정권이 등장한 이후 중국은 경제발전 제일주의에 입각한 대담한 개혁과 개방정책을 추진함과 동시에 정치제도와 권력구조의 대규모적인 개혁과 개편을 추진하였다. 등소평 정권이 추진한 정치제도과 권력구조의 개혁이 지향하였던 1차적인 목적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문화혁명 좌파세력을 제거하고, 과거 문화혁명 시대에 파괴되었던 당과 국가제도를 정비하고 합리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등소평의 정치개혁은 단순히 구시대의 제도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사회주의적 법제화와 민주화’를 실현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등소평은 “과거에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하여 충분히 선전하지 않았고 실행하지도 못했으며, 제도적으로도 많은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고 인정하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도록 계속 노력하는 것은 우리 당의 불변의 목표가 될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등소평은 1980년 8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당과 국가정치생활의 민주화, 경제관리의 민주화, 그리고 모든 사회생활의 민주화를 제도적으로 보증하기 위한 당과 국가의 제도개혁”을 제창하기도 하였다. 특히, 등소평은 당과 국가의 영도제도에서 나타나는 권력집중과 관료주의적 병폐를 방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당헌에 명기하고, 당과 정부의 기능적 관계를 명확히 하며, 각급 인민대표대회제도를 개선하여 공민의 권리를 충분히 향유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등소평의 정치개혁 구상은 급진적인 민주개혁을 주장하는 세력들과 기존의 사회주의적 정치체제의 고수를 고집하는 보수파들간의 타협과 조정을 거치는 과정에서 상당부분이 변형되었다. 결국 등소평 시대의 정치개혁은 기존의 당국가체제의 골격을 유지하면서 당과 국가기관의 제도화, 합리화하는 방향에서 추진되었다. 따라서 등소평시대에 과거에 폐지되었거나 작동되지 않았던 당과 국가기관, 그리고 사회단체들이 재건되었으며, 중국공산당의 영도원칙이 유지되는 가운데 당과 국가, 그리고 사회단체간의 관계가 재조정되면서 부분적이나마 사회주의 법제화와 민주화가 진행되었다. 다시 말하면, 당의 역할과 기능이 재정립되고, 국가부분의 자율성이 확대되었으며, 다양한 형태의 사회조직들의 역할과 기능이 증대되면서 당국가체제의 다양화가 진행되고 있다.
등소평시대의 정치제도의 개혁은 외견상 과거와 같은 당국가체제를 유지하면서도 단계적이고 지속적인 인사개편을 통해서 중국의 정치사회의 구성과 분위기를 크게 변화시켰다. 특히, 개혁정치 초기에 등소평은 계급투쟁론에 입각한 대중운동이나 정풍운동을 금지하고, ‘민주적 방식’에 의한 정풍운동이나 인사개편을 강조함으로써, 중국정치의 분위기를 일신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따라서 등소평 시대에 과거와 같은 공개적이고 투쟁적인 권력투쟁 양상은 억제되었고, 제도개편과정에서 비교적 자연스럽게 당과 국가기구의 주요 영도계층이 교체되었다.
등소평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세력은 1978년 11기 3중전회 이후 중앙과 지방의 각급 영도간부들에 대한 조직개편과 인사개편을 통하여 좌파세력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개혁정치 초기에는 좌파세력을 숙청하면서 과거 좌파에 의하여 숙청당했던 구관료와 간부들을 대거 복권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구간부의 평판과 복권은 좌파세력의 제거라는 정치적 목적에는 부합하는 것이었지만, 간부의 이른바 ‘노화문제(老化問題)’와 ‘우화문제(愚化問題)’의 해결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등소평은 좌파세력을 제거한 이후 간부의 세대교체와 간부 4화(혁명화(革命化), 연경화(年輕化), 지식화(知識化), 전업화(專業化))를 강조하면서 당과 국가기구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젊고 전문성이 있는 기술관료출신들을 대거 등장시킴으로써 정치사회의 질적 변화를 가져왔다. 아래의 <표-1>과 <표-2>는 등소평시대에 정치사회가 어떻게 얼마나 변화했는가를 가늠할 수 있게 해 준다.
우선 중국의 ‘최고 국가권력기관’인 전국인대표대회의 대의원 구성의 변화를 보여주는 <표-1>에서 알 수 있듯이, 본격적으로 정치체제의 개편이 진행되기 시작한 이후 소집된 제6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이후에도 중국공산당원의 비중은 여전히 높지만, 과거와 비교하면 노동자와 농민과 같은 이른바 대중단체의 대표들이나 해방군의 비중이 낮아진 반면에 지식인과 관료의 비중이 눈에 띄게 높아지고 있다.
구분 |
총 수 |
공산당원 |
민주당파및 무당파 |
노동자 |
농민 |
간부 |
해방군 |
지식인 |
소수민족 |
여성 | |||||||||
수 |
% |
수 |
% |
수 |
% |
수 |
% |
수 |
% |
수 |
% |
수 |
% |
수 |
% |
수 |
% | ||
제1기(1954.9) |
1,226 |
668 |
54.5 |
558 |
45.5 |
100 |
8.2 |
63 |
6.2 |
|
|
76 |
6.2 |
|
|
177 |
14.4 |
147 |
12.0 |
제2기(1959.4) |
1,226 |
708 |
57.8 |
518 |
42.3 |
69 |
5.6 |
67 |
5.5 |
|
|
60 |
4.9 |
|
|
180 |
14.7 |
150 |
12.2 |
제3기(1964.12) |
3,040 |
1,667 |
54.8 |
1,373 |
45.2 |
175 |
5.8 |
209 |
6.9 |
|
|
120 |
4.0 |
|
|
373 |
12.3 |
542 |
17.8 |
제4기(1975.1) |
2,885 |
2,217 |
76.3 |
238 |
8.3 |
813 |
28.7 |
662 |
30 |
322 |
11.2 |
486 |
13.4 |
346 |
12.0 |
270 |
9.4 |
653 |
22.6 |
제5기(1978.2) |
3,497 |
2,545 |
72.8 |
495 |
14.2 |
935 |
26.8 |
720 |
20.6 |
468 |
13.4 |
503 |
14.4 |
523 |
15.0 |
381 |
11.0 |
740 |
21.1 |
제6기(1983.6) |
2,978 |
1,861 |
62.5 |
543 |
18.2 |
443 |
14.9 |
348 |
11.7 |
636 |
21.4 |
267 |
9.0 |
701 |
23.5 |
404 |
13.6 |
632 |
21.1 |
제7기(1988.3) |
2,970 |
1,986 |
66.8 |
540 |
18.2 |
684* |
23%* |
733 |
24.7 |
267 |
9.0 |
697 |
23.4 |
445 |
15.0 |
634 |
21.3 | ||
제8기(1993.3) |
2,979 |
2,036 |
68.4 |
572 |
19.2 |
612* |
20.6%* |
841 |
28.3 |
267 |
8.9 |
649 |
21.8 |
439 |
14.8 |
626 |
21.0 |
* 노동자+농민의 수 및 비율
자료: 김정계, 㰡”중국의 권력구조와 파워엘리트㰡•, (평민사, 1994), p. 57 참조
이와 같은 경향은 아래의 <표-2>에서 보여주는 중국공산당의 중앙위원회 위원의 구성 변화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하고 중국공산당의 4화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 1982년의 중공당 12기 전당대회부터 1994년에 개최된 14기 전당대회까지 선출된 중앙위원회 위원들의 평균년령, 직업유형, 교육수준 등을 살펴보면, 첫째, 젊고 능력이 있는 중앙위원들이 대거 진출하여 중앙위원 전체 평균연령이 55, 6세로 낮아졌다. 둘째, 군부출신이나 대중조직을 대표하는 간부들의 비중이 낮아진 반면에 당정간부의 비중이 눈에 띠게 증가하였다. 셋째, 중앙위원들의 교육수준은 대부분 대졸 이상이고 거의 과반수가 전문가들이다.
다시 말해서 중국공산당은 등소평시대에 과거와는 상당히 다른 배경을 가진 젊고, 교육수준이 높으며, 전문적인 직종에 종사하는 간부들에 의하여 지배되는 집권당으로 탈바꿈했다. 이런 현상은 중국의 최고 권력엘리트들의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공산당 정치국위원의 구성 변화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아래의 <표-3>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중국은 현재 대체로 교육수준이 높고 군부의 경험은 비교적 적지만 당정부분에서 전문적인 경력을 갖춘 60대의 지도자들이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분 |
전체중앙위원 |
평균연령 |
직업유형(%) |
전문가 비율(%) |
교육수준(전문대졸이상, %) | |||
수 |
신임 |
군 |
당·정부 |
대중조직 | ||||
8기 |
170 |
102(60%) |
56.4 |
28.2 |
64.7 |
7.1 |
- |
40.2 |
9기 |
279 |
226(81%) |
59.0 |
44.1 |
27.6 |
28.3 |
1.8 |
23.0 |
10기 |
319 |
113(35%) |
62.0 |
30.4 |
29.8 |
39.8 |
2.1 |
27.6 |
11기 |
333 |
146(43%) |
64.6 |
30.9 |
40.5 |
28.5 |
2.7 |
25.7 |
12기 |
348 |
210(60%) |
62.0 |
21.5 |
66.7 |
11.8 |
17.0 |
55.4 |
13기 |
285 |
193(68%) |
55.2 |
12.6 |
77.5 |
9.8 |
20.0 |
73.3 |
14기 |
319 |
150(47%) |
56.3 |
22.2 |
77.8* |
44.5 |
83.7 |
* 자료:① Jürgen Domes, "China in 1977: Reversal of Verdicts," Asian Survey, Vol. 18, No. 1 (January 1978), p. 8
② Li Cheng and Lynn White, "The Thirteenth Central Committee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From Mobilizers to Managers," Asian Survey, 28: 4 (April 1988), p. 375
③ An-chia Wu, "Power and Policy Prientation in Mainland China Since the CCP's Fourteenth Congress", Issues & Studies, Vol 29. No. 1 (January 1993), p. 60
④ 小竹一彰, 「中國14全大會の政治的意義」, 㰡”國際問題㰡•, No. 394 (1993年 1月), p.12
⑤ 吳龍, 「14전대 이후 정국정치전망」, 㰡”중국연구㰡•, 1993년 창간호,(대륙연구소, 1993) pp. 170-171.
구 분 |
정치국위원수 |
유임위원 비율(%)* |
평균 연령 |
군경험 비율** |
교육수준(대졸이상, %) |
출생지(명) |
해외경험비율*** | |
도시 |
농촌 | |||||||
제7기(1945) |
15 |
53.8 |
47.3 |
73.3 |
- |
1 |
14 |
66.5 |
제8기(1959) |
26 |
52.9 |
57.2 |
84.6 |
52.2 |
1 |
25 |
61.5 |
제9기(1969) |
21 |
47.6 |
61.6 |
76.2 |
28.0 |
- |
21 |
33.3 |
제10기(1973) |
22 |
59.1 |
63.1 |
72.7 |
28.0 |
1 |
21 |
31.8 |
제11기(1977) |
26 |
61.5 |
64.7 |
82.8 |
23.0 |
3 |
26 |
31.0 |
제12기(1982) |
28 |
53.6 |
69.3 |
64.5 |
57.1 |
7 |
24 |
29.0 |
제13기(1987) |
17 |
22.2 |
64.4 |
47.1 |
66.6 |
4 |
13 |
23.5 |
제14기(1992) |
20 |
30.0 |
61.6 |
10.0 |
83.7 |
10 |
10 |
40.0 |
* 유임율은 前期의 정치국위원을 기준으로 한 것임. 따라서 중간의 중앙전체회의에서 선출된위원은 신임위원으로 하여 계산된 수치임.
** 정치국위원을 사령원, 정치위원, 사령·정위로 군근무를 한 위원으로 나눈값
*** 해외에서 1년이상 근무 또는 유학한 위원에 한함.
자료: ① 서진영 편, 㰡”현대중국과 북한40년㰡•,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1989) p. 48
② 김정계, 「현중국 최고 지도층 실체와 정책전망」, 㰡”중국연구㰡• 제2권 1호, (1994년 봄), p.170-178.
③ 송인영, 㰡”중국의 정치와 군㰡•, (한울, 1995), p. 137.
④ Lowell Dittmer, "The 12th Congress of the CCP," China Quarterly, No. 93 (March 1983), pp. 121-124.
⑤ Li Cheng and Lynn White, "The Thirteenth Central Committee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From Mobilizers to Managers," Asian Survey, Vol. 28, No. 4, (April 1988), p. 375.
이와 같이 등소평 개혁개방시기의 중국의 정치사회는 과거와는 다른 배경을 가진 엘리트 그룹들이 등장하여 중앙과 지방의 주요 당과 국가기구를 장악하였다. 대체로 이들은 젊고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가진 기술관료적인 성향을 가진 간부들이란 점에서 모택동시대의 혁명간부들과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등소평 시대의 정치사회는 모택동 시대와는 달리 이데올로기적인 요소에 의하여 정치적 갈등과 균열이 확대․심화되는 위험성은 감소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등소평 시대에도 정치 엘리트들간의 개혁과 개방의 폭과 속도문제를 둘러싸고 유동적인 정책논쟁이 전개되었고, 이와 더불어 복잡한 파벌정치와 권력투쟁이 계속되었다. 중국의 정치사회에서는 여전히 인적 관계를 중시하는 다양한 형태의 파벌들에 의한 인치가 지속되는 가운데 파벌들의 세력관계가 개혁과 개방정책에 대한 정책논쟁과정에서 끊임없이 재편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등소평의 개혁과 개방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전에는 이른바 화국봉을 중심으로 하는 범시파들과 등소평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연합세력간의 갈등이 중심적인 전선을 형성했다면, 화국봉과 범좌파세력이 실각한 이후에는 보수적인 개혁파와 급진적인 개혁파간의 갈등이 순환적으로 표출되면서 호요방, 조자양, 양상곤 등과 같은 주요 정치지도자들과 파벌들의 세력관계가 재편되었다. 이처럼 정치지도자들과 파벌들의 세력관계는 중국의 정치사회와 경제사회의 갈등과 균열구조를 직․간접적으로 반영하는 정책논쟁과정을 통하여 끊임없이 재편되는 복잡하고도 대단히 유동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
4. 등소평 이후 정치전망: 4가지 시나리오
앞에서 분석한 등소평시대의 경제사회와 정치사회의 변화를 근거로 등소평이후 중국의 정치전망에 대해 다양한 시나리오가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4가지 시나리오가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다.
(1) 강택민을 중심으로 하는 현재의 지도체제가 당분간 지속되면서 등소평이 제창한 경제발전 제일주의의 입장에서 개혁과 개방을 계속 추진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이른바 ‘신권위주의 정권’이 등장할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2) 등소평의 사망으로 초래된 권력의 공백상태에서 지도부 내부의 분열과 권력투쟁이 심화되면서 군부의 지지를 받는 보수파 정권이 등장하여, 대내적으로는 기존의 개혁․개방의 속도와 폭을 축소 조정하고, 기존의 사회주의체제의 기본틀을 유지하면서도 대외적으로는 중화주의적 민족주의를 강조함으로써 정권의 정통성을 유지하려고 할지도 모른다는 주장도 있다.
(3) 천안문사건 이후 잠복되었던 밑으로부터의 정치개혁 요구가 분출되면서 당내외의 급진개혁파를 중심으로 하는 개혁파 정권이 등장하여, 공산당 일당제도를 포기하는 과감한 정치개혁을 추진함으로써 중국도 소련이나 동구와 마찬가지로 체제변혁의 길로 가게 될 것이라는 시나리오도 있다.
(4) 중앙 지도부의 권력투쟁이 격화되고 중앙의 통제력이 급속히 약화되면서 개혁과 개방시대에 등장한 지방세력들간의 갈등과 마찰로 말미암아 중국이 천하대란의 정치적 혼란에 휩싸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와 같은 시나리오는 각기 나름대로의 타당한 근거가 있다. 현재의 강택민을 중심으로 하는 신권위주의 정권이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들은 모택동 이후의 승계문제와 등소평 이후의 승계문제의 차별성을 우선 강조한다. 즉, 모택동 시대의 중국지도부는 문화대혁명을 경험하면서 양극화되었으며, 등소평을 중심으로 하는 반좌파 연합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비하여, 등소평 시대에 중국 지도부는 비록 개혁과 개방의 폭과 속도에 관한 이른바 급진개혁파와 보수파간의 갈등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등소평의 ‘중국적 사회주의’에 합의를 하였으며, 동시에 권력 엘리트 내부에 조직화된 반대세력, 또는 대체세력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강택민은 강력한 카리스마적인 리더쉽은 없지만, 1989년 천안문사건 이후 등소평의 후원하에 구축한 세력기반을 중심으로 최소한 1997년 당대회 이후에도 얼마동안은 생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그러나 두번째의 시나리오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강택민의 권력기반의 취약성을 지적하고 있다. 강택민은 천안문사건으로 조자양을 중심으로 구상하던 등소평의 후계구도가 차질을 빚으면서 급진개혁파와 보수파를 모두 견제하기 위하여 등소평이 전격 기용한 인물이기 때문에 당과 국가기구 내부에 독자적인 권력기반이 없다는 약점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군부와 당관료를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등소평이 퇴장한 이후 강택민의 리더쉽은 군부와 기존 당관료들 사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세력들, 이를테면, 양상곤이나 이붕, 그리고 교석과 같은 인물들을 중심으로 반강택민 연합세력이 형성된다면, 의외로 쉽게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더구나 등소평 이후 중국이 국내외적으로 심각한 시련에 봉착하게 되고, 정치적 사회적 혼란이 가중된다면 군부와 당관료들을 중심으로 강력한 개발독재 정권이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번째의 시나리오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주로 소련이나 동구에서 이미 증명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도 체제변혁을 무한정 연기하거나 회피할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이들은 천안문사건 당시에 폭발적으로 분출하였던 밑으로부터의 변혁 요구는 중국이 개혁과 개방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면서 더욱 심화, 확대될 것이지만, 반대로 등소평과 같은 혁명 1세대가 사라진 이후 체제를 옹호할 수 있는 강력한 리더쉽이 등장할 수 없기 때문에, 중국은 결국 체제변혁의 길로 갈 것이라고 추론하고 있다.
끝으로 등소평이후 중국이 천하대란의 시대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들은 중국이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앙과 지방정부사이, 그리고 연해안지방과 내륙지방간, 그리고 도시와 농촌간의 갈등과 분열이 심화되었기 때문에, 등소평 이후 권력 엘리트 내부의 권력투쟁과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중국사회에서 또 다시 지방할거주의가 등장하여 수 많은 ‘독립왕국’간의 천하대란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상의 각각의 시나리오는 나름대로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시나리오를 시간적 요인을 고려함이 없이 동일한 수준에서 동등하게 취급해서는 곤란하다. 예를 들면, 등소평 이후 중국의 체제변혁이나 천하대란의 가능성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러하다는 것이지, 등소평의 사망과 더불어 가까운 장래에 중국사회나 중국의 사회주의체제가 붕괴되거나 해체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단기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중국의 체제변혁과 대혼란 가능성보다는 강택민을 중심으로 하는 현재의 후계체제가 지속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하겠다. 그 이유는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대안 부재론과 대혼란에 대한 권력 엘리트 내부의 공통적인 위기감, 그리고 중국사회의 균열구조에 대한 상이한 평가에 근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등소평 정권의 개혁․개방정책으로 중국사회의 다원화, 자율화, 개방화가 크게 증진되었으며, 당국가의 정통성과 통제력이 과거와 비교하여 크게 약화되면서 ‘밑으로부터의 민주화’ 요구도 확산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그러나 아직은 당국가체제를 근본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조직적 사회세력들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상당기간 경제발전 제일주의를 지향하는 ‘신권위주의 정권’이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개혁과 개방과정에서 지방정부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었고, 지방정부의 차원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 중앙정부와 마찰을 빚는 경우도 흔히 발생하고 있지만, 중국사회를 해체시킬 만큼 심각한 지방할거주의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중국의 지방주의는 소련에서와는 달리 민족문제와 중첩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개혁과 개방이 진행되면서 지방주의가 현재화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경제적인 통합화도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지방주의의 위협을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등소평 이후 중국사회에서 지방주의와 밑으로부터의 민주화 요구는 계속 기존의 당국가체제의 변화를 압박하겠지만, 단기간에 체제변혁이나 천하대란과 같은 돌발적인 사태를 초래할 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물론, 권력엘리트들 내부에서의 권력투쟁이 심화, 확산되어 지방주의와 체제변혁을 요구하는 사회세력을 소명(calling)하는 경우는 다르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을 경험한 현재의 권력엘리트들간에는 그와 같은 위험성에 대하여 공통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등소평이후의 권력 엘리트들 내부에서 전개되는 권력투쟁은 ‘찻잔속의 태풍’으로 끝날 개연성이 높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기존 권력 엘리트들 내부에서의 ‘힘의 재배분’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을 것이다.
5. 강택민의 신권위주의 정권과 중국
강택민체제는 1989년 천안문사건 이후 등소평의 후원에 힘입어 단계적으로 형성, 공고화되었다. 특히, 1992년 10월의 14차 전당대회에서 원로혁명세대가 거의 모든 부문에서 퇴진하면서 강택민을 비롯하여, 이붕, 교석 등과 같은 혁명 3세대를 주축으로 하는 현재의 지도체제 골격이 구축되었다. 더구나 최근 2,3년간 강택민을 핵심으로 하는 후계체제의 정비를 꾸준히 추진하여, 당과 정부, 그리고 군부에서 강택민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예를 들면, 14차 전당대회 이후 당과 정부의 핵심부처에 이른바 상해방이라고 알려진 강택민의 정치적 지지자들이 진출하였으며, 지방간부의 인사개편도 단행하고 있다.
또한 강택민은 군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다각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천안문사건 이후 군의 처우개선과 장비 현대화를 위한 국방예산을 대폭적으로 증액하면서, 동시에 대대적인 군인사 개편작업을 진행시켜 왔다. 지난 1993년말 이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군간부의 전문화와 세대교체를 내걸고, 고위군간부들을 대거 교체하면서 군부에 대한 강택민체제의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인사개편과 더불어 강택민은 최근에 군 내부에 기율강화에 대한 지시를 하달하고, 강택민을 핵심으로 하는 당중앙의 권위 유지를 강조하면서 강택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강택민체제는 농촌지역에서의 당조직 재건 및 강화운동, 유교 등 전통적인 중국문화에 대한 교육강화, 정신문명의 중요성 강조 등을 통하여 해이해 진 사회기강을 바로 잡으면서, 등소평 이후에 폭발할지도 모르는 사회적, 정치적 불안정 요인을 사전에 제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 전개되고 있는 반부패운동도 한편으로는 강택민의 정적을 제거한다는 정치적 목적도 있지만, 보다 넓은 의미에서는 고질적 관료부패에 강경 대응함으로써 등소평체제와의 차별성을 부각하고, 강택민체제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강택민의 홀로서기가 성공할 것인지, 또는 보수파들의 반격으로 강택민체제가 단명으로 끝나게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나 현재의 시점에서 강택민 체제를 대체할 만한 정치세력이 형성되어 있지 않으며, 또한 현재의 강택민체제가 붕괴되는 경우에 초래될지도 모르는 대혼란에 대한 위기감을 권력엘리트들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최소한 1997년에 개최될 15차 전당대회에서도 강택민체제가 유지되는 가운데 권력엘리트들 내부에서의 힘의 재배분을 둘러싼 암중모색을 계속하게 될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이처럼 등소평이후 등장하게 될 강택민체제는 기본적으로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의 연장선에서 부국강병책을 모색하려고 할 것이다. 즉, 중국의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달성하기 위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경제개혁과 개방을 추진하면서도, 정치적 안정과 사회기강을 위협할 수 있는 정치개혁의 요구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할 것이며, 공산당의 지배를 포함하여 기존의 당국가체제를 견지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에서 맑시즘이나 모택동주의를 고집하기 보다는 과거 보다 더 실용주의적인 경향을 보여 줄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에 대한 신심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점점 더 중화민족주의와 부강한 신중국의 건설을 강조할 것이다. 따라서 등소평 이후의 중국은 대외정책에서 과거보다 더 ‘자주독립노선’을 견지하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소평 이후의 중국은 상당기간 경제발전에 치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미국이나 서방세계, 그리고 동아시아국가들과의 협력관계를 훼손하면서까지 중국의 국가이익을 확장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추론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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