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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家의 돌연변이 영창악기

지식창고지기 2009. 8. 5. 00:07

현대家의 돌연변이 영창악기①

  • 글쓴이: 열두달
  • 조회수 : 184
  • 08.07.05 19:31
http://cafe.daum.net/bu35/NwMM/102

“박병재 부회장이 살려내십시오”

87년 노사분규 이후 경영난…몰락 직전 ‘백기사’ 현대산업개발이 인수
현대家의 돌연변이 영창악기①

▶영창악기 박병재 대표이사 부회장은 2006년 5월, 영창 인수식을 마치고 취재진의 요청으로 영창피아노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영창악기는 우리나라 최초의 악기 회사다. 한때 국내 피아노 시장의 70%를 장악했던 이 회사는 그러나 노사분규에 휩쓸려 좌초 직전에 몰린다. 그때 나타난 게 바로 현대산업개발이다. 현대가의 뒤편에 있던 현대산업이 생뚱맞게도 악기 회사를 인수한 것이다. 이번 호부터 현대산업이 영창악기를 인수하게 된 이면사를 연재한다.
1947년, 광복을 맞이하고서도 2년여가 흐를 동안 한국의 산업은 불모지 그 자체였고, 보다 못한 재일교포 기업인들이 일본에서 경제단체를 결성하고 조국의 산업 발전을 위해 발 벗고 나섰던 모태가 ‘재일경제인동우회’였다.

그 후 근 반세기, 한국은 무역 대국으로 부상했고 국경 없는 시장에서 경이롭게도 조선과 반도체는 세계 최고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을 정도가 됐다.

그럼에도 세계적인 석학들이 한국을 ‘불균형의 나라’로 보고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들은 빈부의 격차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었다. 산업화를 얘기하는 것이었다. 조금 지난 이야기지만 2001년 6월, 유럽연합집행위원회(EC)에서도 유사한 비판이 나왔다. ‘한국의 산업은 균형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렇다면 불균형의 나라로 비친 까닭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가. 어쩌면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한국의 ‘문화산업 빈곤’을 보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국가정책의 불균형이 빚어낸 결과이든 기업을 경영하는 경제주체들의 무관심 때문이든, 결과는 문화산업 빈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도 올해 연두기자회견에서 문화 콘텐트 개발과 수출을 중점적으로 지원하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 점에서, 정치적인 손익계산으로 그림 몇 점은 사줄망정 문화예술 산업에 투자하기를 꺼리는 것이 재계의 솔직한 분위기였다는 점에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건설회사가 쓰러져가는 악기회사를 인수한다고 했을 때, 업계의 반응은 의외였고 국민은 신선하게 받아들인 것이 사실이었다.

2006년 5월 현대산업개발이 영창악기를 인수했을 때였다. 뒤에 인수 배경이 담긴 인터뷰 내용을 소개하겠지만 사실 인천에 본사를 두고 중국에 대규모 생산기지를 갖추고 있는 영창악기는 삼익악기보다 2년 앞선 1956년 11월 설립됐다.

한때 피아노만으로 국내시장 70%를 장악했을 정도로 브랜드 가치와 제품으로서의 명성을 한껏 자랑했던 국내 최초이면서 최대의 악기 제조업체였다.

그러나 5000년 민족 역사가 세계 최강이 아니듯 최초라는 기업 역사가 자랑스러울 것은 하나도 없는 영창으로 전락했고, 역사가 지닌 우월성보다는 오히려 붉은 머리띠와 살벌한 구호가 영창의 대명사처럼 국민의 기억에 남아 있다.

87년 6·29 선언이 나온 이후 영창악기는 인천의 기업군 노조를 대표한다고 할 만큼 극심한 노사분규의 선봉장이 되어 죽음도 불사한다면서 기세를 떨쳤다.

그 당시까지 영창은 세계적인 피아노 국제 품질상을 받기도 했고 1000만 달러 수출탑과 석탑산업훈장을 수훈한 유일한 악기회사이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과거의 영광은 이미 사주(社主)를 위한 것이었을 뿐 자신들에게는 착취당한 결과물의 훈장이요, 수출탑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영창악기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벌써 85년 4월부터 산업현장을 뒤흔든 대표적인 노동쟁의가 인천에서 발생했고 삼익악기, 대우자동차, 대우중공업, 경동산업 등에서도 불길이 타올랐다. 6·29 선언 이후에는 더 극심해 인천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보면 불과 석 달 사이에만 3311건의 쟁의가 발생했다.

그런데 한편에서 보면 그들의 주장이 명분이나 일리가 전혀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경제성장률이 85년 5.4%에서 86년에는 12.5%를 기록했고 국제수지도 47억 달러나 흑자를 냈는데 노동자들은 여전히 ‘선 성장·후 분배’라는 장밋빛 정책 속에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열악한 환경과 높은 산재율에 시달렸으니 소위 ‘노동자 투쟁’ 선언이 일방적이었다고 몰아붙일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영창악기의 노사분규 결과는 불행이었다.

붉은 구호를 써 붙이고 민주화가 살길이라고 핏발이 서도록 외치면서 87년 9월에는 노조가 사장을 드럼통에 넣어 굴렸다(당시 노조는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는 국회 증언과 언론 보도가 나올 만큼 심각한 사회문제까지 일으켰고, 그 후에도 중국 피아노 반입 문제와 전체 노동자 45% 정리해고 등에 반발해 끊임없이 분규의 꼬리를 이어감으로써 강성노조의 표본처럼 인식되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보이는 것은 쇠퇴의 길이었고 기다리는 것은 법정관리뿐이었다.

울산에서도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가 노사분규로 극심한 몸살을 앓았으나 그들과는 결과가 판이하게 달랐던 것이다.

87년 노사분규로 사라질 위기

결국 삼익악기와 함께 한국의 양대 악기제조회사 중 하나로 꼽혀왔던 영창악기는 노사분규와 경영 실패 등으로 50년간의 창업 역사를 마지막으로 이 땅에서 사라질 위기를 맞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했던 영창이 사라지지 않았다. 자타가 인정하는 피아노 제조기술을 비롯해 시장의 욕구에 부흥하는 전자악기 기술력이 그들에게 있었다는 것도 생명수 역할을 했겠지만 무엇보다 행운은 현대산업개발이라는 백기사의 등장이었다.

2006년 5월, 영창악기 인수 계약서에 서명하던 그날, 인수단장이면서 사실상 영창악기를 회생시켜야 하는 힘든 과제를 안은 박병재 대표이사 부회장을 현대산업개발 본사에서 만났다. 영창악기 인수계약 서명식을 끝낸 직후였다.

박 부회장은 재계에서도 낯선 인물은 아니었다. 인지도가 높다 보니 DJ 정권 시절 정계에 입문하라는 강요에 못 이겨 총선에서 지역구 공천을 받았다가 포기하기도 했지만 그는 68년 현대자동차에 입사한 이후 현대·기아차 부회장까지 지낸 인물이었다.

그의 이력은 자동차와 인연을 끊고 현대정보기술 회장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재무 분야를 제외하고는 개발에서부터 판매와 해외공장 운영까지 거치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할 정도로 화려해서 ‘기업백화점 경영자’라는 닉네임이 붙어 있을 정도였다.

최근에는 대선을 앞두고 ‘다스’(전 대부기공)가 BBK사건과 함께 관심의 중심으로 부상했지만 92년 대선 때 ‘대부기공’ 문제를 놓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이명박 전 현대건설회장 사이에서 가장 심한 고초를 겪은 사람이 박 부회장이기도 했다.

영창악기와 관련이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깊은 내용까지는 들어가지 않겠지만 한마디로 없어지게 된 대부기공을 끝까지 지킨 인물이 박 부회장이었던 것이다.

-현대산업개발이 인수금액 286억5000만원을 법정 기일에 납입하게 되면 새로운 영창악기의 CEO로 박 회장(전 직함으로 인터뷰했다)님을 임명한다고 했습니다. 임명장은 받았습니까.

“인수단장 임명장만 받은 거지요. 정리 채권 납입일이 아직 안 됐으니까. 이런 말씀은 하시두만요. 정몽규 회장님이 영창악기 문제로 저를 보자고 불렀을 때 회장님하고 얘기가 끝나니까 이방주 사장(현대산업개발)을 불러요. 그러더니 ‘됐어요. 박 부회장님(자동차에 있을 때 직함이다)이 맡기로 했습니다.’ 그래요. 그건 사전에 회장님이 이 사장하고도 누구한테 경영을 맡길지 의견을 많이 나누셨다는 얘기겠지요.”

2006년 6월 현대산업은 인수금액 납입을 완료하고 곧바로 박 부회장을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임명했다.

-영창악기라고 하면 지긋지긋한 회사 아니었습니까. 현대자동차도 노사분규 때문에 머리가 터질 정도로 악몽 같은 경험을 하셨는데 어떻게 현대산업에서 영창을 생각하게 됐는지 정몽규 회장을 아는 사람이라면 전부 의아하게 생각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근데 분명한 게 있어요. 정몽규 회장님이나 나나 어제까지의 영창은 생각 안 해요. 몰라요. 알 필요도 없어요.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정말 태산 같은데 어제의 영창악기가 어떻게 했다, 그거 생각할 여유가 있겠어요? 물론 기업 이미지는 절대적으로 중요한데 국민이 불행했던 과거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을 하고 있다면 빨리 불식시키고 정말 완전히 새로운 인식을 가지도록 해드려야 되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도 할 일이 태산 같다는 겁니다. 그러고 우리 현산(현대산업개발)이 인수하기 전까지 영창으로서도 뒤늦은 감은 있지만 노사가 새로운 인식을 가지고 기업 회생을 위해 다각도의 노력은 했습디다. 비록 피아노 시장에서 독과점 폐해가 우려된다는 공정거래위원회의 판단 때문에 제동이 걸려 무산되긴 했지만 삼익악기하고 M&A를 해서 합병까지 해보려고 열의를 다했잖아요?”

▶영창악기 본사 인천공장. 대규모 생산공장은 중국 톈진에 있다.


정세영 회장 1주기 때 인수식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제동을 걸지 않았으면 회생할 수 있었던 기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질문하면 내가 어떻게 대답해요. 물론 질문의 의도는 알겠는데 이제부터는 어제의 영창으로 보시면 안 된다니까…. 우리가 맥이 빠지잖아요. 물론 600%가 넘는 높은 부채비율에다 파업과 누적된 피로감, 그리고 최악의 불황까지 겹쳐 독자적인 경영이 도저히 불가능하니까 법정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겠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나서서 인수를 한 거고. 근데 정말이지 이젠 미래를 봐줘야 해요. 이건 아주 중요하다고. 어제까지는 다 덮어주고 이제부터 시작하는 걸음마 회사라고 생각해서 격려와 힘을 넣어줘야 해요.”

인수 첫날에 과거의 영창으로 회귀하는 기억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도리는 아니다 싶었다. 화제를 돌렸다.

-현대산업이 영창악기를 인수한다는 것은 언제 아셨습니까?
“그게 나중에는 언론에도 보도가 됐지만 나한테는 지난 2월 26일(2006년) 오전 9시30분쯤에 직접 몽규 회장님이 전화를 주셨더군요. 그 시간에 직접 전화를 하셨다는 건 뭔가 중대한 문제가 있다는 거거든요? 자동차에서 모시고 있었으니까 잘 알잖아요. 조금 긴장을 했는데 지금도 현대정보기술에 있느냐고 물어요. 아니라고. 그럼 잘됐으니 곧바로 만나자고 해서 찾아뵈니까 영창악기 말씀을 하십디다. 그때 처음 알았지요.”

-현대산업에서 영창악기가 웬말인가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까?
“그 얘기를 다 하자면 길지만 내가 그런 의문을 가지는 건 잠깐이고 말씀을 들어보니 여러 가지로 정말 많은 고민을 하셨습디다. 뒤에 질문이 있으면 기억나는 대로 얘기를 하겠지만 왜 악기회사를 인수하는가, 악기회사를 인수하게 될 때 여러 가지 신경 써야 하는 문제에서부터 누구한테 맡겨야 되나 하는 문제까지, 명예회장님(정세영)이라도 계셨으면 저렇게까지 고민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이 고민을 하셨어요. 아마 사모님(정세영 명예회장의 부인)도 조언을 해주신 것 같아요. 그리고 우선협상 대상자 공표가 2월 28일 나오고 언론에는 3월 2일자로 실렸는데 재계에서도 의아했겠지만 현대가의 어른들과 집안에서는 얼마나 예민하게 봤겠어요. 거기까지도 몽규 회장님이 인수 전에 생각을 안 할 수 없었을 테니 얼마나 고민을 했겠어요. 평소 별로 설명이 없고 말수도 적은 분이지만 눈에 보이더라고. 더 이상 내가 드릴 말씀이 없겠더라니까요? 그러니 말씀을 다 듣고는 영창악기를 내가 최대의 열정을 쏟아 넣어 마지막 작품으로 키워 보겠다는 말만 하고 물러나왔지요.”

-영창악기라면 국내 최대의 악기회사였고, 법정관리였지만 질곡에서 헤어나게 된 셈이고, 더구나 현대산업개발이라는 최우수 기업이 인수하는 데다 범현대가에서 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사회적인 관심이 집중될 테마가 되는데, 왜 언론 취재도 차단시킨 채 인수식을 공개적이고 화려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언론을 차단한 건 아니에요. 생각해 보세요. 명예회장님(정세영) 1주기가 어제(5월 21일)였고, 장자인 몽구 회장께서 저렇게(구속) 돼 있는데 동네방네 소문 내고 북적거리며 잔치 기분 낼 상황이에요? 잔치 거리도 아니지만. 내가 조용히 격식만 차려서 하자고 했어요. 그래서 현대 친인척들은 하나도 안 불렀고 서명식에는 정몽규 회장, 이방주 사장, 리딩투자증권 박대혁 사장, 우리은행이 주거래니까 문동성 부행장, 그리고 영창악기 이호석 사장하고 영창악기 국내외 대리점 대표들을 포함해 20여 명만 참석했던 겁니다.”

그러나 현대산업이 브랜드 인지도에서 국내 최고의 위치에 올라있는 건설회사로서 어떻게 생소한 악기회사를 인수하게 됐는지 그 배경은 궁금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계속>
몽규 회장이 야망의 지휘봉 꺼내”
자동차로 세계에 우뚝 서려던 뜻 접고 영창악기서 새로운 성취욕 찾은 것
현대家의 돌연변이 영창악기 ②

▶2007년 9월 미국에서 발명가상을 두 번이나 받은 레이먼드 커즈와일 박사를 초청, 특별강연을 듣기에 앞서 박병재 부회장(왼쪽)이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레이먼드 커즈와일 박사의 저서를 보고 있다.


2006년 2월 영창악기를 놓고 M&A가 시작됐을 때 우선협상 대상자로 건설업을 전문으로 하는 현대산업개발이 선정됐다고 하자 재계에서는 의외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지만 현대가의 주요 인물들은 긴장 속에 정몽규 회장을 주목해 왔다.

그러면서 그들은 미국에서 벌어진 영창악기와 삼익악기의 소송을 지켜보다가 영창악기가 승소하고 마침내 영창 인수 서명식 행사가 끝나자 ‘몽규 회장이 접었던 야망의 지휘봉을 드디어 꺼내 들었다. 할 만한 사람이 나섰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얼핏 들어서는 추상적인 표현이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정몽규 회장의 깊은 심연을 읽어왔던 측근들과 현대가 사람들은 예상됐던 계획이라고 말했다. 몽규 회장은 ‘포니 정’이라는 아버지 정세영 명예회장(작고)의 명성을 등에 업고 자동차로 세계에 우뚝 서려던 뜻을 접고 현대자동차를 떠났다.

그때 그는 밤잠을 설치며 분노와 실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그것은 숙질 간(정세영과 정몽구)의 투쟁이나 정씨 집안의 애증에서 시작되는 분노의 감정이 아니라 기업인으로서 성취욕이 무너졌다는 것에 대한 허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봐야 했다.

물론 대외적으로 정몽규 회장이 직접 나서 영창악기 인수 배경에 대해 설명한 적은 없다. 하지만 현대자동차 내홍을 알고 있는 주변 인사들은 현대산업개발의 영창악기 인수는 그동안 몽규 회장이 국내 건설사업만 해오면서 쌓인 성취욕의 체증을 일시에 소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도전의 사업으로 안성맞춤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보고 있다는 얘기였다.

한편에서는 ‘금속성 집안’으로 인식돼 왔던 범현대가의 이미지를 새롭게 탈바꿈시키는 일에 정몽규 회장이 벌떡 일어섰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동안 현대가를 대표하는 교육사업은 현대중공업 대주주인 MJ(정몽준)가 울산을 중심으로 펼치면서 서울까지 확산시켜왔다.

생전의 정주영 회장이 ‘본인은 신문을 통해 알고 배우는 것이 많기 때문에 어느 대학 출신이냐고 물으면 신문대학 출신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지식 고양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던 그 유지를 MJ가 맡아온 셈이었다.

하지만 삭막했다고 할 정도로 문화적 사업을 외면해 왔던 현대그룹을 생각할 때 영창 인수를 통한 문화사업은 정몽규 회장이 현대가를 새롭게 인식시킬 수 있는 의지 표명이며 현대가의 변신을 예고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브랜드 ‘I’PARK’로 치솟은 현대산업개발이 음률에서 미세한 먼지조차 허용하지 않는 악기회사를 인수했다는 것은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세계적인 명기를 제작하는 악기제조회사 중에 건설회사를 계열사로 두거나 참여하고 있는 회사는 어디에도 없다. 영창을 인수한 바로 그날, 박병재 부회장도 그 점에 의아심을 가졌다고 했다.

-현대산업개발이 의외라는 일반적인 시각에도 영창악기를 인수한 데 대해 나름의 설명은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몽규 회장님이 나를 불러서 영창악기 경영을 맡아 달라고 했을 때 제일 먼저 물었던 게 ‘건설회사가 왜 악기회사를 인수하려고 그럽니까?’ 이거였어요. 내가 몰랐던 거지. 회장님이 고민을 정말 많이 했는데, 그동안 인수에 필요했던 자료를 전부 내놓고 설명하는 걸 들으니까 아, 밖에서 생각했던 몽규 회장님이 아니구나 싶더라고요. 내가 몇 년 떠나 있었으니까. 한마디로 아파트 사업의 획기적인 점프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로 집약이 돼요. 말씀을 들어보니 그동안 무지하게 답답하고 안타까워하셨어요. 욕심만큼 성장변화의 구동력이 없었고 뒷받침이 안 된 거야. 획기적인 변화로 소비자들을 확 끌어당겨야 되는데 수만 가지 방법으로 홍보를 해봤지만 어느 정점 이상은 브랜드 이미지 업도 안 되고 효과도 크지 않더라는 거지요.”

-그렇다면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I’PARK를 알리는 전략적인 홍보 차원에서 영창의 역할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세계는 지금 브랜드 전쟁인데 뭐가 없겠느냐 이거지요. I’PARK를 수직 상승시킬 방안을 찾으셨던 거예요. 홍보를 한다고 해봐야 언론 뒤치다꺼리나 하고 높은 빌딩에 I’PARK 간판 걸어놔 봤자 그냥 광고판의 하나일 뿐이지 거기에 무슨 생명이 들어있느냐는 의미예요. 자동차는 타는 순간에 광고야. 그래서 좋은 차가 팔려요. I’PARK는 브랜드를 보는 순간 들어가고 소유하고 싶다는 충동이 생기도록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브랜드 특별화 방안의 하나가 영창악기 인수라고요.”

-몽규 회장이 현대산업개발을 경영하면서 개인적인 어떤 성취욕이 있다고는 느끼지 않았습니까.
“잘 알잖아요.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세계시장을 상대로 경쟁했던 현대자동차 회장이었잖아요. 영창악기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만들겠다는 것도 그런 연장선상에서 생각해볼 수 있지요.”

박 부회장은 정몽규 회장을 오랫동안 보좌해 왔던 현대자동차의 핵심 중 한 인물이었다. 기아자동차를 인수할 때도 중심에 있었고, 현대차에서 정몽규 회장이 회장에서 부회장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을 때도 현장을 지켜봤다. 누구보다 범현대가의 ‘닭싸움’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끝까지 영창악기 인수를 ‘현대가의 사업 변신’으로 결부시키는 것을 경계하는 발언을 했다.

음악을 ‘I’PARK’ 에 접목

▶현대산업개발이 인수한 직후 영창악기 인천공장의 작업 모습. 열악한 환경이었음을 보여준다.

-현대산업이 영창악기라는 새로운 계열사를 탄생시키는 공식적인 ‘인수식’이 열렸고, 그게 결코 소홀히 여길 수 없는 행사인데, 현대가의 중요 인맥들을 초대하지 않았다는 것은 친인척이 전부 모이게 되면 현대가의 문화사업으로 공식화될까봐 초청을 안 한 것은 아닙니까?
“미치겠네. 명예회장님(정세영) 1주기가 어제(2006년 5월 21일)였다고 얘기 했잖아요. 범현대가다, 현대가의 프로젝트다, 장자를 포함한 정씨 가문의 계획으로 본다, 별별 소리를 다 듣는데 특히 최근에 와서 언론이 그렇게 몰아가는 경향이 있지만 내가 아는 한 그런 것은 아니죠. 세계로 뻗어나가야 되겠다는 몽규 회장의 야심하고 현대 가문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이런 소리는 합디다. ‘앞으로는 전부 영창피아노로 바꿔야 되겠네. 울산에 있는 현대 학교부터 전부 영창으로 바꾸라고 해야 되겠군.’ 그러면서 웃었는데 그건 서로 돕는다는 의미지 특별히 목적성이 있어서 하는 얘기는 아니라고요. 울산에는 현대학교가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다 있잖아요. 그러니 자꾸 현대가문하고 연결시키면 일 하기도 굉장히 어렵다고요.”

그 시점에서 정 명예회장의 1주기라는 분위기도 있었겠지만 정몽구 회장이 독거실(구치소)을 쓰고 있었으니까 심정적으로 현대가에서는 어떤 행사도 조용하고 조촐하게 치를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사정도 있었다.

그러나 현대가 담장 밖에서는 아직도 미완의 드라마가 계속되고 있는 현대중공업과 현대상선 문제, 최근까지도 불거진 현대증권의 현대건설 인수설, 거기에 당시 현대중공업 임직원 2만5000명의 현대자동차 살리기 서명운동과 현정은 회장 주도의 현대그룹 계열사 임직원들의 MK(정몽구) 석방탄원서 제출이 마치 장손의 마음을 선점하기 위해 벌이는 몽구 회장 쟁탈전처럼 비쳐 연일 언론의 조명을 받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몽자 항렬의 몽규 회장이 현대가와 상의 없이 이질적인 악기회사를 인수하고 나섰겠느냐고 추론했을 때 현대가의 움직임과 연계시켜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국민을 향한 이미지 쇄신이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현대산업 홍보실에서 내놓은 인수 배경 설명을 보면 ‘영창피아노로 대표되는 영창악기 브랜드가 I’PARK 브랜드의 명품화를 추구하는 현대산업개발의 브랜드 전략하고 일치하고, 앞으로 두 브랜드가 합쳐 시너지 효과가 기대되기 때문에 인수했다’고 돼 있습니다. 동의하십니까?
“멍청한 소리지. 솔직하게 말해 영창악기 브랜드가 I’PARK 브랜드보다 높아요? 목표는 I’PARK 브랜드를 높이자는 건데, 인지도가 더 낮은 영창악기 브랜드로 I’PARK가 무슨 덕을 봐.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합치면 더블 플러스가 되나? 합쳐서 시너지 효과? 우리끼리는 제대로 얘기하자고. 시너지 효과는 ‘음악과 I’PARK’지 ‘영창과 I’PARK’는 아니야. 그렇잖아요? 당장 이 선생부터 반문을 할 텐데?(그렇다고 했더니) 회장님이 나한테 정확하게 짚어서 말씀하더라고요. ‘우리 I’PARK가 추구하는 브랜드 상징성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안락한 조건을 창조한다는 것이고, 거기에 악기가 우리 브랜드하고 통한다’ 이겁니다. 그래서 영창악기를 인수하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 절묘한 얘기지. 악기가 만들어내는 음악은 무한대잖아요. 음악 자체가 형성해 내는 영적인 세계가 또 무한대잖아요. 이런 앙상블보다 더 멋진 게 인간 세상에 있어요? I’PARK가 추구하는 브랜드 목표점이 나오더라고. 그래서 내 고민이 굉장히 깊어졌어요. 앞으로 내가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 중 하나가 지금까지의 영창악기 이미지를 현대산업개발의 이미지, I’PARK 브랜드로 흡수시키는 작업이에요. 그 다음에 세계적인 브랜드로 같이 상승시키는 거라고요.”

현대산업개발은 영창악기에 대한 과거 이미지를 새롭게 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일 것이다. 영창악기의 브랜드 속에는 음악이라는 것도 담겨 있지만 극렬했던 노사분규의 이미지가 함께 뿌리박혀 있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국민이 영창 민노회(민주노동자회)가 외치던 섬뜩한 붉은 글씨의 현수막을 기억하고 있지 않겠는가.

-인수 전에 실사를 하셨을 텐데, 영창악기가 어떤 상태였습니까.
“인수를 목표로 그동안 실사를 철저히 했는데, 외형적으로는 인천에 본사와 악기공장이 있었고 중국에 톈진 공장, 미국에 전자악기연구소를 두고 세계 각국에 악기 수출을 해온 글로벌 기업이더라고요. 그것도 영창 상표로 생산하고 수출을 해왔어요. 국내 시장점유율은 50% 정도 되고. 잘나갈 때는 연간 판매가 2000억원 정도? 그랬던 회사예요. 직원이 한국에 340명, 중국은 주로 부품을 생산하는데 1250명, 미국에 50명, 보스턴 악기연구소에 15명, 그런 정도인데 특히 영창 자회사로 커즈와일(Kurzweil)이라는 세계적 브랜드인 전자악기 종합 메이커가 있더라고요.”

야마하 견학하고 깜짝 놀라

-그동안 경영을 위해 해외시장이나 악기 회사들도 둘러보셨을 것 아닙니까. 영창을 비교했을 때 전망은 보였습니까?
“한마디로 큰일 났다, 이거였어요. 중국도 가고 일본도 가고 미국도 가봤고 독일에서 국제 악기박람회가 열린다고 해서 거기도 가서 샅샅이 훑었는데 국내 수준하고는 마감처리 기술에서부터 격차가 확 나요. 생산기술은 내가 아직 몰라요. 자동차를 했으니까 마감처리는 한눈에 점수가 나오잖아요. 원인도 짚어내는 거고. 그래서 당장 중국 톈진의 피아노 공장에 모든 공정을 최대한 자동화하라고 지시했어요. 중국은 일일이 수작업으로 하고 있으니까 효율성과 정확성이 떨어지는 건 뻔하잖아요. 인구 때문에 채용을 해야 한다는 불가피성도 있지만 현대가 맡은 이상 하라면 하는 거야, 무조건 최대한 하라고 했지. 나중에 회장님하고 둘러보니까 개선이 되고 있어요.”

-일본의 야마하는 방문을 하지 않았습니까?
“어차피 붙어야 되는 상대가 야마하니까 당연히 갔지요. 자동차에 있을 때 사귀었던 미쓰비시 인맥을 통해 공장까지 둘러봤는데 거긴 야마하 도시가 형성될 정도고 연간 4조원에 이르는 매출을 올리는 세계 최대 악기제조회사 아닙니까. 일본 시장은 야마하와 가와이가 90% 이상 점유하고 있지만 미국 시장만 해도 미국 회사인 스타인웨이하고 야마하가 60% 이상 먹고 있기 때문에 대단하지요. 우리 영창하고 삼익이 잘나갈 때 미국 피아노 시장에서 겨우 10% 정도였으니까 비교가 되잖아요. 그런 회사니까 배울 점이 수두룩했어요. 전부 메모를 했고 경청을 했는데 야마하는 완전히 틀이 잡혔어요.”

-세계적인 악기 박물관이 야마하에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거예요. 물론 악기 박물관도 둘러봤지요. 악기 박물관이 있다는 얘기는 귓전으로 들어왔지만 막상 보니까 뭘 생각하게 되느냐 하면 ‘이게 일본이구나!’ 그런 느낌이 확 오는 겁니다. 한국에 영창이다, 혹은 삼익이다 하면서 50년 넘는 세월을 보냈는데, 악기 박물관이라고 콧구멍만 한 거라도 만들었어요? 이게 영창이든 삼익이든 회사를 말하려는 게 아니라 국가의 문화정책과 국민의 문화 수준을 얘기하는 겁니다. 나는 그렇게 느꼈어요. 그러니 영창을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 깜깜하더라고요.” <계속>
 
“현대차 노하우로 영창 키울 것”
90억 투자해 설비 뜯어고쳐…야마하보다 우수한 부품으로 전부 교체 중
현대家의 돌연변이 영창악기 ③

▶2007년 1월 세계적인 악기 전시회 ‘NAMM show’ 기간 중 영창악기 전시부스에서 브랜드 홍보전을 펼치기도 했다.


영창악기를 인수하기로 한 이후 박병재 부회장은 야마하를 비롯한 세계 유명 브랜드의 악기회사들을 둘러보았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그는 야마하의 악기박물관을 보면서 그들이 일본 국민에게 무엇을 심어주고 있으며, 회사가 추구하는 경영 목표가 무엇인지를 알 것 같았다고 술회했다. 일본의 문화정책과 일본 국민의 문화 수준이 그 속에 담겨 있더라는 것이다.

-박물관 규모나 내용 면에서는 어땠습니까.
“지하에 전시해 놨는데 엄청난 관람객이 찾아왔어요. 박물관 그 자체만 본다면 그것 하나로 악기의 경쟁력도 비교하게 만들어버리는 거지요. 우리하곤 차원이 달라요. 거기서 야마하를 상징하는 게 뭐다 하는 것이 다 나타나요. 기술력과 음악을 사랑하는 철저한 프로정신이 없으면 오늘의 야마하가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을 박물관 전시물이 가르쳐 주고 있는 겁니다. 초창기 악기에서부터 최근 개발된 악기까지 품질의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해 놨어요. 그게 자신감이고 국민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내가 돌아오면서 우리도 반드시 어느 시점이 되면 거대하지는 않더라도 박물관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그게 결국 현대가의 문화사업을 현대산업개발의 영창악기가 맡는다는 계획하고도 연결되는 거군요?
“그것 참 조심되게 질문하시네. 현대가의 문화사업이라는 말은 뉘앙스가 간단히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니까? 영창악기를 현대 가문 속에 집어넣어 생각하면 공연한 오해를 받을 수가 있다니까? 솔직히 현대 가문에 문화사업이라고 내세울 만한 건 없어요. 그렇다고 현대 가문이라는 이름으로 나선다면 영창악기 하나만 가지고 ‘이게 현대의 문화를 상징하는 거다’ 그렇게 할 것 같아요? 최소한 예고를 세우든가 예술대학을 세우고 제대로 왕창 하지? 그러니까 영창은 영창이고, 현산의 계열사로 단순하게 이해해 달라니까 그래요. 나하고 오늘은 영창악기 얘기만 하자고요.”

국내 재벌 상위 그룹 중에 범현대가에서 문화사업에 얼굴을 내민 것은 지금까지 없었다. 삼성, 대우, LG, 금호 같은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문화사업을 펼칠 때도 그 흔한 미술관 하나 갖지 않은 그룹이 현대였다.

정주영 회장이 생전에 정·재계 인사 모임에서 건설업 출신이라 기업이 풍기는 전통이나 기업문화 자체가 문화사업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고 했을 때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기업인 중에 소설가, 시인, 화가, 국악인, 탤런트, 그리고 가수까지 나만큼 많이 아는 사람 누가 있어요? 노래도 내가 제일 잘하고 많이 불러요.

문화실이 있는 그룹도 현대 말고 있어요? 우린 그룹홍보실이 아니라 그룹문화실이라니까? 신문도 문화일보예요. 왜들 이러셔?’해서 한바탕 웃기도 했다고 한다.

얼마 전 CJ엔터테인먼트의 최고위 경영자가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 자리에서 대중문화가 국력과 성별을 초월하고 더 큰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이 된다고 강조한 것은 기업이 문화사업에 투자하는 이유를 전하는 메시지였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고 해도 지금까지 현대가의 문화사업 투자는 소홀했던 게 사실이다. 바로 이런 배경을 감안하더라도 박 부회장이 신경 쓰이는 말이라고 하지만 범현대가에서 현대산업개발이 문화사업에 시동을 걸었다고 해서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박 부회장은 야마하 박물관을 설명하면서 야마하가 일본 국민에게 전달하는 문화적 상징성까지 짚었지만 정작 제품의 우수성과 경쟁력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사실 영창악기는 건반악기를 제외하고 특히 관악기에서는 후발주자며, 그런 만큼 제품이나 판매기법에서도 상위권이 되지 못했다. 야마하의 다양한 악기 종류와 비교해도 상대가 되지 않지만 품질은 아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소비자나 판매처에서부터 영창악기에 대한 인식은 바닥권이었다. 그런 평가는 지금도 다르지 않다.

야마하와 게마인하트 같은 세계적인 악기 메이커들은 아예 제외해 놓고라도 관악기에서 국내의 삼익악기나 코스모스, 세창 등과 비교해도 뒤떨어진다는 것이 판매상들의 공동된 견해였다.

“나는 그런 평가를 부인하지 않아요. 건반악기하고 달라서 관악기는 전부 건반악기에 비해 소규모고 이동이 용이하고 한 손에 들고 설명을 할 수 있어요. 그건 다시 말해 판매하는 사람이 눈에 보이는 부분만 가지고도 품질을 설명할 수 있다는 얘기니까 판매원들이 어떻게 얘기하느냐에 따라 영창악기가 그 자리에서 평가가 돼버리는 겁니다. 근데 우리가 영창악기를 인수한 지 1년 남짓 더 됐어요? 2년도 안 돼가지고 그동안 영창에 쌓여 있던 직원들의 구습을 씻어버리라고 교육하고, 생산설비를 바꾸고, 자동화하고, 그러면서 관악기까지 시장을 확대한다고 막 밀어댔는데, 대리점도 많지 않지만 판매원들 교육을 제대로 시킬 시간이 있었겠어요? 거기다가 옛날 영창이 실패했던 이미지까지 있다고요. 그러니 판매 현장이 어떻다 하는 거 나도 짐작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한마디로 아직은 엉망일 거야. 그렇지만 곧 달라진다고요, 반드시 인식이 바뀌게 된다니까요?”

정주영 “내가 노래 제일 잘해”

▶중국 톈진의 생산현장. 생산라인을 모두 현대화했다고 밝혔다.

박 부회장은 이해해 줘야 할 부분이 있다고 강조했지만 고객 입장에서는 회사의 타임스케줄을 이해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가격대가 비슷한 동급 제품을 놓고 일산의 A백화점 악기 판매원의 설명은 영창악기의 현주소를 말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고객분들한테 처음부터 영창악기는 권해 드리지 않아요. 가령 플루트(Flute)나 색소폰 하나 팔아놓고 A/S를 열 번 해 주면 장사 어떻게 합니까. 더구나 백화점에 입점해 있는 악기점에서는 고객이 A/S 요구를 몇 번 하다가 화가 나서 제품교환을 요구하면 거절할 수가 없어요. 해 줘야 한다고요. 그럼 우리(판매점)는 뭐가 됩니까. 가게 이미지도 완전히 가는 거고 손해가 보통이 아니잖습니까. 그러니 아예 취급하지 않는 게 낫지요.”

A백화점에서만 들을 수 있는 평가가 아니었다. 판매원이 다른 회사 제품을 권해 기자가 영창악기를 고집하며 섹소폰 하나를 보자고 했더니 서울의 B악기점에서는 영창악기를 가져오긴 했지만 다른 악기를 꺼내 들고 직접 비교까지 하면서 설명했다.

“여길 보세요. 이 악기(다른 회사 제품)는 특히 키 파트(Key Parts)와 키 포스트를 백동과 황동 재질로 다 교체했거든요? 잔 고장이 제일 많은 스프링 파트는 이미 세계 최고급 부품으로 전부 교체했단 말입니다. 근데 뭐 영창은 보시다시피 그렇지가 않잖습니까? 아직 이 악기(다른 회사 악기) 정도까지 가자면 한참 걸릴 걸요? 곧 교체한다는 얘기는 있습디다만 글쎄요, 신제품이 나와 봐야 그것도 아는 거지요. 제품이 좋다 나쁘다 하는 건 고객들이 먼저 압니다.”

이구동성이었다. 거기다가 품질이 조금 떨어진다면 영업과 판매시스템이라도 뛰어나야 하겠는데 판매시스템도 엉망이라는 직설적인 평가까지 나오고 있었다. 심지어 영창악기 홈페이지에 관악기는 제품 사진 한 장 변변히 올라 있는 것이 없었다.

사진은 현물과 달라 얼마든지 제품 이미지를 고양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을 텐데 무슨 까닭인지 소매 문방구 홈페이지보다 허술했다. 영업시스템이 제로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아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현대자동차로 세계를 누볐던 박 부회장이 판매 현장의 소리를 들었으면 소름이 돋는다고 했을 것이다.

“앞으로 대리점 교육을 철저히 하려고 해요. 뭐가 문제라는 걸 내가 안다고요. 제품에서도 결점이 뭐다 하는 걸 전부 체크하고 있어요. 그래서 특히 스프링 파트 같은 건 A/S가 많기 때문에 야마하에서 쓰는 것하고 최소한 똑같거나 더 우수한 걸로 전부 교체하고 있어요. 심지어 악기 케이스까지. 그게 사각이니까 모퉁이가 잘 벗겨지거나 닳잖아요. 그것도 전부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모른다면 모르지만 알고 있는 이상 문제가 있는 걸 그냥 놔둘 수는 없잖아요.”

박 부회장은 속이 상한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과거 현대자동차를 어떻게 운영해 왔는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 같기도 했다. 2만 개가 넘는 부품으로 자동차를 만들고, 그런 부품 중에 하나만 불량이 나와도 용서하지 않았던 자신이 품질에서 뒤처지는 악기를 만들겠느냐는 소리를 하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큰 짐을 짊어지고 먼 길을 가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몽규 회장님이 생각하고 계시는 것까지 뒷받침하려니 큰 짐을 짊어졌다고 하는 것 같은데, 현대차에서 쌓은 수출 영업의 노하우를 이용하면 영창악기의 세계시장 확장이나 기존 판매망 복구도 빠른 시간 내에 해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여러 전략을 구상하고 있지만 아직은 내 마음처럼 따라주지 못하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경영자 책임이지, 누굴 탓할 것도 없고 돌파해야 되겠지만 우선 국내 가정용(업라이트) 피아노 시장 점유율부터 높여가면서 관악기도 시장을 열어나갈 계획인데, 분명한 건 세계 최고의 브랜드 가치를 지닌 악기제조업체로 육성할 수 있는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는 겁니다. 우린 현대차로 도요타하고 경쟁했던 노하우가 있다고요.”

박 부회장은 자신감을 보였다. 관악기는 부끄럽지만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으로 이해해 달라는 것 같았고, 피아노로 일단 승부를 내게 되면 영창 관악기도 업그레이드된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종합악기제조업체’라는 말은 아직 사용하기가 민망스럽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피아노 시장 환경도 녹록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경기 침체로 꼭 피아노가 필요하다면 새 피아노를 사려는 사람보다 중고 피아노 시장을 찾는 사람이 늘고, 혼수품에서 피아노가 빠지고 있는 것도 박 부회장에게는 풀어야 할 과제다.

그리고 중국산 중·저가 악기들의 시장 점유율이 높아가고 있는 것은 더욱 부담될 것이 틀림없고, 더구나 소모품이라고 할 수 없는 고가품이라는 점과 소비자층이 제한돼 있다는 것은 만만하게 여길 문제가 아닌 것이다.

“부끄럽지만 이제부터 시작”

그럼에도 살집이 많지 않은 얼굴에 웃음이 번지는 것은 복안이 있기 때문일까. 어쩌면 아이파크(I’PARK)가 신축하는 아파트에는 가스레인지나 식기건조기 대신 음악이 걸어 다니도록 무조건 악기 하나씩을 거실에 선물하겠다면 대단한 시장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부회장님 말씀으로는 영창악기를 인수하기 전에 실사를 할 때 보니까 중국에 톈진 공장이 있고, 미국에 전자악기연구소를 두고서 세계 각국에 악기 수출을 해 온 글로벌 기업이더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럴 정도로 생산시스템이나 제품의 우수성이 세계적인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까?
“우리가 인수하기 전이지만 1991년 2월에 프랑스 ‘르몽드’지가 ‘세계 베스트 5 피아노’에 영창피아노를 선정했고 그해 7월에는 미국의 전자악기 전문지인 ‘키보드(KEYBOARD)’에서 세계 디지털피아노 3대 명품으로 영창 디지털피아노를 또 선정했습디다. 그뿐 아니고 계속 세계적인 악기 전문지들로부터 꾸준히 주목 받아 왔는데 96년 1월에는 ‘MMR (Musical Merchant Review)’지에서 또 95년도 최고의 디지털피아노로 선정했어요. 그게 거슬러 올라가면 90년 6월에 미국의 커즈와일(KURZWEIL Music Systems)사를 인수하면서부터 가능해졌던 것 같은데 어쨌든 제품의 우수성은 평가를 받고 있었지요.”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현대산업이 영창악기를 인수하기 전에 제품의 우수성도 인정을 받았고, 연구소와 생산 공장도 이미 갖추고 있었다는 것 아닙니까. 중국 톈진에는 주물공장과 피아노 완제품 공장도 있었으니까요. 현대산업이 그 후에 투자한 액수는 얼마나 되고 주로 어떤 분야에 집중하게 된 겁니까?
“기본적으로 영창악기가 글로벌 기업이었으니까 갖추어야 될 건 다 갖췄어요. 그렇기 때문에 거의 집중적으로 개조했는데, 정신개조에서부터 설비, 생산라인, 근무환경 그런 분야에 투자한 셈이 됐지요. 연간 대충 90억원을 투자했고, 그중 20억원 정도는 미국 보스턴에 영창악기 기술연구소가 있으니까 제품 개발비로 투자되고 나머지 70억원은 인천 공장과 중국 톈진공장을 개조하는 데 투입됐다고 보면 돼요. 대대적으로 건물만 그냥 두고 라인, 설비, 특히 주물공장을 용광로 방식에서 전기로 방식으로 확 뜯어고쳤으니까요. 그러니까 이제부터 시작인 겁니다.”<계속>
‘돈 되는 소리’ 찾는 데 20억 쏟아
소리가 상품인 시대…세계적인 A피아노 부품도 영창에서 공급
현대家의 돌연변이 영창악기 ④

▶미국 보스턴에 있는 영창악기 기술연구소 전경. 전문연구원 20명이 상주하고 관계자 수십 명이 보조를 하고 있다.


영창악기의 사실상 제2창업을 주도하고 있는 박병재 대표이사 부회장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했다. 그의 말은 그동안 먼지와 오염투성이, 냄새 나고 치유되지 않을 것 같던 회사의 고질적인 영창 문화를 청소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어쩌면 이질적인 건설업체가 점령하다시피 인수한 이후, 예술의 혼을 뿜어내는 악기회사를 성공의 반석 위에 올려놓는가를 보여주겠다는 공개선언 같았다.

영창이 선언한 ‘제2의 창업’ 속에는 최소한 세 가지의 자신감이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박 부회장은 연구소부터 언급했다.

“첫 번째는 미국 보스턴에 소재하고 있는 영창악기 연구소가 있잖아요. 보스턴 연구소는 현대산업개발이 영창을 인수하기 훨씬 전인 90년 6월에 설립해서 지금까지 계속 발전하고 있는데, 겨울에 보면 눈 덮인 언덕에 마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집처럼 아름다운 풍광 속에 자리 잡고 있지만 그 안에는 정말 세계적인 음률연구 석학들과 그 원음을 창조해내는 수십 가지의 기기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연구하는 순수 연구비만 연간 20억원 이상 이거든요? 근데 알아듣기 쉽게 얘기를 하려니까 기술연구소도 제품 개발비로 투자되고 있다는 말을 하는데, 나는 사실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어요. 제품 개발이 목적이지만 제품까지 못 나와도 좋다 이거야.

제대로 된 소리가 어떤 거냐, 우리가 발견하지 못하고, 이름을 붙여주지 못하고 있어서 그렇지 그걸 악기로 담아낼 수 있는 소리가 이 우주공간에는 수없이 있다 이거야, 그것만 찾아내도 대성공이라는 자세로 돈을 쏟아 붓고 있다고요.

이미 소리가 상품이고 돈이 되는 시대 아니에요? 명창들이 부르는 소리만 돈이 아니라 자연의 소리도 돈이에요. 굉장한 부가가치가 있는 무한대의 자산이 ‘소리산업’이라고. 그걸 정부도 모르고 기업들도 미처 생각을 못하고 있어요.”

대단하다 싶었다. 원래 덕담도 잘하지만 아이디어도 남달리 풍부한 박 부회장은 두 번째 ‘시작의 힘’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은 ‘피아노의 한계’에 도전하는 도전정신을 꼽고 있었다. 피아노의 한계에는 여러 가지 나타나고 있는 품질의 문제, 디자인의 문제, 시장의 문제 등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가 내포되고 있을 텐데 감히 한계에 도전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대뜸 피아노의 고질병처럼 느껴지고 이사할 때마다 고생해야 하던 악몽이 있어서 끊임없이 토해져 나오는 그의 설명을 끊고 질문을 던졌다.

-피아노가 왜 그렇게 무겁습니까? 꼭 무거워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겁니까? 집안에 변화를 주고 싶어도 피아노가 턱 하니 공간을 차지하고 있으면 아주 꼴통 망나니를 보는 것 같단 말입니다. 어느 집이나 그렇게 느낄 걸요?
“하하, 그거요? 나도 먼저 의구심을 가졌던 부분이 그거였어요. 자동차든 비행기든 하다못해 철판과 섬유소재까지, 첨단을 달린다 하는 제품들은 전부 기능은 향상되면서 경량화로 가고 있는데, 피아노는 어째서 30년 전에 본 피아노나 지금 나오는 피아노나 한결같이 무겁느냐 이거지요. 그건 이사할 때 별도로 계산해줘야 되잖아요. 결론은 내가 무식해서 가졌던 의문이었다고요.

한마디로 고급 피아노일수록, 좋은 피아노일수록 무겁습니다. 왜냐, 나무 때문에 그래요. 피아노라는 것이 건반을 치고, 현을 때리고, 공명의 기능을 거쳐서 사람의 귀에 전달되는 과정은 어느 피아노나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를 얼마나 원음에 가깝게, 깨지지 않고 멀리까지, 오래도록 전달되게 하느냐 하는 것은 나무에 달렸다는 거지요.”

지면으로 이해시키기는 쉽지 않지만 박 부회장은 언어의 마술사처럼 그림이 눈앞에 떠오르도록 전달하느라 애를 썼다. 내용 속에는 상식을 넘어 지식이 될 수 있는 부분까지 있었다.

“일단 피아노에 사용되는 나무는 0.001 mm, 그러니까 1000분의 1mm이상만 변형이 있어도 고급화가 될 수 없다는 게 업계의 평가예요. 설명하자면 끝도 없지만 피아노에 들어가는 나무는 6개월 동안 함수와 탈수의 과정을 거치는데 그런 무변형에 가까운 소재를 쓰려니까 나무보다 더 좋은 소재가 현재까지는 없고, 그만큼 건조가 잘 되고 단단한 것을 쓰다 보니 무거운 나무가 될 수밖에 없는 거지요.

가령 조선 500년 역사에서 지금까지도 뒤틀림 하나 없이 고궁에 남아 있는 옛 기와집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될 겁니다. 그럴 정도로 나무의 질은 설명하기 어려운 세세한 부분까지 영향을 미쳐요. 우리가 북방 나무를 쓴다고 자랑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게 단단하기 때문이라고요.

나무의 나이테를 보면 추운 북방 지역 나무는 좁다고. 굉장히 오밀조밀하지. 남방의 나무는 나이테가 넓고 쑥쑥 자라고. 그러면 그런 나무들은 물러터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이테가 좁은 나무를 수천, 수만 개씩 똑같은 면적을 만들어 붙여야 되거든요? 그래서 좋은 피아노는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 거예요.”

배석했던 김정현 기획이사가 일본의 야마하 악기공장을 설명하면서 이해를 도왔다. 그는 야마하 공장을 견학하면서 알게 된 내용들을 사실 그대로 전했다.

피아노는 왜 무거운 걸까

“야마하가 있는 공장 입구 기차역에 내리면 첫눈에 들어오는 것이 야마하 전시장과 바로 옆에 카와이(Kawai)악기 전시장이죠. 거기에 보면 정말로 고급나무의 중요성을 알게 해주는 전시물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직경이 4mm밖에 안 되는 나무를 88개의 건반에 들어가도록 가공하고 구멍을 뚫고 하는데, 그게 충분한 건조기간을 거치지 않거나 조금이라도 변형이 생기면 구멍을 뚫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일일이 수작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대량으로 막 찍어내려면 말이죠.

그래서 그 전시장은 정말 단단하고 깨지거나 갈라지지 않는 질 좋은 나무를 써야 되는 이유를 눈으로 보여주고 있는 거지요. 그 사람들이 진짜 대단하다 싶은 건 카와이가 똑같은 전시장에 과감하게 ‘카와이의 신기술 ADS의 승리’라고 안내 문구를 붙여놨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무는 아니고 플라스틱 비슷한 합성소재인데 그걸 나무 대신에 쓴다는 거지요.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무엇보다 피아노의 중량을 상당히 줄일 수 있고 가격도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니까 큰 폭으로 낮출 수 있지요. 그래가지고 카와이가 돌풍을 일으켰다는 선전문을 걸어놨는데, 도대체 나무의 중요성을 전시물로 보여주면서 동시에 신소재도 놓는다는 얘기는 뭐냐 이거죠.”

-그렇게 좋은 소재가 있다면 영창에서도 ADS 소재를 사용하면 되지 않습니까.
“바로 그겁니다. 카와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질이 문제라는 겁니다. 어떤 소재도 나무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카와이도 상급 피아노에는 그걸 쓰지 않습니다. 아주 미미한 차이가 있을 뿐인데도 그래요. 일본에는 상급, 중급, 하급의 피아노가 엄정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업라이트(UP)피아노냐, 그랜드 피아노냐 하는 정도의 구분만 있잖습니까? 일본에서는 그게 구분되기 때문에 ADS를 쓸 수 있었던 거죠. 물론 90년대 중반에 한국에서도 영창에서 ADS를 쓴다고 해서 소문이 확 돌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땐 카와이에서 쓸 정도라면 나쁜 소재는 결코 아닌데 경쟁사인 삼익악기에서 ‘영창은 최고급 나무를 쓰지 않고 싸구려인 ADS를 쓴다’고 광고를 하는 바람에 혼이 났죠.

그때만 해도 영창이 워크아웃에 들어가고 그랬을 때라서 제대로 ADS에 대해 홍보도 못하고 고스란히 당한 겁니다. 입도 벙끗 못하고 무대를 내려온 목 쉰 웅변가처럼 전전긍긍하다가 결국은 나무로 다시 돌았지요.”

▶중국 톈진의 영창악기 피아노 생산라인. 먼지와 각종 오염물질들을 모두 정화시키고 1등급 공장으로 판정받았다.

-결과적으로 피아노는 고가품이고 나무로 만들어야 제격인데 왜 싸구려 이미지를 주는 플라스틱 소재를 쓰느냐 그거 아닙니까.
“인식이 그만큼 무섭다는 거지요. 그래서 아예 지금의 영창피아노는 아무리 첨단 신소재라고 하더라도 금속성 소재는 넣지를 않습니다만 결론은 역시 나무라는 거지요. 실제로 피아노 형판(사운드보드)을 손으로 탕 두드려보면요, 좋은 나무는 북처럼 웅 하고 울립니다. 길게 오랫동안 울려요. 바로 그런 나무가 최고급이고 그런 이유로 무거운데도 나무를 외면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김 이사의 설명을 듣고 있던 박 부회장은 영창의 비밀 한 가지를 공개했다. 일절 외부에 공개되면 안 된다고 했지만 기자의 귀는 항아리가 아닌 것이다. 국가 이익에 반하지 않는다면 항아리 속에 고여만 있는 정보가 될 수 없고 흘러나가게 돼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피아노가 무거운 것도 앞으로 해결해야 할 연구대상이지만 결국은 소비자들에게 싸고 좋은 피아노를 공급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영창의 최종 목표가 아니겠느냐면서 그는 품질 면에서 내세울 게 있다는 얘기를 했고, 그 과정에서 비밀이 안테나에 잡힌 셈이었다.

“스타인웨이(Steinway)피아노 알지요? 흔히 피아노의 제왕이라고 하잖아요. 역사적으로 봐도 스타인웨이가 1862년에 업라이트 피아노(일반적인 연주용)로서 첫선을 보였다니까 벌써 몇 년입니까? 세계적인 콘서트홀이나 연주장에 가면 언제나 이목을 끌면서 조명을 받고 있는 그야말로 세계적인 명기가 스타인웨이 피아노 아닙니까.

어떻게 보면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나 ‘게릭 올슨’ 같은 세계 정상급 연주가들이 극찬하고 있는 파지올리(세계에서 가장 긴 그랜드 피아노)보다 내용 면에서 더 명기로 평가 받고 있다고요. 그런 스타인웨이가 지금도 연간 5000대 정도밖에 생산을 안 합니다. 우리 영창이 인천공장에서만 연간 1만 대를 생산하고 중국 공장에서 4만5000대를 생산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지요.”

400명이 하루 피아노 5대 생산

-스타인웨이가 연간 5000대밖에 나오지 않습니까?
“그걸 숫자적인 면으로 비교를 한다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스타인웨이 피아노는 실질적으로 수공업 제품이거든요. 연주가들 사이에서는 독일산 스타인웨이를 더 알아준다고 그러는데 생산은 함부르크 공장하고 미국 롱아일랜드 공장에서 해요.

근데 각각의 공장에서 몇 대를 생산하는지 아세요? 스타인웨이가 직접 생산하는 선(Sun) 함부르크에 350명이 있고, 뉴욕 롱아일랜드 공장에는 400명의 근로자가 있어요. 놀랍게도 함부르크 같은 경우 350명이 하루 5대를 생산합니다. 뉴욕 롱아일랜드 공장에서도 400명이 하루 5대를 생산한다고요.

생산성에서 말이 돼요? 그렇지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품질로 평가 받고 최고의 가격을 받거든요? 스타인웨이라는 브랜드만 붙으면 보통 3억원에서 4억원씩 한다고요.”

-그런데 영창의 비밀이라는 건 어디에 숨어있다는 겁니까?
“하하, 궁금하지요? 스타인웨이 피아노에 견줄 만한 세계적인 피아노가 또 있어요. 영업비밀이기 때문에 밝힐 수 없지만 A라는 브랜드가 있어요. 그 피아노를 우리 영창에서 공급하는 겁니다.”

특급비밀이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피아노를 취미 삼아 친다고 하는 사람이더라도 스타인웨이 피아노의 건반 한번 두드려보는 것이 소망이라고 할 정도로 스타인웨이는 귀족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그런 피아노와 버금가는 피아노를 국내 업체에서 납품하고 있다니까 충격적인 정보가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스타인웨이처럼 A브랜드의 피아노 회사도 어디서 생산하고, 어디로 운반되고, 가격이 얼마라는 것을 밝히지 않는 게 고집스러운 전통처럼 알려져 있다.

-A브랜드 피아노에도 여러 부분이 있을 것 아닙니까. 자동차에도 여러 협력업체가 부품을 납품하면 완성차 업체에서 완성품을 내듯이 영창도 A브랜드에 일부분을 납품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말입니다.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하면요, 피아노를 열면 쇠판이 하나 나오지요? 그 프레임을 우리가 직접 제작해요. 모든 피아노는 우리가 직접 만든 프레임을 써요. 건반도 우리가 만들어요. 건반을 치면 안에서 작용하는 뭔가가 있지 않겠어요? 그게 싱크라고 그래요. 현을 때리는 해머가 있지요? 해머하고 액션 부위 전체가 또 있어요.

그걸 전부 우리 영창에서 직접 만들고 있다고요. 전부 완제품으로 들어가요. 영창피아노의 품질을 얘기하느라고 스타인웨이와 동급인 A브랜드 피아노를 말하게 됐는데 일부 부품만 가지고 얘기가 돼요? 솔직히 관악기는 이제 시작이다 보니 아직 얼굴을 쳐들기가 조금 쑥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피아노의 품질은 자신 있다고요.”

-그렇다면 OEM방식으로 생산한다는 얘기 아닙니까?
“사실 우리한테는 다행이고 자존심 상하는 문제가 아니더라고요. 우리한테 협상이 들어온 것이 영창을 인수하고 나서 2개월쯤 지나서인가? 2006년 7월이었으니까. 어느 악기회사가, 더구나 완제품을 생산하고 영창이라는 독자적인 브랜드를 가지고 있는데 남의 회사 브랜드로 OEM 생산하는 걸 좋아하겠어요. 자존심 상하고 스타일 구기는 일이라서 안 하지.

그러나 했어요. 왜, A브랜드 피아노이기 때문에 한 거예요. 협상을 받아들인 거지요. 그랬더니 결과적으로 아주 잘된 겁니다. 그 회사가 우리한테 주는 사양과 그 회사의 기술지도 방식, 품질, 그런 모든 게 사실 전부 우리 영창으로 이전이 되는 셈 아닙니까. 우리가 어지간한 바보가 아니라면 그렇게 되는 거 아니에요? 우리가 갖지 못했던 세계적인 A브랜드 피아노 기술이 전부 영창으로 왔다고요.”<계속>
“한국 주머니 채울 효자 노릇 할 것”
최소한 야마하 앞서는 게 목표…제2 창업으로 내년 100개국에 수출
현대家의 돌연변이 영창악기 ⑤

▶외국 연주자들이 커즈와일이 만들어낸 신시사이저를 연주해 보고 있다.


물론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기준으로 모든 제품의 우수성을 비교하는 것이 영원한 잣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세계 최고의 명품으로 손꼽히는 피아노라면 역시 스타인웨이를 선정하는 데 주저함이 없기 때문에 명품 시장에 나온 피아노들은 스타인웨이와 비교하는 것이다.

여하튼 영창악기는 그러한 스타인웨이에 버금가는 A브랜드 피아노에 납품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창악기가 세 번째로 내세우는 ‘제2 창업의 힘’이 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박병재 부회장을 배석해 인터뷰에 응한 김정현 기획이사는 즉각 ‘제품의 다양화’를 내세웠다.

경영진의 의지는 확고한 것이고, 자동화 시설투자와 기본적인 악기 제조회사로서의 생산시설은 다 완비됐기 때문에 경영진의 의지를 제외하고는 다양한 악기 제조가 영창의 미래를 담보하는 힘이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영창이 피아노밖에 모르던 회사였지 않습니까. 근데 악기 종류부터 확대를 해서 영창의 저력을 보여주고, 궁극적으로는 악기 액세서리까지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액세서리까지 생각하게 되는 건 사실 소비자와 좀 더 가까워져야 한다는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는 건데, 그게 악기의 종류를 알리는 판매 전략하고도 직결됩니다. 건반악기든 관악기든 현악기든 계속 종류를 늘려가는 것은 악기가 대리점을 통해 판매되는 특수성 때문이지요. 야마하도 우리와 똑같은 과거를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액세서리까지 팔고 있습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피아노는 부피가 크니까 대리점 공간에 제한을 받고, 그러면서 사람이 없습니다. 대리점을 찾아가면 피아노를 반드시 사지 않더라도 재미가 있어야 되는데 달랑 피아노만 있으니까 흥미가 없다 그거죠. 그래서 기타, 만돌린, 바이올린 같은 현악기에서부터 클라리넷, 색소폰, 플루트 같은 관악기도 팔고 악보도 팔고, 심지어 악기 형태의 액세서리까지 팔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악기의 다양화를 보여주는 핵심은 디지털 악기입니다.”

왜 디지털 악기 얘기가 나오지 않는가 했다. 전 세계적으로 흔히 전자악기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있는 전자오르간이나 전자피아노가 사실은 커즈와일(Kurzweil)에서 시작된 것이고, 그것의 특허권과 저작권을 영창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김정현 이사는 계속했다.

“디지털 악기시장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고 우리는 보고 있는데, 방금 말씀한 커즈와일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83년에 레이먼드 커즈와일(Raymond Kurzweil)이라고, 미국의 인공지능 미래학자인데 그 사람이 컴퓨터 쪽에 천재입니다. 8세 때 이미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피아노 음악을 개발한 소년 과학자지요. 미국에서 획기적인 발명 공로자에게만 수여하는 대통령상을 세 번이나 받았으니까요. 그 사람이 83년에 빌 게이츠처럼 자기가 워낙 머리가 좋으니까 공부보다 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커즈와일 뮤직시스템즈라는 전자악기 제조회사를 차린 겁니다. 바로 그것이 커즈와일의 시작입니다. 맹인 가수 스티비 원더가 시각장애로 다른 악기까지 사용하기가 어려우니까 하나의 악기에서 다양한 음원이 나오도록 개발해 달라고 부탁해 만들어낸 것이 ‘신시사이저’라는 것이고요. 하여간 그런 독특한 악기까지 영창에서는 다양하게 제품 구성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디지털 악기 시장도 공략

말하자면 전통음악과 첨단공학이 만나 하나의 건반 위에서 모든 음색이 연주될 수 있도록 공학도들과 음악가들이 창조해 낸 것이 신시사이저라는 얘기였다. 그때부터 사실상 신시사이저는 전자악기의 대표주자로 부상하면서 디지털화를 시도해 인공지능, 디지털 신호처리, 사운드 샘플링 등으로 세분화되면서 가장 원음에 가까운 소리로 각종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구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커즈와일은 이미 현대산업개발에서 영창을 인수하기 전부터 영창의 고유 악기로 시장을 파고들지 않았습니까? 대중가수들의 공연장에서도 신비스러운 소리를 내면서 자극적인 음색까지 토해 내 관중을 열광시키고 그랬죠.
“맞습니다. 그게 신시사이저죠. ‘커즈와일 뮤직시스템즈’라는 회사는 사실 현대산업개발이 지금의 영창을 인수하기 전에 전임 경영진에서 600만 달러에 인수했어요. 영창 쪽에서 프러포즈를 했고, 그게 1990년이었는데 당시 야마하도 인수하려고 덤볐습니다. 그때 야마하는 독자적으로 전자악기 회사를 가지고 있었는데도 워낙 뛰어난 사운드를 내니까 탐을 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최근의 시장 변화는 일반 업라이트 피아노에서 디지털로 바뀌는 양상입니다. 앞으로 전자악기 시장은 더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는 게 업계의 전망인데, 그렇게 되면 제품의 다양화도 좋지만 피아노 시장이 잠식된다는 점에서 우려가 없습니까?
“굉장히 조심스럽게 시장 변화를 주시하고 있습니다만 근본적으로 미국도 그렇고 일본, 유럽도 그렇고 점점 디지털 피아노 시장이 커질 거라는 전망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솔직히 고민이 많지만 현실을 외면하고 승부를 건다는 건 어리석지 않습니까. 근데 피아노는 항상 일정량의 시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확대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피아노를 치는 사람은 피아노를 고집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디지털 피아노는 새로운 고객을 유혹하는 전략으로 나가야지 기존의 피아노 시장을 축소시키는 전략은 쓰지 않겠다는 것이죠. 아마 박 부회장님도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실 겁니다. 전문 연주가들은 피아노를 치고 디지털 쪽은 새로운 패션으로 접근한다는 거지요. 그렇게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봐도 맞아 들어갈 것 같습니다. 우선 디지털 피아노는 취미생활도 되고, 가격도 70만원에서 보통 100만원까지 다양합니다. 물론 400만원짜리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자신만의 공간에서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피아노처럼 덩치가 큰 것도 아니고. 물론 어지간히 나빠지지만 않으면 피아노는 계속 치던 것을 치기 때문에 성장에 한계가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요.”

박병재 부회장은 피아노 시장이 어떻게 변해왔는가에 대해 흥미 있는 진단을 내놨다. 그동안 전 세계적으로 피아노 시장은 대단한 번창기가 있었는가 하면 인수합병(M&A) 바람이 불면서 피아노 제조공장이 하나도 없는 나라까지 생겨났고, 그러다가 다시 상승기를 맞을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는데, 바로 그런 악기시장의 변화를 보여주는 축소판이 중국 시장을 보면 안다고 했다.

“우리가 도표까지 만들어봤는데, 우리나라가 1956년에 영창악기가 생기고 58년에 삼익악기가 생길 때 딱 두 개 회사였잖아요? 출발을 그렇게 했어요. 근데 2007년 현재 피아노는 영창하고 삼익, 딱 두 개 회사가 남았거든? 정확하게 50년이란 기간 동안 그렇게 됐어요. 그러면 50년 사이에 몇 개 회사가 있었느냐, 47개 회사가 있었어요. 물론 25년이 흐른 시점을 정점으로 잡는다고 할 때 그때까지 47개 회사가 생겨났다는 거지요. 그러다가 정점에서부터 다시 25년 동안은 하향곡선을 그리면서 점점 줄어든 거지요. 그래가지고 50년이 되니까 다시 처음처럼 2개 회사가 남은 거예요.”

▶부지 30만 평에 자리 잡고 있는 중국 톈진의 영창악기 공장 전경.

-아, 그렇게 되는 거군요. 1956년 그 언저리에 2개 회사였던 것이 현재 두 개 회사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요. 물론 피아노의 경우겠지만요.
“그렇죠. 근데 중국이 딱 그 상황이에요. 중국도 굉장히 많은 피아노 회사가 난립했다가 현재 100여 개 회사가 있는데, 이게 앞으로 얼마나 더 살아남게 될지는 미지수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지금도 난리거든요? 환경에서부터 자금사정, 개발능력, 기술, 품질까지. 엉망이라고. 사회주의 국가니까 아직은 정부에서 막아줘서 그렇지 베이징 올림픽 끝나면 반드시 구조조정을 할 겁니다. 그렇게 안 하면 다 죽는걸? 저가에 품질까지 떨어지면 매정하게 날아가요. 붙잡는 사람도 없지만 붙잡는다고 생명이 부지되는 게 아니라고. 그게 피아노 시장이에요.”

-그런 변화를 내다보시면서 생각하시는 게 뭡니까?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거지요. 중국도 그나마 우리가 톈진 영창을 근사하게 개조하고 막 밀어가면서 시장을 넓히니까 정신을 차려가지고 경쟁 시스템으로 들어갔어요. 사실상 중국도 우리 영창하고 베이징 피아노, 이렇게 2개 회사가 붙었다고 보면 맞아요. 자기들 얘기로는 7~8개 회사가 경쟁력이 있다고 그러지만 내가 볼 때는 아니다 그거야. 베이징피아노가 영창의 2배 조금 넘는 연간 10만 대를 생산하는데 그것도 저가로 막 밀어내다시피 하거든요? 베이징피아노가 그러는데 다른 군소회사들이 어떻게 경쟁력을 가져요. 피아노는 품질 고급화가 생명이라고. 그러니까 중국도 2개 회사, 많아야 3~4개 회사가 남을 거고, 일본도 야마하하고 카와이 2개뿐이에요. 유럽의 경우엔 철저하게 가내수공업으로 1년에 100여 대를 생산하는 업체들인데 그나마 전부 망하거나 없어졌어요. 그런 변화를 보면서 내가 느끼는 게 뭐냐 하면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지나간 50년은 내버리고 지금부터 죽느냐 살아남느냐, 살아남게 된다면 매출이 수직상승을 할 거다 그거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품질이 뒷받침돼야 하겠지만 브랜드 인지도를 높일 수 있어야 하는 숙제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 때문에 머리가 허옇게 세고 있다고.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걸 다 열거할 수는 없고, 악기 종류를 늘리는 것도 마찬가진데 결국엔 고급 브랜드로 가야 하는 거예요. 고급 브랜드가 되어 있는 상태라야 대중성이 쫓아오는 것이지, 대중적인 이미지만으로는 생명이 길지 못해요. 이게 아주 중요한 얘기요. 브랜드만의 대중성을 얘기하거나 브랜드의 인지도만을 얘기하면 중·저가로도 돼요. 우리가 흔히 비교해 볼 수 있는 자동차, 미국 시장에서 수만 가지 자동차가 굴러가요. 그중에 대중성이 있고 인지도도 웬만큼 높은 차들이 있어요. 대체로 한국에서 나간 차들이 그래요. 근데 그게 고급 브랜드냐? 천만에. 이게 엄청 다르다 그거야. 저 차를 어떡하든 꼭 사야 되겠다, 적금을 들어서라도 저 차를 구입해야 되겠다, 이게 고급 브랜드야. 인지도도 있고 브랜드로서 조금 알려져 있는 차다? 그까짓 거야 함지박 속에 쌓여 있는 단감 골라 사듯이 사면 돼. 그런 차이라고. 그래서 피아노의 브랜드는 고급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심어놓지 않으면 영원히 2등, 3등이에요.”

-고급 브랜드로 업그레이드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게 안 되면 안 하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할 때는 자신 없이 함부로 말 안 해요. 그렇다고 전략과 기업정책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야마하가 2개의 원음을 구현했는데 우리는 13개를 구현했어요. 피아노? 디자인에서부터 획기적으로 변화를 줄 겁니다. 이 정도만 하지요. 최소한 야마하는 능가할 수 있어야 하잖아요?”

-영창악기의 생산직 직원의 평균 근속연수는 어느 정도나 됩니까?
“직원이 한국에 340명, 중국은 톈진 공장에서 핵심부품을 거의 다 만들기 때문에 1250명이 있고, 그 외 미국에 50여 명이 있는데 인천 공장만 하더라도 생산직이 100여 명 돼요. 그들의 평균 근무연수가 22년 정도예요. 10년차에서 30년차 직원들도 있지만 벌써 평균 20년이 훌쩍 넘으니까 전부 박사들이야.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기술자들이라고요. 물론 중국 공장에서 생산되는 피아노하고 한국에서 생산되는 피아노는 사양이 약간씩 다르지만 기술은 차이가 없어요.”

결국 고급 브랜드로 가야

-몇 나라에 수출하고 있습니까?
“일본 시장까지 포함해 약 50개국인데, 작년에 인수할 당시에는 20여 개국밖에 안 됐었다고요. 내년까지 목표는 100개국인데, 일본 시장을 뚫었다는 것은 평가할 만하지요. 야마하와 카와이가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시장을 영창이 뚫었다는 것은 건설업체가 진출하는 것 이상으로 힘든 겁니다. 유럽, 아시아권과 남미 시장도 열었는데 특히 동구권 국가들은 불모지였고 워낙 문화적으로 발달한 나라들이라서 힘들었지만 시장을 열었습니다. 러시아, 스페인, 폴란드, 헝가리까지. 어쨌든 조금만 기다려줘요. 자동차나 조선 정도는 아니더라도 영창악기가 전 세계에서 한국의 주머니를 배부르게 만들 효자 노릇을 할 때가 곧 올 테니까요.”

박 부회장은 경력이 다양한 사람이다. 경력이 다양하다는 것은 그 속에 전략도 함께 배양시켜왔다는 것이 된다. 제2의 창업을 언급할 정도라면 간단한 작심을 한 것이 아닐 것이다. 야심을 불태우겠다는 얘기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