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 진晉,5호胡16국國 ( 265~420 ) - 동진시대

지식창고지기 2009. 8. 9. 11:07

동진시대


낙양과 장안이 모두 함락되자, 낭야왕 사마예(司馬睿)는 주위로부터 황제에 추대되어 즉위하여 연호를 태흥(太興)으로 고쳤다.

그리고 건강에 도읍을 정하니, 이 왕조를 동진(東晉)이라고 부른다.


한편 4세기초 서진이 멸망할 무렵 중국북부와 서부에 근거지를 두고있던 흉노(匈奴), 갈, 저, 강(羌), 선비(鮮卑)등의 오호(五胡)들이 중원지역에 각기 자신들의 정권을 수립하므로, 양자강 상류와 황하지역에는 무려 16개의 정권이 할거하는 오호십륙국(五胡十六國)시대가 전개되었다.


이들중 최초로 성립된 한국(漢國)은 유총이 죽은후 내분이 일어나 유요(劉曜)의 전조(前趙)와 석륵(石勒)의 후조(後趙)로 분열되었다.

이후 후조는 전조의 군사를 대파하고 유요를 죽임으로써 전조는 37년만에 멸망되었다.


그 이후 후조는 선비족 출신인 모용씨(慕容氏)에게 멸망당하고, 그 뒤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은 저족의 전진(前秦)에 의해 멸망당한다.


전진(前秦, 351 ~ 394)은 저족의 부씨(符氏)가 세운 정권으로 저족은 일찍이 사천, 섬서, 감숙성 일대에 살던 민족으로 부견(符堅)의 통치하에서 그 세력이 강성해졌다.

전진왕 부견은 강성한 세력을 바탕으로 동진(東晉)을 토벌키로 마음먹고, 383년 동진토벌의 기치를 들었다.

전진군은 보병 60만, 기병 27만으로 수로와 육로를 통해 동진을 공격하였다.

당시 동진(東晉)의 재상 사안(謝安)은 심사숙고 끝에 사석(謝石)을 대장군, 사현(謝玄)을 선봉장으로 임명하여 도합 8만의 군사로 전진(前秦)의 80만 대군을 맞을 태세를 갖추었다.

전진(前秦)과 동진(東晉)은 비수를 사이에 두고 포진했다.

동진(東晉)은 전진(前秦)보다 상당한 열세에 있었으나, 군과 민이 일치단결하고 죽을 각오를 했기에 그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반면 전진(前秦)군은 비수까지 오는동안 극심한 더위로 병을 앓는 사람들도 생겼으며, 여러 이민족이 혼합되어 있었으므로 그 단합력도 떨어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동진(東晉)은 적극적인 공격으로 전진의 선봉을 무너뜨렸다.

그리되자 전진(前秦)군은 누구 할것없이 흔어져 달아나기에 바빳으며, 진왕 부견(?堅)도

말에올라 도망칠 정도였다.


이리하여 싸움은 동진(東晉)의 승리로 끝나고 부견은 겨우 10만의 군사만을 이끌고 장안(長安)으로 돌아왔다. (비수전투)


한편 부견의 위세가 쇠퇴해지자 부견의 힘에 눌려있던 소수민족의 우두머리들은 앞다투어 부견(符堅)의 곁을 떠났다.

모용수(慕容垂)가 이틈에 군사를 모아 중산(中山)에 도읍하고 연(燕)나라를 일으켰다.(385년)

이를 후연 이라한다(後燕)


또한 모용수(慕容垂)의 동생 모용충은 선비족을 규합하여 부견에게서 장안을 빼앗았다.

장안(長安)마저 빼앗긴 부견(符堅)은 오장산(五將山)으로 피신하였는데, 강(羌)족의 요장(姚?)이 오장산을 포위해 버리고는 부견에게 옥새를 빼앗고, 부견을 살해하였다.


요장은 나라이름을 진(秦)이라 정하고 나라를 세우니, 이를 전진(前秦)과 구분키 위하여 후진(後秦)이라고 부른다.


모용수의 후연(後燕)과 요장의 후진(後秦)은 동서로 대치하면서 강대국으로 부상하였고, 이외에도 서진(西秦), 후량(後凉), 남량(南凉), 서량(西凉), 하(夏)등의 나라들이 할거하였으며, 후연(後燕)은 다시 또 남연(南燕)과 북연(北燕)으로 나누어 진다.

이들 10여개국이 중국 북부를 다투다가 이후 선비족의 척발씨(拓跋氏)가 세운 북위(北魏)에의해 통일되었다.

이 북위가 중국역사상 북조(北朝)의 역사를 열며 130년을 이어온 오호십륙국(五胡十六國) 시대의 종지부를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