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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연과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는 무엇인가 - 5. 도가의 자연관

지식창고지기 2010. 1. 17. 20:06

3. 자연과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는 무엇인가

     

    5. 도가의 자연관

     

      서양말 physis나 nature를 자연이라고 번역할 때, 그 자연(自然이라는 말 자체는 중국 도가 사상의 핵심 용어로서, 소위 중국적 자연관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연개념의 의미와 위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천지와 만물이라는 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처지(天地)란 만물을 추상적으로 종합한 말로서, 만물의 원형(原形)이자 총체적인 모습니다. 이에 비해 만물(萬物)은 구체적으로 실재하는 사물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천지의 객형(客形)이자 개별적인 모습(別相)이다. 천지가 '형상(道)를 의미한다면, 만물은 '그런 원리를 근원으로 하여 형상을 갖게된 사물'로서 형이하(形而下)의 기(器)를 가리킨다.

    그런데 우리가 자연천지(自然天地)나 만물자연(萬物自然)이라 하지 않고 언제나 천지자연(天地自然)이나 자연만물(萬物自然)이라고 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늘 천지-자연-만물이라는 관계 속에서, 자연은 천지와 만물을 동시에 포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연은 두 가지의 사태를 함축한다. 첫째, 동사적 사태로서의 자연(自然)은, 천지가 만물로 현현하는 과정 자체의 성격이나 본성(本性)을 가리킨다. 이때의 자연은 '제 스스로 그러함'을 의미하며, 이런 자연을 본성으로 하기에, 천지 만물은 외적인 힘에 의하지 않고 제 스스로의 이치에 따라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 중국의 전통적 문헌에서는 대부분이 이런 의미로 자연을 사용했었다. 둘째, 명사적 사태로서의 자연은 그러한 본성에 따라 형성된 천지 만물의 총명(總名)이자 별칭(別稱)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phsis나 nature와 마찬가지로, 자연 역시 '본성으로서의 자연'(동사적 사태)과 '전체로서의 자연'(명사적 사태)이라는 의미를 이중적으로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본성으로서의 자연이라는 의미는 도가 사상 속에서 가장 잘 표현되어 나타난다. <노자> 25장에 "도는 자연을 본 받는다"(道法自然, 이때의 法은 '본받다', '따르다'는 뜻이다)는 말이 있다. 이에 대해 왕필(王弼)은 "도가 자연을 어기지 않으면 곧 그 본성을 얻는다"고 주석하였다. 그렇다면 "도가 자연을 본받는다"는 것은, "도가 자연을 그 본성으로 삼는다"는 뜻이고, 따라서 "도 밖에 따로 자연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의 본성이 자연이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도의 본성은 '제 스스로 그러함'(自然)에 있다. 다시 말해 도의 본성은 '외적인 힘에 의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본으로 삼아 스스로 형성되어 간다는 것'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천지는 자신을 자연에 맡긴 채, 억지로 만들거나 일부러 하지 않으며, 만물은 스스로 서로를 다스려 가지런히 한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도의 본성으로서의 자연이란 곧 무조(無造)이고 무위(無爲)임을 알 수 있다. 먼저 자연이 곧 무조라는 말은, 제 스스로 그런 것은 외부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만약 모든 것이 외부의 어떤 것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모든 것은 그것을 '위하여' 그것을 '목적'(telos)으로 하여 존재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자연은 제 스스로 그러할 뿐, 어떤 것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각 사물이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렇게 때문에 자연은 "만물을 입혀주고 길러주면서도 주인 노릇을 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낳고도 소유하지 않고 키우고도 지배하지 않는다". 이처럼 '주인의 지배를 용인하지 않는 것은, "아무리 완전하다 해도 지배하지 않는 존재는 신이 아니다"는 뉴턴의 발상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따라서 도가의 자연관에는 어떠한 목적론이나 신중심주의도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이다.

    또한 자연이 곧 무위라는 말은, 제 스스로 그런 것은 인위적으로 일부러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러한 인위(人爲)의 부정은 두가지를 겨냥하는 있다. 첫째, 인위의 부정은 '인간 중심적 사랑'에 대한 비판이다. 인간 중심적 사랑은 무관심하고 낯선 것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지만, 자연은 무위하여, 만물이 각기 쓰여지는 대로 놔두면서도 넉넉지 못한 것이 없게 한다. 그러기에 "무위하면서 존중하는 것은 천도인데, 유위하면서 억매이는 것은 인도이다"고 하여, 무위 불인(不仁)의 입장에서 유위 인(仁)의 유가 사상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인위의 부정은 언어와 개념을 통한 인위적 수식에 대한 비판이다. 언어와 개념은 정의를 통해 어떤 것을 한정하고 제한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유위의 소산일 뿐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임의로 제한되지 않는 자연은 "말이 없이 스스로 그러할 뿐이다". 그러므로 "도를 도라 말하는 순간, 그것은 늘 그러한 도는 아닌 것이다".

    이처럼 무조 무위의 자연을 본성으로 하는 도는 반대되는 것을 그 움직임으로 한다. 여기서 반대되는 것이란, 근본으로 돌아감을 뜻하기도 하고, 상반되는 것이 반복되어 변해가는 과정이 끝없이 되풀이되어 순환함을 뜻하기도 한다. 이처럼 서로 반대되면서도 서로 형성하고 서로 낳으면서도 서로를 이겨내면서 스스로 서로를 다스려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곧 자연의 '스스로 그러함'이다.

    스스로 그러함은 스스로 다스림이고 스스로의 질서에 따름이다. 이것은 인간만이 자유와 자율의 존재인 데 반해, 자연은 필연과 타율의 존재라고 본칸트의 생각과 전혀 다른 발상이다. 중국인에게서 자연이란, 그 구성원들이 상생상극하는 자율적인 하나의 유기체이다. 모든 것을 한 몸,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이런 총체론적인 사고는 후대 화엄불교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창조를 부정하고 인위를 부정하며 언어화를 경계하고 소유화를 용인하지 않는 도가의 지혜는 인도의 사상인 불교를 수용하여 중국화할 수 있는 내적인 토양을 제공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