맵고 단호했던 강심장의 여인, 철수무정 가남풍(賈南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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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윤(꿈나무미래학교 교장, 한국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총명하면서 악랄하고, 방탕하면서 담대한 여자는 남자보다 무섭다. 그런 여자가 권력을 장악하면 사태는 예측할 수는 혼란에 빠진다. 그 이유는 여자의 마음이 남자보다 변화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찌그러진 공이 어디로 튀는지 알 수 없듯이, 권력행사의 방향을 판단할 수가 없다. 그런 상황 아래서는 오로지 몸을 낮추고 눈치를 살필 수 밖에 없다.
한 여름에는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고, 한 겨울에는 온 몸을 열나게 만드는 예측불허의 세계에서 가남풍(賈南風)은 살육을 오락으로 여긴 강심장의 여인이었다. 악랄한 수단과 쇳덩이로 만든 심장에서 인간의 감정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조조가 기틀을 세운 위(魏)나라의 운명은, 사마의와 그의 아들 사마사, 사마소 두 사람의 가혹한 살인유희를 거쳐 사마염에 이르러 진(晉)나라로 바뀌면서 그 막을 내렸다. 그러나 진(晉)나라도 위(魏)와 마찬가지로 단명에 그치기는 마찬가지였다. 진나라가 실재한 기간은 무제(武帝;265-290) 사마염과 혜제(惠帝;290-306) 2대에 걸친 40년 뿐이었다.
진나라의 사마염은 위(魏)나라 이래 다투어오던 촉한(蜀漢)과 동오(東吳)를 멸망시키고 혼란에 흽싸였던 중국을 통일하였다. 훗날 서진(西晉;265-316)으로 불리는 그의 왕조는 사실 취약하거나 무력한 왕조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토록 신속하고 무력하게 멸망을 당하였는가? 그 중요한 원인으로 대략 세가지를 꼽을 수가 있다.
첫째, 무제는 동성(同姓) 제왕(諸王)들에게 각지를 분봉하고, 병권(兵權)을 수여한바, 이것이 강대한 분열세력을 조성하는데 크게 한 몫을 했다. 일단 중앙에서 내란이 발생하여 혼란에 빠지자, 각지의 왕들은 제왕의 권위를 무시하고, 상호 세력다툼에 빠져들어 결국은 천하대란(天下大亂)을 불러 일으켜 수습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둘째, 사마씨(司馬氏)는 권모술수와 살육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도, 이를 은폐하기 위해 오히려 유가(儒家)의 도덕률을 선양하였다. 이처럼 허위와 기만으로 장식한 도덕표준은 실제적인 행동과 분리되어, 어떠한 명분으로도 도덕규범이 지켜지지 않았고, 이는 통치집단 내부의 안정된 질서를 세울 수 없는 조건이 되었다.
셋째, 혜제의 왕후인 가남풍이 불러 일으킨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유희는 그동안 잠재되었던 진(晉)나라의 모순을 일거에 폭발시켰다. 통치집단 내부의 세력다툼과 충돌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가남풍이라는 여자에 대해서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낙양성의 남쪽에는 지방의 치안을 책임지는 관아가 들어서 있는데, 이곳에 매우 젊은 소리(小吏;낮은 벼슬의 관리)가 한 명 있었다. 그는 일반적인 문서를 관리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는데, 위인됨이 건실하고 예의도 바르며, 또한 훤칠하고 잘생겼다. 그렇지만 그는 직급이 낮고 녹봉이 적은 보통의 관리였다. 집안이 가난한 그는 평소에도 낡은 옷차림으로 사무를 보았다.
어느날 그가 매우 화려한 복장을 입고 나타났다. 씀씀이도 커져 동료들을 좋은 술집으로 안내해 거하게 대접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를 의심하여 도둑으로 장관(長官;일반 사무관청의 대장)에게 고발하였다. 장관도 의심하고 있던터에 고발장이 들어오자 체포하여 그를 심문하였다. 그때 그는 나이가 겨우 스물에 가까웠고, 경험도 부족하여 자신이 겪은 일을 모두 장관에게 고해 바쳤다.
어느날 저녁무렵, 그는 일을 마치고 거리에 나섰다가 어떤 노파를 만났다. 노파는 그에게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며 중요한 일이 있으니 도와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는 무슨 일인지 궁금하여 노파에게 물으니, 노파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집안 사람이 병이 들어, 점장이를 불러 들였는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오늘 저녁에 성의 남쪽에 가면, 젊은이를 만날 수 있는데 그가 우리 집안의 사기(邪氣)를 물리쳐 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집에 왕림하여 주시기만 한다면 후한 보상을 드리겟습니다.”
그는 노파의 복장이 화려하고 말에도 예의가 있는 점으로 보아 부잣집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기대감과 호기심에 그 노파를 따라가기로 결심하였다. 거리를 빠져나와 골목에 들어서니 뜻밖에도 거기에는 마차가 한 대 대기하고 있었다. 마부는 노파가 눈짓을 보내자 다짜고자 소리(小吏)의 눈을 검은 천으로 가리고, 커다란 나무상자에 그를 넣고 뚜껑을 열쇠로 채워, 마차에 태우고는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렸다. 그는 재수없게 강도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나처럼 가진 것이라고는 불알하나 밖에 없는 사람을 잡아다 무어에 쓰려고 그러지?”
비록 천이 눈을 가리고 주위가 어두웠지만 소리는 마차가 굴러가는 모양으로 보아서 대략 10리는 달려왔다고 생각했다. 마차에서 내려진 그는 대여섯번 문지방을 넘고 10여개의 회랑을 지나 어느 지점에 인도되었다. 그곳에서 누군가 눈을 가린 천을 벗겨주었다. 소리(小吏)는 주변의 광경에 놀라지않을 수 없었다. 하늘을 치솟는 두대(樓臺)가 즐비하였고, 처마와 처마가 맞닿은 건물들이 운해(雲海)처럼 멀리 늘어섰다. 가산(假山;인공적으로 만든 산)이 눈 앞에 우뚝 서있고, 냇물이 시원스레 흐르고 뒷쪽에는 호수가 보였다.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 그의 눈 앞에 펄펴져 있었다.
얼떨떨해 있을때, 눈 앞에 아리따운 아가씨가 서너명 다가와 그 앞에 섰다. 그는 얼른 다가가 궁금증을 물었다.
“이곳은 어디입니까? 나를 무엇때문에 이런 곳에 불렀나요?” 아리따운 아가씨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이곳은 하늘 나라입니다. 인간 세상에 이처럼 아름다운 곳이 어디에 있나요? 좋은 일 때문에 불렀으니 마음을 푹놓고 저를 따라 오세요.”
소리(小吏)는 그녀들의 뒤를 따라 매우 화려하게 꾸며진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들은 그곳에서 그의 옷을 벗긴 다음에 목욕을 시키고 비단으로 만든 화려한 옷을 내주었다. 본래부터 훤칠하게 잘생긴 그는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자 곧바로 귀공자처럼 보였다. 곧이어 그는 그곳을 벗어나 어떤 큰 집의 내실로 안내되었다. 실내는 이제껏 전혀 본적이 없는 보석과 진귀한 물품으로 가득했다.
이때 밖에서 어떤 귀부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나이는 대략 서른 대여섯으로 보였고, 매우 키가 작고 뚱뚱했다. 피부는 거무틱틱 하였고, 왼쪽 눈썹 위에는 붉은 사마귀가 있었다. 아리따운 아가씨드른 귀부인이 나타나자 모두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예의를 표시하였다.
귀부인은 그녀들을 밖으로 나가라고 손짓을 한 다음에 소리(小吏)에게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았다.
“오, 정말로 보석이로구나. 이렇게 훌륭한 보석은 처음이야.” 그녀는 젊은이를 가슴에 품고 천천히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영문을 모르는 소리는 그저 묵묵히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자, 이제부터 하늘나라에서 즐기는 놀이를 시작해요, 젊은이.”
그녀는 소리를 침상에 끌어들여 손수 옷을 벗겨주고 자신도 황급히 옷을 벗어 던졌다. 소리(小吏)는 아직 장가를 들지 않았고, 여자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동정(童貞)이었지만 귀부인의 능숙한 손놀림에 흥분이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귀부인과 닷새동안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귀부인은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돈과 옷을 하사하며,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장관은 소리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낙양성의 근처에 하늘나라가 있다는 것도 그렇고, 천상에서 그렇게 못생긴 귀부인이 어떻게 아리따운 아까씨들의 시중을 받으며 살 수가 있단 말인가? 상식적으로도 그는 소리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곳 관아에는 황후와 먼 친척이 되는 관리가 서너명 있었다. 그들은 소리의 말을 듣고 가볍게 웃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영문을 모르는 장관에게 귓속말로 무어라 쏙닥거렸다. 그제서애 장관은 무엇을 깨달았는지 얼른 소리에게 말을 꺼냈다.
“그래 맞아, 너는 거기에서 선녀를 만나거야. 이후부터 하늘의 일은 원래 남에게 말하는게 아니니 더이상 거기에서 있었던 일은 꺼내지 마라. 알았는냐?”
낙영성에는 얼마전부터 용모가 빼어난 소년들이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실종된 그들은 이제까지 한 명도 돌아온 적이 없기 때문에 진상이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이곳의 소리(小吏)는 여자의 경험이 없었고, 천성이 본래부터 착해서 황후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이때문에 그녀는 소리(小吏)를 죽이지 않고 돌려 보낸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못생긴 가남풍이 어떻게 황후가 될 수 있었을까? 또한 황후가 이렇게 미소년을 납치해서 음란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데 황제는 무얼하고 있단 말인가?
가남풍(賈南風;256-300)은 가충(賈充;217-282)의 딸이다. 가충은 사마씨가 조씨로부터 위(魏)나라를 빼앗는데 커다란 공로를 세운 공신이었다. 사마의의 둘째 아들인 사마소가 집정하고 있을때, 위(魏)나라의 어린 황제 조호는 꼭두각시 황제가 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어느날 궁중의 측근 태감(太監;환관을 일컫는 말)과 시위를 이끌고 사마씨 가문으로 상징되는 장군부를 공격하였다.
이 일은 당시에 매우 곤란한 문제를 일으켰다. 사마씨 가문은 이제껏 천하의 사람들에게 유가의 충효(忠孝)를 선전하였는데, 아직 왕조를 엎을 준비가 되지않은 상황에서 황제가 친히 장군부를 공격하자, 어떻게 대응해야 옳은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때, 가충이 지휘하는 병력이 장군부로 통하는 길목에서 황제의 진로를 막아섰다. 이 자리에서 가충은 과감한 결단을 내려 수하에게 황제의 목을 내리치도록 명령했다. 어린 황제는 낙양성의 대로에서 목이 떨어졌다.
이 사건은 조정의 대신들과 백성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이 일로 인해서 서서히 민심이 동요되기 시작했다. 가충은 곧바로 황제의 목을 내리친 장수에게 대역죄를 적용해 그의 3족을 멸하고 일을 수습하였다.
사마씨에 대한 가충의 충성심은 진무제(晉武帝) 사마염이 적통(適統)을 잇게 만드는 과정에서 나타났는데 이때에도 그는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사마염은 후에 황제가 된 다음에 가충을 노공(魯公)으로 삼고 조정의 대사를 그에게 맡겼다. 가남풍은 비록 얼굴은 천하의 박색이었지만 가충의 공로로 궁으로 들어와 태자비가 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인 태자 사마충(司馬衷)은 백치(白痴)였다. 어느 날, 그는 궁중의 숲에서 청개구리가 심하게 우는 소리를 듣고 측근에게 말했다.
“저 청개구리는 공적으로 우는가, 아니면 사적으로 우는가?” 그의 물음은 사실 어느 누구도 대답을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또 한번은 황제가 된 이후에, 어느 대신이 천하에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먹을게 없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물었다. 그는 아무런 고민도 하지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먹을 양식이 없으면, 고기(肉)를 먹어야지.” 황제는 보통 식사시간에 고기를 먹기 때문에, 그는 고기야말로 백성들도 마음대로 먹는 음식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백성들은 고기가 그들의 일생에서 가장 먹기 힘든 음식이었다.
가남풍은 이처럼 바보같은 황제를 남편으로 두었지만, 성격으로 본다면 그녀는 매우 무서운 여자였다. 전통적인 규범에 따르면 여자는 3종4덕(三從四德)을 따라야 하며, 투기나 강짜는 부릴 수 없었다. 남자는 3처4첩(三妻四妾)을 거느려도 무방하였고, 더욱이 황제는 궁중예법에 따라 3천여명의 후궁을 거느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가남풍은 황제가 다른 여자를 마음에 두는 것을 용납하려고 하지 않았다.
어느날 가남풍은 궁중에서 배가 불록한 궁녀를 보았다. 그녀는 위사(衛士)의 수중에서 과(戈;무기의 일종)를 빼앗아 그자리에서 궁녀의 배를 두들겨 패서 유산을 시켰다. 이렇게 잔인한 그녀의 성격은 집안의 내력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도 성격이 매우 흉폭하여 천하의 맹장인 가윤도 그녀 앞에서 쩔쩔 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마충은 본래부터 완전한 백치는 아니었다. 악독한 여자를 부인으로 맞아들인 이후에 그녀의 악독한 행동을 자주 보게되면서 점점 바보처럼 행동하였다. 가남풍은 비록 성격은 악독하였지만 매우 똑똑한 여자였다. 사마충이 황제가 되는데 있어서 그녀는 커다란 공로를 세웠다.
진무제는 말년에 바보같은 사마충을 태자에서 폐하고 다른 아이를 태자에 앉히려는 생각을 하였다. 그는 사마충을 마지막으로 시험하기 위하여, 아직 처리하지 않은 공문을 태자에게 건네며 빠른 시일내에 처리하도록 명령했다. 이때 가남풍은 사마충을 도와 공문을 모두 처리했다. 진무제는 이에 태자를 폐하려던 생각을 다시 바꾸었다.
태희(太熙) 원년(서기 290년) 무제가 붕어하자, 태자 사마충은 혜제(惠帝)가 되었고, 가남풍은 황후가 되었으며, 혜제의 이모인 양지(楊芷)는 황태후에 올랐다. 진무제의 황후는 본래 양절(楊絶)로, 그녀는 혜제 사마충의 모후였다. 그녀는 임종시에 포악한 가남풍이 자신의 아들 사마충을 잘 대해주지 않으리라 여기고, 무제에게 특별히 간청하여 자신의 당매(堂妹;사촌 여동생)인 양지를 궁으로 불러들여 황후로 삼게 하였다.
태자가 황제가 되었을때 그는 서른 둘이었다. 일반적으로 황제의 나이로 보면, 권력의 행사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거대한 권력의 진공상태가 생겨났다. 권력을 놓고 두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되었기 때문이다. 황궁 내에서는 태후인 양지와 황후인 가남풍의 세력이, 조정에서는 외척인 양씨(楊氏)와 가씨(賈氏)의 세력이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초기에는 양씨의 세력이 우세를 점하였다. 진무제 생존시에 이미 양지의 아버지 양준(楊駿;?-291)은 황후의 부친이라는 신분을 빌어 거기장군(車騎將軍)이 되었고, 진후(晋侯)에 봉해졌다. 양준의 동생인 양요(楊珧)와 양제(楊濟)도 조정의 대신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진무제가 병약하여 임종을 맞았을때, 양지는 무제의 정신상태가 혼미한 시기를 이용하여 양준을 보정대신(輔政大臣)으로 삼게 만들었다. 혜제가 즉위하자 양준은 한계단 올라 태부(太傅;태자의 사부)에서 대도독(大都督)이 되어 백관(百官)을 거느렸다. 양씨들은 더욱 권력의 장악에 박차를 가하였다. 혜제가 즉위한지 얼?되지않은 싯점에 양씨 부녀는 혜제에게 태자를 세우도록 독촉하였다.
당시에 황후인 가남풍은 딸 하나만 낳고 아들은 없었다. 태자로 책봉된 사마휼(司馬譎;278-300)은 사비(謝妃)의 소생이었다. 사마휼이 태자가 되자 양제(楊濟)는 태부로 승진하였다. 양씨의 세력은 표면상으로 조정의 대권을 거의 장악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양씨의 세력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양씨의 가문은 태후인 양지의 지위를 이용하여 권력을 획득하였을뿐 결코 진(晉)의 권문세가는 아니었다. 따라서 조정의 여러 세력과 연결관계가 부족하였고 더 나아가 정치경험이 현저하게 결핍되었다.
가씨의 세력도 양씨에 비해 그다지 나은바가 없었다. 비록 가남풍의 아버지인 가충이 진(晉)의 개국공신으로 조정에서 상당한 지위와 권력을 가졌지만, 무제가 붕어하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고, 가충의 유일한 아들도 일찌기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가충의 봉호(封號)인 노공(魯公)은 외손인 한밀(韓謐)에게 계승되었고, 한밀은 가씨로 성을 바꾸었다. 이때문에 가밀로 바꾼 한밀의 실제적인 영향력은 가충에 비할바가 못되었다.
양지는 비록 혜제의 친어미는 아니었지만 이모였고, 양지에게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혜제와 거의 친아들과 같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특수한 관계로 인하여 양지는 며느리인 가남풍이 비록 똑똑하고 악독하다 할지라도 충분히 견제할 수 있다고 자신하였다.
가남풍은 부친 가충에게서 악랄하고 매서운 성격을 물려받았다. 그녀는 공론(公論)이나 도덕규범을 멸시하는 특수한 성격을 소유한 여자였다. 그녀는 과감하고 비상한 수단을 사용하여 양가로부터 권력을 탈취하는 계획을 착실히 다져나갔다. 특히 부인을 귀신보다 더욱 두려워 하는 혜제는 그녀가 목적을 이루는데 필요한 가장 유효한 도구였다.
가남풍은 일찌기 태자비가 되었을때 혹독한 성품과 안하무인격인 태도로 인하여, 양지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혜제가 즉위하자 조정의 대사에 간여하고 싶었지만, 이미 조정의 권력이 양준에게 넘어가 있는 상태라서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양지와 그녀의 가문에 깊은 원한을 품기 시작했다. 단지 기회가 없기 때문에 참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날, 가남풍의 심복인 태감 동맹(董猛)이 그녀에게 말했다. “전중중랑(殿中中郞;황궁시위대를 지휘하는 벼슬) 맹관(孟觀)과 이조(李肇) 대감은 양준의 무례한 언사에 매우 분개하고 있습니다.” 맹관과 이조가 맡고 있는 전중중랑은 비록 높은 벼슬은 아니었지만, 황궁을 지키는 정예 시위대를 지휘하는 중요한 벼슬이었다.
가남풍은 양준이 명의상으로는 천하의 병마를 관장하는 대도독이지만, 돌연한 사태가 벌어지면 백만병력도 황궁 시위대 수백명에 비해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동맹, 맹관, 이조와 함께 양준을 제거하고 태후를 폐위할 음모를 꾸몄다. 또한 가남풍은 이처럼 중요한 대사(大事)는 대외적인 명망성이 뛰어난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판단아래, 맹관과 이조에게 종실의 제왕(諸王)을 포섭하여 긴밀하게 연계하라고 지시했다. 그녀는 지방에 웅거하고 있는 번왕(蕃王)의 지지를 획득해야 무리없이 일을 성공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처음에 무제는 진(晉)을 세우고, 종실(宗室)이 약해 망한 위(魏)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종실의 제왕(諸王)을 주요한 지역에 진주시키고 반란이 일어날때 황실을 보호하는 역할을 부여하였다. 양준이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자, 소외된 번왕들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하였다. 가남풍은 이를 알고 맹관과 이조를 여남왕(汝南王) 사마량(司馬亮;?-291)과 초왕(楚王) 사마위(司馬瑋;271-291)에게 파견하여 의사를 물었다.
여남왕 사마량은 찬성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강력하게 반대를 한 것도 아니었다. 이에 비해 초왕 사마위는 혼쾌하게 지지를 표시하였다. 영평(永平) 원년(서기 291년) 2월, 초왕 사마위와 여남왕 사마량이 입조(入朝)하였다. 양준은 그들이 입조한 까닭을 알지 못하고, 지방에 웅거하고 있던 그들이 중앙에 올라와 있으면 통제하기가 쉽다고 판단하여 입조를 막지 않았다.
3월 어느날, 이조와 맹관이 혜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양준의 모반을 밀고하였다. 혜제는 양준이 무엇때문에 모반을 꾸몄는지 알수가 없었고, 또한 모반을 꾸몄다면 어떻게 토벌을 해야할지 막막하였다. 다행히 그의 곁에 재간이 뛰어난 가남풍이 있었다. 혜제의 부탁을 받은 가남풍은 곧바로 토벌을 지시하였다. 이 날 심야에 혜제의 명의로 조서가 내려져, 황궁에 계엄이 선포되고 모든 대신들의 출입이 통제되었다.
가남풍은 황궁 시위대를 세 부대로 나누어,
첫째 부대는 초왕 사마위가 인솔하여 황성의 외문을 지키고,
둘째 부대는 여남왕의 장군인 유송(劉頌)이 인솔하여 내전을 호위하고,
셋째 부대는 동안공(東安公) 사마유(司馬由)가 사백여명의 정예 시위병을 이끌고 직접 양준이 머물고 있는 태부부(太傅府)를 공격하도록 지시하였다. 동시에 양준의 직위를 해제하고, 부중에 거처를 제한한다는 조서를 딸려 보냈다.
양준은 일찌기 황제의 앞에서 자신을 비방하는 사람을 감시하기 위하여 외조카인 단광(段廣)과 장소(張邵)를 궁중에 들여보내 혜제를 모시는 직위를 부여했다. 이때 양광은 가남풍이 양준을 토벌한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혜제에게 나아가 호소하였다.
“폐하, 양 대도독은 자식도 없는데 어찌 모반을 하겠습니까? 다시한번 헤아려 주십시오.” 혜제는 그 말에 한동안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아들이 없는데 무슨 모반을? 그렇지만 황후가 모반이라고 했으면 어쨋든 모반인거야.”
단광은 혜제의 말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고, 이를 태후 양지에게 고하였다. 태후는 혜제를 찾아가 따지려고 했으나 시위들이 출입을 통제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는 급한 나머지 비단에 ‘태부를 구하는 자에게 상을 내리겠다’라는 글과 태후의 도장을 찍은 다음에 화살에 묶어 궁문 밖으로 날렸다. 그녀는 궁성 밖에 있는 금위군이 화살을 발견하여 양준을 돕게 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화살은 오히려 궁중 시위들에게 발견되어 가남풍에게 넘겨졌다.
양준이 머물고 있는 태부부(太傅府)는 전(前) 왕조인 위(魏)나라의 대장군이었던 조상(曺爽)의 장군부였다. 황성에 계엄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들은 양준은 측근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하였다.
주부(主簿) 주진(朱振)이 먼저 입을 열었다. “궁중에 변고가 발생했다면 태감들이 황후와 함께 음모를 꾸민게 틀림없습니다. 우선 운룡문(雲龍門;낙양의 황성 정문)을 불태워 궁중을 소란스럽게 만든 다음에, 태자 동궁의 시위대와 궁 밖에 주둔하고 있는 금위군을 이끌고 태자마마를 호송해 와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주모자를 색출하면, 병마가 절대로 부족한 궁중의 세력은 불안에 떨다가 주모자를 건네주고 활로를 찾게 될 것입니다. 그때 모든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재앙이 바로 우리에게 닥칠 것입니다.”
양준은 성격이 유약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사태가 얼마나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는지 판단을 하지 못한 그는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운룡문을 지을때 얼마나 많은 재물을 들였는데, 어떻게 태울 수가 있는가?” 양준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자 많은 참모들이 한 숨을 내쉬었다.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벌써 슬그머니 태부부를 빠져나와 멀리 달아났다.
사마유가 이끄는 궁중의 시위대는 순식간에 양부(楊府;양씨의 저택)를 포위하고 사방에 불을 질렀다. 양준은 비로소 사태가 심각하다고 느끼고 위사를 이끌고 돌파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춘 궁중의 시위대에게 번번히 저지당하였다. 그는 당황한 나머지 마굿간에 몸을 숨겼다가 시위대에게 발각되어 단칼에 목이 떨어졌다. 사마유는 양부(楊府)의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이어서 양준의 가족들과 측근들을 수색하여 단칼에 처단하였다. 이때 살해된 사람들은 무려 1천여명에 이르렀다.
양준을 제거하는데 성공한 가남풍은 곧바로 혜제의 명의를 빌어 태후 양지를 영녕궁(永寧宮)에 연금시켰다. 처음에 가남풍은 양씨의 일족은 모두 처형시킬 생각이었으나, 어쩐일인지 은혜를 베풀어 태후의 모친인 방씨(龐氏)를 살려주고, 태후를 모시며 살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는 가남풍이 꾸민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얼마 지난 후, 그녀는 측근 관리를 시켜 상서를 올리게 하였다. “황태후는 부친과 함께 모반을 꾸몄습니다. 종묘사직을 어지럽히기 위해서 화살을 궁밖으로 날려 보내 병사를 모으고 민심을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죄악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위로는 조종(祖宗)의 업(業)을 계승하고, 아래로는 천하인에게 공도(公道)를 보여야 마땅하옵니다. 사정(私情)에 얽매어 태후의 죄를 용서하시면 아니되옵니다.”
군신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열띤 토론을 거쳐 태후를 서인(庶人)으로 폐하고, 낙양성 밖의 금용성(金용성)에 가두기로 결정하였다. 황태후가 모반을 한 예는 이제껏 한번도 없었다. 또한 양지는 비록 혜제의 친모(親母)는 아니지만 봉건시대의 예법에 따르면 엄현히 모친의 관계였다. 그런데 아들이 모친의 죄를 다스리고, 모친의 명호(名號)를 삭탈한 일도 처음이었다. 이 모든 일은 가남풍이 뒤에서 조종(操縱)한 것이다.
태후의 폐위가 결정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어떤 관리가 상서를 올렸다. “양준이 모반을 하여 그 집 안은 모두 처형이 되었는데, 그 처인 방씨만이 사면을 받아 태후를 모시며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태후가 이미 서인(庶人)으로 폐위 되었으니, 방씨는 특권을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마땅히 정위(廷尉;재판 담당관)에게 넘겨 처형해야 마땅합니다.”
가남풍은 황제에게 허가하지 말라고 압력을 넣었다. 대신들은 일국의황제는 대의를 따라야지, 사정(私情)에 얽메이면 나라의 기강이 무너진다며 줄기차게 처형을 주장하였다. 이에 가남풍은 국가의 통치를 엄정히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대신들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고 황제를 설득했다. 황제는 바보같이 눈만 껌뻑거리며 동의를 표시하였다.
태후 양지는 어머니 방씨가 사형에 처해졌다는 통보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며느리인 가남풍에게 보내 충정을 표시하며 목숨만을 살려달라고 애걸하였다. “죄첩(罪妾;죄를 지은 여자라는 낮춘 말)에게 성은을 베풀어 모친의 한가닥 생명만을 지켜 주신다면 감읍하여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가남풍은 그녀의 상서문을 갈기갈기 찢으며 통쾌하게 웃었다. 이제는 태후만이 그녀의 손아귀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았다. 가남풍은 태후를 처치할 묘수를 짜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 그녀는 태후의 모친인 방씨를 처형하는 방법을 쓰지 않았다. 만일 방씨를 처형한 예를 따른다면 서인으로 폐출된 태후는 마땅히 서인의 신분에서 모반죄에 걸려 쉽게 처형될 수 있었다.
가남풍은 악독하고 결단력이 있는 여자였지만 뻔뻔스러운 방법을 쓰지 않았다. 그녀는 금용성에 감금된 양지에게 일체의 음식을 보내지 못하도록 하였다. 임금 다음으로 존귀하고 영예스러웠던 태후는 끝내 굶어죽고 말았다. 장례를 치룰때 가남풍은 양지가 유명계(幽冥界)에 있는 선황제 무제에게 진상을 고할까 두려워, 그녀의 관에다 갖가지 부적을 붙여 영혼이 작난하지 못하게 막았다.
가남풍은 종실의 지지를 받아 양가의 세력을 제거하자, 부득불 제왕(諸王)을 중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여남왕 사마량을 보정대신(輔政大臣)에 임명하고, 진왕(秦王) 사마간(司馬柬)과 동평왕(東平王) 사마무(司馬楙)에게 군사(軍事)를 주관하게 하였다.
또한 초왕 사마위(司馬瑋)에게는 금군의 지휘권을 내리고, 동안공 사마유는 양준을 살해하는데 공로가 지대하여 왕(王)으로 임명하여 조정의 대사에 참여시켰다. 가충의 계승인인 가밀은 더욱 관직이 상승하고 권력의 힘이 커져 이로써 진(晉)의 권력은 종실과 가씨들이 공유하는 상황이 되었다.
가남풍은 일차적인 목표를 이루자 권력이 극대화된 종실의 세력을 제거할 준비에 착수하였다. 그녀는 사마량을 앞세워 사마유의 월권을 죄목삼아 지방으로 축출시켰다. 또한 사마위에게 밀조(密詔)를 내려 사마량이 모반을 꾸몄으니 토벌을 하라고 명령하였다. 사마량과 그의 일가족은 이때 모두 처형되었다.
이어 그녀는 사마위가 조서(詔書)를 위조하여 사사로히 사마량을 모반죄로 몰아 처형하였다는 죄목을 빌미삼아 그를 체포하고 역시 사형에 처하였다. 형장으로 끌려가던 사마위는 품속에서 가남풍이 보낸 밀조를 꺼내며 억울하다고 변명했지만 감형관(監刑官)은 오히려 밀조를 탈취하고 사마위를 그대로 처형시켰다.
종실 세력은 가남풍의 꾀임에 빠져 서로 치고 다투는 바람에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조정의 권력은 가남풍과 가익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종실 세력은 그 이후 가남풍의 말을 믿지 않았다. 가남풍은 이제 태자 사마휼에게 방향을 돌렸다. 태자는 그녀의 소생이 아니었다. 더욱이 사마휼은 태후였던 양지가 내세운 사람이었다.
가남풍은 자신이 양태후를 모반죄로 몰아 죽였듯이, 만일 태자가 황제가 된다면 자신도 그와 마찬가지로 모반죄에 걸려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태자를 제거해야 마음이 놓였다. 가남풍의 모친 곽괴(郭槐)는 흉폭하고 음험한 여자였다. 하지만 자신의 딸이 저지른 살인유희가 너무나 지나치다고 생각해서 여러번 태자를 죽이지 말고, 잘 대해 주라고 충고하였다.
가남풍은 듣지 않았다. 사람을 많이 죽일수록 그만큼 불안감이 커지기 때문이다. 드디어 그녀는 커다란 도박을 하기로 작정하였다. 어느날 그녀는 대신들 앞에서 자신이 아들을 낳았다고 선포하였다.
그녀가 아들이 있으면서 이전에 말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가남풍의 아들은 무제가 붕어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잉태한 생명이었다. 당시의 예법에 따른다면 부모가 죽은 다음에 아들은 반드시 3년상을 치루어야 하며, 이 기간동안에는 향락을 추구해서도 안되고 부인과 동침을 해서도 안되었다.
이 일은 어떻든 황제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대신들이 이일을 가지고 어떻게 황제를 성토할 수가 있겠는가? 이제는 혜제가 상중에 가남풍과 동침을 해서 아들을 낳았느냐, 그 진실성 여부가 중요했다. 혜제는 결코 가남풍과 동침해서 아들을 낳지 않았다는 사실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가남풍이 아들을 낳았다고 말하자, 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승인했다.
이 아이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타났단 말인가? 바로 가남풍의 누이동생인 가오(賈午)가 낳은 아들이었다. 이처럼 갑자기 황자(皇子)가 나타나자, 대신들은 그녀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태자 사마휼은 아버지 사마충과는 달리 매우 총명하였다. 다섯살때 궁중에 불이 일어났는데, 무제가 망루에 올라 불구경을 하자 아버지의 옷소매를 잡고 어두운 쪽으로 끌고 갔다.
나중에 그 이유를 물으니 대답이 너무나 걸작이었다. “밤중에 갑자기 불이 일어났다면 변고가 틀립없습니다. 그런데 밝은 곳에 몸을 나타내면 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신들은 사마휼이야말로 선제(宣帝) 사마소(司馬昭)의 환생이라고 이구동성으로 감탄하였다.
사마휼은 성장하면서 학문에 열중하지 않고 갖가지 오락에 탐닉하기 시작하였다. 가남풍은 태자의 총명을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태자가 오락에 빠져 제왕의 수업에 게을리하자 태감들을 시켜 태자를 미혹하게 만들었다. “전하, 정욕(情欲)은 아름다운 것이온데 어찌하여 욕망을 참고 계시옵니까? 그것은 자아(自我)를 구속하는 것입니다.”
태자 사마휼은 이로부터 더욱 여자와 오락에 심취하였고, 황제와 황후를 문안하는 일에도 소홀히 하였다. 태감들은 또한 궁중 대신들의 기를 미리 눌러놓지 않으면 기고만장 해지니 사소한 일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엄하게 벌을 내려야 한다고 꼬득였다. 태자가 퍼특하면 대신들을 두들겨패고, 안하무인 격으로 행동한다는 소문은 궁밖을 벗어나 일반 백성에까지 전해졌다.
태자의 생모인 사비謝妃)는 매우 천한 집안의 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돼지를 잡아 파는 백정이었다. 가남풍은 태감을 시켜 태자와 함께 저자거리에 나가 좌판을 벌이고 돼지고기를 파는 놀이를 시키도록 하였다. 동궁은 매달 일정의 비용이 지급되었으나, 태자가 오락에 바져 비용이 항상 부족하였다. 태감들은 동궁에 있는 물건들을 내다 팔아 비용을 충당하였다.
얼마가 지난 후 궁중이나 저자거리에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태자마마는 백정 딸의 소생인데 고기만 보이면 칼로 써는 연습을 한데. 어찌나 실력이 좋은지 썰은 고기의 두께가 일정하데.” “태자 마마는 궁중에서 고기를 팔고, 야채를 팔아 돈을 버는데 장사 수완이 대단하시데.” “대통을 이으셔야 하는 태자마마께서 그렇다면 이를 어쩌나?”
황실의 존엄은 태자의 행동으로 인하여 바닥에 떨어졌고, 총명으로 소문났던 태자의 명성도 일거에 훼손되었다. 가익은 때때로 가남풍의 명을 받아 태자와 어울려 놀았다. 하지만 태자는 권세가 막강한 가익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언젠가는 두 사람이 바둑을 두었는데 사소한 문제로 다투었다. 태자는 바둑판을 뒤집으며 자리를 떴다.
가익은 태자가 황후에게 심히 원한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가남풍에게 태자의 행동을 고해바쳤다. “태자는 사재(私財)를 모으고 소인들과 결탁해 우리 가씨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잇습니다. 수하중에 어떤 사람이 몰래 저에게 귀뜸해 주기를 만일 황제가 되거나 황후마마께서 세상을 떠나면 우리 가씨의 씨를 말리겠다고 하였습니다.”
가남풍은 가익의 말에 동의를 표시하였다. 태자가 즉위하면 틀림없이 자신에게도 태후 양지를 폐위시키고 굶어 죽인 일과 같은 짓을 하지않으리라는 보장을 할 수가 없었다. 영평 9년(서기 299년), 태자는 스무 두살이 되었다. 그 해 12월의 어느 날, 가남풍은 태자에게 사람을 보내 황제의 건강이 좋지 않으니 문병을 오도록 하였다.
태자가 불려오자, 가남풍은 그를 곧바로 황제에게 안내하지 않고 화려하게 꾸며진 방에서 우선 기다리라고 전했다. 잠시후 진무(陳舞)라는 궁녀가 태자에게 술상을 가지고 왔다. 그녀는 황제께서 태자에게 내리는 술잔이라고 하면서 가득히 술을 따라 권하였다. 태자는 주량이 쎄지 않았고, 문병을 온 상태라 더이상 받아마실 수가 없었다.
진무는 계속 술을 따르며 황후의 말을 전하였다. “폐하께서 내리시는 술을 어찌 마시지 않습니까? 혹시 술에 독이 있나 의심하시고 있습니까?” 태자는 어쩔 수 없이 연거푸 석 잔을 받아마셨다.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진 태자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때 승복(勝福)이라는 궁녀가 두루마기를 한 폭 가지고 왔다.
조정의 유명한 대신인 반악(潘岳)이 기초한 문장으로 황제의 건강을 축원하는 글이었다. “폐하께서 이 글을 베껴 올리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태자는 궁녀의 손에서 두루마기를 받아 읽어 내려갔다. 대부분의 내용이 기원에 관한 글이었다. 태자는 힘겹게 문장을 모두 베껴 주었다. 가뜩이나 정신이 혼미한 상태라 탈진한 태자는 바닥에 꼬구라졌다. 잠시 후 승복은 또다른 두루마기를 가지고 왔다. 정신이 오락가락한 태자는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그대로 베껴썼다.
이튿날 헤제는 대신을 소집하고 황문령(黃門令) 동맹(董猛)에게 한 폭의 두루마기와 조서를 내리고 대신들에게 들리게 큰 소리로 낭독하도록 하였다. 황문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먼저 조서를 읽어 내려갔다. “태자는 망령된 문서를 작성한 죄로 죽음을 내린다.”
대신들은 태자가 작성하였다는 문서의 내용을 보고 모두 놀라지않을 수 없었다. 글자가 꾸불꾸불 엉망이었지만 틀림없이 태자의 문체였다. “부황이 스스로 죽지 않는다면 내가 궁으로 들어가 죽이겠다. 황후도 스스로 죽지 않는다면 내가 친히 손을 쓰겠다. 사비(謝妃)와 나는 이미 거사일을 정했으니 동시에 손을 써야 한다. 만일 조금이라도 늦어서 후환을 남겨서는 안된다.”
누구에게 보내는 서신인지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사비와 공모하여 모반을 일으켜서 황제와 황후를 죽이겠다는 뜻이 다분했다. 대신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리 태자가 난봉꾼이라고 해도 공공연히 이렇게 모반을 작심하는 문장을 쓸리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대신들은 먼저 이 문서를 발견하고 밀고한 사람을 색출하여 심문을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가남풍은 형세가 이상하게 변해가자 곧바로 태자를 서인(庶人)으로 폐출하여 이 일을 수습해야 한다고 혜제에게 주청했다. 부인을 호랑이보다 더욱 무서워 하는 그는 그 자리에서 승인을 하였다. 대신들도 어쩔 수 없이 승인하지않을 수 없었다. 태자는 우선 금용성에 감금되었다. 이듬해 정월, 태자궁에 있던 어느 태감이 자수를 했다. 그는 태자와 모반을 상의하였다는 전말을 문서에 적어 가남풍에게 올렸다. 가남풍은 그 문서를 대신들에게 모두 열람시키고, 곧바로 태자를 허창의 행궁(行宮)으로 압송하였다.
가남풍은 비상하게 머리를 써서 태후 양지와 태자 사마휼을 모반죄로 몰아넣는 뛰어난 정치술을 선보였다. 그녀의 특출한 상상력과 악독한 심계는 어디까지가 끝인지 알 수가 없었다.
대신들은 모두 가황후의 음란한 행동을 알고 있었다. 가황후는 때때로 미소년을 입궁시켰으며, 궁중의 태의(太醫)와도 불륜을 저질렀다. 대신들은 태자가 무고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악독한 가황후가 무서워 말을 꺼내지 못했다. 또한 가황후가 낳았다는 아들도 거짓이라는 것 쯤은 모를리가 없었다. 대신들은 조만간 가황후로 인해서 황실에 폭풍우와 같은 변고가 발생하리라고 짐작했다.
어느날 태자의 측극이었던 대신이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301)의 참모인 손수(孫秀)를 찾아가 불평을 토로하며 말했다. “태자 마마께서 폐위를 당해 지금 적자(適子)가 없는 상황이라 조만간 대란이 알어날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황후와 조왕이 참여하여 태자를 제거하였다고 합니다. 대감은 줄곧 가황후를 섬겼으니 자세히 알 것입니다. 만일 대란이 일어나면 대감과 조왕은 화를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대책을 아직도 세우지 않고 있습니까?”
손수는 동의를 표시하고 조왕 사마륜과 그 문제를 상의하였다. 두사람은 일단 가황후를 폐위시킬 명분이 없다는데 인식을 같이했다. 손수가 역시 핵심 참모답게 계책을 내었다. “대왕 마마는 가황후와 함께 태자를 폐위 시켰으므로, 설사 가황후를 폐위시키고 태자를 모셔와도 언젠가는 재난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가황후를 움직여 태자를 독살시키게 만들고, 태자의 원수를 갚는다고 병사를 일으키면 천하의 사람들이 호응하여 대열에 합류할 것입니다.그러면 정적도 제거하고 권력도 장악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조왕 사마륜도 손수의 계책에 선뜻 동의했다. 얼마후, 어떤 사람이 가남풍에게 밀서를 보내 황후를 폐하고 태자를 옹립하는 움직임이 도성에 있다고 밀고했다. 물론 이 밀고는 조왕 사마륜이 꾸며낸 것이었다. 가남풍은 즉시 자신과 오랫동안 정을 나누었던 태의에게 독약을 만들게 한 다음에, 혜제의 조서를 꾸며서 태자에게 사약을 내렸다.
태자는 허창에 감금되어 있으면서 음식을 먹을때는 측근 시위들이 먼저 맛을 보아 위험을 수차례 넘겼다. 가황후가 파견한 태감은 관리들과 상의하여 독약을 내려 죽이기가 힘이 들다고 판단하고 굶겨 죽이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몰래 음식을 안으로 들여보내 태자는 몇날이고 건재하였다.
태감은 황제의 조서를 건네며 사약을 내렸으니 명령을 받들라고 윽박을 질렀지만, 태자는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가남풍의 독촉에 쫒기던 태감은 최후의방법을 생각했다. 그는 태자가 측간에 가는 시기를 택해 몽둥이를 지니고 미리 그곳에 숨어 태자를 기다렸다. 태감은 궁둥이를 까고 앉아 있는 태자의 뒤통수를 무차별하게 두들겨 팼다. 역사상 일국의 태자가 측간에서 태감에게 맞아 죽는 비극이 이때에 처음 일어났다.
조왕 사마윤은 태자가 죽었다는 보고를 받자 곧바로 병사를 일으켜 황궁을 점령하고,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302)을 가남풍에게 보내 그녀의 폐출을 전달하였다. 가남풍은 사마경이 대전으로 들어오자 깜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오?” 사마경은 품속에서 두루마기를 꺼내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황후를 서인으로 폐위시킨다.”
가남풍은 매우 화를 내며 소리쳤다. “조서는 누가 내렸나요?” 이때 멀리서 혜제가 대전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바보같은 남편이 협박에 못이겨 조서를 내렸다고 판단하였다. “폐하는 부인을 폐위시키고 무사할 줄 아나요?” 혜제는 일단 무서운 가남풍을 눈 앞에서 사라지게 만드는데 우선 뜻을 두었지 다른 생각은 할 겨를도 없었다.
가남풍은 공교롭게도 태후 양지가 머물렀던 금용성에 압송이 되었다. 사마륜은 반란에 성공하자 혜제로부터 조서를 받아내 가남풍을 독살시켰다. 가남풍이 죽고나서 가씨(賈氏)의 일족과 측근들은 모두 체포되어 처형당햇다. 사서에는 집안에 가축의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혜제는 가남풍이 죽자 두려움에서는 벗어낫지만 나라를 온전히 다스릴 수가 없었다. 반란에 성공한 사마륜이 때를 기다리며 황제가 될 준비를 하자, 종실의 여러 왕들이 다투어 일어나 상호간에 살육전을 펼쳤다. 북방에 있는 여러 소수민족들은 중국이 커다란 혼란에 빠지자 다투어 남하하여 각지를 차지하고 나라를 세웠다. 5호 16국(五胡十六國)의 시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혼란에 빠진 한족(漢族)의 귀족들은 난을 피하여 남으로 대대적인 이동을 하였다. 이곳에서 종실인 낭야왕(琅邪王) 사마예(司馬睿)가 건업(建業;지금의 남경시)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역사에서는 이를 동진(東晉)이라고 한다. 중국은 이때부터 무려 3백여년에 걸치는 대규모의 혼란시기에 접어들었다.
가남풍은 매우 총명한 여자였다. 그녀는 양씨(楊氏)의 세력을 필두로 종실세력을 제거하는데 뛰어난 기지(機智)를 발휘하였고, 행동에도 결단력이 있었으며 과감하게 승부수를 던졌다. 일반적인 남자 권력자와는 비교가 되지않을 정도로 뛰어난 정치감각과 기술을 가졌다. 그러나 그녀는 욕심이 지나쳐 태자를 폐하고 거짓으로 만든 아들을 태자로 삼으려고 기도했다. 그녀에게서 가장 큰 착오는 바로 이 점에 있었다.
권력을 분할하고 있던 통치계급은 자신들의 이해와 직결되는 이 문제에 대해서 강하게 반발하였고, 그녀는 종실의 힘을 간과하여 끝내는 반란을 예측하지 못하였다. 궁극적으로 그녀의 정치실험은 여자라는 한계 때문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사태를 너무나 안이하게 보았기 때문에 실패하였다.
여기에 한 몫을 한 것은 그녀의 자유롭고 음란한 행동이었다. 젊은 나이에 권력을 장악했거나 권력을 조종한 여자들은 모두 음심(淫心)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을 통제하지 못해서 결국은 망한 예가 많은데 그녀도 이 대열에서 예외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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