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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연과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는 무엇인가 - 6. 불교의 자연관

지식창고지기 2010. 1. 17. 20:07

3. 자연과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는 무엇인가

    6. 불교의 자연관

     

      불교의 자연 개념을 논하기에 앞서, 자연(自然)이라는 표현이 한역불교에서 실제로 사용된 경우들을 살펴 보기로 하자. 대부분의 경우 '제 스스로 그러함’을 뜻하는데, 이것은 “억지로 만들거나(造) 일부러 하지(爲) 않으면서 만물이 스스로 서로를 다스려 질서를 잡는 것(無造無爲 萬物自相治理)”을 의미했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제 스스로 그러함’으로서의 이런 자연을 ‘저절로 그렇게 됨’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항상 장로를 공경하는 자에게는 네 가지 복이 저절로 자라난다.”(常敬長老者 四福自然增, 《법구경》 〈술천품〉)거나, 인위적 노력에 의하지 않고 “저절로 생기는 부처님의 지혜”(自然智, 《법화경》 〈비유품〉, 〈법사품〉)라고 하거나, 불국정토에서는 온갖 좋은 것들이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생겨나고” “저절로 앞에 나타난다”(自然化生, 自然在前, 《무량수경》)거나 하는 것들이 좋은 예이다. 그런데 이때의 자연은 팔리어 sayam.이나 산스크리트 svayam.에 대한 번역어로서 단순히 ‘저절로’라는 수식어에 불과할 뿐, 소위 자연관을 논할 때의 그 자연 개념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본성으로서의 자연’과 ‘전체로서의 자연’이라는 온전한 자연 개념을 불교적인 사유 속에서 검토해 보기 위해서는, 그 단서를 단순 역어로서의 자연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야만 한다. 그곳이 바로 다르마이다.

    인도 철학 사상에서 다르마만큼 복합적이고도 핵심적인 의미를 가진 개념도 없을 것이다. 대충 열거해 보아도 법령·판결·관례·규범·질서·법칙·이법·의무·권리·정의·도리·도덕·선행·진상·진리·교리·교설·본성·본질·요소·사물·사건·존재 등 20여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떠받치다’ ‘유지하다’ ‘지탱하다’는 뜻의 dhr.에서 유래한 다르마(dharma)는 크게 보면 ‘어떤 것을 떠받쳐 유지시켜 주는 것’ 또는 ‘어떤 것에 의해 지탱되어 유지되는 것’이라는 뜻이며, 이를 좀더 세분하면 다음과 같은 네 부류로 나뉜다.

    첫째, 인간 사회를 떠받쳐 유지시켜 주는 것이라는 의미에서는 사회의 ‘질서’와 ‘규범’과 ‘법령’, 카스트 제도상의 ‘의무’, 인생의 네 가지 주기(aseama)에 관한 ‘관례’ 등을 뜻한다. 이것은 브라흐만교도 내지는 힌두교도로서 지켜야 할 ‘정의’이자 ‘도덕’으로서, 불교의 등장 이전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인도 사회에서도 존중되고 있는 힌두 다르마이다.

    둘째, 우주 만물을 떠받쳐 유지시켜 주는 것이라는 뜻에서는 우주의 ‘이법’이나 ‘법칙’, 만물의 ‘본성’이나 ‘진상’ 또는 ‘진리’ 등을 의미한다. 이것은 종래의 협소한 용법이 불교의 등장으로 인해 훨씬 확장되었음을 보여 준다. 브라흐만이나 힌두의 다르마가 카스트적 규제를 포함하는 지극히 인디아적인 법임에 반해, 이런 불교의 다르마는 카스트 제도를 넘어선 만유 보편의 법이다. 전자가 신들의 계시로서 영원 불변한 부동법(不動法, sana·-dharma)을 가리킨다면, 후자는 무수한 조건에 따라 생성 소멸하는 인연법(因緣法, pratitya-dharma)을 가리킨다. 따라서 “연기를 보면 곧 법을 보는 것이요, 법을 보면 곧 연기를 보는 것이다.”(若見緣起便見法 若見法便見緣起, 《중아함》 〈상적유경〉)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연 만물의 원리 내지 본성으로서의 다르마(法)란 내용적으로는 바로 ‘연기(pratityasamutpada)’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이런 만물의 법칙에 의해 지탱되어 유지되는 것이라는 뜻에서는 그런 이법에 의해 형성된 ‘사물’이나 ‘존재자’ 혹은 그 존재자의 구성 ‘요소’ 등을 의미한다. 이것은 ‘연기’라는 본성적 원리에 따라 ‘연기한 것(pratityasamutpanna, 緣已生)’을 가리킨다. 불교에서 일체법이나 제법(諸法, sarva-dharma)이라는 말로 함축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존재자들이다.

    넷째, 그런 만물의 법칙에 관해 가르치는 것이라는 뜻에서는 ‘교설’ ‘교리’ ‘경전’ 등을 의미한다. 불교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불법(佛法, buddha-dharma)이라 하고, 그런 가르침을 삼보의 하나로서 법보(法寶, dharma-ratna)라고 할 때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상과 같은 다르마의 여러 의미들 중 두번째와 세번째 의미가 불교적 자연 개념의 단서가 된다. 왜냐하면 우주 만물의 이법이나 본성을 ‘연기’로 보는 것은 ‘본성으로서의 자연’에 해당하며, 연기를 본성적 원리로 하여 ‘연기한’ 일체의 존재자들은 ‘전체로서의 자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교에서 ‘본성으로서의 자연’과 ‘전체로서의 자연’은 각각 법성과 법계로 표현될 수도 있다.

    법성(法性, dharmata·)이란 법의 본성을 말하는데, 이 때의 법은 실제로는 제법, 즉 모든 ‘연기한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제법의 본성으로서의 법성이란, 연기한 제법을 관통하는 근본적인 성격, 또는 연기한 모든 존재자를 그렇게 존재하게 하는 원리를 의미한다. 그것은 바로 ‘연기(緣起)’이다. 이 연기라는 원리는 현실 세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연기한 것’들을 추상화한 하나의 이법이기 때문에, ‘연기한 것(pratityasamutpanna, 緣生)’을 추상명사로 만들어, 연생성(緣生性, pratityasamutpannatva)을 법성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연기(pratityasamutpa·a)란 수많은 조건들(pratitya)이 함께(sam) 결합하여 일어난다(utpada)는 ‘상호의존적 발생’을 의미한다. 일체의 현상이 이런 상호의존성(idappaccayata·)의 원리에 따라 성립된다고 할 경우, 영원 불변하게 고정된 것은 있을 수 없고(無常), 혼자만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자아도 있을 수 없으며(無我), 자기만의 존재로 지속되는 독립적인 실체도 있을 수 없게 된다(無自性, 空).

    서양인에게서 자연의 본성이 제작성(고대)과 창조성(중세)과 기계적 인과성[근대]이고, 도가에서는 무위자연성(無爲自然性)인데 비해, 불교에서는 이처럼 무상성(anityata·)과 무아성(ana·matva)과 공성(sunyata)을 특징으로 하는 상호의존성, 즉 연생성이 자연의 본성(법성)인 것이다. 이러한 연생성으로서의 법성이야말로 모든 존재자의 있는 그대로의 실태를 보여주는 것이므로, 제법실상(諸法實相, dharmata·)이라고도 한다. 또한 상호의존적 발생이라는 이러한 ‘현상의 규칙성(dhammaniya·a)’은 여래가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간에 이미 있어 온 일종의 법주성(法住性, dhammat.t.hitata·)으로서(《상윳타니카야》 2. 25), 그러한 법을 깨달은 자가 곧 붓다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법성은 붓다가 될 수 있는 근본적 가능성인 불성(佛性, buddhatva)을 가리키기도 한다.

    법계(法界, dharma-dha·u)라고 할 때, 그 계(dha·u)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야기하다’ ‘놓다’는 뜻의 dha에서 유래한 dhatu는 ‘야기하는 근원(因, 性)’과 그런 근원에 의해 ‘야기되어 놓여진 것(分齊, 가지런히 나누어 가짐)’이라는 두 가지 뜻을 지닌다. 전자의 뜻으로 해석할 경우, 모든 존재자의 현상을 야기하는 근원으로서의 연생성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법계는 곧 법성과 같은 의미가 된다. 하지만 후자의 뜻으로 해석할 경우, 연기라는 원리 하에 마치 하나의 가족이나 종족처럼 공존하며 모여 있는 것을 뜻한다는 점에서, 법계는 곧 ‘연기한 제법(pratityasamutpanna· dharma·.)’, 즉 일체법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불교에서 ‘전체로서의 자연’이란 이처럼 연기라는 원리에 의해 관통되어 있는 세계, 상호의존하여 이루어진 모든 존재자, 곧 일체법으로서의 법계이다.

    그런데 일체법은 12처, 18계, 유위법과 무위법 등으로 표현된다. 12처(處, a·atana)란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마음(意) 등의 내적인 것과 형태(色)·소리(聲)·냄새(香)·맛(味)·감촉(觸)·사물(法) 등의 외적인 것으로 이루어진 ‘경험의 열두 가지 터전’을 말한다. 18계는 이런 여섯 가지의 육체적 기관(六根)을 인(因)으로 하고, 저 여섯 가지의 물질적 대상(六境)을 연(緣)으로 하여 여섯 가지의 정신적 작용(六識)이 일어남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일체를 12처 또는 18계라 함은, 육체계와 물질계와 정신계가 연기라는 원리에 의해 통합되어 작용하는 하나의 세계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에 비해 유위법과 무위법은 깨달음의 여부와 관련된 다소 종교적인 분류법이다. 유위(有爲, samskrta)란 번뇌를 낳는 의지적 성향(sam·ka·a, 行)에 의해 형성된 것을 말하고, 무위(無爲, asamsk.ta)란 그런 의지적 성향에 의해 형성되지 않은 것을 말한다. 따라서 세간(世間)의 미계(迷界, 깨닫지 못한 세계)를 유위법이라 한다면, 출세간(出世間)의 오계(悟界, 깨달은 세계)는 무위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연기하지 않는 법은 결코 있을 수 없으므로”(未曾有一法 不從因緣生, 《중론》 24 : 19), 유위법도 무위법도 다 함께 일체법으로서 모두 연기에 의해 통일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함축한다.

    첫째, 무위법도 ‘연기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의 세계라 해서, 연기하는 이 현실의 세계와 무관한, 마치 신과도 같은 영원 불변한 절대자의 세계가 아니며, 그렇기에 출세간은 세간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고, 따라서 어리석음의 세계를 깨달음의 세계로 변혁시킬 수 있는 가능성과 당위성이 확보된다는 점을 함축하고 있다. 만약 무위가 유위와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미계(迷界)를 오계화(悟界化)하는 중생제도가 어찌 가능할 수 있겠는가·

    둘째, 유위법도 무위법도 모두 ‘연기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양자는 상호의존하여, 자기만의 존재(自性)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므로, 유위법과 무위법, 세간과 출세간, 미계와 오계가 모두 무자성(無自性) 공(空)이라는 점에서 전혀 차별이 없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므로 생사가 열반과 다르지 않고(生死卽涅槃), 번뇌가 깨달음과 다르지 않다(煩惱卽菩提)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무자성 공으로서 연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만의 특정한 입장(自性的 戱論)’에 따라 고정적으로 분별되지 않기에, 그저 같고도(如) 같다(如)고 할 따름이다. 이처럼 무자성 연기의 ‘법에 따라 그러한 것(法然, dharmata·)’은 ‘같고도 같은 것(如如, tathata·)’이요, ‘진실로 같은 것(眞如, bhu·a-tathata·)’이며, ‘참으로 있는 그대로의 것(如實, yatha·-bhu·a)’이다. 따라서‘법과 같아 제 스스로 그러한 것(法爾自然)’에서는 주관과 객관, 인간과 자연, 부분과 전체가 둘로 분열되어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無二, 無碍). 그런데 이렇게 모든 것을 상즉(相卽)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무책임한 신비주의적 동일화를 조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특정한 것에 자리를 잡아 머물러 집착하지 않고(無位, 無住) 전체를 하나로 관통하여 봄(全一觀)으로써, 사태의 진상에 제대로 다가가기(實相觀, 如實智見)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부분과 전체가 상호 침투(相入)한다는 것은, 협소한 분석의 시각에서는 설명하기 힘든 현상이지만, 연기적 전일성의 관점에서는, 모든 것이 한없이 거듭 거듭해서 상호 관련되어 있으므로(重重無盡緣起), 하나의 사물은 고립된 부분이 아니라 전 우주와의 관계망 속에서 그 우주 전체를 반영한다(一中一切 多中一)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부분과 전체를 전일적으로 조화시키는 연기론에서는, 목적론처럼 전체의 목적을 중요시하여 부분을 전체에 종속시키거나, 기계론처럼 부분의 요소를 강조하여 전체를 부분으로 환원시키거나 하지 않는다. 더욱이 다 같이 인과성을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연기적 인과성과 기계적 인과성은 내용적으로는 전혀 다르다. 근대의 기계론에서 자연은 마치 죽은 기계처럼 수동적인 물질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자연 내 요소들 간의 인과관계도, 일정한 원인의 부분이 제한된 범위에서 일정한 결과의 부분을 낳는 쪽으로만 진행하도록 결정되어 있다는 획일적이고도 단순한 선형적(linear) 인과관계가 된다.

    그러나 불교의 연기론에서 자연은 마치 인드라의 그물처럼 수많은 조건들이 서로를 반영하는 관계들의 연쇄이기 때문에, 자연 내 구성원들 간의 인과관계도, 원인과 결과가 ‘고정된 선후관계(因先果後, 果先因後)’나 실체성(自性)을 고집하지 않는 역동적이고도 공(空)한 관계가 된다. 이것은 현대의 생태학적 시스템 이론의 주장을 연상시킨다. 그 이론에서 자연은 서로 연결된 관계들의 자기조직적 그물망(network)이기 때문에, 자연 내 각 사건들 간의 인과관계 역시, 되먹임(feedback) 작용을 통해 결과가 원인에 재투입되기도 하는 환류적이고도 복잡한 비선형적(nonlinear) 인과관계가 된다. 이렇게 볼 때, 인과의 일방성과 단순성을 주장하는 근대의 기계론과는 달리, 인과의 상호성(mutuality)과 복잡성(complexity)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불교의 연기론과 시스템 생태학은 일맥 상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인간과 자연이 둘로 분열되지 않는다는 것은 근대 서양인의 인간관과 자연관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근대인에게서 인간은 비물질적 정신성을 본질로 하고 이와는 반대로 자연은 물질적 연장성(延長性)을 본질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인간과 자연은 각각 독립된 실체로서 분립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불교에서 자연은 이런 것이 아니다. 법성(法性)을 본성의 원리로 하고 법계(法界)를 전체의 범위로 하는 불교적 자연(法性自然, 法界自然)에서는, 모든 존재자가 상의성(相依性)과 연생성(緣生性)과 공성(空性)을 법으로 하여 통일된 한 생명의 큰 바다를 이루고 있다. 그곳에서 천지와 나는 한 뿌리이고(天地與我同根), 정신과 물질은 둘이 아니며(色心不二), 만물과 나는 한 몸이다(萬物與我一體). 그러므로 땅의 인연을 받아 태어난 생명(身)과 그 땅(土) 자체는 언제나 하나인 것이다(身土不二).

    이것은 오늘날 생태학의 입장이기도 하다. 생태계에서는 ‘생산자’인 녹색식물이 광합성 작용을 통해 산소를 방출하고 자신의 유기물을 동물이나 미생물에게 제공하며, ‘소비자’인 인간과 동물은 그렇게 방출되고 제공된 것들을 영양 단계별로 이용한다. 또한 ‘분해자’인 미생물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시체를 분해함으로써 유기물을 무기물화하는데, 이 무기물은 필수 원소로서 뿌리를 통해 녹색식물에게 다시 흡수된다. 이것은 완벽한 상호의존적 순환작용이다. 이곳에서 ‘소비자’인 인간은 ‘생산자’인 녹색 식물의 숙주에 붙어 사는 ‘기생자’에 불과할 뿐, 이성만을 믿고 자연을 지배하려는 ‘군림자’가 될 수는 없다.

    또한 그렇게 상호의존적으로 순환하는 자연이라는 생명의 그물은, 연결망(network) 속에 들어 있는 또 다른 수많은 연결망들로 중첩되어 있다. 마치 인드라의 그물과도 같은 이러한 연결망 속에서는 개별 부분들 간에 정확한 경계선을 긋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부분들을 고립된 실체로 파악하려는 것(自性的 分別)은 인간 주관의 투영일 뿐, 실제 있는 그대로의 모습(諸法實相)을 보는 것은 아니다.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 緣起)을 원리로 하는 그 곳에서는 어떤 부분도 다른 부분보다 더 근본적이지 않으며, 어느 한 부분도 중심임을 주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연기론적 혹은 생태학적 상호의존성을 우주의 원리로 받아들이는 자는, 피조물의 창조자를 주인으로 신앙하는 신중심주의도, 합리주의와 산업주의에 의거해 자연을 지배하는 근대적 인간중심주의도, 인위적 조작을 배제하고 그저 모든 것을 자연에 맡기자고만 하는 환경론적 자연중심주의도, 인간에 대해서만 가치가 있는 자연이 인간의 힘을 통해서만 보호될 수 있다고 하는 환경론적 인간중심주의도 내세우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연과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란, 서로 간에 중심성을 주장하지 않는 공(空)한 관계, 그래서 중심이 없기에 지배도 종속도 없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관계 속에서만 인간의 비인간화와 자연의 비자연화를 극복하고서,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자연을 자연답게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