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한중 교류의 서막을 연 서복(徐福)

지식창고지기 2009. 11. 6. 19:15

한중 교류의 서막을 연 서복(徐福)

 

 

 

<< 서복의 고향인 중국 장쑤(강소)성 간위(감유)현 서복사당에 있는 좌상과 서복 일행이 내한할 때 이용했을 범선. 서귀포시 제주서복연구회,<정방폭포서복유적조사보고서>(1992년) 8쪽.

 

 

불로초 얻었는가, 해동땅 건너온 그대


 

어릴적 어른들로부터 불로초를 구하러 진시황이 동남동녀 수천 명을 우리나라쪽에 보내왔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그런 선약을 구해 갔는지, 못갔는지는 저마다 하는 소리가 달라서 종잡을 수 없었고, 또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도 통 오리무중이었다. 그저 심심파적의 흥미거리로만 들렸다.

어쩌면 이것이 전설의 매력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 매력은 허망만이 아닌, 사실의 투영 때문일 수도 있다. 사실 전설은 상상과 가공이라는 허구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지만, 일정한 사실성과 역사성을 반영한다. 그래서 전설은 오래도록 전승되며, 또한 전설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방증적으로 조명하게 된다.

 

이 불로초 전설의 중심에는 서복(徐福:일명 서불)이라는 방사(方士)가 서 있다.

사실 서복이 바다로 동쪽을 향해 갔다는 ‘출해동도(出海東渡)’는 기원전 3세기께 중국과 한국, 일본 세 나라의 관계에 얽힌 역사적 현장으로서 그 의미가 자못 크다.

 

일본 사람들은 서복을 고대 일본문명을 일으킨 문명의 개조(開祖)로 보고 있다. 그래서 중국과 일본 학계에서는 일찍부터 활발한 연구활동을 벌여 관련 논문만도 200편 넘게 내놓았으며, 정기적으로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그러나 주요 당사자인 우리는 거의 소외되어 있다. 2년 전, 섬 고장 서귀포에서 어렵사리 ‘서복과 동아시아 문화교류’란 이름 아래 3국 학술모임을 한번 열었지만, 뭍 사람치고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중앙 언론에 보도 한 줄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사람들의 무관심과는 관계없이 전설과 그 주인공은 오늘날까지도 이러저러한 문헌기록과 유적유물, 그리고 민간 구전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중국의 사서 <사기>와 <삼국지>, <후한서>에 나오는 서복의 동도와 관련된 7종의 기사를 종합해 보면, 진시황은 방사 서복의 거듭되는 청을 받고 선약(불로초)을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 수천 명과 함께 오곡과 쇠뇌까지 지닌 각종 공장들을 바다에 들여보냈는데, 그들이 택한 행선지는 ‘가기에 멀지 않은’ 발해 한가운데에 있는 봉래산(蓬萊山)과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의 삼신산(三神山)이다.

 

그런데 선약을 구할 수 없게 된 서복 일행은 죽음이 두려워서 감히 돌아오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다가 회계(會稽) 바다 밖에 있는 단주(亶洲) 혹은, ‘평원광택(平原廣澤: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이 있는 그 어느 곳에 정착하였다는 것이다.

 

서귀포 정방폭포에 ‘이곳 지나가다’ 글 남기고 남해 금산 바위엔 ‘해 향해 예 올렸다’ 기록 한-중교류 서막이었나

 

이 내용 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서복 일행의 내한(來韓)과 관련된 것이다. 당초 행선지로 잡은 삼신산과 그 산들이 소재하는 발해, 그리고 종착했다는 단주가 다 한반도 판도 내에 속한다. 

 

 단군 이래 우리 겨레의 고유 신앙체계인 신선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진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삼신산은 오늘의 금강산과 지리산, 한라산을 가리킨다. 또 진대의 발해는 오늘의 발해와 황해를 망라한 한반도 주변의 해역이다.

 

회계는 오늘의 중국 절강성 회계이고, 단주는 선인들이 사는 동해 상에서 회계와 교역을 하는 곳이라고 하니, 십중팔구는 한반도 내의 어느 곳일 것이다. 단,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이 있는 땅이 어디인가에 관해서는 이론이 있는데, 일본 사람들은 그것을 서복이 일본에 이르렀다는 유일한 증거로 삼으며, 거기에 봉래산을 부사산(鳧繭箚내세우며 한술 더 뜬다. 신빙성이 없는 억지주장일 따름이다.

 

이러한 문헌기록과 더불어 서복의 내한과 관련된 유적유물로는 마애각(磨崖刻:절벽에 새긴 글) 5점과 암각(岩刻:바위에 새긴 글) 1점, 총 6점이 있는데, 그 중 명문을 남긴 대표적 유물은 제주도 서귀포 정방폭포의 마애각과 경남 남해군 금산(錦山)의 암각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정방폭포의 암벽에 ‘서복과지(徐福過之)’, 즉 ‘서복이 이곳을 지나다’라는 글이 옛 중국 문자의 하나인 올챙이 문자로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금석학자이기도 한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인 1840~49년 탁본했다고 한다. 19세기 말의 <삼한금석록>과 제주도 설화 속에도 ‘서복과지’ 이야기가 나온다.

 

이러한 기록과 전승으로 보아, 조선조 말엽 당시에는 마애각이 있었던 듯하며, 광복 뒤까지도 본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암각은 폭포 위에 전분공장이 들어서면서 폐수가 흘러내려 지워졌다고 전해진다.

 

다음으로, 지금도 또렷한 남해 암각은 금산의 한 평평한 바위 위에 새겨진 금석문(너비 1×0.5m)인데, 그 내용은 여태껏 수수께끼에 싸여있다.

 

16세기 전반 이맥(李陌)은 그 옛날 환웅시대의 수렵도 같기는 하지만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다고 하였다. 19세기 말엽에 와서야 이 각문을 서복의 내한과 관련시켜 해석하려는 시도가 나왔다.

 

금석문 학자 오경석은 탁본을 해 가지고 중국에 간 뒤 상형문 학자인 하추도(何秋濤)로부터 ‘서불기례일출(徐市起禮日出)’, 즉 ‘서불이 일어나서 솟아오르는 해를 향해 예를 올렸다’라는 해석을 받고 돌아왔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각문에 대한 논란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크게는 글자를 새겼다는 각문설(刻文說)과 그림을 새겼다는 각화설(刻畵說)이 맞서고 있다.

 

각문설에는 그것이 고문자이거나 상형문자, 혹은 진나라의 전자(篆字)일 것이라는 견해가 있으며, 각화설에는 물형그림이나 수렵그림, 혹은 태양을 상징한 그림이라는 주장이 있다.

 

진시황의 명 받자옵고 아직 동정인 수천명 데리고 뱃길이라 몇 만리 신선의 나라 찾은 서복   전설로만 남겨둘수야

 

이와 같이 아직 연구가 미흡하기 때문에 이 암각이 서복의 내한을 실증하는 유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래된 유물로서 서복 내한의 전설적 요소가 깊이 배어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고장(남해도)의 서리곶을 비롯해 주변 가까이에 관련 전설이 여러 건 있는 점 등을 감안한다면, 이 암각이 갖는 상징적 의미나 시사하는 바를 결코 무시 못할 것이다.

 

그밖에 서복의 내한에 관한 여러 가지 흥미로운 전설은 사실성을 한결 보강해준다.

서복이 제주도 영주산에서 ‘시로미’(한라산 1700m 이상의 고산지대에 자라는 상록관목의 완두 크기만한 식용 과실)란 ‘불로초’를 구해서 득의양양한 채 서쪽을 향해 귀로에 오른 포구라는 데서 ‘서귀포’란 이름이 지어졌다고 전한다.

 

지리산 어구에 자리한 전남 구례군 마산면 냉천마을은 서불과 동남동녀 500명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삼신산(지리산)에 가면서 이 마을에 들러 샘물을 마셔보니 물이 하도 차서 ‘냉천마을’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섬진강 지류인 구례의 서시천(徐市川, 서불의 불(市)자를 시(市)자로 오인) 이름도 같은 경우다.

 

이와 더불어 서복전설은 계발과 교훈을 보듬어주는 문학적 모티브로까지 승화하여 귀중한 민족문학유산으로 전승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가사 묶음집인 <경세설(警世說)> <백발가(白髮歌)>에는 서복의 맹랑한 구약 허사를 빗대어 인생의 허무함을 이렇게 개탄한다.

 

“서복의 동남동녀 돌어온지 뉘 들었노, 불사약 어디 있고 불로초 보았느냐, …가는 청춘 뉘 막으며 오는 백발 뉘 제할까‘. <심청전>에도 이러한 대목이 있다.

 

”동남동녀 실었으니 진시황의 불로초 캐러 가는 배인가, 방사 서시(서불의 오자) 없으니 한무제의 신선 찾는 배인가, 가는 길에 죽자해도 뱃사람들이 지키고, 살아가자 해도 돌아갈 나라는 멀고 아득하다“.

 

배에 실려 인당수의 제물이 되는 심청의 신세를 서복이 당한 비운에 비추어 애통해 하고 있다.

 

조선조 문인 신광한도 <기재기이(企齋記異)>에서 진시황의 허망한 꿈은 ”천하를 혼란시키고 만세에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하면서 ”신선이 될 분수도 없으면서 신선이 되는 약을 먹는 자는 한갓 그 수명을 재촉하기에 족할 따름이다“라고 신랄한 풍자를 보내고 있다.

 

그밖에 유명한 ’금란굴 전설‘은 불로초를 구하려는 것처럼 헛된 망상을 안고 무모하게 이땅을 범접하는 자들은 죽임만 당하게 된다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이런 여러가지 사실은 전설 속의 서복을 2천여 년 전 한중 교류의 역사적 현장으로 끌어내고 있다. 물론, 진나라 이전 시대에도 고조선과의 인적 , 물적 교류가 있어왔지만, 서복 일행처럼 수천 명이 대선단을 만들어 곡식과 무기를 싣고 오간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중국 해양사에서도 서복의 출해동도는 원양 항해의 효시라고 평가한다. 서복 일행은 낭아란 곳에서 출항해 산동반도의 연해를 따라 북상한 다음 발해를 건너 요동반도의 남해안을 거쳐 한반도의 서해안을 남하해 제주도나 남해안에 도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테면 고대 한중 해로의 연해로를 따른 셈이다. 그 선단 규모에 관해 동남동녀 3000명을 포함해 승선인원을 약 5300명으로 계산하는 학자가 있다.


아무튼 전말이야 어떻게 되었든간에 서복은 고대 한중 교류의 여명기에 그 서막을 연 인물임에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