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진의 멸망과 남조의 성립
한편 전진(前秦)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동진(東晉)은 전진으로부터의 위협이 사라지자 정치가 문란해지기 시작하였다.
효무제(孝武帝)는 주색과 유흥에 빠졌고, 불교사원 건립에 막대한 자금을 허비하였다.
396년 무제가 죽고 안제(安帝)가 즉위하였다.
그는 15세 였으나, 말도 제대로 못하는 정신 박약아였다.
당시 북부군의 총수가 왕공(王恭)이었는데, 북부군은 전진(前秦)과의 대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부대였다.
왕공은 이 북부군을 동원하여 정치의 쇄신을 강요했다.
하지만 398년에도 재차 군대를 동원했는데, 이는 사실 모반과 진배없는 행동이었다.
그런 그의 행동을 다른 장수들이 고이 보아줄 리 없었다.
그들중 유뢰지(劉牢之)는 북부군의 민심을 얻고 있었는데, 당시 조정의 실권자인 사마원현(司馬元顯)은 그런 유뢰지를 설득하여 왕공을 배반케 하였다.
유뢰지의 공격으로 왕공은 포로가 되어 건강(建康)으로 압송되어 참수당하였고, 유뢰지는 북부군의 총수가 되었다.
왕공의 모반이 실패한 다음해인 399년 손은(孫恩)이 난을 일으켰는데, 사마원현은 유뢰지가 이끄는 북부군과 환현(桓玄)이 이끄는 서부군을 연합하여 반란군을 모두 제거하였다.
그러자 환현의 권력이 점차 강대해지게 되었다.
그리되자 사마원현은 다시 환현을 토벌키로 마음먹고는 유뢰지를 동원하려 했는데, 유뢰지는 이미 환현과 협력하기로 약속을 한 상태였다.
믿었던 북부군 마저 없어진 사마원현은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수도로 공격해 들어간 환현은 사마원현을 비롯한 그 일당을 모조리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유뢰지를 회계내사(會稽內史)에 임명하였다.
이 회계내사는 요직이긴 하였으나, 회계로의 부임은 더 이상 북부군을 이끌수 없다는 뜻이 었다.
이같은 인사에 불만을 품은 유뢰지는 자신의 부하들을 모아놓고 환현을 도모할 계책을 논의하였다.
그런데 이때까지 배신만을 일삼았던 유뢰지에 협력하는 부하들은 없었다.
자신의 세력이 모두 떠나자 유뢰지는 북쪽으로 도망치다가 마침내 자살하고 말았다.
한편 조정에 모든 걸림돌을 제거한 환현은 태위, 대장군, 상국을 거쳐 초왕(楚王)이 되었다.
또한 이듬해인 403년엔 안제(安帝)를 폐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나라이름을 초(楚), 연호를 영시(永始)로 정하였다.
허나 환현이 황제에 오르자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으며, 곳곳에서 환현의 타도를 외치며 군사가 일어났다.
그중에도 유유(劉裕)가 두각을 나타내며 404년 경구성(京口城)을 빼앗고 북부군의 총수인 환현의 사촌 환수(桓修)를 목베었다.
그후 곧바로 수도 건강(建康)을 향해 군사를 돌리자 환현은 허겁지겁 도망치다 유유군에 붙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유유(劉裕)는 심양(瀋陽)에 유폐되었던 안제(安帝)를 복위시키고, 인심을 얻기위해 당시 혼란에 빠져있던 중원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손수 군사들을 이끌고 북벌에 참여하여 남연(南燕)을 멸망시키고, 이어 후진(後秦)마저도 멸망시켰다.
이에 유유의 명성은 크게 떨치게 되었도, 그 뒤 왕기지(王紀之)에게 명하여 안제를 시해하고 공제(恭帝)를 세웠으나, 그마저 위협하여 제위를 선양받아 송왕조(宋王朝)를 세우니 이것이 남조(南朝)의 시작이다.
이리하여 중국은 남조(南朝)와 북조(北朝)가 대치하는 시대로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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