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백년 동북이민의 역사
청나라말기의 산해관
글: 이원강(李遠江) : <<국가역사>> 기자
초민개간(招民墾荒)
1644년, 청왕조는 중원을 차지했다. 당시의 100만 만주족중 90여만이 산해관을 넘어 중원으로 들어왔다. 이때 동북(東北, 만주-滿州- 혹은 관동-關東- 혹은 관외-關外-라고도 부름. 현재의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을 가리킴)지방은 "옥토가 천리에 펼쳐 있고, 땅은 있으나 사람은 없는(沃野千里, 有土無人)"의 상황이었다. 당시 중원지역도 장기간의 전쟁으로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여, 토지는 부족하지 않았고, 기후조건이 열악한 동북지방은 중원의 농민들에게 그다지 매력있는 땅은 아니었다.
청나라조정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근거지인 동북지방을 방어하는 것은 필요했다. 그리하여 군대를 주둔시키는데, 군대를 주둔시키려면 반드시 군량이 조달되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1653년, 순치제는 사상유례없는 우대정책을 내놓고 관내농민들을 동북으로 이주하게 한다. 우대정책의 내용은 동북으로 이민가는 농민에게는 1인당 1달에 1말의 양식을 지급할 뿐아니라, 일정한 토지를 개간할 때마다 일정한 양식을 추가로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뿐아니라, 다른 사람을 데려가는 경우에는 관직을 부여했는데, 50명이상을 데려가면 문관직으로는 현주부(縣主簿), 무관직으로는 백총(百總)을 수여했고, 60명이상인 경우에는 문관은 주동(州同), 주판(州判), 무관은 천총(千總)을 수여하고, 100명이 되면 문관은 지현(知縣), 무관은 수비(守備)의 직위를 내렸다.
이같은 우대조치에 힘입어, 하북,산동의 가난한 농민들이 줄지어 산해관(山海關, 만리장성의 가장 동쪽 관문, 이 관문의 안쪽을 관내, 바깥쪽을 관외라고 한다. 관외는 관동이라고도 부른다)을 넘어 동북으로 이주했다. 15년이라는 짧은 기간내에 봉천(奉天, 현재의 심양), 금주(錦州)의 두 부(府)에만 인정(人丁, 성인남자)이 1만6천여명에 달하게 된다. 이는 순치제때에 비하여 3배나 증가한 숫자이다.
아쉽게도 이러한 관청주도의 관동이민붐은 금방 중단된다. 10여년의 개간을 거쳐, 요동지구가 어느 정도 개발되고, 관외에서 생산되는 식량만으로도 군대주둔에 필요한 군량이 마련될 수 있게 되었다. 관외이민이 증가하면서 만주족의 이익이 침해되는 것을 우려하여, 강희7년(1668년), 청나라조정은 <<요동초민개간조례>>를 폐지하고, 한족의 관외이민을 금지시킨다.
이때부터, 관외이민은 금지된다. 산동,하북의 가난한 농민들은 어쩔 수 없이 "불법이주(闖)"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관동지역으로 불법이주해가는 것을 중국에서는 "틈관동(闖關東)"이라고 부른다. "틈(闖)"은 '맹렬하게 쳐들어가는 것'을 의미하고, 이자성의 별호가 틈왕(闖王)이다.
봉쇄(封禁)
화북각지에서 출발하여, 산해관을 거쳐 동북의 심장부로 들어가는 것은 원래의 순탄한 '이민의 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 길은 유혈과 비장함이 묻어있는 생존의 길로 바뀌었다. 엄격한 봉쇄정책으로 관동으로 이주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관문이 닫혀있게 된다.
초기에 산해관을 빠져나간 사람들은 동북각지에서 아주 환영받았다. 각지를 지키는 만주족병사들은 대부분 땅을 한족농민에게 빌려주었다. 한족농민들의 노력하에, 관외의 많은 토지들이 개간되었다. 성경(심양)지구는 특히 관내와 거리도 가깝고, 기후조건도 괜찮은 편이어서, 경작지가 1천만무를 넘어서게 된다. 이리하여 이곳은 관외의 곡창이 된다.
중원지구를 보면,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함에 따라 인구/토지문제가 첨예하게 드러났다. 여기에 자연재해까지 겹쳤다. 동북지방에 이주한 사람들의 생활상황이 장삿군들이나 서신을 통하여 관내에 알려지게 된다. 그리하여, 중원지역에서 고생하던 농민들은 동북으로 이주하고 싶어하게 된다.
1715년, 산동 등주부 문루촌에 살던 주덕신(周德新), 주덕순(周德純) 형제는 이런 배경하에서, 관동으로의 길을 떠난다. 그들은 그래도 행운아였다. 비록 청나라초기의 초민개간정책의 우대조치를 받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여순의 하가촌에 도착하여 넓은 땅을 개간할 수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시기 조정의 '틈관동'에 대한 입장은 장려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쫓아내지는 않는 방임상태였다. 수십년간의 노력을 들여 경작하고 후손을 낳으면서 주씨집안은 하가촌에 자리를 잡았을 뿐아니라, 날로 세를 불려갔다.
동북의 넓은 토지가 점차 개간되면서, 관내유민은 각종 경로를 통하여 관외로 빠져나갔다. 이런 상황하에서 1740년, 건륭제는 전면적인 봉금령(封禁令)을 내린다. 관내백성이 관외로 이주하는 것을 금할 뿐아니라, 이미 관외로 이민간 사람들도 현지에서 입적하도록 조치했다. 원하지 않으면 다시 관내로 되돌아와야 했다. 이때부터 산해관은 상인들이 무역을 목적으로 통과할 수 있을 뿐이다. 상인들은 반드시 원적 혹은 무역지에서 발급한 인표가 있어야 통과할 수 있게 된다.
산해관을 닫아버리자, 관청의 금지조치와 요동지구는 이미 사람이 넘쳐나는 것으로 인하여, 유민들은 육로로 산해관을 우회하여 육로로 장성을 넘어 금주, 광녕, 개원을 지나서 봉천성(요녕성)의 경계를 넘어 바로 길림성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유민들이 북상하는 것이 새로운 추세가 된다.
대량의 유민들은 할 수 없이 해로를 이용하기도 한다. 현재의 여순, 금주, 대련의 해안에 상륙한 후, 다시 육로로 비옥한 토지를 찾아 북상하게 된다.
건륭제가 내린 전면적인 봉쇄령의 결과는 "틈관동"의 목적지가 요녕에서 점차 길림까지 확대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요동반도에 자리잡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관부의 조사를 피해 잠시 머문 후에 직접 북상하여 길림으로 갔다.
유민이 많아지면서, 초기에 대련,여순에 도착하여 정착한 주민들까지 북으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1776년, 주씨형제들의 손자대의 후손인 주성문(周成文)은 자기의 처인 곡씨(曲氏)를 데리고, 주씨형제가 이미 61년간 정착했던 하가촌을 떠나 북쪽의 또다른 마을로 이주하고, 거기서 자식을 낳고 정착한다. 그리고 주씨성이 이 마을의 대성이 되면서 마을 이름도 아예 "주가위자"가 된다.
흘러들어오는 사람들
건륭이 전면적으로 봉쇄한지 52년이 지난 후 11년간 봉쇄가 풀리는 시기가 온다.
1792년, 화북지방의 가뭄으로, 많은 이재민들이 산해관에 모여든다. 직예총독 경성은 주청을 올려 산해관 부도통 덕복이 '개별심사'를 거쳐 내보내준다. 물밀듯이 몰려들어오는 이재민들을 보고 덕복은 너무 엄격하게 조사하면 변란이 날 것을 우려하여 조정에 주청을 올려, '직업없는 백성들이 먹고살길을 찾아가는 경우'는 허가해주도록 하였고, 그 경우 '관적만 묻고, 등기한 후에 보내주는 것'으로 하였다. 건륭제는 덕복의 주청을 허가하고, 신속히 영을 내려 산해관에 있는 이재민들을 모조리 관외로 보내주도록 한다. 그리고, 규정에 묶여 처리를 늦게 한 경성을 질책하였다.
이후, 건륭59년(1794년), 가경2년(1797년), 가경5년(1800년)에 연속 홍수가 있고, 가경6년(1801년)에 황하의 둑이 무너져, 건륭57년에 취했던 완화조치는 11년간 지속되게 된다.
가경8년(1803년), 중원의 재해가 조금 완화되면서, 가경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동북에 대한 봉금령을 다시 내린다. 그리고 한족이 상업이나 고용을 핑계로 체류하며 귀향하지 않는 것을 방지하기 우히ㅏ여, 가겨에는 각 관문에서 엄격히 조사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강대한 인구압력으로 화북농민의 '틈관동'은 왕성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1661년부터 1753년까지 92년간 산동의 1인당 평균경작면적은 10무여에서 7무로 줄어들었고, 1766년부터 1887년까지 1인당 점유경작면적은 2,3무 수순을 배회했다. 사람은 많고 땅은 적어지게 되어, 풍년이 들어도 먹는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었다. 흉년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리하여, 가경시기에 관외로 나가서 개간하는 것을 금지시켰고, 갈수록 강경한 조치를 취하기는 하였지만, 사실상 가경제때 '틈관동'은 금지하는 자는 금지하지만, 나갈 사람은 다 나갔다. 통계에 의하면, 길림지역에 가경16년(1811년)의 민인(民人)은 33,025호(戶), 307,781구(口)였다. 건륭제때에 비하여 1.5배수준이었다. 흑룡강일대는 가경13년(1808년)에 민인26,207호, 136,228구였는데, 건륭제때에 비하여 3.7배 수준이었다. 가경제가 엄격히 금지시켰지만, 이는 '틈관동'의 조류를 막지 못했을 뿐아니라, 더욱 머나먼 흑룡강까지 새로운 이민목적지가 되어버렸다.
대추세
가경제의 금지령은 그의 아들인 도광제에 의하여 구멍이 생기고, 함풍연간에는 대규모의 이민붐이 일어난다.
당시 청나라는 위기가 사방에 잠복되어 있었다. 천재, 인재에 내우외환이 겹쳤다. 1833년에 기록된 산동지구의 황하홍수로 수많은 사람이 집을 잃었다. 1855년, 황하는 난고동와상에서 둑이 무너진다. 일시간에 하남, 하북, 산동에 이재민이 넘쳐났다. 이와 동시에 태평천국의 난과 염군(捻軍)의 난이 중국땅의 절반을 휩쓸게 된다. 난민들은 줄줄이 동북으로 도망친다. 화불단행이라고 북방의 러시아는 계속 침입하여, 중국의 영토를 점거하고, 동북삼성으로 밀려들어왔다. 사실상의 식민지로 삼아서 동북지방을 차지하려는 의도였다.
내우외환에 금지령을 해제하는 것은 필연이 되었다. 함풍10년(1860년), 흑룡강장군 특보흠이 여러번 상소를 올려 '해금'을 요구한다. 청나라정부는 '이민실변(移民實邊, 백성을 이주시켜 변방을 튼튼히 한다)'의 정책으로 변경하게 된다. 널리 한족농민을 모아서 관외로 나가 개간하게 한다
1878년, 청나라정부는 한족부녀가 관외로 이주하는 것을 금지하던 것을 해제한다. 관내한족이 가족을 이끌고 동북으로 이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더 많은 유민들은 장사나 노동뿐아니라 정착하기 시작하게 된다.
이민전(移民戰)
1920, 1930년대에 '틈관동'의 조류는 다시 최고조에 이른다.
중화민국 건국후, 중국은 군벌혼전시대로 접어든다. 중원지구는 참혹한 전장터로 바뀌고, 여러번의 재해로 백성들이 유리걸식하게 된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눈을 동북으로 돌린다.
동북삼성은 봉천계의 두령인 장작림이 장악하고 있었다. 심계가 깊은 일본도 동북에 이민계획을 세운다. 그들의 생각은, 대량의 이민을 통하여, 일본민족이 동북의 주체민족이 되도록 하고, 이리하여 만주를 동화시켜, 통치한다는 것이었다.
장작림의 통치는 일본의 지지를 받기는 했으나, 장작림은 일본의 통제를 받고싶어하지는 않았다. 일본의 이민계획에 대항하기 위하여, 그는 왕영강의 건의를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조직적으로 산동, 하북, 심지어 하남, 안휘의 농민을 매년300만명씩 동북으로 대량이주시킨다. 이 수량은 러시아, 일본과 조선의 이민자수를 훨씬 초과하는 것이었다.
장작림은 관내이민의 수량이 얼마인지에 대한 정확한 수치개념은 없었다. 그러나, 장작림, 장학량부자가 동북지방을 통치할 때, 공업광업상업을 크게 발전시켰고, 동북의 경제상황은 관내의 평균수준보다 훨씬 높았다. 객관적으로도 이주민이 옮겨올만한 조건이 잘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금방, "9.18사변"이 발생한다. 사변이후 일본은 동북에 대하하여 일본인과 조선인을 대량으로 이주시키는 대륙식민주의정책을 시행한다. 그리고 화북이민을 겨냥한 <<외국노동자단속규칙>>을 제정하여, 한족의 이민을 엄격히 제한한다. 관내의 한족들도 동북으로 가서 망국노가 되기를 원하지는 않게 된다. 이미 이민갔던 상인들도 가족을 이끌고 관내로 역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련에서 나오는 선박은 모두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노동력침탈
일본인의 식민정책에 따라, 이 시기의 관동이민은 변화를 나타내게 된다. 사변이전에는 이민자들이 북만주로 가는 경우가 많았고,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했다. 그러나, 사변이후에는 이민의 방향이 바뀌어 주로 남만주의 도시나 공업지구로 향했고, 노동이민이 많았다. 절반이상이 광산이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었다.
1937년, "7.7사변"이 폭발한 후, 만주국정부는 동북의 노동력이 부족하다는 점때문에 산업개발5개년계획을 시행하면서, 대량의 노동력이 필요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민의 문을 다시 연다. 그러나, 이때 관내민중은 더 이상 관동으로 이민가려고 하지 않게 되어, 만주국정부는 노동력약취조치를 취하게 된다.
통계에 의하면, 1936년부터 1945년까지 10년간, 일본이 화북에서 유인, 약취, 매매한 노동자의 총수가 704.7만명에 이른다. 따라간 가족은 223.7만에 이른다. 그중 96%는 동북으로 옮겨졌다.
산동은 여전히 일본이 '노동력을 차출하는데' 가장 피해를 많이 본 지역이다.
민국시기는 산동에서 동북으로 이민가는 두번째 붐이 1939년에서 1943년사이에 일어난다. 전란이나 가뭄이외에 일본이 산동으로 가서 노동자를 유인해간 것도 큰 이유이다. 1940년경, 산동 혜민현의 '틈관동'한 사람은 대부분이 유인약취된 노동자였는데, 임구현으 인구는 1939년의 38만에서 1942년에는 20.7만명으로 감소하게 된다.
노동자의 유인약취를 위하여 모집인들은 동북의 광경을 아름답게 묘사했다. 나중에 철광산의 광공으로 가게 된 유헌명 형제는 1940년당시에 청도에서 유랑하고 있었다. 부친과 두 여동생은 모두 죽었고, 형제 둘은 의탁할 곳이 없었다. 노동자모집하는 사람들은 '일도 힘들지 않고' '흰쌀로 만든 면을 먹고, 서양집에서 살며, 하루에 2위안을 벌 수 있다. 오래 하고 싶으면 오래해도 되고, 원하지 않으면 6개월간 돈을 벌어 되돌아오면 되다'고 꼬셨다. 형제 둘은 별 방법이 없어서 신청했다: "첫 며칠은 괜찮았습니다. 좋은 곡식을 제공했습니다. 그런데 대련에 도착하니 와와두였고, 대련에서 탄 기차는 콩나물시루였는데, 사람과 짐을 따로 넣고는 문을 잠궈버렸습니다."
하북사람인 이향영의 기억에 따르면 광경이 더욱 처참했다. 1935년, 그는 속아서 길림으로 가서 도로건설에 참여한다. 노동자들은 '반드시 소처럼 머리를 숙이고 일해야 했고, 조금이라고 머리를 들면, 바로 몽둥이가 날아왔다" 먹는 것은 '곰팡이가 핀 빵'이었다. 머무는 것은 '임시로 만든 천막이었다' 임금은 '한번도 만져본 적이 없다' 어떤 사람은 목숨을 잃기도 했고, 일본인들은 긴 채찍을 수시로 꺼내서 때리곤 했는데, 어떤 노동자는 그대로 맞아죽었다.
1936년, 일본정부는 중국의 동북이민정책을 국책으로 확정한다. 계획시간은 1956년까지였다. 이 국책의 핵심내용은 20년내에 중국의 동북이민을 100만호로 하는데, 약 500만명이었다. 일본정부의 생각은 20년후, 100만호, 500만의 일본이민은 자손을 낳아서 1000만명이 될 수 있고, 이렇게 되면 동북 총인구의 1/5이상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 목표를 실현하면, 만주국을 '일본대화민족'이 주체가 되어 일본의 질서로 통치할 수 있게 된다.
이들 이민온 일본인들은 기본적으로 황무지를 개간하지는 않았다. 중국인의 토지를 빼앗았다. 중국농민은 일부는 소작민으로 전락하고, 일부는 더욱 골짜기 산으로 개간하러 들어갔다. 1941년, 일본의 '개척단'이 방정현의 가장 비옥한 토지인 이한통향으로 왔다. 그들은 원래 살고 있던 사람들의 집을 모조리 불태워버린 후에, 그들을 쫓아내 버렸다. 아직도 한기가 가시지 않은 동북의 봄날에 현지에 살던 2000여명을 서쪽의 산으로 쫓겨나게 되고, 거주할 곳이 없어 절반정도가 얼어죽게 된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틈관동'한 이민자들의 비참한 처지는 개선되지 않았다.
북대황(北大荒)
역사는 희극적인 요소가 충만하다.
'틈관동'과 비슷하게 비극적인 용어는 이외에도 '하남양(下南洋, 남양은 동남아를 가리킴)', '주서구(走西口, 산서에서 몽고로 나가는 것)'가 있다. 이들 단어는 중원지구에 살던 백성들이 살길을 찾아서 분투한 역사를 말해준다.
대규모의 인구이동은 하나는 생계를 위하여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부의 정책적인 이민이다. 1653년부터 수백년동안, 적극적으로 모집하였고, 피동적으로 흘러들어갔건, 이 '틈관동'의 열기는 각종 유형무형의 장애를 무너뜨렸다. 이는 유민들의 생존에 대한 의지와 희망을 반영한 것이고, 이것이 이민붐의 가장 완강한 생명력이다. 정부정책에 따라 왕왕 이민은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서 전란중에 성립한 신중국(중화인민공화국)은 한편으로는 인구가 급격히 팽창하고, 인구/토지모순이 첨예하게 되었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재난이 빈번하여 중원지역의 토지는 더 이상 인구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새로운 관동으로의 이민붐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는 정부의 호소와 격려하게 시작된다.
이것이 바로 북대황개발이다.
사람은 없고, 눈과 얼음이 쌓인 북대황에는 비옥한 흑토가 숨어 있다. 정부의 호소하에 관내인민들은 관외로 가서 '황무지를 개간'하기 시작한다.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1956년, 산동성에서만 10여만의 청년들이 흑룡강으로 향했다.
이해의 흑룡강성 임전현에는 돌연 산동 제남의 역성지구에서 황무지개간을 위하여 몰려온 산동인들로 가득 차게 된다. 그히 4월에서 5월까지, 이 현은 '산동성에서 온 13,836명의 청년지원자들을 받아들여, 5개구, 55개 촌에 나누어 배치한다. 당시의 군대편제에 따라, 이들 촌은 모두 모연대 모대대로 불리웠다.
2년후, 산동성 비성 문양공사의 왕석우 일가 5식구도 기차를 타고 관외이민의 길에 오른다. 꽉막힌 차를 타고 그들은 흑룡강의 안강에 도착한다. 오래지 않아 왕석우일가는 다시 마차를 타고 임전현의 촌으로 간다. 이때 이곳에는 이미 낯익은 산동사투리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왕석우일가는 금방 적응하고 안착한다.
이러한 '틈관동'은 이미 비극적이고 슬픈 색채를 많이 털어버렸다. 심지어 영광으로 생각하기까지 하였다.
1978년, 북대황이민의 개간운동이 끝난다. 동북의 땅에는 이미 더이상 미개간지가 없었다. 동북은 중국의 공업중심과 '북대창(北大倉)'이 되어 있었다. 300여년간 이어진 대규모 관동이민붐은 잠시 마침표를 찍게 된다.
관동의 길
금지령이 있든 없든, 관동의 길은 고생길이다.
수백년동안, 얼마나 많은 '틈관동'하는 백성들이 마차를 끌고 혹은 등짐을 메고 앞에는 아이를 안고 뒤에는 짐을 끌면서 일가족의 희망을 안고 한걸음 한걸음 산넘고 물건너 갔을 것인가.
대련은 해로로 '틈관동'하는 관문이었다. 바다를 건너오다보면 바닷속에 수장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주씨형제처럼 잘 도착하는 사람은 열에 한둘밖에 되지 않았다.
올해 76세인 유문충은 산동성 봉래시 소호도촌이 조상의 고향이다. 1893년 가을, 메뚜기재해로 수확을 거두지 못하자, 유문충의 조상은 일가를 이끌고 작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섰다. 배를 타고 나선지 얼마되지 않아, 큰 바람이 불었고, 작은 배는 바다위에서 이틀간을 표류한다. 운좋게 여순의 해안에 닿으려고 할 때, 다시 파도가 일어서 일가 8명중에서 6명이 삽시간에 파도에 휩쓸려 갔다. 겨우 유문충의 부친과 고모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현지의 마음씨좋은 사람이 돌보아주어서 살아갈 수 있었다.
이통신의 일가는 운이 좋았다. 20세기가 시작하면서, 산동에서 대련, 영구, 여순으로 정기여객선이 개통되었다. 이통신일가는 1939년에 대련으로 갈 때, 더 이상 유문충이나 주씨형제들처럼 작은 배를 타지 않아도 되었다. '대련환'이라는 일본여객선을 타고 갔다. 돈이 없어서 이씨가족은 삼등칸에 타고 갔다 삼등칸은 배멀미하는 사람이 토해놓은 구토물과 대소변이 섞여 역한 냄개가 났고, 공공변소같았다. 그 냄새를 이통신은 평생 잊을 수가 없다.
바다를 통하여 대련에 닿은 산동인들은 일부분만이 대련에 남고, 대부분은 다시 더 북쪽으로 살만한 곳을 찾아나선다. 19세기부터 민국시대까지, 동북에는 수십개의 철로가 건설된다. 동북삼성에 퍼진 철로는 관내인민들의 '틈관동'의 우선적인 선택이었다. 통계에 의하면, 동국에는 모두 20여개의 철로가 건설되어 있었다. 철로연변은 유민들이 가장 원하는 정착지였다. 그리하여 관동이민은 철로를 따라 퍼져갔다. 민국시기에 300여만이 흑룡강으로 이주하였는데, 철로연로와 송화강연안에 수천개의 촌락이 형성되고 400여만향의 황무지가 개간된다. 이리하여 송넌평원, 삼강평원, 송화강유역과 목단강유역이 주요한 양창이 된다.
일부는 기차를 타고 산해관을 지나 동북으로 갔다. 70%이상의 '틈관동'하는 사람들은 돈을 아끼기 위하여 먼저 해로로 대련으로 간 후 다시 기차를 타고 북으로 갔다.
대련에서 북으로 가는 철로는 사통팔달이었다. 이는 경제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아주 편리했다. 1930년대에 일본인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틈관동'하는 한족들은 1인당 15일원(日元)의 돈을 평균 지니고 왔다. 이 마저도 고리대금업자에 빌린 것이거나 땅과 집을 팔아서 얻거나, 친척친구들이 도와준 것이었다. 이 시기의 물가를 보면 배를 타고 대련까지 오는데 가장 싼 삼등칸이 3.4일원이었다. 대련에서 봉천까지의 기차표는 6.16일원이었고, 길림까지는 13.2일원이었다. 일반적으로 그들이 가진 돈은 기차료를 사면 동이 나게 되어 있었다.
이들을 운송하기 위하여 한가지 언급할 것은 '만철(滿鐵)'에서는 노동자들을 화물열차로 이송했다. 북에서 남으로 올 때는 농산물을 싣고 오고, 돌아갈 때는 비어서 가야 하는 화물열차에 이들 노동자를 실어서 옮김으로써 큰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이다.
1928년에 일본인인 소택무는 이런 광경을 목격했다고 적었다: 이씨성의 과부를 한 명 보았는데, 그녀는 식구 7명을 데리고 산동에서 오다가 여비를 강도에게 털렸다. 그리하여 구걸하면서 청도까지 왔는데, 마침 이웃사람이 도와주어서 배표를 사서 대련까지 왔다. 어느 작은 점포에 머물렀는데, 점포주인이 9위안을 빌려주어 사람을 보내여 여순에서 광산에서 일하는 장남을 찾아갔다.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점포주인은 8살된 딸을 팔라고 재촉했다.
오로지 살려는 욕망으로 그들은 불나방처럼 전도가 험악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물을 머금고 계속 북으로 갔다. 가장 북단이 흑하에 가서야 정착하게 된 사람들도 있다.
산동출신으로 대련에 사는 고만당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비행기를 타고 대련에서 흑하까지 2,3시간이면 갑니다. 그러나 100년전에 우리의 조상은 걸어서 1년 혹은 2년 심지어 여러해가 지나서 비로소 이 흑토지에 도착했습니다. 비행기에서 관동의 대지를 내려다보니, 얼마나 많은 망령들이 이곳에 잠들어 있을지...."
뿌리찾기
300여년에 이르는 '틈관동'의 이민붐에서, 매번 이민자들은 동북으로 몰려갔다. 다만, 그들이 홀로 '틈관동'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왕왕 가족 혹은 친구들까지 모아서 집단으로 이동했다. 그들이 완전히 생소한 곳으로 가는 경우도 드물고, 왕왕 먼저 모처에 정착한 친척친구를 찾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새이민자가 구이민자가 되고, 구이민자는 다시 새이민자를 불러들였다. 신구이민자들 사이에 충돌은 적었고, 서로 도우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동북각지에는 동향모임과 같은 '과화(鍋?)'조직이 있었다. 이는 동향사람들끼리 같이 밥을 해먹는 곳을 말한다. 가난한 고향사람이 오면, '과화'는 먹을 곳을 제공해주었고, 일자리를 찾도록 도와주었다. 만일 누군가가 돈을 벌면, '과화'에 돈을 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들 중원에서 온 이민자들은 향토와 종족에 대하여 동질감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의 뿌리인 것이다.
뿌리는 이민혈액에 흘러내리는 유전인자이다. 그들이 동북에서 이미 수십년을 살았건, 수대를 내려왔던, 이민후대가 동북에서 태어나고 자라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뿌리가 관내에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 족보 한 부, 지명 하나, 배분표는 바로 그들이 뿌리를 찾는 열쇠가 된다.
조적이 산동 제녕이고, 현재 북경에 거주하는 허란무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하나 전해준다: "큰할아버지는 어려서 '틈관동'하였는데, 죽기전에 유언을 남겨서, 낙엽귀근으로 고향의 땅에 묻어달라고 했다. 효성이 지극한 백부는 큰할아버지의 유체를 막하에서 고향까지 등에 지고 갔다" 주씨형제의 제12대 적손인 주순관에게 있어서도 1989년의 그 일을 잊을 수 없다. 그 해 그는 겨우겨우 산동의 동족의 손에서 족보를 하나 찾아낸다. 이미 누렇게 된 족보에 쓰여 있는 한줄은 그를 감격하게 하였다: "강희54년, 주덕순, 주덕신 형제. 발해를 넘어 북상하여, 여순 쌍도 하가촌에 거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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