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 최고 지도자 해부] 中 5세대 최고 지도자 시진핑(習近平) Part Ⅰ

지식창고지기 2009. 8. 1. 16:52

신경진의 서핑 차이나
출처-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xiaokang&folder=14&list_id=10641979

1999년5월7일 유고슬라비아의 주재 중국 대사관에 미국 전투기 오폭 사건이 발생했다. 전 세계가 놀랐다. 중국내에서도 동요가 감지됐다. 정치투쟁이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장쩌민, 주룽지를 위시한 제3세대 지도자들이 추진한 대외개방 확대정책이 큰 타격을 받았다. 국민감정이 불타올랐다. 학생들의 항의 운동이 시작됐다. 군도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이때 해결사로 등장한 인물이 당시 국가부주석이었던 후진타오(胡錦濤)였다. 그는 중앙정치국상무위원회를 대표해 TV카메라 앞에 앉았다. 그는 차분한 어조로 미국을 비난하고 대중의 냉정한 대응을 호소했다. 그의 주도로 사건은 평화적으로 수습됐다. 황태자 후진타오는 그렇게 실권을 장악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당시 장쩌민의 자리에는 후진타오가, 후진타오의 자리에 시진핑이 있다. 후진타오는 돌발사건에 강한 정치형 지도자다. 시진핑은 준비·계획에 강한 경제형 리더다. 그는 2012년 중국공산당 18차 당대회를 통해 중국 최고 권력을 넘겨받아 그 뒤 10년 동안 거대 중국을 이끌어 나갈 것이다. 시진핑의 모든 것을 4회에 걸쳐 살펴본다. 
 

               ▶지난 2월21일 중남미 방문 도중 몰타를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부주석

◇고급간부이자 반당(反黨)분자 가문에서 자라다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習仲勛, 1913~2002, 산시성 푸핑현 출신. 1928년 중국공산당 입당. 산간(陝甘)변구지방지도자를 거쳐 대장정에 참가. 항일전쟁승리 후 중공중앙서북국서기 겸 산간링천쑤이(陝甘寧晉綏)연방군정위, 서북인민해방군야전군부정치위원 등 역임. 건국후에는 중앙인민정부위원, 인민혁명군사위원회 위원, 중공중앙선전부부장, 국무원부총리 등을 역임했지만 문화대혁명으로 실각. 개혁개방 후에는 광둥(廣東)성 제1서기, 광둥성 성장, 광저우(廣州)군구제1정치위원 등을 거쳐 중앙정치국위원, 서기처서기, 전국인민대표대회부위원장을 맡음)은 중국공산당 혁명 원로다. 류즈단(劉志丹), 가오강(高崗)과 함께 산베이(陝北)혁명근거지를 창설한 주역이다. 제1야전군정치위원(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으로 중공의 당·정·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인물이다.

시진핑은 1953년6월에 태어났다. 원적은 산시(陝西)성 푸핑(富平)현이다. 그가 태어날 당시 부친은 공산당 중앙선전부장과 정무원(현재의 국무원, 건국부터 1954년9월 전인대제도가 생길 때까지 정무원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문교위원회 부주임을 겸임하고 있어 베이징에 머물고 있었다. 이 때문에 아이 이름을 진핑(近平, 당시까지 베이징은 베이핑北平이라고 불렸다)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렇듯 시진핑은 고급간부의 자제인 ‘태자당’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시진핑의 고급간부자제로서의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1962년9월 시진핑이 막 소학교에 입학하던 무렵 부친이 소설 ‘류즈단(劉志丹)’ 사건(1962년 ‘공인일보’에 연재된 소설로 1920년대 혁명가 류즈단의 동생 류징판의 처 리젠퉁(李建彤)이 지음. 반당소설로 몰려 6만여명이 연루됐고 6000여명이 숨졌다. 문화대혁명의 발단이 된 사건)에 휩쓸렸다. ‘소설을 이용해 당에 반대’했다며 ‘시·자·류 반당집단’(시중쉰·자퉈푸賈拓夫·류징판劉景范)의 두목으로 몰려 같은 해 10월 국무원부총리 등 당 안팎의 모든 직위에서 해임당하고 구류돼 조사를 받았다. 1964년 심사를 마친 후 허난(河南)성 뤄양(洛陽)에 있는 제분소 부공장장에 임명됐지만 직위는 허울에 불구했고 실제로 일반노동자와 똑같이 근로하며 사상개조를 받았다.

1967년1월 ‘문혁’이 고조되면서 시중쉰은 일찍이 서북국(西北局)에서 활동한 경력이 꼬투리가 되어 조반파의 비판투쟁을 받았다. 시중쉰은 시안(西安)에서 열린 비판투쟁을 도저히 견디지 못해 마오쩌둥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마오쩌둥이 그 편지를 받은 67년 2월은 고참간부와 문혁파가 격돌한 중남해 ‘화이런탕(懷仁堂)사건(‘2월 역류’라고도 불리며 문혁 초기 첫 당내 공개투쟁)’이 발생하던 때였다. 마오쩌둥이 천이(陳毅)와 탄전린(譚震林) 등 고참간부를 제압하면서 동시에 당내투쟁의 격화를 완화하기 위해 고참간부의 일부를 회유하려고 생각할 때였다.

이를 위해 마오쩌둥은 시중쉰의 편지에 “중쉰 동지는 훌륭한 동지다. 당을 위해 커다란 일을 했다. 그에게 무슨 문제가 있나? 그 소설은 출판되지도 않았던 것 아닌가. 내 한마디로 문제가 커지기도 하지만, 내가 그 때 말한 것은 일반론이었다”라는 답장을 보냈다. 이 마오쩌둥의 말이 나오자 저우언라이는 직접 사람을 보내 시중쉰을 베이징으로 불렀다. 그를 베이징 웨이쉬(衛戌)구에 명목상으론 감금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를 보호했다.

1969년1월 가정환경이 바뀌고 초급중학을 끝낸 15살의 시진핑은 ‘지식청년은 농촌으로 들어가고, 변방으로 내려가 가난한 중농의 재교육을 받으라’는 마오쩌둥의 게시에 따라 농촌으로 내려가야 했다. 가족과 의논하고 시중쉰의 동의를 얻어 시진핑은 학교의 배분에 따른 집단이주를 따르지 않고 자기 스스로 하방 갈 곳을 찾았다. 시중쉰과 인연이 있는 산시(陝西)성 옌촨(延川)현 원안이(文安驛)공사 양자허(梁家河)대대(大隊)로 결정한 뒤 시진핑은 산시성으로 내려갔다.

◇농촌으로 하방돼 애물단지에서 대대 당지부서기로
시진핑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농촌에 하방 됐을 당시 나는 아직 젊었다. 당시 사회 분위기 때문에 하방을 피할 수 없었다. 장래를 생각할 수 없었을 뿐더러, 주위 사람들과 잘 사귀지 못했다. 보통 하방되 내려가면 매일같이 산으로 나가 작업을 해야 했다. 나는 제멋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나쁜 인상을 줬다. 수개월 후 나는 베이징으로 돌아와 다시 ‘학습반’에 들어갔다. 반년 후 석방돼 나는 농촌으로 다시 내려갈 지 여부를 고민하던 중 당시 외가 쪽의 숙부(그도 고참 간부였다)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돌아가라. 대중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내일은 없다’는 그의 말을 따랐다.”
시진핑이 인민공사로 다시 돌아갈 때는 기분을 바꿨다. 그곳의 일반 사원들과 같이 일하는 생활에 익숙해졌다. 게다가 대중과의 관계도 의식적으로 개선했다.
시진핑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내 숙소는 점차 그 지방의 중심인 마을 센터로 변해갔다. 매일 밤이 되면 노인과 젊은이들이 차례차례 찾아왔다. 그들이 모이면 내가 그들을 위해 고금동서의 여러 문제에 대한 풀이를 해줬다. 문제가 생기면 대대의 당지부 서기도 점차 나와 상담을 시작했다. 그는 “젊은 사람이 지식도 많고, 우리들 보다 세상사를 더 잘 안다”고 말했다. 이렇게 나는 마을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사람이 됐다.”
노동작업 면에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주눅들지 않게 됐다. 시진핑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보통 작업도 할 수 있었다. 100킬로그램의 소맥을 짊어지고 10킬로미터의 산길을 걸어도 지치지 않았다. 힘도 셌다. 그 마을의 젊은이들에게 지지 않았다.”
‘당원’ 자격에도 변화가 생겼다. 1972년8월 시진핑은 적극분자로 발탁돼 펑자핑(馮家坪)공사 자오자허(趙家河)대대에서 노선교육을 하는 입장이 됐다.
시진핑은 발탁될 기회를 잡자 입당신청서를 제출했다. 그 전에 시진핑은 이미 10여 차례 입당신청서를 제출했지만 부친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결국 인가 받지 못했었다. 이번에는 공사에서 입당신청서를 중공 옌촨현위원회에 제출했다. 현위서기는 ‘이 마을은 씨족간 모순이 복잡해 현지 사람들이 일을 처리하기 어렵다. 그가 마을 활동을 주재하는 편이 좋다’며 게다가 ‘부친의 결론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그 때문에 아들의 입당문제를 취소할 수는 없다’고 의견을 표명했다. 현위서기가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시진핑은 1973년 입당을 인정받았다. 그 해 겨울에는 시진핑은 량자허(梁家河)대대 당지부서기로 발탁됐다.
이 입당에 대해서 시진핑은 비교적 정직하게 말하고 있다.
“그곳은 부친이 옛날에 활동한 근거지였다. 활동 당시 19살이었던 아버지는 ‘산간(陝甘)변 소비에트정부(산시성과 간쑤성에 걸쳐 중공지배하의 혁명근거지정부)주석’이었다. 그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나를 지켜주고 도와줬다. 또한 내 자신도 끝까지 노력했기에 입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진핑은 대대당지부서기가 된 이후 다음과 같은 업적을 남겼다.
첫째, 마을에 세 개의 소형 댐을 건설했다. 게다가 대형 우물을 파 용수로를 만들었다. 수리건설로 식량증산을 실현했다.
둘째, 인민공사 사원들과 공동으로 메탄가스 발생장치를 설치해 연료문제를 해결했다. 당시 산시성정부 관련 부서는 량자허촌에서 메탄 가스 이용현장촉진회를 개최했다.
시진핑은 산시성에서 7년간 농민으로 가난하고 어렵게 노동자로서 시절을 보냈다. 그의 부인 펑리위안(彭麗媛)에 따르면 시진핑은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7년간 농촌에 있던 당시 돼지고기를 먹지 못했다. 한번은 생산대에서 100그램 정도의 돼지고기를 배급했다. 그 때는 요리할 때까지 기다리지도 못하고 생고기를 그대로 한 입에 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시운을 타고 칭화대학 입학을 허가 받다
시진핑은 ‘당시, 마을 간부를 맡고 있었지만 항상 기회만 있으면 학교에서 조금 더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곳에선 공부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1975년 여름 중국 대학은 아직 추천 받은 노동자와 농민, 병사만 입학하던 시절이었다. 칭화대학으로부터 2명의 입학 쿼터가 옌안(延安)지구에 배분됐다. 그 중 한 명이 옌촨현에 할당됐다. 시진핑은 현 교육국 지도자로부터 그 소식을 들었다. 그는 즉시 칭화대학 입학을 신청했다.
시진핑에게 시운이 찾아온 것이다.
현에서는 현교육국 지도자가 소개한 추천장을 받았고, 중앙에서는 칭화대학당위지도자 류빙(劉冰)이 시진핑의 입학결정의 판단하게 됐다. 류핑은 덩샤오핑 계열에 속하는 고참간부였다. 당시는 덩샤오핑이 복권돼 권한을 잡고 교육부문 정돈을 추진하고 있었다. 게다가 ‘문혁파’인 츠쥔(遲群, 77, 마오쩌둥의 호위부대출신으로 문혁을 추진. 칭화대학혁명위원회 주임. 문혁후기에 쎼쩡이(謝靜宜)와 함께 저우언라이·덩샤오핑을 비판. 사인방 몰락 후 체포되어 징역 18년 형 판결 받음)과 쎼쩡이(謝靜宜, 73, 문혁 초기 칭화대학혁명위원회 부주임을 문혁 후기에 베이징시혁명위원회 부주임을 역임. 사인방 몰락 후 체포돼 당적 박탈 처분을 당함)은 마침 칭화대학을 떠났기 때문에 류빙이 ‘입학시켜도 좋다’고 말한 것이다.
그 무렵,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은 뤄양(洛陽)의 내화자재공장의 부공장장을 맡고 있었다. 뤄양은 당시 중앙정치국위원 지덩쿠이(紀登奎, 1923~1988, 1973년8월부터 1980년2월까지 중앙정치국위원. 1971년3월부터 1978년10월까지 중국공산당 허난성 당서기 겸임)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는 시중쉰을 잘 보살펴줬고, 생활면으로 여러 배려를 해줬다.. 이 지덩쿠이의 원조를 받은 뤄양내화자재공장은 ‘시중쉰 동지의 문제는 인민내부의 모순으로 자제의 입학·취직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라는 증명서를 써주었다.
시진핑은 천리(天利)와 지리(地利), 인간관계의 운을 타고 칭화대학 화학학부에 입학 추천을 받았다. 그는 1975년 두 상자의 책보따리와 함께 베이징으로 상경했다.
- 시진핑  Part Ⅰ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