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의 고대사

지식창고지기 2009. 5. 15. 10:46

중국의 고대사

 

  

1. 원시사회(B·C 170만년 ~ B·C 21세기)

고고자료에 의하면, 대략 100만년 이전에 중국에는 이미 원시인류가 있었다. 운남성(雲南省) 원모(元謀)에서 발견된 원인 화석 "원모인(元謀人)"과 섬서성(陝西省) 남전(藍田)에서 발견된 원인 화석 "남전인(藍田人)"은 중국 최초의 원시인류로 알려져 있다. 대략 4 5십만년 이전에 북경 주구점(周口店) 일대에서 생활한 원인인 "북경원인(北京猿人)"은 이미 직립 보행할 수 있었으며, 간단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고 불을 이용함으로써 사람의 기본적인 특징을 구비하고 있었다.

그 후 중국의 원시인류는 모계 씨족사회와 부계 씨족사회의 발전 단계를 거쳤다. 6 7천년 이전에 황하유역과 장강유역에 출현한 "앙소문화(
仰韶文化)"는 모계 씨족사회를 가장 대표하는 것이다. 1952년 섬서(陝西) 서안(西安) 반파촌(半坡村)에서 발견된 유적은바로 당시의 모계 씨족 촌락이다. 5천년 이전에 황하유역에 출현한 용산문화(龍山文化)'는 부계 씨족공동체를 가장 대표하는 것이다. 이 두 역사적 단계에 인류는 이미 각종 마제석기를 사용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도기(陶器)를 발명하기도 하였으며, 이때에 이미 사냥과 고기잡이 외에 농업과 목축업도 생겨났다. 후에 생산력과 사회분업 물물교환의 발전으로 사유재산과 계급분화 계급대립이 출현하면서 원시사회는 해체되고 노예사회가 탄생하였다.

원시사회 말기에 황하유역 일대에 많은 부락이 분포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서 황제(
黃帝)를 우두머리로 하는 부락이 비교적 강대하였으며 문화도 비교적 진보하였다. 황제(黃帝)는 후에 중화민족의 시조로 일컬어졌다.

2.
, , 서주시대 : 노예사회시기(B·C 21세기 B·C 771)


중국의 노예사회는 기원전 21세기부터 기원전 771년까지 하(
) () 서주(西周)의 세 왕조를 거쳤다. 기원전 약 21세기에 건립된 하()왕조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노예제 국가이며, ()로부터 시작되어 걸()이 죽을 때까지 500년간 노예사회를 확립하였다. 기원전 16세기에 하()왕조를 멸망시키고 건립된 상()왕조는 600년간 노예제 사회를 더욱 발전시켰다. 이 시기에 노예주였던 귀족계급은 노예와 평민의 반항을 진압하기 위하여 군대와 관료체제 잔혹한 형벌제도를 만들었다. 당시에는 청동의 제련과 제조 기술이 상당 수준 발달하였으며 아울러 비교적 정형화된 문자도 발생하였다.

기원전 약 11세기에 상(
)왕조는 멸망하고 주()왕조가 건립되었다. 서주(西周) 250년간 노예주계급의 통치질서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봉건제도(封建制度)"를 시행하였다. ()왕조보다 더욱 완비된 국가기구를 창설한 것 외에도 엄격한 종법(宗法) 예악(禮樂) 형벌(刑罰)제도를 만들어 모든 사회와 생산력이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다. 이 시기에 중국은 이미 하나의 완비된 광대한 규모의 노예제 국가를 완성하여 중국의 노예사회는 절정에 달했다.

3.
춘추전국시대 : 노예사회와 봉건사회의 과도시기(B·C 770 ~ BC 221)


기원전 770년에 서주(
西周)가 멸망하고 주()왕조는 낙읍(洛邑: 지금의 洛陽)으로 천도함으로써 동주(東周)시기가 시작되었다. 동주는 다시 "춘추시대(春秋時代)" "전국(戰國時代)"의 두 시기로 나누어진다. 동주시기에는 제철기술이 신속히 발전하여 철제 농기구와 소를 이용하여 밭을 가는 방법이 사용되고 경지면적이 확대되었다. 또한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서 낡은 노예제도하의 생산관계가 새로운 생산력을 속박하게 되자, 이에 지배계급을 반대하는 노예와 평민들의 투쟁이 격렬해졌으며, 그 결과 신흥 지주계급이 점차 기존의 지배계급의 지위를 대신하게 됨으로써 중국에는 새로운 역사 단계, 즉 봉건사회로 진입하는 과도기가 시작되었다.

춘추시대로부터 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변혁이 격렬하게 진행되었는데, 가장 본질적인 변혁은 노예제에서 봉건제로의 변화이다. 사서(
史書)의 기록에 의하면, 춘추시대에는 140여개의 제후국이 있었으나 장기간의 전쟁을 통하여 서로 통합되어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단지 제() () () () () () () 7개 국가만 남았으며, 이들 국가의 내부에서는 여전히 격렬한 전쟁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처럼 사회의 극렬한 변혁은 의식형태 영역의 내부로 반영되어 각양각색의 학파를 출현시켜 "백가쟁명(百家爭鳴)"의 활발한 국면이 형성되었다. 당시의 주요 학파로는 공자(孔子)와 맹자(孟子)를 대표로 하는 유가학파(儒家學派), 노자(老子)와 장자(莊子)를 대표로 하는 도가학파(道家學派), 상앙( )과 한비자(韓非子)를 대표로 하는 법가학파(法家學派), 묵자(墨子)를 대표로 하는 묵가학파(墨家學派) 등이 있었다. 이들 학파의 사상은 매우 심오하고 풍부하여 고대 중국 전통사상의 원류가 되었으며, 당시와 후대의 중국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유가사상의 영향이 가장 깊고도 컸다.

4.
, 한 시대 : 봉건체제의 확립 시기(B·C 221 ~ A·D 220)


중국은 전국시대부터 이미 봉건사회에 진입하였지만, 중국에서 진정한 중앙집권을 수립한 통일된 봉건국가는 진(
)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의 건립으로부터 동한(東漢) 말기에 이르기까지 약 450년간은 중국의 봉건사회가 정립된 시기이다.

전국 후기 "칠국쟁웅(
七國爭雄)" 중에서 진()나라가 가장 강대하였다. 기원전 221년에 진시황(秦始皇)은 나머지 여섯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중국 역사상 최초의 중앙집권 국가이자 통일 봉건국가인 진()왕조를 건립하였다. 진시황은 통일을 강화하고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중앙집권적 관리체제(郡縣制)" "문자통일(書同文)" "도로통일(車同軌)"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였으며, 화폐와 도량형을 통일하고 토지의 개인 사유제도를 확립하였는데, 이는 중국의 통일과 봉건사회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진시황과 진2(秦二世)는 매우 사치스럽고 잔폭하여 백성들의 생사를 돌보지 않았으며, 궁전을 건축하고 왕릉을 만들며 장성을 축조하는 등 잔혹한 착취와 압박을 자행하였다. 그 결과 단지 15년만에 통치를 마감하고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이끄는 농민대봉기에 의해 붕괴되었다.

기원전 206년에 유방(
劉邦)이라는 한 지방 관리는 진()말 농민봉기의 발전을 이용하여 장안(長安: 지금의 西安)에서 서한(西漢)을 건립하였다. 서한은 200년간의 통치를 거치면서 통일된 중앙집권적 봉건국가를 공고히 하였다. 중국 역사상 서한 전기는 번영과 강성을 누린 시기이다. 정치상으로는 전국적으로 고도의 집중과 통일을 실현하였으며, 경제상으로는 대규모의 수리공사를 일으켜 농업기술과 수공업 상업이 크게 발전하여 많은 중요한 도시가 출현하였다. 군사상으로는 북방의 흉노를 물리쳐서 서역으로 통하는 무역로를 개척하였으며, 영토를 확장하고 국제무역을 촉진시켰다. 과학문화상으로는 많은 발명가와 사상가 문학가 역사학가들이 출현하였다.

서한 후기에 이르러 조정의 정치가 날로 부패해짐에 따라 사회적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녹림군(
綠林軍) 적미군(赤眉軍) 등의 농민봉기가 발생하였다. 농민봉기 과정 중에 호족 출신의 유수(劉秀)가 득세하여 왕망(王莽)이 서한 정권을 찬탈하고 세운 신()왕조를 붕괴시켰다. 따라서 유수(劉秀)는 서기 25년에 낙양(洛陽)에서 황제( 光武帝)라 칭하고 한()왕조를 회복함으로써 동한(東漢)시기를 열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동한시기는 서기 220년에까지 지속되었다.

동한왕조가 통치한 195년간 중국의 봉건사회는 계속적으로 발전하였지만 여러 가지 모순도 더욱 심화되었다. 동한 후기에는 중앙집권 세력이 약화되고 군웅할거 세력이 강대해졌으며, 군웅들 사이에 격렬한 권력쟁탈이 일어난 동시에 황건군(
黃巾軍)의 농민대봉기가 발발하였다. 후에 군웅들은 황건군(黃巾軍)의 봉기를 무력적으로 진압하였지만 군벌의 대혼전이 일어났다. 여러 군벌들의 대혼전을 거쳐 최후에 위() () () 세 나라가 정립하는 국면이 형성되어 삼국시대가 시작되었다.

5.
삼국, , 당 시대 : 봉건사회의 발전과 흥성시기(A·D 220 907)


(
) () () 삼국의 정립에서 진()의 통일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남북조(南北朝)의 대치로부터 수() ()의 통일에 이르기까지, 700년간(220 907) 중국은 기본적으로 반은 분열되고 반은 통일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분열에서 통일로 향하는 상황은 중국의 봉건사회가 진() () 이래의 공고화에서 발전과 흥성으로 향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위 촉 오 삼국이 정립한 국면은 220년부터 280년까지 60년간 지속되었다가 최후에 사마(
司馬)씨에 의해 통일되었다. 이리하여 진()왕조가 건립되었으며 도읍을 낙양(洛陽)에 정하였다. 이로부터 동한 말기 이래로 성행했던 군벌들의 혼전 국면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서진(西晉)의 통치집단은 극도로 부패하여 내부적으로는 권력쟁탈이 매우 첨예하게 일어났다. 따라서 불과 50년만에 바로 "팔왕의 난(八王之亂)"이 발발하여 이후 장장 300년간에 걸쳐 전란과 분열이 새롭게 시작됨으로써 황하유역, 특히 중원지구(中原地區: 지금의 河南 山西 陝西 일대)는 극심한 재난을 겪었다.

316
년에 서진(
西晉)이 멸망하고, 317년에 사마예(司馬睿)가 건업(建業: 지금의 南京)에서 황제라 칭하며 동진(東晉)왕조를 건립하였다. 당시에 중국 북부는 이미 16개의 작은 국가들로 분열되어 있었으며 5개의 소수민족 세력이 매우 강대하였다. 420년에 동진(東晉)은 송()에 의해 대체되었으며 이로부터 581년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남방은 송() () () ()의 네 왕조를 거쳤다. 그러나 북방의 16국은 이후 위()에 의해 통일된 후 다시 북위(北魏)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의 다섯 정권이 연이어 출현하였다. 남북으로 나누어진 이러한 국면을 역사상에서는 남북조(南北朝)시기라 부른다.

이 시기에 북방의 각 민족은 투쟁 속에서도 융합을 추구하여 북방 지구의 경제는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남방은 사회가 비교적 안정된다가 전란시에 황하유역으로 이주한 많은 이민들이 선진 생산기술을 가지고 갔기 때문에 장강유역의 경제도 신속하게 발전할 수 있었다. 경제적 발전 외에도 위진남북조(
魏晋南北朝)시기에는 중국의 문학 철학 과학기술 종교 예술(특히 불교예술) 등에서도 모두 커다란 성취를 이룩하였다.

581
년 북주(
北周)의 사대부 양견(楊堅)이 주()를 멸망시키고 수()왕조를 건립하였다. () 문제(文帝)는 검소한 정치를 단행한 황제이다. 그는 중국의 남북통일을 새롭게 실현시키고 서진(西晉) 이래 약 300년간 지속된 동란과 분열의 국면을 종결시켰으며, 통일을 공고히 하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통하여 전국을 안정시킴으로써 사회는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수() 문제(文帝)의 뒤를 계승한 수() 양제(煬帝) 양광(楊廣)은 오히려 중국 역사상 유명한 난봉꾼이면서 폭군이다. 그는 황음무도한 인물로 사치와 낭비가 심했으며, 백성들을 잔혹하게 억압하고 착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 차례의 대외 침략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결국 생활고에 시달린 백성들은 대규모의 봉기를 일으키게 되었고, ()왕조는 불과 37년만에 종말을 고하고 618년에 멸망하였다.

(
)왕조가 멸망한 후에 그것을 대신하여 일어난 것은 당()왕조이다. 중국 역사상 당()왕조는 한()왕조 이후 가장 번영하고 강대한 왕조였으며 정치 경제 문화가 모두 매우 발달하였다. 이것은 중국 봉건사회의 발전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왕조는 618년부터 907년까지 290년간 지속되었으며, 그것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전기 중기 후기의 세 시기로 구분된다.

전기 120여년은 당(
)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 등 몇몇 황제들이 매우 많은 공적을 남겼다. 정치는 통일되고 사회는 안정되었으며 경제는 번영하고 국제교류는 활발하여 오랫동안 강성한 상태를 유지하였다. 따라서 이를 성당(盛唐)시기라 일컫는다.

중당(
中唐)시기 약 80년은 번진(藩鎭)의 반란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아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후기 80여년은 조정이 분열되고 정치가 부패하여 농민봉기가 일어나고 번진(
藩鎭)이 할거하였으며, 서기 907년에 당()왕조는 결국 멸망하였다.

6.
오대, , 원 시대 : 봉건사회의 지속적인 발전시기(A·D 907 1368)


907
년부터 오대십국(
五代十國)의 분열 국면이 거의 60연간 지속되었으며, 960년에 중국은 다시 통일을 이룩하면서 송()왕조가 건립되었다. 이후로 중국은 비록 계층간의 갈등과 민족적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계속하여 왕조가 교체되긴 하였지만 이전과 같은 그러한 대분열의 혼란 국면은 발생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많은 왕조들의 흥망이 반복되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 중국은 이미 확고한 통일의 기초를 다짐으로써 더 이상 동요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대십국(五代十國)으로부터 송() () ()서하(西夏) 시기의 한족(漢族)과 기타 민족의 융합을 거쳐 원()왕조에 의한 통일이 실현되기까지는 약 460년이 걸렸다. 이 기간에 중국의 봉건사회는 비록 당()왕조와 같은 번영과 부강을 누리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농업 수공업 상업 과학 문화 국제무역 등의 방면에서 모두 새로운 성과를 이룩하였다. 이 시기에 중국의 경제 중심은 이미 황하유역에서 장강유역으로 바뀌어 있었으며, 많은 외국상인들과 여행자들이 중국으로 들어왔다. 이탈리아(意大利) 베니스(威尼斯) 상인 마르코폴로(馬可波羅)는 일찍이 중국의 광대한 지역을 유람하였는데, 그의 여행기 속에는 당시 중국의 상공업이 번영한 모습이 구체적이고도 생동감있게 묘사되어 있다.

(
)·원() 시기에는 민족간의 갈등이 심각하게 대립했던 시기이다. ()왕조 시기에 중국 북부와 서부의 소수민족은 매우 강대해져 요() () 서하(西夏) 정권이 연속적으로 건립되면서 송()왕조를 끊임없이 침범하였다. 서기 1127년에 여진족의 금()나라가 송()의 수도 동경(東京: 지금의 開封)을 공격하여 송나라의 황제를 사로잡게 됨으로써 북송(北宋)은 멸망하였다. 같은 해에 송나라의 황족 조구(趙構)는 정권을 다시 세워 도읍을 임안(臨安: 지금의 杭州)에 정하였는데, 이를 역사에서는 남송(南宋)이라 칭한다.

1279
년 북방에서 금나라를 계승하여 건립된 원나라는 군사력이 강대하였다. 그리하여 징기스칸(
成吉思汗)의 손자 쿠빌라이(忽必烈)가 군대를 거느리고 남송을 멸망시킴으로써 중국에는 처음으로 소수민족에 의해 전국이 통치되는 왕조, 즉 원()왕조가 건립되었다. 원왕조는 중국의 영토가 확장된 시대였고, 각 민족이 더욱더 융합되었으며 아시아 유럽과의 관계도 강화되었다. 그러나 몽고족의 민족차별정책이 심화되고 이에 대한 한족의 반감과 저항이 가속화되어 원왕조의 통치는 100년을 채우지 못하고 1368년에 주원장(朱元璋)이 이끄는 농민봉기에 의해 붕괴되면서 명()왕조로 대체되었다.

7.
, 청 시대 : 봉건사회의 쇠락시기(A·D 1368 1840)


1368
년 주원장(
朱元璋)이 명()왕조를 건립한 후에 중국은 또다시 한인(漢人)의 통치를 회복하여 276년간 지속되다가 명대 말기에 이자성(李自成)이 이끄는 농민봉기가 발발하였다. 1644년에 명왕조가 농민봉기에 의해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을 무렵, 날로 강성해진 동북의 소수민족인 만주족이 기회를 틈타 산해관(山海關)으로부터 북경을 공격하여 명왕조를 붕괴시키고 청()왕조를 건립하였다. 청왕조는 중국 역사상 마지막 봉건왕조가 되었으며, 1911년 손문(孫文)을 중심으로 한 혁명파의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의해 완전히 붕괴되었다.

명대(
明代) 초기부터 청대(淸代) 중기까지 약 470년간 중국은 줄곧 통일된 다민족 국가였다. 청왕조의 국경은 서로는 파미르고원, 북으로는 시베리아(西伯利亞), 동북으로는 외흥안령(外興安嶺)을 따라서 대해(大海)에 이르고, 동으로는 태평양의 대만과 거기에 소속된 섬들에까지 이르며, 남으로는 남사군도(南沙群島), 서남으로는 티베트(西藏) 운남(雲南)에 이르렀는데, 청왕조의 면적은지금보다도 더 광대하였다. 이 기간 동안 중국은 광대한 영토를 가진 통일된 다민족 국가이면서도 각 민족의 관계는 더욱 긴밀하였으며, 사회 경제 문화적인 면에서도 계속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또한 명대의 농업과 수공업은 현격하게 진보하여 명대 말기에 이미 많은 방직업과 제철업 등의 수공업 공장이 있었다. 이들의 생산규모는 매우 크고 기술분업도 세분화되어 있었으며 고용노동을 실행하였으니, 이는 당시 중국에 이미 자본주의의 싹이 출현하였음을 의미한다. 청대에 접어든 이후에 중국의 자본주의 요소는 계속적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명 청 시기에 중국의 봉건사회는 이미 후기에 진입하여 쇠락의 길로 향하고 있었다
.

봉건사회의 말기에 이르자 지배층은 갈수록 부패해지고 계층간의 갈등도 날로 첨예해졌다. 명대 말기와 청대 말기의 농민봉기는 규모나 발생 빈도 및 사회 각 계층이 참여하는 범위면에서 모두 과거 어떤 왕조보다도 훨씬 더 심각했다. 이러한 농민봉기의 새로운 형세는 중국의 봉건제도가 이미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중국의 명대 후기와 청대, 즉 서기 17세기에서 19세기 사이에 서방에서는 이미 자본주의가 신속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중국은 비록 우수한 고대의 과학기술 문화를 지니고 있었으나, 기존의 봉건통치 역량이 너무 완고하고 강대했기 때문에 봉건통치가 이미 몰락과 쇠망을 향해 가속화되고 있으면서도 정치·경제·사상 등의 방면에서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봉건통치에 반대하는 신흥세력의 성장과 도전에 대해서 가혹한 진압을 하였다. 여기에 서방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과 압박으로 인하여 중국의 자본주의는 결코 신속하게 발전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청대 중기부터 중국은 차츰차츰 반식민지(
半植民地) 반봉건(半封建) 사회로 변하여 마침내는 강대한 봉건제국에서 침략당하고 모욕을 받는 빈곤하고 낙후된 국가로 전락해 갔다

'역사의 숨결 > 역사(중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의 역사 총정리(간략사)   (0) 2009.05.18
중국의 근대사  (0) 2009.05.15
중국의 간추린 역사 (4)   (0) 2009.05.15
중국의 간추린 역사 (3)   (0) 2009.05.15
중국의 간추린 역사 (2)   (0) 2009.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