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 삼한(촉한) - 관제 (관우)/유비

지식창고지기 2009. 8. 9. 08:17

관제 (관우)

關帝 (關羽)



<하남성 낙양 관림의 관우상>

 

중국 삼국시대 촉(蜀)의 관우(關羽:?~219)를 무신(武神)으로 받들 때의 이름.

악령을 제어하는 힘이 매우 강해서 극중에서 관우의 역을 맡은 배우에게도 그의 영력이 미친다고 믿을 만큼 민중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예전부터 군인들은 말할 것 없이, 많은 상인이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관우를 자신들의 후원자로 섬겼다.

예를 들면 두부 장수들이 관우를 자신들의 후원자로 생각하는 것은 관우가 젊은 시절 두부 장수를 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기사도 정신이 살아 있던 3세기의 관우는 명대 소설 〈삼국지연의〉를 비롯한 민간 전설 및 희곡 등에서 낭만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가 어떻게 도원결의(桃園結義)의 3형제가 되었는가는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짚신을 삼으며 지내던 유비가 관우와 장비의 싸움을 화해시켰고, 3사람은 의형제를 맺어 죽을 때까지 충절을 지키자고 맹세했다.

219년에 관우는 포로가 되어 사형을 당했지만, 그 명성은 계속 높아져 '제'(帝)라는 칭호가 붙여졌으며, 마침내 1594년 명나라 신종(神宗)은 관우를 나라와 백성을 수호하는 무신(武神)으로 선포했다.

무묘(武廟) 또는 성무묘(聖武廟)라 이름붙여진 수많은 사당이 국비로 세워졌고, 2월 보름과 5월 13일에 제사를 지낸다.


한동안 망나니의 칼을 관우 사당에 안치한 적도 있었다.

범죄자에게 형을 집행한 뒤에 형집행을 맡은 최고 판결자는 사당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이는 죽은 사람의 혼이 감히 사당이나 판결자의 집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림에서 보이는 관우는 녹색 옷을 걸쳤고 붉은 얼굴을 하고 있으며, 거의 항상 아들과 종자(從者)를 데리고 있다.

중국 고전 〈좌전 左傳〉을 들고 있는 그림도 있는데 그는 이 책을 모두 외우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암기술 때문에 문장가들은 그를 문제(文帝)와 함께 문예(文藝)의 신으로 받들고 있다.


17세기에 관우 숭배는 조선으로 전해져 관우가 일본의 침략에서 나라를 구해주리라고 믿는 민간신앙이 되었다.

 

 

유비 劉備


161~223. 4.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221~263/264)의 창건자.

자는 현덕(玄德). 시호는 소열제(昭烈帝)·선주(先主).


한(漢) 경제(景帝)의 아들인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예라고 한다.

14세기 중국 역사소설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후덕함과 지혜로 군인과 사대부들의 신망을 받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학문보다는 호걸들과의 교류를 즐겼으며, 관우(關羽)·장비(張飛)와 의형제를 맺었다.

후한말 황건(黃巾)의 난을 진압하는 데 참여하여 고당현령급평원상(高唐縣令及平原相)에 임명되었고, 조조(曹操)의 추천으로 예주목(豫州牧)이 되었다.

 

당시 군벌들의 할거로 일찍이 공손찬(公孫瓚)·도겸(陶謙)·여포(呂布)·조조·원소(袁紹)· 유표(劉表)의 밑에 있었다.

그후 헌제(獻帝)의 측근인 조조를 타도하는 계획에 가담하여, 이전에 친분이 두터웠던 그를 적으로 삼아 한의 부흥을 꾀했다.

207년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통해 제갈량(諸葛亮)의 도움을 받아 군사력을 키웠다.

이듬해 손권(孫權)과 연합하여 조조의 대군을 적벽[赤壁]에서 격파하고, 형주(荊州)를 점령하여 스스로 형주목(荊州牧)이 되었다.

 

후에 익주(益州)와 한중(漢中)을 점령했다.

221년 황제임을 선포하여 청두[成都]에 수도를 세우고 국호를 촉한이라고 했다.

221년 동오(東吳)를 격파하는 데 힘을 기울였으나, 222년 효정에서 대패했다.

이듬해 4월 영안(永安 : 지금의 쓰촨 성[四川省] 펑제 현[奉節懸] 동쪽)에서 병으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