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왕별희의 주인공 항우(項羽)
항우의 출신 배경
항우(項羽)의 본명은 항적(項籍)이며 하상(下相) 사람으로 자(字)가 우(羽)이다. 항씨 집안은 대대로 초(楚)나라의 명문가로 부귀영화를 누렸다. 항우의 조상이 지금의 하남성 침구현(沈丘縣)에 해당하는 항(項) 지역 제후로 봉해졌기 때문에 성을 항으로 삼았다.
기원전 223년 진왕(秦王 훗날의 진시황)의 명령을 받은 진(秦)나라 장군 왕전(王?)이 초나라를 공격해왔다. 이 전투에서 크게 패한 초나라는 형왕(荊王)이 포로가 되었고 멸국의 위기에 처했다. 이때 초나라 장수 항연(項燕)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창평군을 왕으로 옹립하고 회하(淮河) 남쪽에서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이듬해 재개된 왕전, 몽무(蒙武)의 파상공격에 창평군이 전사하자 항연 역시 자살하고 만다. 이 항연이 바로 항우의 조부이다. 비록 나라는 망했지만 진나라에 맞서 끝까지 항쟁했던 항연의 영웅담은 수많은 초나라 유민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항우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숙부인 항량(項梁)에 의지해 살았다. 항우는 어릴 때 글공부를 배우긴 했으나 중간에 포기했고, 검술도 배웠으나 이마저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항량이 화를 내며 그 연유를 묻자 항우가 대답했다. “글이란 성명을 기록하는 것으로 족하고 검은 한 사람만 대적할 뿐이니 제가 배울 만한 것이 못됩니다. 만인(萬人)을 대적하는 일을 배우고 싶습니다.”
이에 군대를 사용하는 병법(兵法)을 가르쳐주자 아주 좋아하긴 했으나 이마저도 대략적인 뜻만 파악하고는 깊이 배우려하지 않았다.
한편, 우연한 기회에 사람을 죽인 항량이 원수를 피해 오중(吳中 지금의 강소성 소주시)으로 도피하니 항우도 따라갔다. 당시 오중의 많은 인재들이 진나라에 대한 반감이 심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항량 주변에 사람이 모여들었다. 항량 역시 장래를 대비해 오중에 요역(?役)이나 상사(喪事)가 있을 때마다 자신이 나서 일을 주관하면서 인재들을 적절히 배치하며 인심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또 일을 시키면서 사람들의 다양한 재능을 파악했다.
한번은 진시황이 회계산(會稽山)을 유람할 때의 일이다. 항량이 항우와 함께 몰래 숨어 그 모습을 훔쳐보았다. 진시황의 호화로운 행차를 본 항우가 “저 사람의 자리를 내가 대신할 수 있으리라.”라고 말하자 항량이 그의 입을 틀어막으며 “경망한 말을 하지 말아라. 삼족이 멸할 수도 있다.”라고 제지했다. 하지만 항량은 이 일을 계기로 조카인 항우가 범상한 재목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때 항우는 키가 8척이 넘었고 힘이 천하장사라 큰 정(鼎)을 들어 올릴 만했으며 재기(才氣) 역시 범상치 않아 오중 젊은이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했다.
기원전 209년 진이세(秦二世) 원년 7월, 진승(陳勝) 등이 대택(大澤)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시발로 각지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같은 해 9월 회계군(지금의 절강성 및 강소성과 안휘성 남부 지역에 해당) 군수 은통(殷通)이 항량을 불러 은밀히 상의했다.
항량은 이 기회를 틈타 군수의 인수(印綬)를 차고 자신이 예전에 알고 있던 사람들을 불러 모아 군대를 일으켰다. 항량은 오중의 호걸들을 불러 모아 각기 재능에 따라 교위(校尉), 후(侯), 사마(司馬) 등의 직위를 하사했다. 이리 하여 항량은 단번에 회계군의 군수가 되었고 항우를 부장(副將)으로 삼았는데 당시 정예군 8000명을 얻을 수 있었다.
거짓에 속아 진(秦)나라 정벌에 나서다
한편 최초로 반란을 일으켰던 진승(陳勝)은 이때 이미 진왕(陳王)을 칭하고 있었다. 그의 부하 소평(召平)은 광릉 공격에 나선 진왕(陳王)이 패주해 진(秦)나라 토벌군이 온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두려움에 떨다 진왕의 명령을 사칭하며 항량에게 접근했다. 소평은 항량을 초왕(楚王) 상주국(上柱國)에 임명한 후 서쪽으로 진격해 진(秦)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항량은 소평의 말을 믿고 8천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 서쪽으로 진격했다.
이때 인근 동양현(東陽縣 지금의 강소성 우이현)에서는 영사(令史 현령 휘하의 관리로 감옥 관리를 담당) 진영(陳?)이 자의반타의반 현령으로 추대되어 2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항량은 자신의 군대가 규모가 작아 진영의 군대와 연합해 서쪽으로 진격하고자 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진영의 모친이 진영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항량이 회수(淮水)를 건너자 또 경포(?布 원래 이름은 영포), 포장군 등이 속속 군대를 이끌고 휘하에 들어와 병력이 순식간에 6~7만으로 불어났다. 항량은 하비(下? 지금의 강소성 비현)에 진을 치게 했다.
이때 또 다른 반란군 장수 진가(秦嘉)가 초나라 왕실의 후예인 경구(景駒)를 초왕(楚王)으로 옹립하고 초나라 수도가 있던 팽성(彭城 지금의 강소성 서주시) 동쪽에 진을 치고 항량을 막았다. 항량이 진가의 부대를 패퇴시키고 호릉(胡陵)까지 추격해 진가를 죽이자 그의 군대가 투항해 왔다. 항량은 진가의 군대를 병합한 후 호릉에 진을 치고 서쪽으로 진격하고자 했다.
이에 앞서 항량은 항우에게 따로 양성(襄城 지금의 하남성 양성현)을 공격하게 했는데 성의 수비가 굳건해 쉽게 함락시킬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성을 함락시킨 항우는 보복으로 성안에 있던 사람들을 모조리 생매장했다.
이때 최초로 군대를 일으켰던 진왕(陳王) 진승이 진(秦)나라 군대에 패해 사망한 것이 알려지자 항량은 각지의 반란군 장수들을 설현에 불러 모아 대사를 의논했다. 패(沛) 지역에서 군사를 일으켰던 유방(劉邦)도 패공(沛公)의 신분으로 이 회의에 참석했다.
범증(范增)도 이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는 원래 거소(居? 지금의 안휘성 소현)사람으로 당시 나이가 이미 70이었다. 평소 벼슬을 하기보다 집에 머물며 기묘한 계책을 생각하길 좋아했던 범증이 항량을 찾아와 다음과 같이 유세했다.
즉, 직접 왕 노릇을 하는 대신 초 왕실의 후손을 찾아 왕으로 옹립하라는 충고였다. 항량은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겨 남의 집 양치기로 있던 회왕(懷王)의 손자 웅심(熊心)을 찾아내 우이(?台 지금의 강소성 우이현)를 도읍으로 삼고 초회왕(楚懷王)으로 삼았다. 이때 진영(陳?)은 상주국(재상)이 되었고 항량은 스스로 무신군(武信君)을 칭했다. 이전까지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반란군들은 항량을 중심으로 모여 정식으로 나라꼴을 갖추게 된 것이다.
갑작스런 항량의 죽음
어느 정도 체제를 정비한 항량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항보(亢父 지금의 산동성 제녕시)를 공격했다. 그는 제(齊)나라의 전영(田榮), 사마용저(司馬龍且)의 부대와 연합해 동아(東阿)에서 진(秦)나라 군대를 대파했다.
항량은 이 기세를 모아 계속 진군(秦軍)을 추격해 서쪽으로 진격할 것을 촉구했으나 제나라는 고질적인 내분에 휩싸여 더 이상 진군할 의사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항량은 유방과 항우에게 각각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진격하게 했다. 유방과 항우가 나서서 성양(城陽)을 전멸시키고, 복양(?陽) 동쪽에서 진군을 격파하며 수차례 전과를 올리자 항량은 점차 진나라를 경시하고 교만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송의(宋義)가 항량에게 건의했다. “싸움에서 이겼다고 장수가 교만해지고 병사들이 나태해진다면 반드시 패하고 맙니다. 지금 병사들이 다소 나태해지고 있지만 진군은 날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교만해진 항량은 그의 충고를 무시하고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 항량은 송의를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송의가 제나라로 가던 도중 제나라 사신 고릉군 현(顯)을 만났다. 송의가 고릉군에게 말했다. “공께서는 무신군(武信君 항량)을 만나려 하십니까?” “그렇소이다.” “신이 생각하건대 무신군의 군사는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공께서 천천히 가신다면 죽임을 면할 수 있겠지만 급히 가신다면 화를 당하실 수 있습니다.”
과연 송의의 예측대로 진나라에서 모든 군사를 모아 장함을 지원하자 장함은 정도(定陶 산동성 정도현)에서 초군을 공격해 크게 무찔렀다. 이 와중에 항량도 전사했다. 이전까지 승승장구했던 유방과 항우도 진류(陳留) 공략에 실패했다. 지휘관을 잃고 우왕좌왕하던 초나라 군사들은 동쪽으로 물러나 팽성 주변에 진을 쳤다.
본색을 드러낸 항우
초나라 군대가 정도에서 대패하고 나라의 기둥이던 항량이 전사하자 회왕(懷王)은 큰 두려움에 휩싸여 도읍인 우이(?台)를 버리고 팽성으로 합류했다. 이곳에서 회왕은 항우, 여신(呂臣 초나라 장수)의 군대를 통합해 자신이 직접 지휘했다. 여신을 사도(司徒)로 삼고 여신의 부친인 여청(呂靑)을 영윤(令尹)으로 삼았으며 유방을 탕군의 군장(郡長)으로 삼아 무안후(武安侯)에 봉했다.
또 송의를 상장군(上將軍)으로 삼고 항우는 노공(魯公)에 봉해 차장(次將)으로 삼았으며 범증을 말장(末將)으로 했다. 여기서 송의가 상장군이 된 데에는 고릉군의 추천이 큰 영향을 끼쳤다. 고릉군이 일찍이 회왕을 알현한 자리에서 “송의가 무신군의 군사가 반드시 패할 것이라 말했는데 며칠 후 과연 그의 말대로 무신군의 군대가 패했습니다. 군대가 아직 싸우기도 전에 그 패배의 조짐을 알았으니 그는 병법을 안다고 할 만합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을 들은 회왕이 송의를 중용한 것이다.
이때 조나라가 진군의 공격을 받아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회왕은 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대군을 일으켰다. 여러 장수들이 상장군인 송의의 휘하에 속했는데 송의는 안양(安陽)에 도착한 후 46일 동안 머물면서 진격하지 않았다. 본래 송의의 의도는 진(秦)과 조(趙)가 서로 싸우다 지쳤을 때 어부지리를 얻는 것이었다.
그러나 송의는 “그렇지 않소이다. 지금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고 있는데 설사 승리한다 해도 피로해질 것이며 우리는 그 피곤한 틈을 이용할 것이오. 반대로 진이 승리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추격에 나서 진나라를 함락시킬 수 있소. 그러니 먼저 진나라와 조나라가 싸우게 하는 것이 상책이오. 갑옷과 무기로 무장하고 실전을 하는 일에서는 내가 그대만 못하겠지만 앉아서 책략을 꾸미는 일은 그대가 나보다 못할 것이오.”라고 말하며 거부했다. 그러면서 지휘관의 말을 듣지 않고 함부로 하는 자들은 목을 벨 것이라고 엄포를 놓은 후 아들인 송양(宋襄)을 제나라에 보내 제왕을 돕게 했다.
가뜩이나 송의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던 항우는 송의가 제나라와 손잡고 모반을 꾀했다는 구실로 송의를 살해하고 자신이 직접 상장군이 되어 모든 군대를 거느렸다. 이때부터 항우의 위엄이 온 초나라를 진동시켰고 다른 제후들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천하를 놀라게 만든 항우의 기세
조나라가 위험에 처하자 항우는 직접 장하(?河 하북성과 하남성의 경계를 흐르는 강)를 건너 거록을 구원했다. 항우는 장하를 건너자마자 타고 온 배들을 전부 가라앉히고 취사도구와 막사를 다 없애버린 후 겨우 3일분의 군량만 휴대하게 했다. 퇴로를 생각하지 않는 전술로 일종의 모험을 건 셈이다. 항우가 이렇듯 결사항전의 자세로 나서자 초나라 군사들도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다.
당시 조나라를 구하기 위해 달려온 제후 군사들이 10여 진영이었으나 모두들 함부로 군대를 움직이지 못했다. 초군이 진군을 공격할 때도 다른 장수들은 모두들 자신의 진영에서 관망하면서 돕지 않았다. 사실 오합지졸로 구성된 제후 군대가 막강한 전투력을 보유한 진나라 정예부대에 맞서 이렇다 할 전과를 올린 예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항우 휘하의 초나라 군사들은 이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초군은 일당십, 일당백의 용맹을 떨쳤으며 이들이 지르는 고함소리는 천지를 뒤흔들었다. 초군의 용맹한 모습에 제후 군사들은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진군을 무찌르고 난 후 항우가 제후군 장수들을 부르자 모두들 항우의 군문(軍門) 앞에서 무릎으로 기며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때부터 항우는 비로소 제후군의 상장군이 되었고 다른 제후들은 모두 그의 휘하에 속했다.
이때 진나라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나마 강력한 버팀목이 되어준 것은 극원(棘原)에 주둔하고 있던 장함이었다. 당시 초군의 기세에 눌린 장함은 직접적인 교전을 피하는 대신 장기전을 준비하며 대치상태에 있었다. 하지만 무능한 진이세가 사람을 보내 장함을 꾸짖으며 공격에 나설 것을 독촉하자 후환이 두려워진 장함은 심복인 사마흔(司馬欣)을 보내 황제를 알현하게 했다. 하지만 함양에 도착한 사마흔이 3일을 머물렀음에도 간신 조고(趙高)의 방해로 황제를 만날 수 없었다. 위험을 눈치 챈 사마흔이 급히 자신의 부대로 돌아오자 조고가 군사를 보내 추격해왔다.
사마흔은 장함에게 돌아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조고가 궁 안에서 전권을 행사하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제대로 일할 사람이 없습니다. 만일 이 전투에서 이긴다 해도 조고는 반드시 우리의 공을 시기할 것이며 져도 죽음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심사숙고하시기 바랍니다.”
조나라의 진여(陳餘) 역시 편지를 보내 장함을 설득했다.
항우의 살육
그런데 제후군대가 신안(新安)에 이르렀을 때 문제가 발생했다. 제후군 장병들은 예전에 진나라의 요역(?役)과 변경 수비 등에 동원된 적이 있는데 당시 진나라 군사들에게 심한 모욕을 당한 적이 있다. 이제 상황이 역전되어 진군이 항복해오자 제후군 장병들이 옛 원한을 구실로 진나라 병사들을 학대하고 모욕하며 노예처럼 부려먹었다.
일촉즉발의 위기
항우가 천신만고 끝에 함곡관(函谷關)에 도착했으나 관을 지키는 병사가 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게다가 라이벌인 유방이 이미 함양을 함락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화가 난 항우는 병사들에게 함곡관을 공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마침내 관내에 들어간 항우가 희수(戱水) 서쪽에 이르자 유방은 패상(覇上 지금의 서안시 동남쪽)에 주둔했다. 이때 유방의 좌사마(左司馬) 조무상(趙無傷)이 항우에게 유방이 관중의 왕이 되어 진귀한 보물을 다 차지하려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 말에 크게 노한 항우는 유방의 군대와 일전을 벌여 격파하리라 다짐했다. 당시 항우의 병사는 40만으로 신풍(新豊 지금의 섬서성 임동현)과 홍문(鴻門 산언덕 이름)에 주둔해 있었고, 유방의 10만 병사들은 패상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므로 직접 전쟁을 치른다면 유방에게 극히 불리한 상황이었다. 이때 범증이 항우에게 권고했다.
"패공이 산동에 있을 때는 재화를 탐하고 미색을 좋아했는데 지금 관내에 들어가서는 재물을 취하지 아니하고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으니 이는 그의 뜻이 작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사람을 시켜 그의 기(氣)를 살펴보게 했더니 모두 용과 범의 기세로 오색 찬연하니 이는 천자(天子)의 기세입니다. 빨리 공격하여 기회를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
그런데 항우 진영에서 이 소식을 듣고 마음이 불편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항백(項伯)이었다. 그는 초나라 좌윤(左尹)이자 항우의 숙부였는데 평소 유후(留侯) 장량(張良)과 아주 친했다. 예전에 항백이 진(秦)나라에서 사람을 죽여 위험에 처했을 때 장량의 도움으로 살아난 적이 있기 때문에 장량에 대한 항백의 감정은 각별했다.
항백은 그렇다면 내일 아침 일찍 항왕께 사죄하러 오라는 조건을 달고 유방의 부탁을 수락했다. 그날 밤으로 군영에 돌아온 항백은 항우에게 유방이 한 말을 낱낱이 보고했다. 그러면서 “패공이 먼저 관중을 공략하지 않았다면 공께서 어찌 들어오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 그가 큰 공을 세웠음에도 공격하려 하신다면 이는 의롭지 못한 일입니다. 부디 잘 대우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항왕이 이를 허락했다.
범증의 사주를 받은 항장이 들어와 “군왕과 패공께서 주연(酒宴)을 여시는데 군중(軍中)에 취흥을 돋울 만한 것이 없는지라 소장이 검무(劍舞)를 추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 항우가 이를 허락하자 항장이 검을 뽑아들고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항장의 칼끝이 유방을 노리고 있음을 눈치 챈 항백이 칼을 꺼내 들고 나와 같이 검무를 추면서 패공을 감싸면서 공격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장량이 군문(軍門) 앞에서 번쾌(樊?)를 만나 다급한 상황을 알리자 번쾌가 검을 차고 뛰어들었다. 중도에 자신을 가로막는 호위병들을 넘어뜨린 후 군막에 뛰어 들어간 번쾌가 두 눈을 부릅뜨며 항왕을 노려보았다.
항우가 무릎을 세우고 검을 만지작거리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면서 물었다. “대체 무엇을 하는 자인가?” 옆에 있던 장량이 “패공의 호위병인 번쾌라고 합니다.”라고 대신 대답했다. 번쾌의 용감한 행동에 대해 항우는 장사라고 칭하며 술 한 잔을 권했다. 번쾌는 항왕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는 선 채로 큰 잔을 비워버렸다. 그리고는 유방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했다.
자신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항우에게 아무런 응답이 없자 번쾌 역시 자리를 함께 했다. 유방은 이 틈에 화장실에 가는 척하며 군막을 빠져나왔다. 다급해진 유방은 뒷수습을 장량에게 맡기고 수레와 말도 버린 채 네 사람만 대동하고 샛길을 통해 패상으로 달아났다.
유방이 탈출한 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장량이 항우에게 나아가 “패공께서 술 기운을 이기지 못해 하직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대신 신 장량으로 하여금 백벽(白璧) 한 쌍을 대왕께 바치게 하고 또 옥으로 만든 술잔 한 쌍을 아부(亞父 범증을 말함)께 바치게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항왕이 유방의 행방을 묻자 장량은 지금쯤이면 이미 군영에 도달했을 거라고 대답했다. 항우는 별다른 대꾸 없이 구슬을 받아 자리에 두었으나 범증은 화가 나서 옥 술잔을 깨뜨리고는 탄식하며 말했다. “애송이하고는 천하 대사를 도모할 수 없구나. 항왕의 천하를 빼앗는 자는 분명 패공일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의 포로가 될 것이다.”
함양을 불태운 항우
이때 어떤 사람이 항우에게 권고했다.
“관중(關中)은 사방이 산하로 막혀 있고 땅이 비옥하니 도읍으로 삼아 패왕(覇王)이 될 만한 좋은 곳입니다.”
그러나 항우는 궁궐이 이미 불탔고 고향이 그리워서 “부귀한 뒤에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 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 누가 그것을 알아주겠는가?”하고는 동쪽으로 돌아갔다.
항왕에게 권고했던 사람이 “사람들이 초나라 사람은 원숭이가 관을 쓴 격이라고 하더니 과연 그 말이 사실이구나.”라고 말하자 화가 난 항우가 그를 삶아 죽였다.
불공평한 항우의 논공행상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유방을 견제하기 위해 관중을 3지역으로 나눠 진나라에서 투항한 장수들을 각각 왕으로 삼았다. 즉, 장함(章邯)을 옹왕(雍王)으로 삼아 함양 서쪽을 맡겼고, 사마흔(司馬欣)을 새왕(塞王)으로 삼아 함양 동쪽을 맡겼으며 장함에게 투항을 권유한 도위(都尉) 동예를 적왕(翟王)으로 삼아 상군(上郡 한중 동쪽)의 왕으로 삼았다.
그 외 여러 공신과 제후들을 각 지역의 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서초패왕(西楚覇王)이 되어 구군(九郡 지금의 하남성 동부, 산동성 서남부, 강소 및 안휘성 일부)을 봉지로 하여 팽성에 도읍을 정했다. 여기서 ‘서초(西楚)’란 팽성이 초나라의 서쪽에 위치하기 때문이며 다른 왕들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 패왕이라 했다.
항우의 독단과 제후들의 반발
기원전 206년 제후들이 자신의 군대를 철수시켜 각자 자신의 봉국(封國)으로 돌아갔다. 항우도 함곡관을 나와 자신의 봉국에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항우는 의제에게 사자를 보내 천도를 강요했다. 표면적인 구실은 원래 제왕의 거처는 강의 상류에 위치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속내는 따로 있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의제의 신하들이 점차 의제를 배반하고 항우에게 붙었다. 의제가 거추장스러워진 항우는 몰래 손을 써서 형산왕, 임강왕에게 알려 장강(長江) 가운데서 의제를 살해하게 했다.
한편 원래 한왕(韓王)이었던 성(成)은 유방을 도와준 관계로 항우의 눈 밖에 났는데 전공(戰功)이 없다는 구실로 왕위를 폐하고 후(侯)로 삼았다가 얼마 뒤에 죽여 버렸다.
항우는 또 원래 제왕(齊王)이었던 전불(田?)을 교동왕(膠東王)으로 옮기게 하고 제나라의 실력자 전영(田榮)을 무시한 채 제나라 장수 전도(田都)를 제왕(齊王)으로 삼아 임치(臨?)에 도읍하게 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전영이 반란을 일으키자 전도는 초나라로 도망갔고 전불은 항우가 두려워 마지못해 교동왕에 올랐다. 전영이 그를 쫓아가 살해한 후 스스로 제왕(齊王)에 올랐고 뒤이어 제북왕(齊北王) 전안(田安)마저 죽이고 3제(三齊)를 통일했다.
이외에도 원래 조왕(趙王)이었던 헐(歇)을 대(代)로 옮겨 대왕(代王)으로 삼고 그의 신하인 장이를 조나라 왕에 봉하자 항우의 처사에 불만을 품은 진여(陳餘)가 전영과 손잡고 항우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상산을 공격해 장이를 무찌르고 헐을 모셔와 다시 조왕으로 삼았다.
이런 혼란의 배후에는 애초 자신과의 친소관계에 따라 제멋대로 분봉한 항우의 불공평한 논공행상이 있었다. 하지만 이중에서도 가장 억울한 사람을 꼽자면 당연히 유방이었다. 애초 회왕의 약속에 따르면 관중에 먼저 진입한 사람이 관중 땅을 차지해야 했지만 마치 유배된 듯 궁벽한 파, 촉 땅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현실에 안주할 유방이 아니었다. 그는 한신을 대장군으로 등용해 본격적인 공략에 나섰고 아주 짧은 기간에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 배치된 삼진(三秦)을 모두 평정했다.
이후 공격의 방향을 동쪽으로 향하자 크게 노한 항우가 정창(鄭昌)을 한왕(韓王)에 임명해 유방의 공격을 막게 했다. 그러자 유방은 시간을 벌기 위해 장량을 항왕에게 보내 원래 약조대로 관중을 얻을 수 있게 해주면 즉시 동쪽으로의 진격을 멈추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항우의 처사에 불만을 품은 조(趙)나라와 제(齊)나라가 손을 맞잡고 초나라에 반기를 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항우도 마지못해 수락하고 북쪽으로 올라가 제나라와 교전했다. 이때 항우가 구강왕(九江王) 경포(?布)의 군대를 징발했으나 경포는 정세를 관망하기 위해 병을 핑계대고 나오지 않았다. 이 일 때문에 항우는 경포를 크게 원망했다.
인심을 잃은 항우
기원전 205년 항우가 북으로 성양(城陽)에 이르러 전영의 군대와 맞서자 전영이 패해 달아나다 평원(平原 지금의 산동성 평원현)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원래 전영 역시 백성들의 인심을 얻지 못하고 떳떳하게 등극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나라 사람들이 열심히 싸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항우가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에 들어와서는 항복한 장병들을 생매장하고 노약자와 부녀자들을 포로로 삼은 다음 성을 불살라버리자 제나라 사람들이 전영보다 항우를 더욱 원망하게 되었다. 이 틈을 타서 전영의 동생 전횡(田橫)이 살아남은 병졸 수만 명을 이끌고 성양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쉽게 이길 수 있었던 전투였으나 항우가 민심을 잃자 전황이 점차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항우가 제나라에 남아 계속 전투를 독려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듬해 봄에 한왕 유방이 다섯 제후들의 병사 56만 명을 통솔해 동쪽으로 진격해오자 다급해진 항우는 다른 장수에게 제나라 공략을 맡기고 직접 3만의 정예병력을 이끌고 초나라로 달려갔다.
유방의 뼈아픈 패배
이때 유방은 초나라의 도읍 팽성을 점령한 후 금은보화와 미녀들을 차지하고 날마다 주연을 베풀었다. 승리에 도취한 유방이 방비를 허술히 한 틈을 노리고 항우의 정예 군사들이 팽성에 도착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새벽부터 달려드는 초나라 군사들에게 군기 빠진 한군은 애초 적수가 되지 못했다. 정오 무렵 초군의 공세에 밀린 한군이 크게 패했다. 당시 도망치다 죽은 한나라 병사들이 무려 10만여 명에 달했다. 유방으로서는 사상 최악의 패배가 아닐 수 없었다.
초군이 한왕을 겹겹이 포위한 순간 갑자기 서북쪽에서 큰 바람이 일더니 사방이 칠흑처럼 어두워지면서 초군을 향해 불어왔다. 유방은 이 틈을 이용해 가까스로 수십 기의 병사와 함께 도망칠 수 있었다. 원래 유방의 계획은 자신의 고향인 패현에 가서 가족들을 데려가려 했으나 초군도 사람을 보내 유방의 가족들을 추격했다. 유방은 도중에 우연히 만난 아들 혜(惠 훗날의 혜제)와 딸인 노원 공주를 수레에 태우고 길을 재촉했다.
초나라 기병이 뒤를 쫓자 다급해진 유방은 자기 목숨이라도 살리려는 심정에 두 자식들을 수레 아래로 밀쳐버렸다. 하지만 수레를 몰던 하후영(夏候?)이 수레를 멈춘 후 다시 이들을 태우길 3차례나 반복했다. 우여곡절 끝에 유방은 위급한 순간을 간신히 모면할 수 있었고 적군의 추격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한편 유방의 부친인 태공(太公)과 아내는 이미 초나라 군사들의 포로가 되었다. 항우는 이들을 군중에 억류한 채 인질로 삼았다.
항우에게 크게 쓴맛을 본 유방은 형양(滎陽)에서 다시 군사를 모아 반격에 나섰다. 이에 팽성에서부터 한군을 추격해 온 초나라 군사들이 형양에서 가로막혀 더 이상 진격할 수 없게 되자 항우가 형양에 이르러 군사들을 독려했다.
진평의 이간책
유방은 원래 형양에서 황하(黃河)로 통하는 길을 수리해 진나라의 식량창고인 오창(敖倉)의 양식을 조달하고 있었는데 항우가 이를 알고 군사를 보내 식량을 탈취해갔다. 군량이 부족해진 유방은 서둘러 항우와 강화를 체결해 형양 서쪽으로 퇴각하려 했다.
항우가 이를 수락하려 했으나 지금 유방을 없애지 않으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한다는 범증의 간언을 듣고 형양을 포위해 유방을 죽이리라 결심했다. 다급해진 유방에게 모사(謀士) 진평(陳平)이 항왕과 범증의 사이를 갈라놓을 이간책을 제시했다.
진평의 이간책은 아주 간단했다. 귀가 얇고 의심이 많은 항우의 성격을 고려해 항우의 사신이 왔을 때 성대한 주연을 베풀려고 하다 “아부(亞父 범증)의 사신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항왕의 사신이로군.”이라고 말한 후 형편없는 음식을 가져다 접대했다. 분개한 사신이 돌아와 항우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항우는 범증이 유방과 사사로이 통한다고 여겨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점차 권력을 빼앗아버렸다.
항우의 의심에 크게 실망한 범증은 항왕에게 사직을 고하고 팽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독창(毒瘡)이 발병해 사망했다.
기신(紀信)의 살신성인
비록 진평의 이간책으로 항왕과 범증의 사이를 갈라놓긴 했지만 그렇다고 초군이 포위를 푼 것은 아니었다. 계속된 초군의 공격에 상황이 아주 위태할 무렵 한나라 장수 기신(紀信)이 나섰다. 그는 “사태가 이미 위급해졌으니 청컨대 제가 왕의 모습으로 꾸민 후 초군을 속이고자 합니다. 왕께서는 이 틈을 이용해 빠져나가십시오.”
한군(漢軍)이 한밤중에 형양 동문(東門)으로 갑옷 입은 여자 2천명을 내보내자 초군(楚軍)이 사방에서 공격해왔다. 기신이 수레에 타고 한왕 행세를 하면서 “성 안에 양식이 떨어져 한왕이 항복하고자 하노라.”라는 뜻을 전했다. 이 말에 승리를 확신한 초군은 모두 만세를 불렀다.
한편 이렇게 어수선한 틈을 이용해 유방은 수십 기의 병사들만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나와 성고(成?)로 달아났다. 뒤늦게 자신이 속은 것을 알게 된 항우는 기신을 불태워 죽였다. 마침내 형양성을 함락한 후 형양을 사수하던 한나라 어사대부 주가(周苛)에게 항우가 “나의 장수가 되면 공을 상장군으로 삼고 3만호의 후에 봉하겠노라.”라고 회유했지만 주가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항우는 화를 내며 주가를 삶아 죽였다.
위기에 처한 유방과 팽월의 도움
형양을 탈출한 유방은 구강왕 경포를 만나 함께 행군하면서 병사를 모집했고 성고(成?)에 들어가 다시 수비에 나섰다. 하지만 항우가 군사들을 이끌고 성고를 공격하자 다시 도망쳐 황하를 건너 장이와 한신의 군대에 기탁했다. 결국 성고마저 초나라에 함락되었고 대세는 완전히 초나라로 기우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초한(楚漢) 양국에 대해 중립을 지키고 있던 팽월(彭越)이 나섰다. 그는 항우의 성격으로 보아 한(漢)이 무너지면 자신도 무사하지 못하리라 여겨 황하를 건넌 후 동아(東阿)에서 초군을 공격했다. 초나라 장수가 전사하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항우가 직접 나서 팽월을 공격했다.
한편, 유방은 승승장구하던 한신(韓信)의 군대를 빼앗은 후 황하를 건너 성고를 재탈환하고 광무(廣武)에 주둔했다. 항우 역시 팽월을 물리친 후 다시 광무에 진을 치고 한군과 수개월간 대치했다.
이때 팽월이 여러 차례 양(梁) 땅에서 교란하며 초군의 보급로를 끊어버리자 항우가 이를 걱정했다. 다급해진 항우는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은 마음에 인질로 잡고 있던 유방의 부친을 삶아 죽이겠다며 유방을 협박했다. 하지만 본래 건달 출신인 유방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뻔뻔하게 대꾸했다. “전에 회왕(懷王)의 신하로 있을 때 그대와 내가 형제가 되기로 약속했으니 내 아버지는 곧 그대의 아버지이다. 그대가 아비를 반드시 삶겠다면 내게도 국 한 그릇을 나눠주기 바란다.”
항우가 노하여 태공을 죽이려 하자 항백이 만류했다. “천하의 일이란 아직 알 수 없으며 또한 천하를 도모하는 자는 자신의 집을 돌보지 않는 법입니다. 그를 죽인다고 한들 유익함이 없고 그저 화를 더하게 될 뿐입니다.” 이에 태공을 살려주었다.
초한(楚漢) 전쟁
초한 두 나라가 오랫동안 대치하면서 결판을 내지 못하자 장정들은 군역(軍役)에 시달리고 노약자들은 물자 운반에 지쳐버려 모두들 어서 빨리 전쟁이 끝나길 학수고대했다.
항우가 유방에게 “천하가 여러 해 동안 혼란스러운 것은 오직 우리 두 사람 때문이다. 애꿎은 천하 백성들을 고달프게 하지 말고 그대와 내가 자웅을 겨뤄보자.”며 맞대결을 제안했지만 이런 잔꾀에 넘어갈 유방이 아니었다. 유방은 “내 차라리 지혜를 겨룰지언정 힘을 다툴 수는 없다”면서 거절했다.
한번은 항우가 장수를 보내 한군에 싸움을 걸게 하자 한군에서 명사수로 유명한 누번(樓煩)이 나타나 오는 족족 활로 쏘아 죽였다. 자신의 장수가 세 차례나 누번의 화살에 쓰러지자 크게 노한 항우가 직접 갑옷을 입고 전투에 나섰다. 누번이 활을 쏘려고 하다가 눈을 부릅뜨고 크게 꾸짖는 항우의 소리에 놀라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진지 속으로 되돌아 온 후 다시 나오지 못했다.
또 한번은 양측이 광무산 골짜기에서 마주보며 설전을 벌였다. 유방이 항우의 죄목을 일일이 열거하며 화를 돋우자 항우가 숨겨 놓았던 쇠뇌를 쏘아 유방을 맞혔다. 불의의 습격에 부상당한 유방은 다시 성고로 도망쳤다.
한신의 활약과 성고 전투
이때 한신은 하북(河北)을 함락시킨 후 제(齊)나라와 조(趙)나라를 잇달아 무찔렀다. 한신의 군대가 초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항우는 장군 용저(龍且)를 보내 한신과 맞서게 했다. 하지만 믿었던 용저의 군대가 한신에게 크게 패하자 두려워진 항우는 무섭(武涉)을 보내 한신에게 천하를 셋으로 나누자고 제안했다. 즉, 초한(楚漢) 및 한신의 제(齊)가 각기 천하의 3분의 1을 차지하자는 매력적인 제안이었지만 유방에 대한 의리를 중시한 한신에게 거절당했다.
성고에서 한군과 대치하고 있던 항우는 팽월이 후방에서 또 식량보급을 끊어버리자 화가 나서 직접 팽월에 대한 공격에 나서기로 했다. 항우는 떠나면서 뒷일이 불안해 대사마 조구(曹咎)에게 절대 한군과 싸우지 말고 그냥 지키기만 하라고 당부했다.
처음에 조구는 항우의 명령대로 한군이 아무리 싸움을 걸어와도 응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군에서 사람을 시켜 5-6일 연속해서 초군을 모욕하자 조구가 노하여 전면적인 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한군에게 두려운 상대는 항우일 뿐 항우가 없는 초군은 애초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 전투에서 초군이 크게 패했고 대사마 조구, 새왕 사마흔 등이 패배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성고 전투의 소식을 들은 항우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돌아와야 했다. 돌아와 보니 한군은 식량이 풍부한 반면 초군은 오랜 전투에 지쳐 있었고 식량마저 떨어진 상태였다. 이때 유방이 항우에게 사람을 보내 가족들을 풀어줄 것을 요청했다. 처음에 거절하던 항우는 홍구(鴻溝)를 중심으로 천하를 동서로 양분할 것을 약속한 후에야 유방의 부모와 처자를 석방했다. 이후 항우는 곧장 동쪽으로 돌아갔다.
유방 역시 서쪽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장량과 진평이 반대하고 나섰다.
“한은 지금 천하의 반을 차지했으며 제후들도 모두 우리 쪽에 귀의했습니다. 초나라 군사들은 지치고 군량도 떨어졌으니 이는 하늘이 초나라를 망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기회를 이용해 탈취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놓아주고 공격하지 않는다면 호랑이를 길러 후환을 남겨두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유방이 이 말이 옳다고 여겨 항우와의 약조를 어기고 다시 초군을 추격했다.
최후의 승부 해하전투
기원전 202년(한 고조 5년) 유방은 항우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한신, 팽월 등과 함께 연합하기로 했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초군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유방은 함부로 공격에 나서지 못하고 수비에 치중했다. 조급해진 유방이 장량에게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묻자 장량이 말했다. “초군이 망하려 하는데 한신과 팽월은 아직 나누어 받은 봉지가 없으니 그들이 오지 않는 것도 당연합니다. 군왕(君王)께서 천하를 그들과 함께 나누실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그들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유방이 이 계책을 받아들여 초군을 물리치면 땅을 나눠주기로 약속한 후에야 한신과 팽월이 군대를 움직였다. 제왕(齊王) 한신의 군대가 출정하자 단번에 성부(城父)를 전멸시키고 해하(垓下 지금의 안휘성 영벽현 동남쪽)에 이르렀다. 상황이 불리한 것을 감지한 초나라의 대사마 주은(周殷)이 항우를 배반하고 연합군에 동참했다.
한군과 여러 제후의 군사들이 물밀듯이 진격해오자 항우의 군대는 해하에 방어벽을 구축했다. 하지만 군사는 적고 식량마저 떨어진데다 겹겹이 포위되어 군대의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었다.
어느 날 밤, 이렇게 대치한 상태에서 갑자기 사방에서 초나라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항우가 탄식하며 말했다. “한군이 벌써 초나라 땅을 전부 빼앗았단 말인가? 어찌하여 초나라 사람이 이리도 많단 말인가?”
이는 원래 한나라 병사들이 초나라 노래를 배워 초나라 사람처럼 가장한 것으로 일종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초나라 사람들은 특히 춤과 노래를 좋아하는데 깊은 밤에 구슬픈 노래를 들으면 듣는 이의 마음을 처량하게 만든다. 군사들이 이런 노래를 듣는다면 고향 및 가족 생각에 사기가 떨어지게 마련이다. 바로 이점을 노린 것이다.
항우의 최후
패배를 직감한 항우는 근심에 휩싸여 장막 안에서 술을 마셨다. 그에게는 우(虞)라는 이름의 미인이 있었는데 몹시 총애해 늘 옆에서 시중을 들게 했다. 항우에게는 또 추(?)라는 이름의 준마(駿馬)가 있어 늘 이 말을 타고 다녔다.
비분강개해진 항우는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노래로 불렀다.
“힘은 산을 뽑을 수 있고 기개는 온 세상을 덮건만 시운이 불리하여 추(?)도 나아가지 않는구나. 추가 나아가지 않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우(虞)여, 우여 내 그대를 어찌할꼬?”
항우가 여러 차례 노래를 부르니 미인도 따라 불렀고 그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리자 옆에 있던 병사들도 모두들 눈물을 흘렸다.
항우가 말을 타고 군영을 버리고 도망치자 그 뒤를 따르는 자가 800여 명에 불과했다. 이들이 한군의 포위망을 뚫고 남쪽으로 달아나자 한군은 기장(騎將) 관영에게 5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게 했다. 항우가 회수(淮水)를 건너니 자신을 따르는 기병이 겨우 100여 명에 불과했다. 중간에 길을 잃고 다시 동쪽으로 나아가 동성(東城)에 이르니 겨우 28기만 남았고 추격하는 한군 기병은 수천에 달했다.
이때 항우는 자신을 따르는 기병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군사를 일으킨 지 지금 8년이 되었다. 몸소 70여 차례 전투를 벌이며 일찍이 패배를 몰랐고 마침내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 곤궁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한 죄가 아니다. 내 오늘 정녕코 결사의 각오로 통쾌히 싸워 그대들을 위해 포위를 뚫고 적장을 참살하고 적군의 깃발을 쓰러뜨려 그대들로 하여금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못한 죄가 아님을 알게 하겠다.”
그리고는 자신의 말을 증명하기 위해 기병을 넷으로 나눈 후 사방으로 향하며 한군의 포위망을 뚫고 적장의 목을 베었다. 이때 항우 혼자 죽인 한나라 병사들이 100여 명이 넘었다.
항우가 다시 동쪽으로 나아가 오강(烏江)을 건너려 했다. 이때 오강의 정장(亭長)이 배를 강 언덕에 대고는 항우에게 강동(江東)으로 건너가 권토중래(捲土重來 한번 싸움에 패하였지만 다시 힘을 길러 쳐들어옴)할 것을 권했다.
“강동이 비록 땅은 작지만 사방 천리에 달하고 백성들의 수가 수십만에 이르니 그곳 또한 왕이 되실 만한 곳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얼른 건너십시오. 지금 신에게만 배가 있으니 한군이 쫓아온다 해도 강을 건널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항우는 웃으면서 거절했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데 내가 건너가서 무얼 하겠는가? 또한 내가 강동 젊은이 8천명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는데 지금 한 사람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으니 내 무슨 면목으로 강동 사람들을 대하겠는가? 설사 그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해도 내 양심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항우는 정장에게 자신의 애마를 맡기고는 적진을 향해 뛰어들어 수백 명의 한군을 죽인 후 장렬히 전사했다.
항우가 죽자 초나라의 모든 지역이 한나라에 투항했으나 오직 노현(魯縣)만 항복하지 않았다. 이곳 백성들의 의도가 군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절개를 지키려는 것임을 안 유방이 그 뜻을 갸륵히 여겨 항우의 머리를 가져다 보여주자 그제야 투항했다. 원래 회왕이 항우를 노공(魯公)에 봉해 이곳을 영지로 준 적이 있었다. 유방은 이에 대한 예우로 항우를 곡성(穀城)에 안장했다. 유방은 항씨 일족들을 아무도 죽이지 않았으며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항백은 후(侯)에 봉했다.
|글: 하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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