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명나라 건국시조 황제 주원장

지식창고지기 2009. 11. 6. 19:53

명나라 건국시조 황제 주원장

 

 

 

중국 명나라 시조황제 주원장(朱元璋)의 자는 국서(國瑞)이다. 호주, 종리(지금의 안휘성 봉양현) 출신으로서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주원장은 17살 나던 해 부모를 잃고 황각사에 들어가 수도승으로 있었다. 1352년 주원장은 곽자흥(郭子興)이 이끈 홍건군(紅巾軍)에 가입해 용감하게 싸워 이름을 날렸다.

 

1355년 곽자홍이 죽자 주원장은 곽군(郭軍)의 지휘권을 장악하였다. 병권을 장악한 주원장은 대군을 이끌고 원왕조의 수군을 크게 무찌르고 장강을 건너 강남으로 세력을 뻗쳤다.

 

주원장은1356년 집경로(集慶路 후에는 응천부 應天府, 南京이라 함)를 점령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응천부를 근거지로 삼아 주변세력을 확장해 장강 남북을 모두 차지하였다.

 

1368년 주원장은 응천부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국호를 명(明), 연호를 홍무(洪武)로 정했다. 황제가 된 주원장은 북방에 대군을 파견하여 원나라의 수도 대도(大都, 지금의 베이징)를 점령하고 원나라 순제(順帝)를 몽골초원으로 쫓아냈다.

 

그 뒤에도 몇 차례 대군을 파견하여 원나라의 잔존세력을 정벌하였고 1388년 통일을 완성했다. 주원장은 농민출신이였기에 왕위에 오른 후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생활을 안정시키는 정책을 실시하여 민심을 얻는 정치를 하였다.

 

그는 관리들에게 청렴결백하고 법을 지켜야 하며 뇌물을 받아먹거나 법을 어겨서는 안된다고 엄한 명을 내렸다.

 

후에 그는 황무지 개간을 독려하고 3년동안 부역과 세금을 면제하였으며 주둔군이 황무지를 개간하여 식량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도록 했다.

 

주원장은 도덕규범인 육유(六諭)를 정했으며 교민방문(敎民榜文)을 반포하여 백성이 지켜야 할 본분을 가르쳤고 황제에게 충심으로 복종할 것을 강요하였다.

 

1380년 승상 호유용이 역모를 꾀해 왕위를 차지하려고 시도한다는 고발을 받은 주원장은 호유용과 그 집안 뿐만 아니라 그와 연류된 15,000명의 역모 가담자와 그 일가들을 가차없이 죽였다.

 

호유용 사건이 발생한후 주원장은 군정 대권을 대신들에게 주는것이 안심이되지 않아 승상직을 취소하고 직접 5개 부의 상서(지금의 장관급)를 관할 통치하였으며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대도독부를 철폐하고 좌, 우, 중, 전, 후 5개 도독부를 새로 설치하였다.

 

결과 주원장 1인에게  모든 권력이 크게 집중되었다. 1382년 주원장은 자신이 직접 관할하는 국사기구인 금의위(錦衣衛)를 설치했는데, 금의위 관원들은 황제의 특명을 함부로 남용 행사하여 눈에 벗어난 관리들을 모반을 꾀한다는 죄명으로 문무관원과 그 일가족들 15,000여명을 죽였다.

 

하여 조정의 대신들이 거이다 숙청되어 이후 역사의 기록에는 명태조를 독재와 잔인한 성품의 황제로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