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의 국무원 총리 원자바오(溫家寶)

지식창고지기 2009. 12. 27. 10:20

중국의 국무원 총리 원자바오(溫家寶)

   
1942년 톈진(天津) 이싱부(宜興埠)이라는 작은 진(鎭)에서 태어난 원자바오(溫家寶). 그는 1987년 11월 제13차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47세의 젊은 나이로 당 중앙위원 겸 중앙서기처 후보 서기로 임명되었다. 1989년 6월 톈안먼사건 때는 학생들의 입장에 동조하였음에도 축출되지 않고 오히려 1992년 중앙정치국 후보위원 겸 중앙서기처 서기로 승진하였다. 그가 정계에서 ‘오뚝이’처럼 꿋꿋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매일 10시간씩 일하는 열정, 겸손한 태도, 시대의 흐름을 잘 파악하는 통찰력, 풍부한 식견에 있다.
 1. 원자바오 총리의 성장기

1942년 톈진(天津) 이싱부(宜興埠)이라는 작은 진(鎭)에서 태어난 원자바오는 ‘보배와 같은 존재’라하여 '원자바오(溫家寶)'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원 총리 집안은 뼈대 있는 교육자 가문으로 유명하다. 원 총리의 할아버지 원잉스(溫瀛士)는 17세부터 교육사업에 뛰어들어 1920년대 이싱항의 사립학교 교장을 지냈다. 원 총리의 아버지 원깡(溫剛)도 이싱항과 톈진시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어머니는 국민학교 국어선생님이었다.

1949년 원 총리는 가족을 따라 톈진시로 이사했다. 그 뒤 원 총리는 그곳의 명문 중학교인 난카이(南開) 중학교에 입학했다. 이곳은 저우언라이(周恩來) 전임 총리가 다녔던 학교이기도 하다. 저우 전임 총리는 학업성적이 우수하여 특별히 학비를 면제받은 유일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원자바오는 저우언라이 전 총리를 우상으로 삼으면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학창 시절 원 총리는 겉으로 보기에 마르고 유약해 보였지만 농구 등 체육을 즐기고 또한 체육 성적도 좋은 편이었다. 학업성적이 우수해 학습위원을 맡았으며 늘 교사를 대신해 학생들의 학습을 지도해 주기도 했다.

1960년 여름, 원총리는 난카이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어렸을 때부터 지리 선생님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베이징 지질학원(現 중국지질대학) 지질광산 학과에 입학했다.

2. 원자바오의 남다른 재능

1968년 2월, 문화대혁명 폭풍이 몰아쳤다. 베이징 지질학원 구조지질학과 석사학위를 밟고 있던 원총리는 학업을 포기한 채 간쑤(甘肅)성으로 자리를 피했다. 그때부터 10여 년간 광산을 찾고, 지질을 측량하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이러한 경험은 그가 농촌과 자원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근간이 되었다.

1980년대 초 젊은 인재들을 대거 영입하는 ‘4화조건(혁명화, 청년화, 지식화, 전문화)’을 내세운 인재등용 정책이 펼쳐졌다.

원자바오는 이 조건에 모두 해당하는 사람으로 평가되었으며, 지질광산처의 간부들은 모두 그의 기용을 환영했다.

1979년 원 총리는 간수성 지질국으로 전임했다. 그때 간부 발탁을 위해 실시한 검수에서 원자바오 총리는 자신이 힘들게 연구해온 지질학에 대한 학술 보고서를 발표함으로써 높은 식견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원자바오는 37세에 란저우 지질광산처 부처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2년 후에는 무엇보다 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지질광산국을 떠나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판공청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것이다.

원 총리가 중앙위원회 판공청 주임으로 발탁된 것은 후야오방(胡耀邦) 전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의 재능을 중히 여기는 인재 등용 정책에 힘입은 것이다. 1985년 전후 후야오방 전임 총서기는 중앙 조직부에 위탁해 중앙위원회 판공청 주임 해당 간부를 물색하도록 했다. 그 때 원 총리의 모든 조건은 이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1987년 11월 제13차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47세의 젊은 나이로 당 중앙위원 겸 중앙서기처 후보 서기로 임명되었다. 1989년 6월 톈안먼사건 때는 학생들의 입장에 동조하였음에도 축출되지 않고 오히려 1992년 중앙정치국 후보위원 겸 중앙서기처 서기로 승진하였다.

1998년 3월 국무원 부총리를 거쳐 2002년 11월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임명 되었고, 2003년 3월에는 국무원 총리에 올랐다.

사실 원자바오가 정계에서 ‘오뚝이’처럼 꿋꿋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매일 10시간씩 일하는 열정, 겸손한 태도, 시대의 흐름을 잘 파악하는 통찰력, 풍부한 식견에 있다.

지금까지도 원자바오 총리는 간쑤의 많은 동료, 친구들과 연락을 끊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원자바오 총리가 말단 공무원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통로가 되었다.

3. 원자바오가 이끄는 중국 경제

(1) 원자바오, 부패의 도전에 맞서다

제 16차 전인대 이후 진행된 ‘부패와의 전쟁’ 특징은 대중의 이익 보호를 강조해 집권자의 비리 문제 척결에 대한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 냈다는 데 있다. 원자바오 총리는 농민공(농민 출신의 도시근로자)의 임금체불 문제 해결에도 칼을 뽑아들어 비리를 저질은 자들이 챙긴 부당 이익을 전액 압수해 부패로 인해 손해를 입은 서민들에게 돌려주었다.

(2) 홍콩경제 발전에 ‘촉진제’ 역할

원자바오 총리는 “홍콩이 조국인 중국대륙을 발판으로 삼아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면 그 발전 전망은 매우 밝다. 개혁개방 30년 동안 홍콩경제 발전은 대륙경제에 매우 큰 기여를 했다. 대륙경제의 발전도 홍콩경제 발전에 막대한 촉진제 역할을 발휘할 것”이라며 “무역센터, 해상운송 센터, 금융센터로서의 홍콩의 입지는 대체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3) 농촌문제에 조예가 깊은 원 총리

원자바오 총리는 농업, 농민, 농촌 문제가 중국경제 발전에 미치는 중요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는 “우리는 농촌개혁과 발전에 대해 장기적인 안목으로 계획하고 있다”며 농촌개혁과 발전을 2단계로 나누었다. 첫째, 가계 경영을 근간으로 한 경제제도를 실시, 농민에게 생산경영 자주권을 부여함으로써 농촌 생산력을 확대하는 것이다. 둘째, 공업이 농업을 지원하고 도시가 농촌을 지원하는 방식을 실시하는 것이다.

그는 중국 농촌의 개혁과 발전이 이미 2단계에 접어 들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다음 1가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첫째, 세금 개혁을 비롯한 농촌 각종 개혁 추진.
둘째, 농전(農田) 수리시설과 농업 과학기술 추진을 비롯한 농촌 생산력 확대.
셋째, 농촌 교육, 과학기술, 문화 등 각종 사회사업 활성화.
넷째, 농촌 자치, 촌에서 현(縣), 향(鄕) 공직자를 공개 선발하는 말단 공무원의 민주화 제도 건설 추진.

(4) 농촌 식품안전 문제에 대한 해법

‘백성은 음식을 하늘로 삼고, 음식은 무엇보다 깨끗해야 한다(民以食爲天, 食以潔爲先)’, 이는 식품안전에 대한 원 총리의 생각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원 총리는 식품안전 문제의 심각성을 파악, 올 7월 26일 《식품 등 상품 안전 감독관리 강화에 관한 국무원의 특별 규정》을 발표하고 식품 등 상품 안전에 대한 감독관리를 강화했다.

4. 원자바오 약력

1942년 9월 톈진시 출생, 북경지질학원 지질구조 전공 석사
1965.4 입당, 북경지질학원 지질구조학 전공, 석사, 엔지니어
1968~1978 감숙성지질국 지질역학대기술원, 정치담당 책임자 대정치처 책임자
1978~1979 감숙성지질국 지질역학대위원회 상무위원, 부대장
1979~1981 감숙성지질국 부처장
1981~1982 감숙성지질국 부국장
1982~1983 지질광물부 정책법규연구실 주임
1983~1985 지질광물부 부부장, 정치부 주임
1985~1986 중국공산당 중앙판공청 부주임
1986~1987 중앙판공청 주임
1987~1992 중앙서기처 서기 후보 겸 중앙판공청 주임
중앙직속기관 공작위원회 서기
1992~1993 중앙정치국 후보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중앙판공청 주임,
중앙직속기관 공작위원회 서기
1993~1997 중앙정치국 후보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1997~1998 중앙정치국 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1998~2002 중앙정치국 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국무원 부총리, 중앙금융공작위원회 서기
2002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국무원 부총리, 중앙금융공작위원회 서기
2003.3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국무원 총리, 당조 조원, 중앙금융공작위원회 서기
제13기 중앙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후보
제14기 중앙위원, 중앙정치국 후보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제15기 중앙위원, 중앙정치국 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제16기 중앙위원, 중앙정치국 위원, 상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