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 진(秦)나라의 시(始)황제

지식창고지기 2009. 12. 27. 10:13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 진(秦)나라의 시(始)황제




개요


성은 영(贏), 이름은 정(政).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으나, 통일제국 진은 그가 죽은 지 4년 만에 멸망했다.
BC 259~210/209

시황제 영정(秦始皇帝嬴政, 기원전 259년 1월~기원전 210년 음력 9월 10일)은 진나라의 제31대 왕이며, 중국 최초의 황제이다. 조나라에서 출생하였기에 조정(趙政)이라고도 한다. 진 장양왕 영자초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당시 세도가 대단하던 조나라의 상인 출신의 승상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대규모의 문화탄압사건인 분서갱유사건을 일으켜 수 양제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대의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도량형을 통일하였고 전국시대 국가들의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 제도와 군현제를 닦음으로써, 이후 2천년 중국 왕조들의 기본틀을 만들었다. 전근대의 중국에서는 특히 유학 관료들에 의하여 폭군이라는 비판을 계속 받았으나, 오늘날 중국에서는 병마용 발굴 이후부터 시황제의 진취성과 개척성에 초점을 맞추어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초기생애

 

영정은 기원전 259년에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온 진나라 왕손 영자초와 그 부인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래 조씨는 조나라 수도 한단의 기생으로, 조나라의 거상 여불위가 데리고 있었다. 여불위는 조씨를 영자초에게 바쳤고, 영자초는 조씨를 아내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원래 조씨는 여불위의 아들을 임신하고 있었으나, 여불위가 이를 숨기고 정치적 목적에서 영자초에게 바쳤다는 설도 있다.


어쨌건, 영정은 영자초의 아들로 태어나, 줄곧 조나라에서 자라다가 기원전 250년, 영정의 증조부인 소양왕 영직이 동주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소양왕은 얼마 후, 사망하였고 그 아들인 효문왕 영주가 즉위했다. 이에 영자초는 처자와 여불위를 데리고 진나라로 돌아와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효문왕은 3일 뒤에 사망하고, 태자 영자초가 즉위하니, 이가 장양왕이다. 영정은 곧 태자에 책봉되었지만, 3년 뒤에 아버지 장양왕이 훙서하자,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나라의 제31대 왕에 즉위하였다.

여불위와의 분쟁


영정은 왕에 올랐으나, 친정을 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기에, 아버지 때에 승상이 된 여불위가 섭정이 되어 국사를 돌보았다. 여불위는 마음대로 국사를 휘둘렀으며, 심지어는 영정의 모친 조태후와도 각별한 사이였다 한다. 이에 여불위는 노애라는 자신의 수하를 환관처럼 만들어 조씨의 처소로 보냈고, 조씨는 노애와의 사이에서 2명의 아들을 낳았다.


이에 조씨는 노애와 함께 수도 함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거처하였다. 하지만, 기원전 238년에 영정은 성인식으로 잠시 함양을 비우자, 노애가 반란을 일으켰다. 소식을 들은 영정은 곧바로 군사를 파견하여 노애를 능지처참에 처하고 어머니 조씨를 감금하였다. 또한 노애와 조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2명을 포대기에 넣고 몽둥이로 쳐 죽여버렸다. 그리고, 영정은 여불위를 승상의 자리에서 내치고, 자결을 강요하였다. 이듬해인 기원전 237년에 여불위는 결국 자결하였으며영정은 모든 대권을 잡았다.

중국 통일 과정


기원전 230년부터 영정은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중국 통일을 위한 통일 사업을 시작하였다. 제일 먼저, 진나라는 가장 세가 약했던 한나라부터 멸망시켰다.


기원전 228년에는 조나라까지 멸망시켰다. 그 때, 연나라의 태자 희단이 자객 형가를 시켜 잔치자리에서 영정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이어, 기원전 225년에는 위나라, 기원전 223년에는 진나라 다음으로 세가 가장 세었던 초나라, 기원전 222년에는 연나라,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 드디어 마지막 남은 제나라까지 멸망시켜 영정의 나이 39세에 전 중국 땅을 마침내 통일하였다.

최초의 황제


영정은 왕이라는 칭호가 자신에겐 맞지 않는다며, 새로운 칭호를 원하였다. 그리고 삼황오제에서 '황'과 '제'를 따 합쳐서 황제(皇帝)라 칭하였고, 자신은 처음이니 시황제(始皇帝)로 부르라 명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시황제로 시작하여, 자신의 뒤를 잇는 황제들이 2세, 3세 등 만세까지 진 제국이 지속되기를 바랐다.


진시황제 영정은 승상 이사에 의견에 따라 군현제로 나라를 다스렸고,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었다. 또한, 모든 결재는 자신이 직접 챙겼으며, 도량형과 화폐, 문자 등을 통일하여 제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려 하였고, 도로 역시 정비하여 각지의 교통체계를 강화하였다. 시황제는 남쪽으로도 군사를 파견하여 4개 군을 증설시켰으며, 북방의 흉노족이 중국을 위협하자, 대장군 몽염을 변방으로 보내어, 그들을 정벌, 내몽고의 땅 일부도 편입시켰다.

분서갱유와 폭정, 대토목공사


기원전 213년, 어느 연회 때, 박사 순우월봉건제와 군현제를 놓고 복사 주청신과 언쟁을 벌였다. 이 때, 순우월이 봉건제로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승상 이사는 30일 내에 진나라의 역사와 의술, 농경 등에 관한 책 이외의 모든 책들을 태워버리라 주청올렸고, 시황제는 이를 받아들여 실행시켰다. 이것이 바로 분서(焚書)이다.


이듬해인 기원전 212년, 시황제는 방사 후생노생에게 불로장생의 약을 가지고 오라 명하였으나, 도리어 그들은 시황제를 비판하며, 도망쳐 버리자 화가 난 시황제에게 조정 안에 수상한 학자가 일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학자들은 모두 자기가 아니라며 잡아뗐으나 시황제는 이들을 모두 잡아들였으니, 그 수가 460여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구덩이에 넣고 생매장시켰으니, 이것이 바로 갱유(坑儒)이다. 그리고 이를 모두 합쳐서 분서갱유(焚書坑儒)라 불렀다.


이에 분개한 황태자 부소가 시황제에게 간언했으나, 부소는 오히려 시황제의 분노를 사 대장군 몽염이 있는 국경 근교로 쫓겨났다.


시황제는 북방에 흉노의 침입을 염려하여 서쪽으로 임도로부터 동쪽으로 요동까지 그 유명한 만리장성을 쌓도록 명했다. 이 만리장성에 동원된 인부가 150만여 명이나 되었고, 그 중에서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 하였다.


또한, 시황제는 함양 근교에 아방궁을 쌓도록 하였고, 나아가서는 70만 명의 인부를 동원, 함양 근교의 여산 전체에 자신의 능묘를 건설토록 했다. 이런 대토목공사를 하는 동안, 국가의 재정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법을 매우 엄히 하여 백성들이 무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게 하였으며, 한 사람이 죄에 연루되면 그 친족을 몰살시켰고, 나아가 한 집이 법을 어기면 그 마을의 모든 가구들도 그에 똑같은 형벌을 받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관청으로 가는 길에는 항상 죄인들의 행렬이 즐비했다 전해진다.

불로장생의 꿈


시황제는 자신이 무병장수 불로장생하길 간절히 빌었다. 그리하여, 전국의 명산에 방사들을 보내 불로장생의 약을 얻으려 하였으나, 없었다. 그리하여 죽으면서까지 그 약에 매우 집착을 하였는데, 그 중 서복이라는 사람이 시황제에게 왜국에 그 약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시황제는 많은 돈을 서복에게 내주고 왜국으로 가 어서 그 약을 가져오라 명했다. 하지만, 몇 년이 다 되도록 그 약을 구할 수 없게 되자, 시황제는 서복에게 독촉을 했고, 서복은 소년소녀 3000명을 데리고 왜국으로 건너가 다시는 진나라로 돌아오지 않았다.

 

전국 순행


시황제는 재위 기간 중 무려 다섯 차례씩이나 전국 곳곳을 순행하였다. 그러나, 이런 때에 많은 협객이 폭군 시황제를 죽이려 하였다. 그리하여 시황제는 순행 시, 언제나 5개의 수레를 군사들이 호위토록 하고, 자신은 그 수레 중 하나에 탔다. 시황제가 자신을 죽이려 드는 협객을 얼마나 두려워 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시황제는 길가에 자신의 송덕비를 세워 자신의 공적을 과시하기도 했다. 한번은 시황제가 금릉(金陵, 현재의 남경)에 왔을 때, 왕기가 일어났다. 이에 분개한 시황제는 근처에 소나무를 빽빽이 세워 왕기의 기운을 막으려 했다. 그리고 금릉은 삼국 시대까지 말릉(枺陵)으로 불리었다. 이렇게 시황제는 거의 온 중국 대륙을 돌아다녀 자신이 성공한 군주임을 천하에 과시하였다.

진시황릉의 병마용
진시황릉의 병마용
진시황릉의 또다른 병마용
진시황릉의 또다른 병마용

황제의 최후


시황제는 기원전 210년에 마지막 순행을 하였다. 여기에는 승상 이사와 중거부령인 환관 조고, 그리고 자신의 26번째 아들이자 막내아들인 호해가 자신을 뒤따랐다. 사기에 따르면 시황제는 돌아오는 도중 평원진에서 유성이 떨어졌는데 그 운석에 누군가가 '시황제사이지분(始皇帝死而地分)' 즉, 시황제가 죽고 천하가 갈라진다고 써놓았다. 이에 충격을 받은 시황제는 병으로 쓰러졌다고 한다.


그리고 시황제는 사구 지방에 이르자, 병이 매우 위독해졌으며 유언장을 조고에게 쓰라 하고, 그 내용은 옥새를 적장자인 황태자 부소에게 전달케 하고, 부소에게 함양에서 자신의 장례를 주관하라 명하였다.


기원전 210년 음력 9월 10일, 진시황제 영정은 50세의 나이로 붕어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자신이 만든 지하궁전인 여산에 묻혔다. 이 능묘는 1974년 우물공사를 하면서 부장품인 병용(군사모양의 인형)과 더불어 발견되어 지금도 발굴 중이다.


그러나 이사와 조고, 호해는 시황제의 죽음을 숨겼으며 시황제의 시신이 있는 수레 옆에 절인 생선을 같이 운반하여 시신 썩는 냄새가 들키지 않도록 했다. 조고는 시황제의 유서를 조작, 황태자 부소와 몽염에게 자결을 명하였고, 부소는 자결하였으나 몽염은 이 명에 대해 의심을 품어 자결하지 않았다. 그러나 군사들에게 체포당해 압송된 후 처형당했다. 얼마 뒤, 시황제의 26남 호해는 황제에 오르니 그가 진 이세황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