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晋)왕조의 창림에 기초를 마련한 인물 사마중달(司馬仲達)
사마중달(司馬仲達: 179~251)은 이름이 의(懿), 자가 중달(仲達)이고, 하내(河內) 온현(溫縣: 지금의 하남성 온현 서쪽) 출신이다. 그의 집안은 그 지방의 호족으로 아버지 사마방(司馬防: 자는 建公)은 일찍이 상서우승(尙書右丞)을 역임하였으며, 조조(曹操)를 북부위(北部尉)에 추천하기도 하였다. 사마방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사마중달은 어릴 때부터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으면서 병법과 무예를 익혔다. 그는 16~7세 때 이미 그 지역의 유명인사들로부터 대단한 인물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는 일찍이 군리(郡吏)를 역임하였는데, 당시에 명성을 크게 떨쳤던 최염(崔琰)은 그의 재능을 그의 형보다 뛰어나다고 여러차례 말한 바 있다.
위(魏) 건안(建安) 13년(208)에 그는 조조에게 천거되어 상부문학연(相府文學掾)을 역임하고, 얼마 있다가 다시 황문시랑(黃門侍郞), 의랑(議郞), 상부동조연속(相府東曹掾屬), 주부(主簿)로 승진하였다.
처음에 사마중달은 조조의 주목을 그다지 받지 못했다. 건안 20년(215)에 조조가 한중(漢中)을 공격하여 장노(張魯)를 격파하였을 때, 사마중달은 조조에게 여세를 몰아 서촉(西蜀)으로 진공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조조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건안 24년(219), 관우(關羽)가 형주(荊州)에서 위(魏)나라를 공격하여 번성(樊城)을 포위하자, 조조는 도읍을 옮겨 위기를 모면하는 문제에 대해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물었다. 이때 사마중달의 예리한 분석이 조조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관우가 뜻을 얻은 후에 손권(孫權)을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니, 손권을 찾아가 강남(江南)을 준다는 조건으로 후방에서 관우를 공격하게 하면, 관우는 어쩔 수 없이 번성의 포위망을 풀 것이고, 그러면 도읍을 옮길 필요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조조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관우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났다. 여기에서 조조는 사마중달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에게 태자 조비(曹丕)를 보좌하도록 하였다. 건안 24년, 손권은 조조에게 상서를 올려 황제라 칭할 것을 권하였고, 사마중달도 이때를 놓치지 않고 조조에게 황제라 칭할 것을 권하였다.
조비는 황제에 즉위한 후에 먼저 사마중달을 승상장사(丞相長史)에 임명하고, 다시 그를 독군어사중승(督軍御史中丞)에 임명하여, 한(漢)나라의 정권 이양과 헌제(憲帝)의 선양에 관한 구체적인 업무를 책임지고 처리하도록 했다. 사마중달은 앞장서서 헌제의 선위를 강요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헌제는 어쩔 수 없이 옥좌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사마중달은 조비보다 여덟살이 많았지만, 다른 노신들에 비하면 여전히 젊은편이었다. 조비는 그와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그를 매우 신임했다. 조비는 그를 다시 상서부사(尙書仆射), 봉향후(封鄕侯), 무군대장군(撫軍大將軍)에 임명하였다. 조비는 대외 원정을 떠날 때 사마중달에게 허창(許昌)이나 낙양(洛陽)을 지키도록 하였다. 이 시기에 사마중달은 전반적으로 조비의 눈치를 보고 일을 처리하면서 군대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하였다.
226년 5월, 조비는 병세가 위독해지자 조진(曹眞), 진군(陳群), 조휴(曹休), 사마중달을 고명대신(顧命大臣)으로 삼고 태자를 잘 보필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명제(明帝) 조예(曹睿)가 즉위한 후 사마중달의 지위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먼저 그는 무군대장군의 신분으로 관청을 설치하여 일을 처리하면서, 자신의 사무 기구와 군대를 보유하고 그 역량을 계속 키워갔다. 명제가 즉위한지 2개월 후에 오(吳)나라 대장 제갈근(諸葛瑾)과 장패(張覇)가 양양(襄陽)을 공격하였다. 이에 명제의 명을 받고 출격한 사마중달은 오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장패를 죽였다. 그후 조진이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여 명제에게 사마중달을 완성(宛城)에 머물면서 형주와 예주(豫州)를 감독하고 오나라 접경 지역의 군정 업무를 주관토록 건의하였다.
태화(太和) 원년 말에 사마중달 휘하의 신성군수(新城郡守) 맹달(孟達)이 반란을 시도하였다. 맹달은 촉(蜀)나라에서 항복한 장수로 조비가 그를 태수에 임명하였었는데, 이번에 그는 제갈공명과 내통하여 촉나라 군대가 기산(祁山)을 공격할 때 반란을 일으켜 낙양을 치기로 했던 것이다. 처음에 맹달은 사마중달이 조정의 윤허를 얻은 후에 병력을 출동시킬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이러한 긴박한 상황하에서 사마중달은 조정의 윤허를 받지 않고 신속하게 출병하여 반란을 진압했다.
태화 2년(228), 명제는 군대를 두 개 진영으로 나누어 오나라를 공격하였는데, 사마중달의 부대는 한수(漢水)에서 강릉(江陵)으로 내려갔고, 조휴의 부대는 심양(尋陽)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결국 조휴는 오나라 장수 육손(陸孫)에게 크게 패하여 얼마후 병으로 죽었으나, 사마중달은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쟁으로 사마중달의 군사작전 수행 능력은 낙양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태화 5년(231), 제갈공명이 4차 위나라 원정에 올랐다. 촉군은 기산을 포위한 후 선비(鮮卑) 부락에게 북쪽의 석성(石城)을 공격하도록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때 위나라의 전선을 책임지고 있던 조진이 병으로 작전을 수행하지 못하자, 명제는 사마중달을 전선으로 파견하여 전권을 위임했다. 사마중달은 전선에 도착한 후 성문을 굳게 닫은 채 싸우지 않고 촉군의 양식이 떨어져 스스로 물러날 때까지 기다렸다. 사마중달의 이러한 소극적인 자세에 불만을 품은 위나라 진영의 일부 장수들은 사마중달에게 촉군이 그렇게도 두렵느냐면서 나아가 싸울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사마중달은 그들을 출병시켰으나 그들은 중간에 매복된 촉나라 군사들에게 모두 사살되었다.
청룡(靑龍) 2년(234) 4월, 제갈공명은 5차 북벌을 감행하여 위수(渭水)의 남쪽 오장원(五丈原)에 진을 쳤다. 사마중달은 촉군의 두 배나 되는 22만 대군을 거느리고 촉군을 맞이하였지만, 여전히 성문을 굳게 닫은 채 나가서 싸우지 않았다. 제갈공명은 여러 차례 선전포고를 하면서, 심지어 여자의 옷까지 보내왔지만, 사마중달은 끝까지 싸움에 응하지 않았다. 그해 8월, 제갈공명이 갑자기 병으로 죽자 촉군은 스스로 물러났다. 이 두 번의 전쟁에서 사마중달은 제갈공명이 몇 년간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위나라의 영토를 보존하였다. 이 전공으로 명제는 사마중달을 태위(太尉)에 임명하고 전군의 통솔권을 맡겼다.
경초(景初) 2년(238) 봄, 명제는 사마중달에게 요동(遼東)의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공손씨는 3대째 요동을 점거하고 있었지만 한번도 독립 국가를 건설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공손연이 정권을 잡은 후에 국경지역에서 조조와 자주 무력충돌을 일으키다가, 이번에 다시 오나라와 손을 잡고 독립을 선포하고 연왕(燕王)이라 칭하면서 위나라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명제의 명을 받고 출전한 사마중달은 6월에 요동에 도착하여 공손연이 점거하고 있던 양평성(襄平城)을 포위하였다. 8월에 공손연이 항복을 요청하였으나 이를 거부하자, 공손연은 포위망을 뚫고 나오다 피살되었다.
경초 3년(239) 정월, 36세의 명제는 병세가 위독하여 임종전에 사마중달과 조상(曹爽)에게 여덟살밖에 안된 제왕(齊王) 조방(曹芳)을 부탁하였다. 조상은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여 처음에는 사마중달을 어른으로 대접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그의 주변에 정밀(丁謐), 하안(何晏), 이승(李勝), 필궤(畢軌) 등과 같은 명사들이 모여들고 그의 동생들이 조정의 핵심 자리에 앉게 되자, 그는 제왕에게 사마중달을 태부(太傅)에 임명하도록 건의하였다. 표면적으로는 사마중달을 존대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의 병권을 박탈한 것이다. 사마중달은 처음에는 사소한 싸움에 말려들지 않고 평소에는 뒤로 물러나 있다가 중대한 일에만 원칙을 견지하였다.
예를 들면, 정시(正始) 5년(244), 조상이 공을 세우기 위해 다시 촉을 공격할 것을 건의하였을 때 사마중달은 그에 대한 반대 입장을 명확히 표명했다. 그러나 사마중달이 반대를 하면 할수록 조상은 더욱더 강하게 주장하여, 마침내 5만의 병력을 이끌고 촉을 공격하였으나 크게 패하였다. 그후 조상은 사마중달을 더욱 배척하려고 들었다. 이에 사마중달은 병을 핑계로 집에서 쉬면서 정변을 일으킬 구상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사마사(司馬師)에게 명하여 비밀리에 망명자 3천명을 낙양성 도처에 모아놓고 필요할 때 즉식 소집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시 9년(248) 겨울, 조상은 측근 이승(李勝)을 형주자사(荊州刺史)에 임명하고, 가는길에 사마중달을 염탐하도록 했다. 사마중달은 중병에 든 것처럼 가장하여 이승을 속이는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경계심을 늦춘 조상은 가평(嘉平) 원년(249) 정월에 호위병들을 거느리고 조방을 수행하여 낙양성 남쪽 교외 90리에 있는 명제의 고평릉(高平陵)을 배알하였다. 사마중달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정변을 일으켜 황궁의 외문을 점령하고 태후의 이름으로 조상 형제의 관직을 박탈하였다. 그런 다음 조상에게 사람을 보내어 정권을 넘겨주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그 말에 속은 조상은 모든 권력을 넘겨주고 낙양으로 돌아왔지만, 사마중달은 그를 감금하고 죄를 덮어씌워 조상과 그 일당들을 모조리 죽였다. 이로써 사마중달은 다시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고 승상의 자리에 올랐다.
가평 3년(251) 5월, 사마중달은 향년 72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사마중달이 죽은 후 그의 두 아들이 계속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고 있다가, 14년 후에 새로운 왕조 진(晋)나라를 세웠다. 이리하여 사마중달은 진왕조의 창립에 기초를 마련한 인물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으며, 후에 그의 손자 사마염(司馬炎: 진의 武帝)에 의하여 선제(宣帝)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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