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 인민의 영원한 영웅 마오쩌뚱 [毛澤東]

지식창고지기 2009. 12. 27. 10:10

중국 인민의 영원한 영웅 마오쩌뚱 [毛澤東]

 

1893. 12. 26 중국 후난 성[湖南省] 샹탄[湘潭]~1976. 9. 9 베이징.
 
마오쩌둥 /마오쩌둥(1966)

1931년 이래 중국공산당의 지도자였으며 1949~5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을 지냈다. 국가주석을 사퇴한 이후에는 사망할 때까지 당주석을 역임했다.

마오쩌뚱의 어린시절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그의 아버지(毛順生)는 농업과 곡물상 등을 하면서 가세를 일으켜 부농이 되었다. 그는 교육의 용도는 문서기록이나 계산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집안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8세 때 마을 서당에 입학하여 유교경전의 기초지식을 익혔다. 13세 때 학업을 중단하고 아버지의 강요로 집안의 농장에서 하루종일 일을 하게 되었다. 마오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집을 뛰쳐나와 마을 가까이에 있는 현립(縣立) 동산고등소학교에 입학했고, 이어 성도(省都)인 창사[長沙] 소재의 상향중학교로 전학했다. 그곳에서 서구의 새로운 사상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고 량치차오[梁啓超]의 개혁사상과 쑨원[孫文]의 민족혁명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가 혁명사상을 공부하던 무렵에 혁명의 실제상황이 벌어졌다. 1911년 10월 10일 우창[武昌]에서 조(淸朝)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고 2주일도 못 되어 그 반란은 창사까지 확대되었다. 마오는 후난 성 혁명군 소속의 한 부대에 배속되어 사병으로 6개월을 보냈다.
 
1912년 봄이 되어 새로운 중화민국이 탄생했고 마오의 군복무도 끝났다. 그뒤 1년 동안 경찰·법률·상업 학교 등을 전전, 이것저것에 손을 대면서 방황의 시절을 보냈다. 중학교에서 역사를 공부하기도 했고 현립 도서관에서 서양 자유주의 사상이 담겨 있는 고전들을 읽으면서 여러 달을 보내기도 했다. 이같은 모색과 방황은 그의 성격이 우유부단했다기보다는, 그당시 중국의 상황이 그만큼 불안정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1905년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서양의 학문이 현대식 학교에 부분적으로 수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젊은이들은 사회나 관직에 진출하는 데 있어서 서양학문과 중국의 전통학문 중 어떤 것을 공부해야 할지 불확실한 상태에 있었다. 마오는 마침내 1918년 후난 성립 제일사범학교(창사 소재)를 졸업한 뒤 중국 지성의 산실인 베이징대학교로 갔다. 베이징대학교 도서관 사서보(司書補)로 일한 6개월은 그의 장래를 결정짓는 데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곳에서 그는 후일 중국공산당 창설의 두 주역이 되는 리다자오[李大釗]와 천두슈[陳獨秀]의 감화를 받게 된다. 게다가 그가 베이징대학교에서 근무하던 기간에 5·4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운동은 그후 50년 동안 중국에서 벌어지게 되는 모든 변화의 사상적 원천이 되었다.
 
1919년 여름 마오는 창사에서 농민을 제외한 학생·상인·노동자 들의 연대조직을 결성해 정부에 항일운동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 시기에 그가 쓴 글들을 보면 전세계에 '홍위병'(紅衛兵)의 창설을 촉구하고 러시아 혁명을 찬양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마오가 혁명의 철학적 배경으로 마르크스 사상을 수용하게 된 것은 1921년 1월이었다.

마오쩌뚱과 중국 공산당
 
1920년 9월 마오는 창사 소학교의 교장이 되었고, 10월에는 그곳에 사회주의 청년동맹의 지부를 결성했다. 그해 겨울에는 윤리학을 가르쳤던 은사(楊昌濟)의 딸 양카이후이[楊開慧]와 결혼했다. 1921년 7월에는 중국 각지의 공산주의 단체 대표자들과 함께 제1차 중국공산당전당대회에 참가했다. 이 대회에는 모스크바에 본부를 둔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의 대표자 2명도 참가했다. 1923년 중국공산당이 쑨원 휘하의 국민당과 제휴하게 되었을 때 마오쩌둥도 국민당에 입당하여 활동했다. 1924년 전반기에 아내와 2명의 어린 아들을 데리고 상하이[上海]에 살면서 국민당 집행부의 임원으로 일했다.
 
1924~25년 겨울 고향인 사오산[韶山]으로 돌아와 휴양하면서 문득 농민들 속에 내재된 혁명적 잠재력에 눈뜨게 되었다. 그 자신이 농촌 출신이었지만 마오는 학생시절 이래로 노동자와 농민은 무식하고 더럽다는 중국 지식인의 전통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면서 노동자들에 대한 선입견은 어느 정도 바뀌었지만 농민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는 여전해 그들은 낙후되고 조직화할 수 없는 계급이라는 마르크스의 이론에 동조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태도를 바꾸어 고향의 농민들이야말로 중국을 소생시킬 수 있는 자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국민당에서 일하고 있던 다른 공산주의자들도 이미 농민조직 결성에 착수하고 있었고 마오는 이들의 뒤를 좇아 후난 성 농민들의 불만을 수렴하는 조직인 농민협회를 결성시켰다.

마오쩌뚱과 공산당 및 국민당
 
농민협회 활동으로 후난 성 군벌(張敬)의 박해를 받게 된 마오는 할 수 없이 고향을 떠나, 다시 도시로 나와 국민당의 본거지인 광저우[廣州]에서 1년간 활약했다. 비록 광둥에서 살고 있었지만 그의 관심은 여전히 농촌에 있었다. 국민당 선전부장 대리로 일하기도 했고 광저우 농민운동강습소에서도 근무했다. 1925년 3월 쑨원이 사망한 뒤, 국민당의 지도자가 된 장제스[蔣介石]는 1926년 5월 국민당 내의 주요보직을 맡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을 대부분 숙청했다. 그러나 마오는 1926년 10월까지 농민운동강습소의 소장직을 유지했다. 이때 그가 훈련시킨 젊은 농민운동가들은 후일 모두 농촌에서 근무하면서 공산당의 조직을 강화시켜주게 된다.

1926년 11월 마오는 고향인 후난 성으로 다시 돌아갔다. 1927년 1월과 2월 고향의 농민운동을 살펴본 그는 가까운 장래에 수억 명의 중국 농민들이 '폭풍우처럼' 봉기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농민의 힘이 너무나 엄청나고 폭발적이기 때문에 아무리 커다란 세력이라도 그것을 억누르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엄밀하게 말해 이 예측은 빗나간 것이었다. 수억의 농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형태의 혁명이 '가까운 장래'에 벌어지기는커녕 일어나지도 않았던 것이다. 도시와 농촌의 부유층 및 지주계급과의 제휴를 추진중이던 장제스는 노동자·농민 혁명에 등을 돌렸고, 1927년 4월에는 국민당의 상하이 입성을 도와주었던 상하이 노동자들을 학살했다. 국민당과 제휴해 혁명을 완수하려는 스탈린의 전략이 수포로 돌아갔고 중국공산당은 도시에서 거의 전멸, 지방에서는 1/10 이상이 붕괴되었다. 그러나 보다 폭넓은 의미에서 볼 때 마오의 예측은 근거있는 것이었다.

1927년 10월 마오는 후난의 추수봉기에서 살아 남은 수백 명의 농민을 이끌고 장시[江西]-후난 접경지역에 있는 징강 산[井崗山]으로 후퇴했다. 마오는 농촌지방에서 새로운 형태의 혁명전쟁을 수행하게 되는데, 이 전쟁에서는 무장하지 않은 대중보다는 홍군(紅軍)이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되었지만 수억 명의 농민들 대부분이 혁명전쟁에 동조·지지했기 때문에 마오는 내전을 수행해나가면서 외곽지방에서 도시를 포위할 수 있었고, 마침내 장제스를 패퇴시키고 중국을 장악할 수 있었다.

마오쩌뚱의 권력장악과정
 
제1기

마오와 군 총사령관인 주더[朱德]가 지방의 근거지를 기반으로 하여 게릴라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첫 3년이다. 그러나 이들 게릴라전의 주역 또는 상하이의 중앙위원회, 심지어 모스크바의 코민테른까지도 게릴라전은 도시지역에서 또다른 혁명봉기가 일어나기 전까지 현상을 유지하는 미봉책에 불과한 것으로 여겼다. 1930년 여름 중앙위원회는 홍군에게 중국 중남부의 여러 주요도시들을 장악하라는 지시를 내리는데 그 목적은 도시노동자들에 의한 혁명봉기를 부추기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시 장악 시도를 더이상 계속하면 인명손실만 커진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마오는 그 지시에 불복, 전투를 포기하고 장시 성 남부의 근거지로 돌아갔다. 같은 해에 마오의 아내 양카이후이가 국민당에 의해 체포·처형되자, 마오는 1928년부터 동거하고 있던 허쯔전[賀子貞]과 재혼했다.

제2기(장시 시기)

1931년 11월 장시 성의 일부 지역에 마오를 주석으로 하는 중국(혹은 루이진[瑞金] 정부)을 수립한 시기이다(→ 색인 : 장시 소비에트). 도시지역에서는 혁명에 대한 지지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최종 승리를 거두려면 근거지를 서서히 확장해갈 수밖에 없었다. 장시 중국 정부는 곧 수백 만 명의 인구를 통솔하게 되었다. 약 20만 명 규모로 병력이 늘어난 홍군은 장제스가 4차에 걸쳐 보낸 허약한 토벌군을 손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후에 공격해온 장제스의 정예군에는 대항할 수가 없어서 1934년 10월 마오와 임신한 그의 아내는 홍군과 함께 장시의 근거지를 버리고 중국의 서북부지역으로 옮겨가는, 이른바 장정(長征)에 나서게 된다. 마오는 장정중이던 1935년 1월 쭌이[遵義]에서 열린 당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사실상의 당지도권을 장악하지만 당주석이라는 공식 칭호는 그때까지도 얻지 못했다.

제3기

제3기는 장정의 온갖 역경을 이겨낸 약 8,000명의 공산군이 1935년 가을 중국 북서부지역인 산시 성[陝西省]에 도착했을 때부터 시작된다. 이 시기는 항일(抗日)을 위한 국민당·공산당의 합작과 마오의 당권 완전장악이 그 특징이다. 제3기는 흔히 옌안[延安] 시기라고 하는데 실제 마오는 1936년 12월이 되어서야 옌안에 도착했다(옌안은 산시 성에 속한 지역으로 이곳에 공산당 본부가 있었음). 1935년 8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7차 전당대회는 반(反)파시스트 연합전선 원칙을 공표했고, 1936년 5월 중국공산당은 처음으로 이같은 연합전선에 장제스도 포함된다는 가능성을 시인했다. 이어 1936년 12월에 있었던 시안[西安] 사건은 국공합작을 가속화시켰다. 1937년 7월 일본은 중국 전역을 제압하려는 기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무렵 국공합작의 새로운 연합전선을 위한 여러 조건이 사실상 타협되었고, 1937년 9월 공식 합의서가 발표되었다. 항일전이 수행되는 과정에서 공산당은 그들의 군대를 대부분 소규모 부대로 분할하여 일본군의 후방에 침투시켜 게릴라전의 세포로 활용했다.
이 부대들은 농촌의 광대한 지역을 효과적으로 장악하면서 일본군 점령하의 도시들과 보급로 사이를 교란했다. 그결과 공산당은 일본의 항복 당시 군의 규모를 약 50만~100만 명으로 증강시켰을 뿐만 아니라, 9,000만 명에 이르는 인구를 정치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어 확고한 대중적 기반을 형성했다. 농촌인구의 지지를 확보하게 된 것은 항일전쟁 수행중 민족감정에 호소한 것이 주효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민족감정도 큰 역할을 했으나, 공산당의 농업정책이 농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1936~40년 마오는 1920년대 이래 처음으로 사색과 저작에 몰두하는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가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설명으로 내놓은 책자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실천론 實踐論〉·〈모순론 矛盾論〉이다. 더욱이 자신의 혁명투쟁 경험과 연합전선의 상황하에서 어떻게 혁명이 수행될 것인가 하는 예견을 종합한 대표적 저서들을 속속 발간했다. 먼저 군사문제를 다룬 저서로는 〈중국혁명전쟁의 전략적 문제〉가 있다. 이 책은 1936년 12월에 씌어진 것으로, 장시 시기의 교훈을 요약하고 당시 그가 취한 군사노선이 정당했다는 것을 주장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1938년에 씌어진 〈지구전론 持久戰論〉과 기타의 저작은 항일전의 전략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1939~40년 겨울 마오는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를 이유로 강경노선을 내세우면서 공산당의 주도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마오의 주장은 이러했다. 국제적으로 볼 때 중국혁명은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일부분이고 국내적으로 중국은 항일연합전선에 속하는 '제(諸) 정당의 공동독재'에 의해 통치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분간은 공산당과 국민당의 목표(항일)가 일치한다고 느꼈기 때문에 공산당이 사회주의 건설을 너무 급속히 재촉하여 연합전선을 붕괴시켜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취했다.

연합전선의 주도권을 둘러싼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경쟁관계는 중국공산당 내부의 권력투쟁과도 관련있는 것이었다. 마오의 두 정적(政敵)인 왕밍[王明]과 장궈타오[張國燾]는 모두 국민당에 아첨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마오쩌둥이 공산당 내의 제1인자로 부상하게 된 핵심사건은 1938년 10월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라는 문제였다. 즉 마르크스주의는 중국의 상황에 알맞게 변형되어야 하고 중국인의 국민성과 문화전통을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오는 중국공산당 내의 일부 지도자들과는 달리 소련 내의 공산당 운영방식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도 없었고, 마르크스나 레닌의 저서를 원어로 읽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중국의 사정은 더 잘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마오쩌둥과 유소파(留蘇派:소련지향적인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불화는 1942~43년의 정풍운동(整風運動)에서 표면화되었다. 이 운동은 1937년 이래 늘어난 수만 명의 신규 공산당원들에게 당조직에 대한 마르크스 이론과 레닌의 원칙을 설명해주는 기본교육의 제공을 그 목적으로 했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은 2차적인 목표는 마오가 말하는 이른바 '외국 교조주의', 즉 소련의 방식을 무조건 답습하고 소련의 지령에 맹종하는 태도를 버리게 하는 것이었다.

제4기

1943년 3월 마오는 사무국과 정치국의 주석이 되면서 처음으로 공산당을 공식적으로 장악했다. 바로 그 직후 정풍운동은 마오에게 충성하지 않는 자들을 가혹하게 숙청하는 형식을 취했다. 따라서 농촌지방에서 마오가 벌이는 혁명전쟁이 제4기(마지막 시기로서 국민당과의 내전 시기를 가리킴)에 접어들었을 때, 스탈린이 중국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하는 데 별로 흥미를 보이지 않았던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당시 스탈린이 보여준 일련의 공식적인 조치들을 보면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일례로는, 인민해방군이 1949년 4월 난징[南京]을 점령했을 때 광둥으로 퇴각하는 국민당 군대를 따라간 외교사절은 소련대사뿐이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마오쩌뚱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중국공산당이 중국 전역을 장악했을 때 마오와 스탈린은 그 상황에 적절히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1949년 12월 중화인민공화국(1949. 10. 1 수립)의 국가주석이 된 마오는 모스크바를 공식 방문했고, 그곳에서 2개월간의 열띤 타협 끝에 한정적인 경제원조가 부수된 상호원조협약에 스탈린의 서명을 받아냈다. 그러나 중국은 경제발전을 위해 설치한 시설들로부터 혜택을 받기도 전에, 평양의 친소련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한국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마오에 따르면, 이같은 시련을 겪고 난 뒤에야 스탈린은 마오를 신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모스크바와의 긴장관계에도 불구하고 중화인민공화국 초기의 정책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소련의 방식을 답습하는 것'이었다. 마오와 그의 동료들은 게릴라전, 시골의 농민동원, 대중적인 정치조직결성 등에는 경험이 있었으나 국가의 경영이나 대규모 경제발전계획에는 직접적인 지식이나 경험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이 유일한 모델이 되었다. 소련의 지도 아래 수립된 5개년경제개발계획은 1953년에 실시되었다. 이 계획에는 소련의 기술지원과 여러 개의 산업용 공장 완공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뒤 2년 내에 마오는 소련과의 정치적·이념적 연대를 단절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마오쩌뚱식 사회주의의 실현
 
1949년 봄 마오는 지금까지 중국혁명은 '지방으로부터 도시를 포위하는' 비정통적인 노선을 걸어왔으나 앞으로는 도시가 지방을 이끌어가는 정통노선을 걷게 되리라고 공표했다. 1950년 마오는 이러한 노선에 발맞추어 농촌집단화는 중국의 중공업이 기계화에 필요한 장비를 제공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류사오치[劉少奇]의 견해에 동의했다. 1955년 7월의 한 보고서에서 마오는 이같은 입장을 바꾸어 중국에서는 사회변혁이 기계변혁보다 앞설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근본적으로 외부의 지원을 전혀 받지 않고 물질적인 조건들을 향상시킨 일부 집단농장들의 업적에 깊은 감명을 받은 마오는 중국 인민들의 무한한 잠재력을 믿게 되었다. 특히 혁명을 위해 동원되는 농촌 대중들은 임의로 자연과 그들의 사회관계를 변모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같은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일부 지도자들은 마오에 의해 '전족을 한 노파'라고 매도당했다. 당간부들의 집단적 의사결정과정을 무시하고 마오의 임의대로 정책을 추진해나가는 경향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1956년 2월 제20회의 당대회에서 스탈린을 비판하는 흐루시초프의 비밀연설이 있기도 전에, 마오와 그 동료들은 새 중국을 건설하는 데 지식인들을 자발적으로 참여시키기 위한 사기 진작책을 검토했다. 1956년 4월말 마오는 '백화제방정책'(百花齊放政策:여러 가지 다양한 사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정책)을 발표해 중국에 스탈린 치하의 소련과 비슷한 탄압적인 정치 분위기가 생겨나지 않도록 했다.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탈(脫)스탈린화가 빚은 혼란을 목도하면서도 이 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과감하게 밀고 나갔다. 고위급 동료들이 이 정책을 실시하지 말라고 조언했으나, 마오는 중국사회에 그때까지 존재하는 갈등사항들은 대체로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결과 벌어진 '백화제방과 백가쟁명(百家爭鳴)'이 겉잡을 수 없는 상태로 되어가자 당노선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고, 마오는 지식계급에 의해 배신당했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그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그때 이후 마오는 근대화의 주역은 대중서민과 그들의 창조성이라고 믿게 되었다. 전문가들도 당성(黨性)이 충분하지 못하면 농촌으로 보내 노동을 시킴(下放)으로써 그들의 당성을 개조시켰다. 이러한 배경 아래 마오는 1957~58년 겨울에 대약진운동이라는 정책을 입안해 1958년 5월 공식적으로 시행했다. 마오의 경제정책은 1960년대와 1970년대의 통설처럼, 일방적이고 단세포적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마오는 공업화와 '기술혁명'이 여전히 자신의 목표라고 공언했으나 기술발전의 결과가 가져온 부정부패적 측면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불안을 느꼈다.

그리하여 대약진 운동의 일환으로 '인민공사'의 설립을 지지하고 촉진시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결과 1955~56년 협동농장 단위로, 이어 1956~57년 사회주의 집단농장 단위로 구성되었던 농민들은 1958년에 다시 한번 자신들의 세계가 뒤죽박죽 되어버린 것을 경험했다. 결국 이러한 변화의 결과는 혼란과 경제적 파탄만을 가져왔다. 1958~59년 겨울 마오는 전략의 일부 수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 인민공사의 구성원에게로 소유권을 분산시키고 공업과 농업에서의 비현실적인 과도한 생산목표를 하향조정시켰다. 그러나 인민공사를 비롯한 새로운 중국식 사회주의 노선이 크게 볼 때는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1959년 7~8월 루산 산[廬山]에서 개최된 제8회 전국대표대회(전대회) 제8차 중앙위원회전체회의(중전회)에서 당시 국방장관이던 펑더화이[彭德懷]는 대약진 운동의 부조리와 그에 따른 경제적 손실을 비난하여 곧바로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감금생활을 하다가 문화대혁명 때 죽었다.

마오쩌뚱의 후퇴와 반격
 
1960년 마오는 인민해방군 내에 새로운 권력기반을 구축하기 시작했고, 신임 국방장관 린뱌오[林彪]는 군대를 '마오쩌둥의 사상을 가르치는 위대한 학교'로 개조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동시에 마오는 소련뿐만 아니라 중국 내에서도 정부 및 당 관료, 기술·예술 분야 엘리트 등의 특권계급 사이에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이 생겨나고 있다고 비난했다. 1963년에 이르러 중·소 관계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악화되었는데, 그 주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대약진 운동에 대해 소련이 비웃는 듯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마오의 인민공사 설립안이 이념적으로 볼 때 근거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흐루시초프는 그 안에 대해 조소를 퍼부었다. 1960년 흐루시초프는 소련의 기술지원단을 철수시켜 마오에 대한 불쾌감을 표시했고, 이로 인해 중국 내의 많은 대규모 공장들은 건설이 중단되었다. 흐루시초프는 또한 타이완이나 인도에 대한 정책, 그리고 여타 외교문제와 관련해 중국에 압력을 가하려고 했다. 마오는 그 자신과 중국의 위신에 대한 모욕, 그리고 그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중국 내의 계급투쟁에 대해서도 마오는 중국 내에 수정주의 노선이 제기되지 않을까 우려했고, 이같은 우려는 1960년대 초반 대약진운동으로 인한 경제적 파탄을 수습하기 위한 정책이 제시되면서 더욱 커져갔다.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소련 경제원조의 중단으로 인해 중국 내에 큰 기근이 일어났고, 수백만 명의 사람이 굶어죽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류사오치와 덩샤오핑[鄧小平], 그리고 기타 경제계획 입안가들은 물질적인 동기를 부여하고 농업생산에 있어서 개인 가계(家計)의 역할을 강화하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처음에는 마오도 이같은 조치가 필요하다고 마지못해 시인했으나, 1962년 전반기에 그는 경제회복안들이 대약진 정책의 전부를 부정하고 나서는 것임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이같은 도전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안으로서 1962년 9월에 개최된 8전대회 10중전회에서 '계급투쟁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말 것'을 촉구했다. 그후 3년 동안 주로 지방에서의 사회주의 교육운동을 통해 계급투쟁을 전개해나갔고, 이같은 운동의 수행방침을 놓고 중국 지도층 내에서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1964년말, 류사오치가 당내의 '주자파'(走資派)를 투쟁의 주목표로 삼자는 마오의 요구를 거절하자, 마오는 그를 숙청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마오쩌뚱과 문화대혁명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이라고 알려진 이 운동은 당내 숙청운동의 범위를 넘어서서, 당내의 관료적 부패를 일거에 척결하기 위한 보다 과감한 새로운 정책으로서 마오가 앞장서서 주창한 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마오의 권위에 감히 도전했던 지도층 내의 인사들을 제거하기 위한 의도적인 운동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 제거된 인물들 중에는 류사오치도 있었는데 그는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하고 병사했다. 문화대혁명의 선봉에 섰던 홍위병들은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정당하다"(造反有理)라고 외치면서 1966년의 여름 정국을 주도했고, 이로 인해 당간부의 영향력뿐만 아니라 모든 권위가 도전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마오는 1956년 탈집중화(脫集中化)가 강력한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여전히 강력한 중앙정부 권력을 선호하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상하이의 급진주의자이며 이후에 4인방의 일원이 된 장춘차오[張春橋]와 야오원위안[姚文元]이 상하이 코뮌을 설립한 직후인 1967년 2월 마오를 방문했을 때 마오는 '우두머리'(지도자)를 철폐하라는 주장은 극단적인 무정부주의이고 가장 보수반동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언제나 "우두머리가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마오는 코뮌이 "반혁명을 분쇄하기에는 너무 취약하다"고 주장하면서 어떤 경우든 당지도부의 역할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상하이 코뮌을 해산하고 '혁명위원회'로 대치하라고 명령했다.

전(前) 당간부, 젊은 행동가, 인민해방군 대표들의 세력균형에 바탕을 둔 이 혁명위원회는 마오가 죽은 2년 뒤까지 존속되었다. 처음에는 군부가 위원회를 주로 장악했다. 1969년의 9전대회를 계기로 당재건 작업이 시행되었고, 린뱌오의 사망으로 인해 군부의 영향력은 아주 없어지지는 않았으나 감소되었다. 1971~72년에는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주축으로 하여 문화대혁명의 가치관과 1966년 이전의 정치·경제 질서 사이에 일종의 절충이 시도되는 듯했다.

그러나 1976년 1월 저우언라이의 사망 이전에 벌써 이같은 절충은 실패로 끝났다. 마오가 전문기술의 중요성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광란적인 정치적 수사(修辭)에 묻혀버렸고 외국에서 온 것은 모두 반혁명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마오의 마지막 10년은 파리 코뮌을 지향하는 대중민주주의의 선언문으로 개막되었으나 가장 중앙집권적인 독재자였던 진(秦)의 시황제(始皇帝)를 연상케 하는, 마오 자신에 대한 칭송일색으로 막을 내렸다.

마오쩌뚱에 대한 평가
 
마오의 마지막 20년 집권 형태를 놓고 볼 때 문화대혁명은 발생될 수밖에 없는 논리적 귀결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마오의 혁명노선에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결과는 결코 아니었고, 그의 전체 업적에 대한 평가는 마지막 집권기간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지방에서의 게릴라전을 바탕으로 한 투쟁노선을 설정해 내전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고 그로 인해 국민정부를 전복시킨 점,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한 점, 중국의 독립과 주권을 회복시킨 점 등에 있어서 마오쩌둥은 대단한 기여를 했고, 이 점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공산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중국 사회 내에 팽배했던 불공정과 부정부패, 그리고 외세에 의해 국토가 유린당한 결과 중국민들이 느낀 굴욕감 등을 놓고 볼 때, 마오의 중국통일 업적은 충분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마오는 1949년 9월 "우리는 봉기했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늘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1949년(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마오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명확하지 않다. 1981년 6월에 나온 중국측의 공식적 평가에 따르면, 마오의 지도노선은 1957년 여름까지는 근본적으로 정당한 것이었으나, 1957년 이후에는 기껏해야 옳고 그름이 반반이며 아주 잘못된 적도 많았다는 것이다. 마오의 2가지 개혁정책인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은 잘못된 것이었고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관료제도를 견제하고 대중의 정치참여를 유도하고 중국의 자립을 강조한 마오의 목표는 대체로 칭송할 만한 것이나,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들은 과감하고 상상력에 넘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자멸적인 것이었다. 마오의 전생애를 놓고 볼 때 그의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을 정확한 수치로 제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토지를 얻게 된 농민들의 행복과 내전중에 희생된 수백 만 명의 죽음을 놓고 어떻게 그 무게를 저울질할 수 있겠는가? 1949년 이후에 거둔 실제적인 경제발전과 대약진운동이 가져온 엄청난 기근, 그리고 문화대혁명이 가져온 끔찍한 혼란을 어떻게 저울질할 수 있겠는가? '말년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마오의 공이 과를 덮고도 남는다는 공식적인 평판은 대체로 무난한 것 같다.

S. R. Schram 글 | 李鐘麟 옮김
출처 |  인터넷 Daum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