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 인민의 존경받는 영원한 제2인자 / 저우언라이 (周恩來)

지식창고지기 2009. 12. 27. 10:12

중국 인민의 존경받는 영원한 제2인자 / 저우언라이 (周恩來)

1898 중국 장쑤 성[江蘇省] 화이안[淮安]~1976. 1. 8 베이징[北京].

1940년경 저우 
1940년경 저우언라이
 
중국공산당의 주요인물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의 총리(1949~76)와 외교부장(1949~58)을 역임했다. 혁명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후에 중국정부의 외교문제를 전담했다. 중국공산당 초기인 1921년부터 지도자적 역할을 했으며, 20세기 중국의 위대한 정책가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정책 시행에 뛰어났고 세부사항을 파악하는 데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 언제나 당 지도부에서의 위치를 유지하면서 내부 갈등으로부터 비롯된 숙청에서 살아남았다. 우아함과 섬세함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친화력있고 실용적이며 설득력있는 사람으로 정평이 났다.

그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저장 성[浙江省] 사오싱[紹興]에 살고 있던 큰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이곳에서 초등교육을 받았다. 1913년 톈진[天津]에 있는 명문 중학교인 난카이중학교[南開中學校]에 입학했으며, 졸업한 뒤에 계속 공부하기 위해 1917년 일본으로 갔다. 1919년 5·4운동으로 불리는 학생시위가 베이징에서 크게 일어나자 톈진으로 돌아왔다. 1920년 체포될 때까지 학생시위와 유인물 발간에 적극 가담했다. 1920년 가을에 석방되어 근로장학생제도의 일환으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그가 공산주의자로 평생을 보내겠다고 결심한 것은 바로 프랑스에서였다.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이 창립되자 유럽 지부의 조직책이 되었다. 1924년 여름 중국으로 돌아와 국민혁명에 참가했다. 이 혁명은 쑨원[孫文]이 이끄는 국민당이 중국공산당의 협조와 소련의 지원을 받아 광둥[廣東]에서 일으킨 혁명이었다.

이 무렵(1925) 덩 잉차오[鄧穎超]를 만나 결혼하게 되는데, 그녀는 당시 학생운동 지도자로서 나중에 중국공산당의 주요일원이 되었다. 저우언라이는 장제스[蔣介石]가 교장으로 있던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정치부 주임에 임명되었고, 1926년 겨울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서기가 되었다. 1927년 3월 장제스의 북벌군이 상하이 외곽에 도착했을 때 그는 국민당 군대를 위해 노동자들을 동원, 폭동을 일으켜 상하이를 장악했다. 그러나 장제스가 상하이 입성 후 곧 공산주의자 동료들을 숙청하자 우한[武漢]으로 도망쳐 목숨을 부지했다. 중국공산당은 우한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고 이곳에서 국민당 좌파인사들과 긴밀히 협조했다. 같은 해 4월 우한에서 열린 제5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공산당 중앙위원 및 정치국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국민당 좌파인사들이 공산당과 결별하게 되자 그는 난창[南昌] 사건(1927. 8)으로 알려진 공산당 봉기를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국민당이 난창을 재탈환하자 광둥 동부지역으로 퇴각했고 곧 홍콩을 거쳐 상하이로 도피했다.

1928년 제6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린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공산당 내의 자신의 지위를 확인받았다. 이어 모스크바에서 중국으로 돌아와 무너진 공산당 조직을 재건하는 데 힘썼다. 1920년대 후반 중국공산당 본부는 상하이에서 지하활동을 벌이면서 도시 근로자의 봉기에 주력했으나, 주요대도시를 장악하려는 공산당의 시도는 큰 피해만 냈을 뿐 실패를 거듭했다. 1931년 저우언라이는 상하이를 떠나 장시[江西]로 갔는데, 1928년 이래로 주더[朱德]와 마오쩌둥[毛澤東]이 이곳에서 공산당 지방근거지를 착실히 다지고 있었다. 1932년 공산당 본부는 상하이 경찰의 가중되는 압박을 이기지 못해 장시 지역으로 옮겨갔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 주더가 지휘하는 홍군(紅軍)의 정치위원이 되었다.

처음에 그는 장시 소비에트에서 마오쩌둥으로부터 정책통제권을 빼앗은 공산당 지도자들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결국 마오쩌둥과 밀접한 협력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이 관계는 평생 동안 변하지 않고 지속되었다. 장제스의 계속되는 토벌작전으로 인해 공산당은 마침내 1934년 10월 장시 소비에트와 중국 중남부의 기타 소비에트 지역을 버리고 중국 북부의 새로운 근거지를 향해 장정(長征)에 나섰다. 마오쩌둥은 장정중에 당기구의 통제권을 장악했고 저우언라이의 중앙군사위원회 서기직도 넘겨받았다. 저우언라이는 그 이후로 충실하게 당내 마오쩌둥의 지도력을 보좌했다.

1935년 10월 산시 성[陝西省] 옌안[延安]에 이르러 장정은 끝났다. 이곳에서 공산당의 근거지를 확보하자 저우언라이는 당의 주요협상자가 되었고, 국민당과 전략적으로 연합을 맺는 어려운 일에 착수했다. 일본의 침략에 대한 국민의 항일감정에 호응하고 파시즘에 대항하라는 모스크바의 이른바 신(新)인민전선 전략을 수행하기 위해, 1935년 후반 중국공산당은 '항일'이라는 기치 아래 국민당을 비롯한 모든 애국인사들과 연합하겠다고 제의했다. 1936년 겨울 장제스가 국공내전을 중지하고자 하는 부장(部將)들에 의해 산시 성 시안[西安]에서 체포되자 저우언라이는 곧 그곳으로 갔다. 그는 반란을 일으킨 장군들에게 장제스를 살해하지 말라고 설득한 뒤, 장제스가 공산당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고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공산당과 연합전선을 편다는 조건 아래 그의 석방을 성사시켰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한 직후 그는 연합전선 구축을 성사시켰고, 그 이후로 1943년까지 국민정부에 파견된 공산당측의 대표로 활약했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한 지 2주 만에 마오쩌둥을 수행하여 충칭[重慶]으로 가서 장제스와의 평화회담에 참가했다. 6주 후에 마오쩌둥이 옌안으로 돌아간 뒤 그는 충칭에 남아서 협상을 계속했다. 1946년 미국이 후원하고 조지 C. 마셜 장군이 주재한 국민당과의 평화협상에도 대표로 참가했으나 이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때 그는 국민당에 환멸을 느낀 진보적 정치가와 지식인들에게 공산당의 이미지를 좋게 심는 수완을 발휘했다. 그리고 이 점은 1947년 전면적인 내전이 재개되었을 때 장제스가 결국 몰락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총리가 된 저우언라이는 중국의 대규모 민간 관료체제를 관리하는 주요행정가가 되었다. 외교부장을 겸임하면서 외교문제에서도 중책을 수행했고 이 직책을 사임하고 난 뒤에도 계속 중추적 역할을 했다. 1950년 2월 14일 모스크바에서 30년 기한의 중·소상호우호동맹조약에 서명했고, 1954년 제네바에서 열린 한국과 인도차이나 관련 회담에서 중국 사절단 대표로 참가했다. 1955년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열린 아프리카·아시아 회의에서 아시아 비동맹국가들에 대한 중국의 지원을 제의했다. 1956~64년에 유럽·아시아·아프리카 등지를 여행했고, 아프리카의 상황이 '혁명 직전'이라고 공언했다. 1964년 모스크바를 방문했으나 중국과 소련 사이의 근본적인 입장 차이를 해소할 수는 없었다. 1971년 7월 미국 특사 헨리 A. 키신저가 베이징을 방문하여 저우언라이를 처음 만난 후 외교관·협상가로서 그의 명성은 미국 언론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72년 2월 베이징에서 열린 마오쩌둥과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 사이의 역사적 회담은 대부분 저우언라이가 조직·성사시킨 것이었다. 1972년 방광암에 걸린 뒤에도 정치를 계속했다. 1975년 제4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제1차회의에서 중국공산당을 대표하여 공업·농업·국방·과학 기술의 현대화를 실현시키자고 주장했다. 그가 죽은 지 3개월 뒤인 1976년 4월 많은 공산당원·학생·노동자·간부·군인 등이 그를 기념한다는 명분으로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광장에 모였다. 그들은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4인방(四人幇)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4월 5일 이 집회는 4인방에 의해 무력 진압되었는데, 이를 '톈안먼 사건'이라고 한다.

저우언라이는 공산당에서의 지도적 위치를 끝까지 유지했다. 1956년 당내 4명의 부주석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 있었던 문화대혁명 이후에 린뱌오[林彪]가 당내의 유일한 부주석이 되었지만, 그는 정치국 상임위원회 제3인자가 되었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마오쩌둥 사상을 지지하는 극단주의자들에게 제동을 거는 주된 역할을 했고, 혼란스러운 시기에 유일하게 안정의 구심점이 되었다. 1970년대 초 문화대혁명의 기운이 쇠퇴하는 동안 덩샤오핑[鄧小平]과 기타 전직 온건지도자들을 권좌에 복귀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주요저작은 〈저우언라이선집 周恩來選集〉에 수록되어 있다.

저우언라이의 자라난 배경

저우언라이는 1898년 3월 5일 중국 장쑤 성 화이안의 가난한 관료출신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관리였으나, 봉급은 매우 적었고, 아버지는 과거시험에 계속 낙방하여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그래서 서기같은 하찮은 직업에 종사하였다. 태어난지 한살정도 되었을때 후사가 없이 사망한 친할아버지의 동생의 양자로 입양되어 어릴적부터 양어머니로부터 전통적인 고전교육을 받았다.


10살 이전에 친어머니와 양어머니를 모두 읽고 고아가 된 그는 고향 화이안을 떠나 만주의 선양에 살고있던 삼촌에게 갔다. 12살부터 신식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자유와 평등과 같은 서양사상을 익히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신해혁명이 터져 청조는 붕괴하고 공화정이 성립되었다. 1913년 15세 때 중국 톈진난카이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1917년 졸업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도쿄의 칸다구 고등 예비학교(호세이 대학 부속학교)에서 공부하고 메이지 대학에 들어갔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침략적 압력이 중국에 가해지는 것을 보고, 학업을 포기하고 1919년에 귀국하였다. 이후 5·4 운동에 참가하다 1920년에 체포되었다.

저우언라이의 학생운동

5.4운동을 주도하여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된 저우는 이후 텐진의 난카이 대학의 문학전공으로 적을 두었으나, 수업에 참가는 하지 않았다. 그는 군벌과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것을 모토로 하는 "텐진학생연합"의 조직자가 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저우는 이 조직의 기관지인 《텐진학생연합회보》의 편집인이 되어 활동했다. 1919년 9월, 12명의 남학생과 8명의 여학생으로 "각오사"(觉悟社)를 조직하였다. 이 조직에서 후에 부인이 되는 덩잉차오를 만났다. 저우는 남학생으로만 조직된 "텐진학생연합"과 여학생으로만 조직된 "애국연합"을 통합하는 조직책이었다.


1920년 경찰이 인쇄소를 덮치고 "각오사"의 회원을 체포하였다. 저우는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이끌었고, 이후 다른 28명과 함께 그도 체포되었다. 이후 경범죄로서 풀려났다. 코민테른은 그를 공산당에 가입시켜 모스크바로 유학시키려고 했으나, 그는 당시에는 공산주의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고, 대신 프랑스 유학을 선택했다. 그가 프랑스로 떠난 이후 덩잉차오가 "각오사"를 맡았다.

저우언라이의 프랑스 유학시절

1920년 저우와 196명의 다른 중국인 학생들은 상하이를 떠나 마르세이유로 출발했다. 이것은 "근공검학"(勤工俭学) 이라고 불리는 프로그램에 의한것으로 "중불 교육위원회"가 주도한 것이었다. 마르세이유에 도착하여 파리로 가서 프로그램에 의해 일하면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을 주도한 위원회의 부패로 말미암아 그들은 급료를 받지 못했고, 저우는 중국신문에 교육위원회와 정부를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파리시절 덩샤오핑과 알게되어 교유하게 되었다.


저우는 그동안 영국을 여행하고 에든버러 대학에 입학하려고 했으나, 학기가 안맞아 프랑스로 돌아왔다. 프랑스에서 중국공산당의 산하 학생조직에 가입했고, 1922년 중국공산당에 정식으로 가입했다. 이후 프랑스, 독일, 벨기에등을 여행하면서 중국유학생들을 공산당 산하단체인 "사회주의청년단"에 모집하고 그들을 선발하여 모스크바에 유학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의 활동은 당에서 인정받아 제1차 국공합작이 성립하자 국민당과 함께 통일전선을 조직하라는 명령을 받고 1924년 홍콩을 통해 광저우로 돌아왔다.

저우언라이와 제1차 국공합작 시절

1924년 1월 쑨원은 공식적으로 공산당과 국민당의 연대를 선언했고, 중국각지에 할거하던 군벌에 대한 토벌작전을 계획했다. 이를 위해 소련의 지원을 받아 광저우에 황푸군관학교를 세우고 군대를 지휘하기 위한 장교들을 기르기 시작했다. 당시 열강에 의해 고립되었던 소련과 코민테른은 중국에서 제국주의세력을 몰아내어 고립을 탈피할 기회로 보고 무기와 자금, 군사고문단을 지원했다. 10월에 저우는 이 학교의 정치부 부주임으로 임명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당시 교장은 후에 저우와 대결하는 장제스였다.


저우는 곧 국민당 우파가 국공합작을 극렬히 반대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특히 국민당 자체가 군벌의 연합체라는 것을 깨닫고 이들의 배신에서 공산당의 생존을 위해서는 자체 병력을 가져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를 위해 그는 황푸군관학교에서 부교장을 맡고 있던 다른 공산당원 네룽전과 함께 생도들을 포섭하여 중국공산당원에 가입시켰다.


1925년 3월 쑨원이 사망한 직후, 천츙밍이라는 군벌이 광저우를 점령하였다. 저우는 생도들을 이끌고 천에 대한 토벌에 나서 승리했다. 그래서 황푸군관학교의 군법회의 위원장으로 승진하였다. 저우는 여세를 몰아 다시 승리하고 산토우를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산토우와 인근지역에 대한 특별행정관에 임명되었다. 이 직위를 이용하여 그는 비밀리에 공산당의 세포조직을 심었다. 이해 8월 덩잉차오와 5년간의 원거리 연애를 청산하고 결혼하였다.


쑨원의 사후, 국민당은 장제스, 랴오중카이, 왕징웨이의 삼두정치에 의해 운영되었다. 그러나 곧 좌파인 랴오중카이가 암살되었고, 장제스는 이를 기화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민당의 우파를 통합하여 자신의 지휘아래 두었다. 1926년 3월 18일 코민테른의 국공합작 고문 미하일 보로딘이 상하이에 있는 동안 장은 당에 있던 좌익을 추방하고 당권을 장악할 음모를 꾸몄다. 장은 국민당군의 군함 중산함의 함장과 선원이 자신을 납치하려 했다는 구실을 들어 이들을 모두 체포했고, 더 나아가 네룽전을 포함한 황포군관학교의 공산당원들이 체포되었다.


비상사태와 통행금지가 선포되었고, 산토우에서 돌아온 저우도 48시간동안 체포구금되었다. 저우는 풀려나면서 장을 대면하였고, 장에게 저우는 "국공합작의 단결을 방해하는 일이다"라고 비난했으나, 장은 일부 공산당 과격세력의 음모를 분쇄한 것일뿐이라고 강변하였다. 상해로부터 돌아온 보로딘은 장을 신뢰했고, 저우가 성급했다고 힐난했다. 장의 요구에 의해 보로딘은 국민당적을 가지고 있는 공산당원의 명부를 장에게 넘겼다. 이 명부에 빠졌던 당원은 저우가 비밀리에 모집한 당원들이었다. 장은 모든 공산당원 장교들을 해임하였고, 공산당에 동정적이었던 국민당 거두 왕징웨이도 유럽으로 보내버려 대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저우도 다른 공산당원 장교와 마찬가지로 모든 지위에서 해임되었다.

저우언라이, 상하이에서 옌안으로

국민당의 북벌이 시작되자 그는 상하이로 와서 선동가로 변신했다. 그는 1926년 상하이에 대한 국민당의 공세가 시작되자 내부에서 노동자들의 총파업과 무장봉기를 주도하여 국민당군이 상하이에 대한 공세를 시작할수 있도록 원조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시의 주도권이 공산당에게 넘어갈 것을 우려하여 시를 점령하자 범죄조직인 청방삼합회를 동원하여 백색테러를 주도, 자신을 원조했던 노동자들을 체포처형하였다. (4.12사건 참조) 이를 기화로 국공합작은 결렬되었고, 각지에서 공산당원에 대한 체포와 처형이 일어났다.

저우는 1927년 8월 1일 허룽과 함께 난창 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겨우 탈출에 성공하여, 홍군이 있던 장시 소비에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우는 교조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르는 "28인의 볼셰비키" 그룹대신 농촌혁명을 우선시하는 마오쩌둥을 지지하게 되었다. 당권을 잡고 국민당군에 정규전으로 맞서 큰 피해를 낸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이 몰락하고 대장정 기간중 마오가 당권을 장악하자 그는 당의 제2인자가 되었다. 군벌 장쉐량이 국민당과 공산당의 항일연대를 주장하면서 자신을 방문한 장제스를 체포하는 시안사건이 벌어지자, 저우는 교섭자로 나서 장제스를 석방하는 대신 항일을 위한 국공합작을 다시 재건될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이후 저우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중 국민당 정부가 있던 충칭에 공산당 대표로 머물렀다.

저우언라이의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후, 저우는 총리겸 외교부장을 맡아 국제 외교무대에서 활약하였다. 1955년 제네바 회의와 반둥회의에 중국 대표로 활약하였다. 이때 국민당의 암살시도가 있었으나, 그는 무사히 벗어났다. 이후 인도, 인도네시아, 유고슬라비아등의 국가와 함께 비동맹회의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1958년 천이에게 외교부장을 넘겨주지만, 총리는 그가 죽을때까지 계속 맡았다.


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의 혼란의 와중에도 그는 한쪽에 기울어지지 않은 처신으로 총리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1970년대에는 미중 국교정상화를 주도하여 1972년의 미국 닉슨 대통령의 방중에서 마오를 대신하여 주된 상대로 나서 상하이 코뮤니케에 공동서명하였다.


그는 말년에 자신에 방광암이 발병한 것을 알고, 덩샤오핑에게 많은 직무를 넘겨주기 시작했다. 1974년 문화대혁명의 말기 기간에는 저우 자신이 마오와 사인방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1976년 1월 마오에 8개월 앞서 사망했다. 장례식에서 추도사는 덩샤오핑이 읽었으며, 그의 유해는 자신의 희망대로 화장되어 중국에 뿌려졌다. 마오가 저우가 자신보다 장수할 것을 우려해 병치료를 방해했다는 설이 있다. 텐진에는 이후 저우와 그의 부인 덩잉차오를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 세워졌다.

저우의 동상
저우언라이의 동상

저우언라이와 톈안먼 사태

저우의 죽음은 마오 사후 권력을 장악하려고 했던 사인방에게 희소식이었고, 그를 존경하던 많은 중국의 인민들에겐 슬픈소식이었다. 그리하여 자발적으로 저우를 기리기 위해 텐안먼 광장에 모인 추모인파가 사인방을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자, 4인방은 무장병력을 동원하여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4인방은 이러한 사태의 책임을 덩샤오핑에게 돌렸고, 덩샤오핑은 자리를 물러나 마오 사후 4인방 체포때까지 권력에서 밀려나 있었다.

저우언라이의 평가
 
노련한 외교관으로서, 유능한 행정가로서, 헌신적인 혁명가로서, 그리고 실용적 정치가로서 중국 현대사에 남긴 그의 족적은 매우 크다. 그의 삶은 현대적인 공산주의 혁명가의 삶과 관리집안 출신으로 "최후의 만다린(궁정관료)"이라고 불리는 전통적인 삶이 교차하는 역설적인 것이었다. 그는 마오의 관념적이고 급진적인 정책을 자신의 권한 안에서 최대한 완화시키도록 노력했다. 특히 문화대혁명 기간동안 홍위병들의 파괴으로부터 많은 문화유적지들을 보호하고, 숙청인사들을 보호하였고 한다.

마오를 비롯한 많은 중국 지도자들의 비행이나 추문에 대한 사후 폭로나 비화가 잇다르고 있지만, 저우언라이는 이들과는 달리 청빈하고 성실한 근무로 예나 지금이나 중국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있다.


그러나 비밀로 분류된 중국공산당의 서류들을 접할수 있었던 전기작가 가오원천이 홍콩에서 펴낸 저서에 의하면, 저우는 문화대혁명 기간중 마오의 행보를 완화시켰다는 통설과는 달리,마오에 굴복하여 수수방관하는 자세로 일관, 자신이 구할수 있던 많은 사람들을 숙청당하도록 내버려두었다고 한다.


그와 아내 덩잉차오는 자식이 없어서, 혁명기간중 부모를 잃은 동지의 자녀들을 양자로 삼아 키웠다. 그중 유명한 이는 후에 총리를 지낸 리펑이 있다.

 

출처: Daum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