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에 여류 문인이 등장하는 일은 흔하지 않다. 그러나 송대(宋代)의 이청조(李淸照)는 중국 문학사상 가장 뛰어난 여류시인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녀의 작품은 널리 애송되고 있다.
중국의 문학을 흔히 “한문(漢文), 당시(唐詩), 송사(宋詞), 원곡(元曲)” 이라 하듯이 당대는 시(詩)가 문학을 대표하였다면, 서민적 사회였던 송대는 문예의 꽃이 피면서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음곡(吟曲)에 따라 노래하도록 지어진 사(詞)가 널리 유행하였다. 사는 오언절구나 7언 율시와 같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섬세한 미적 의식이나 정감을 개인의 독백 형식으로 풀어놓는데 이청조는 바로 이런 사의 명인이었다.
유년시절
이청조(1084~1151경)는 산둥(山東)성 지저우(齊州: 지금의 산둥성 지난(濟南))에서 태어났다. 호는 ‘이안거사(易安居士)’ 또는 ‘수옥(漱玉)’이라 하였으며 양송(북송과 남송)의 전란시대에 활동한 저명한 여류 사인(詞人)이다.
그녀의 아버지 이격비(李格非, 자는 文叔) 역시 북송시대 저명한 문장가이다. 유명한 문장가 소식(蘇軾)이 이격비를 특별히 아꼈는데 소식을 따라 학문을 크게 익혔으며 ‘소문후사학사(蘇門後四?士: 이격비(李格非), 료정일(廖正一), 이희(李禧), 동영(董?)를 이름)’라고 불릴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이격비는 산문, 시, 사에 뛰어났는데 이런 재능이 이청조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이격비는 영리를 구하지 않은 청렴한 관리 생활을 하였다.
이청조의 어머니 역시 명문집안 출신으로 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물이었다. 이처럼 이청조는 문학적 분위기가 농후한 가정에서 풍부한 역사와 문학 자료에 친근감을 가지고 성장하였던 것이다.
산수가 수려한 지난(濟南)에서 천진난만한 유년시절을 보내던 그녀는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그녀는 경사자집(?史子集), 시사가부(詩詞歌賦) 및 여러 문체에 눈을 돌려 문학적 재능을 개발하여 나갔다. 결혼
이청조는 18세에 조명성(趙明誠, 자는 ?甫)과 결혼하였다. 조명성은 당시 인재들이 모이는 태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태학생이었는데, 금석문(金石文)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조명성의 아버지 조광지(趙挺之)도 고관에서 봉직하고 있었으니 그 역시 명문가문 출신이다.
당시 풍습대로 그들도 서로 만난 적이 없는 상태에서 결혼하였지만 이들은 서로 사랑하며 상대를 존경하였다. 결혼 초의 생활은 부유하였고 남편 조명성과 함께 공동으로 서화 금석문을 수집 정리하였다.
조명성은 아내의 해박함과 문학적 재능에 감탄하여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송대는 여성에게 전족(纏足)을 시키는 등 여성을 남성의 부속물처럼 여기던 시대였지만, 그는 출중한 재능과 소탈한 성격을 가진 아내를 존중했으며 이청조가 자신의 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할 수 있도록 외조를 하였던 것이다. 이청조 역시 남편이 공명심이나 부를 탐하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몰두하는 일에 존경을 표하면서 그를 사랑했다. 조명성은 나중에 금석문에 해박한 지식을 갖게 되었고 결국 구양수를 이어 저명한 금석학자가 되었는데 이는 이청조의 도움이 컸던 것이다.
성품과 취향이 비슷했던 이들 부부는 ‘선 결혼 후 연애(先結婚後戀愛)’, 이른바 ‘먼저 결혼하고, 후에 연애한’ 전형적인 사례가 되었던 것이다. ?
당쟁과 전란으로 인한 수난
훗날 이청조의 아버지는 당쟁에 휘말려 정치적 모함을 당하고 그의 가문도 자연 몰락하였다. 당시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이 부국강병을 위하여 신법을 내세우자 보수파들은 이를 반대하였고, 결국 사마광을 중심으로 한 구법당과 왕안석을 중심으로 한 신법당이 대립하는 이른바 당쟁이 일어났는데, 이 때 이청조의 아버지는 구법당에 속해 신법을 반대하였다. 조정에서는 사마광 등 300여 명의 구법당 인사들을 간당(姦黨)이라 하여 그 이름을 돌에 새겨 전국 여러 곳에 세워(이것을 ‘원우당적비<元祐黨籍碑>’라 함) 탄핵할 정도로 억압하였는데 이청조의 아버지 이격비도 그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청조가 시집을 간 그 이듬해, 친정아버지 이격비는 탄핵되어 옥에 갇혔다. 반면 시아버지 조정지(趙挺之)는 구법당을 탄핵하는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이청조가 당시의 재상에게 마음을 감동시키는 장문의 편지를 써 보낸 바람에 이격비가 구출되기는 하였지만 많은 구법당 관료 학자들이 제거되고 이격비 가정도 몰락하게 되었다. 반면 조정지는 반대파 탄핵에 대한 공이 인정되어 후에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니 알고 보면 이청조는 정적(政敵)의 집안에 시집을 간 셈이었다.
1126년에는 ‘정강(靖康)의 변’이 일어났다. ‘정강(흠종의 연호)의 변’이란 여진족이 세운 금(金, 1115-1234)이 북송을 침입하고 휘종(徽宗;上皇), 흠종(欽宗) 등을 포로로 잡아감으로써 북송이 멸망당한 사건을 말한다. 요를 멸망시킨 금이 1123년 연경 부근의 6주를 송에게 할양해 줄 때 송과 맺은 약속을 송이 이행하지 않는다 하여 금은 송의 수도 카이펑(開封)을 공격하였다. 이에 송은 세폐(歲弊)의 지불, 영토 일부의 할양 등을 조건으로 화의를 맺었으나 송이 약속을 지키지 않음으로 금군이 재침하여 카이펑을 함락하고(1126), 이듬해에는 휘종·흠종을 비롯한 황후·태자·비빈·대신 등 3천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을 뿐 아니라 많은 재물을 약탈하여 갔는데, 이로 인하여 북송은 멸망하고 말았다.
이후 흠종의 동생 고종(高宗)이 즉위하여 송왕실을 재건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린안(臨安, 오늘의 杭州)에 도읍하니 이를 남송(1127-1279)이라 한다.
이런 전란 가운데 이청조 부부도 사람들을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였다. 정처 없는 피난길에도 이들 부부는 오직 서화 및 골동품에 대한 애착뿐이었다. 피난 생활 중 이청조 남편 조명성은 남송 지배 하에서 후저우(湖州)의 지사(知事)로 명을 받았다. 평소 관직에 관심 없던 그였지만 나라가 여진족에 빼앗기는 것을 그저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선뜻 응했다. 그러나 후저우 지사가 된 지 얼마 안 되어 그는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청조는 고향도, 사랑하는 남편도 전란 중에 잃고 말았다. 당시 이청조의 나이는 45세였는데 남편이 병사하자 이청조는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그녀의 일생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꽃이 피고 달이 뜬 한가위 밤에 이미 세상을 떠나 없는 남편과의 다정했던 옛날을 회상하면서 그녀가 지은 시가 유명하다. 한없이 깊어만 가는 외로움을 달랠 길 없어 몸부림치는 작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십오 년 전 달빛 어린 꽃 아래서 (十五年前花月底) 서로 함께 그 꽃 보며 시를 지었도다. (相從曾賦賞花詩) 지금 보니 그 꽃 그 달 옛날 그대로이건만 (今看花月渾相似) 이내 마음 어찌 옛적과 같으리오 (安得情懷似往時)
그녀는 외로운 신세가 되어 항저우(杭州), 위에저우(越州) 등지를 돌아다니며 지내다가 만년에는 진화(金華)에 있는 동생 집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그녀는 다시 남편이 그토록 애착을 가지고 작업하던 『금석록(金石錄)』이라는 책을 완성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금석록』은 철, 동 비석 등에 새겨진 글을 모아 연구한 책으로, 그녀는 예술품과 책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 가면서 저서를 완성하였다. 후에 『금석록』은 중국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이청조는 문학상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녀는 시(詩), 사(詞), 문(文), 부(賦) 등의 장르에 탁월한 작가이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의 명성을 높인 것은 사(詞)이다. 젊었을 때 이미『사론(詞論)』펴 일가를 이루었다. 그녀가 지은 사의 작풍은 사체와 음률의 어울림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서정적인 점이 두드러지고 있다. 우미(優美) 섬세함을 기조로 하면서도 당시의 구어(口語)를 대담하게 삽입하여 재기 넘치는 작품들을 많이 지었다. 특히 유랑 후의 작품에는 인생의 고독과 불안을 투시한 청렬(淸冽)한 맛이 가미된 송사(宋詞)의 최고 수준을 나타냈다. 그녀는 이안체를(易安體)를 창립하였고 아울러 남당의 황제 이욱(李煜), 송대의 진관(秦觀), 주방언(周邦彦) 등과 함께 이른바 ‘완약파(婉約派)’ 를 이루어 중국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이청조는 남편이 죽은 지 3년 후에 장여주(張汝舟)와 재혼하였다. 남편과의 사별, 금의 침입으로 인한 전란, 거기에 몸에 병까지 들어 더욱 생활이 처참하게 되었을 때, 장여주가 찾아와 그녀를 격려하자 심약해 있던 이청조는 그에게 마음을 주고 재혼하였다. 외로웠던 이청조는 의지할 대상을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장여주가 50세가 다 된 이청조를 아내로 맞은 것은 그녀의 재산이 탐이 나서였다. 그렇기에 장여주는 그녀의 재물만을 탐하면서 학대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로 인해 그들은 서로 자주 다투게 되었다. 끝내 이청조는 남편과 약 100일 만에 헤어지고 말았다.
그녀가 재가한 것에 대해서는 일부 비난의 목소리가 없지 않다. 이청조의 탁월한 문학적 소양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이청조가 절개를 지키지 않고 다시 재가를 했다는 데에 대한 비난이다. 그러나 왕안석도 과부의 재혼을 권하고 있듯이 당시에는 재혼이 비난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 같다. 또 당시 몰락한 가정의 여인의 몸으로 혼자『금석록』이라는 방대한 거작을 집필하고 출판하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동정심을 보이는 사람도 있다.
생에 대한 예리한 묘사는 사색의 여운을 남기고
그녀의 작품 세계를 보면 전반기에는 밝은 면이 많았으나 후반기에는 쓰라림, 애달픔 등이 많이 배어있다. 당쟁, 전란, 거기에 남편의 죽음, 재혼, 방랑 생활 등 시대의 아픔과 환경의 변화는 그의 삶을 애달프게 하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 가운데에는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고뇌와 번민을 많이 그렸는데 그녀의 작품은 표현이 섬세할 뿐 아니라 심정과 자연 풍경에 대한 세밀한 묘사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사색의 여운을 남겨주고 있어 중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말년의 작품 『성성만(聲聲慢)』은 자연의 정경과 심경을 잘 묘사하고 있는데 후반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地?花堆? (널리 펼쳐진 정원의 황화(국화 꽃) 떨어져 쌓이는데 ) 憔悴損 (시들어 하나도 남김없이 다 지고 있으니 ) 如今有?堪摘 (지금 어디서 더 딸 것이 있으랴) 守著?兒 (창가에 기대어 그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데) ?自?生得黑 (외롭게 어찌 밤을 맞으리오) 梧桐更兼?雨 (떨어지는 오동잎 거기에 더불어 내리는 가랑비) 到?昏 点点滴滴 (황혼에 이르러 뚝뚝 떨어지니) ?次第 (이러한 정경 ) ?一?愁字了得 (어찌 한낱 ‘수(愁)’라는 한자만으로 다 표현해 낼 수 있으리오)
이청조는 나라를 빼앗기고 남편과의 사별, 재혼의 실패 등 실의에 찬 생활을 하다가 1151년에 지난에서 6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산둥성의 지난시에 가면 천성광장(泉城廣場) 맞은편에 맑은 샘이 있는 표돌천공원(?突泉公園)이 있다. 공원 안의 수옥천반(漱玉泉畔)에 그 고장 출신의 여류작가 이청조를 기념하기 위하여 이청조기념당(李?照紀念堂)을 만들어 시민들과 관광객들로 하여금 그녀를 기리도록 하고 있다. 산둥성 칭저우(靑州)시에서도 칭저우시 박물관 옆에 이청조기념관(李?照記念館)을 설립하여 유물들을 진열하여 두었다.
이청조는 그간 『이안거사문집(易安居士文集)』,『이안사(易安?)』등 7권의 수필과 6권의 사집을 냈으나 소실되고 단지『수옥사(漱玉詞)』를 중심으로 여기저기서 조금씩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의 작품은 남송 시대의『악부아사(?府雅詞)』가운데 있는 「이이안사(李易安詞)」23수, 명말 『수옥집(漱玉集)』의 17수, 청말 『수옥사(漱玉詞)』의 50수, 조만리(趙万里) 편집의『수옥집(漱玉集)』60수, 중화인민공화국시대의『이청조집(李?照集)』78수 등이 있으며 인민문학출판사(人民文?出版社)에서 간행한『이청조집교주(李?照集校注)』는 비교적 잘 정비된 전집으로 오늘날 남아 있는 이청조의 작품(사, 시, 문 등)을 총망라하여 수록하고 있어 이청조 작품 이해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이청조에 대한 관심이 많고 그의 시사(詩詞)에 대한 많은 번역서가 나와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사(詞)의 장르가 가장 뒤진 감이 든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한시를 구체시(舊體詩)라 부르면서 한시보다는 시사를 더 애호하고 있는 편이다. 그래서 이청조는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인(詞人)이다. 여성 특유의 예리한 묘사와 사색의 여운을 남겨주는 그녀의 작품은 오늘날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으며 특히 젊은이들은 그녀를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인으로 그녀를 추앙하고 있다.
글: 전순동/ 충북대 역사교육과 교수, 중국사 전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