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으로서 처음 세계로 눈을 돌린 사람은 누구일까? 세계형세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사주지(四洲志, 1834)』편찬의 주관자인 임칙서(林則徐), 임칙서의 아편 금지를 적극 지지했던 공자진(龔自珍), 세계지리서인『해국도지(海國圖志, 1842)』를 편찬한 위원(魏源) 등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19세기의 인물들이다.
하지만 16~17세기에 해당하는 명말청초(明末淸初), 서학동점(西學東漸)의 물결이 일고 있을 때, 서광계(徐光啓, 1562∼1633), 이지조(李之藻, 1565∼1631), 숭정제(崇禎帝, 1627~1644) 등은 이미 서양문물의 수용에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명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는 중국 역대 황제 가운데 가장 먼저 세계의 흐름을 파악하고, 서양 과학기술의 도입에 열성을 보인 인물이다.
숭정제의 즉위
숭정제(1611~1644, 在位:1628~1644) 주유검(朱由檢)은 15대 황제인 광종(光宗) 주상락(朱常洛)의 다섯째 아들로, 1610년(만력38) 12월 24일에 현비 유씨(劉氏)의 몸에서 태어났다.
숭정제는 본래 황제 자리와 인연이 없는 위치에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광종이 즉위한 지 1개월 만에 죽자, 장남 주유교(朱由校)가 부왕을 이어 16살에 16대 황제로 즉위하여 희종(天啓帝1620∼1627)이 되었다. 희종은 7년간 재위에 있었지만 아들 셋이 모두 요절하여 후사가 없었다.
희종은 1627년 8월, 23살에 병사하였는데, 임종 전에 자신의 동생 신왕(信王) 주유검(朱由檢)을 불러들여 황위를 잇도록 유언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숭정제의 치적
숭정제가 즉위할 당시(1627) 명 왕조는 연일 내우외환(內憂外患)에 시달리는 상태였다. 그는 먼저 황제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희종의 총애를 받아 국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환관파(宦官派)의 거두 위충현(魏忠賢) 세력을 제거하였다.
그 후 숭정제는 국정개혁을 단행하고 서양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기독교인이면서 수리(水利), 목화, 농업 등의 농정(農政)에 능통한 서광계(徐光啓)를 예부상서로 임명하였고, 그 외 동림파(東林派) 관료들을 등용하여 국정개혁을 보필하게 하였다.
▶ 서양 과학기술의 도입과 역법(曆法) 개정
숭정제는 17세에 즉위하였지만 국정의 침체와 기존의 낡은 방법으로는 후금의 침략조차 막아내기 힘들다는 현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에 숭정제는 서양 과학기술의 가치를 이해하기 위해 서광계로부터 수업을 받으며 과학지식을 배웠다. 1629년 5월 일식(日蝕)이 있었는데, 이에 대한 예측이 당시의 대통력(大統曆)과 회회력(回回曆)으로는 정확히 알아내지 못하였으나 서양역법이 이것을 정확하게 알아내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는 역법을 바로 잡기 위해 역국(曆局)을 설립하였다. 이곳에서 서광계의 감독아래 독일태생의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Adam Shall, 湯若望) 등 각국 선교사들을 대거 초빙하여 역법을 수정하였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바로『숭정역서(崇禎曆書,1635)』이다. 특히『숭정역서』를 편찬하는데 큰 공로가 있던 아담 샬은 역국에서 천문기기를 제조하고 환관들에게 천문학을 강의하였으며 궁중에 천주교를 전파하기도 하였다.
▶ 서양식 화기(火器) 제조
숭정제의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은 국방에서도 잘 나타나 있었다. 당시 후금의 침략은 명말 최대의 걱정거리였는데, 숭정제는 서양화기를 만들어 외적의 침략을 막고자 하였다. 보수적인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베이징에 서양 대포를 만드는 공장을 세워 대포를 만들어 내게 하고, 서광계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서광계가 1633년 세상을 떠난 후에는 아담 샬이 그 중책을 맡았다. 이 공장에서는 1년에 대포 20문(門)을 만들어 내었다. 또한 1636년부터 숭정제는 많은 선교사를 전선의 군대에 파견하여 대포 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하면서 기술을 보급시켰다.
▶ 역전제도(驛傳制道)의 폐지
그의 제도 개혁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 중 하나가 역전제도의 폐지이다. 명대의 역전제는 전국망을 조직하여 유지되었던 것으로, 각 역에 교체할 말은 물론 마부의 휴식처 등 여러 설비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되었고, 또한 기상, 치안, 운하의 운행 상태 등 각지의 여러 정보를 교환하는 기능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 재정이 많이 소요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명말 국가의 재정이 어려운 상황에서 국비 절감을 위하여 역전제도를 폐지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역전제의 폐지는 후에 대량의 실업자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일자리를 잃은 백성들이 이자성(李自成)의 반란 집단에 참여하게 하는 계기를 안겨다 주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숭정제의 성실함
한편 그의 성격은 검약하고 근면한 인물로 사서(史書)에는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는 17세의 젊은 나이에 왕이 되었지만 여자나 유희에 빠지지 않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몸과 마음을 바쳐 나라를 다스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천재지변과 인재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위기에 직면하여서는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죄와 잘못을 인정하였다. ‘죄기조(罪己詔: 황제가 스스로를 꾸짖는 조서)’를 반포하고 참회의 심정으로 백성들과 함께 다시 시작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던 것이다. 만회할 수 없을 정도로 국정이 망가져 있는 상태에서 그는 통치자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백성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대범한 인물이라는 평을 받기도 한다.
마지막 죽음을 경산(景山)에서
명 말기에는 안으로 제14대 신종(神宗) 이래 당쟁의 여파가 남아 관료들 간에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밖으로는 장병이 모두 부패하여 군사력도 약화되어 있었다. 게다가 점차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후금을 대비하기 위한 전비(戰費)의 과다 충당으로 농민들은 중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가뭄, 수해, 심각한 기근까지 겹쳐 도시에서는 폭동, 농촌에서는 반란이 빈발하였다.
이러한 반란군 중에서 샨시(陝西)성에서 일어난 이자성의 농민군은 규율이 엄격하고, 민생안정책을 세워 민심을 모아 그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이러한 불리한 상황에서도 숭정제는 검약한 생활을 하면서 기울어져 가는 명나라를 부흥시키려고 열의를 다했다. 그러나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고 했던가? 숭정제는 의심이 많고 신하들을 잘 믿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중신들을 여럿 죽이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특히 적의 간계에 빠져 산해관(山海關)에서 만주족(滿洲族)을 지키고 있던 명장 원숭환(袁崇煥)을 죽인 것은 명을 파국으로 이끈 큰 실수라고 지적되고 있다. 명의 멸망 원인이 많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 숭정제의 시의심(猜疑心)을 제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결국 시안(西安)을 근거지로 ‘대순(大順)’이라는 국호를 내걸고 크게 세력을 펼치던 이자성 군대가 숭정17년(1644)3월 17일에 베이징을 공략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숭정제는 18일 밤에 세 아들들을 변장시켜 피신하게 하고, 적군의 손에 욕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비빈과 공주를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 다음날 새벽 베이징이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숭정제는 내관을 시켜 관병과 대신들을 소집하는 종을 울렸으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들은 이미 흩어지고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단지 내관 왕승은(王承恩)만이 그의 옆에 남아있을 뿐이었다. 황제 스스로가 자신을 부를 때, ‘고(孤)’, 또는 ‘과인(寡人)’이라 하는데 이당시 궁정에 아무도 없었으니 숭정제는 진정한 ‘고’, ‘과인’이 된 셈이었다.
숭정제는 황후에게 자살을 명하고 자신은 옷을 갈아입고 충실한 내관 왕승은과 함께 경산으로 올라가 수황정(壽皇亭) 누각 앞의 괴목(槐木, 홰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함으로써 백성에게 사죄를 표했던 것이다.
그가 입고 있던 옷 속에는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기고 떠났다. “황제 즉위 17년, 짐이 덕이 없고 보잘 것 없어 하늘이 나를 꾸짖는구나. 역적이 경사에 쳐들어온 것은 모두 여러 신하들이 짐을 그릇되게 한 것이다. 짐이 죽어서 장차 선조들을 볼 낯이 없구나. 내 황제의 관을 벗고 헝클어진 머리로 수치스런 얼굴을 덮어다오. 도적들이 내 시신을 갈기갈기 찢는 것은 좋으나, 백성들만큼은 한 사람도 상하지 않게 하여다오!” 그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보필했던 왕승은 역시 그를 따라 목숨을 버렸다.
명13릉(明十三陵) 중 가장 작은 능
베이징을 함락한 이자성은 숭정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명의 관료에게 숭정제와 주황후(周皇后)의 유해를 서둘러 치우도록 명하였다. 숭정제는 즉위 후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온 정력을 쏟은 나머지 미처 자신의 능도 미리 마련되어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관료들은 우선 숭정제의 유해를 측실의 전귀비(田貴妃) 묘에 넣기로 하였다. 전귀비 묘를 파고 거기에 숭정제를 한 가운데 놓고, 좌우로 주황후와 전귀비를 매장하였다고 전해진다.
숭정제 서거 후, 남명(南明)에서 묘호(廟號)를 처음 사종(思宗)이라 하였다가 다시 의종(毅宗)으로 고쳤다. 청대에 들어와 시호(諡號)를 장렬민황제(荘烈愍皇帝)라 하였고, 묘호도 회종(懷宗)이라 칭하였다. 이후 베이징에 들어온 청의 3대 황제 순치제(順治帝, 1638~1661)는 순치 16년(1659)에 황실의 관례에 따라 숭정제가 묻혀 있는 곳을 ‘숭정제의 능’으로 삼아 사릉(思陵)이라 하고 ‘장렬민황제의 능(荘烈愍皇帝之陵)’이라는 비를 세웠다.
순치제가 이렇게 한 것은 청이 명을 뒤이은 정통왕조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한족(漢族)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한 것이었지만 피가 섞이지 않은 탓인지 청 황실에서는 사릉에 재정을 별로 투입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릉은 오늘날 명13릉 가운데 가장 서쪽 끝에, 그것도 가장 작은 능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망국의 황제’라는 오명으로 그의 치적을 덮어버려서야
역사는 과거 사실에 기초한 역사가의 해석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기록의 중심에는 늘 ‘승자의 역사’가 위치하고 있다. 승리한 사람에 의해서 그 의미와 가치가 부여되고 승리한 사람은 승리자로서의 치적을 인정받게 되고, 패배한 사람은 패배자로서의 오명이 따라다닌다. 물론 역사에 그러한 평가를 받아 마땅한 사람이 있기도 하고, 그렇기에 역사가 교훈적 요소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태평성대의 황제는 모두 좋은 황제이고 망국의 군주는 모두 악한 군주라고 평가하고, 개국군주만 칭송하고 망국 군주는 한 칼에 베어버린다면, ‘성공’과 ‘실패’로만 인물을 평가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숭정제는 17세에 즉위하여 17년간 통치하면서 죽는 순간까지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정사를 돌보았던 황제이다. 우매하고 방탕한 여러 황제가 많았던 것에 비하면 서양의 과학기술을 도입하는 등 넓은 안목을 가지고 개혁적인 정책을 펴려던 숭정제의 치적은 재평가 되어져야 한다. 망국의 군주라는 오명 때문에 그의 치적이 덮어져서는 안 될 일이다.
숭정제에 대한 평가가 칭송, 동정, 모욕 등 여러 가지로 나뉘고 있기는 하지만, 국가를 파탄으로 이끈 망국의 군주라 하여 틀에 박힌 편견에 묶어 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는 서양의 과학기술을 전파하는 일과 동서 문화교류에 힘을 쏟으며 일찍이 세상을 읽었던 중국 최초의 황제라는 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전순동/ 본지 집필위원, 충북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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