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여조겸과 함께 [근사록] 편찬 - 성리학 - 주희

지식창고지기 2010. 1. 20. 15:17

주희

동아시아 전통 사상을 되살펴보려 한다면 주희와의 만남을 피할 길은 없다. 그의 사상은 동아시아 지성계 전체가 여러 세기에 걸쳐 참여한 공통의 지속적 담론이었다. 그는 선대 유학자들의 성과를 집대성하고 유학의 방향을 새롭게 전환시킴으로써 이후 동아시아 사상계의 지형도에서 커다란 부동의 산맥으로 자리 잡았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정진

주희는 1130년 9월 15일(음력), 일가가 전란을 피해 임시로 거처하던 복건(福建) 남검주 우계현에서 아버지 주송(朱松)과 어머니 축씨(祝氏)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관적(貫籍), 즉 본관은 신안(新安)인데 신안은 휘주(徽州) 무원의 옛 지명이다. 오늘날 중국의 안휘성 황산시 일대에 해당한다. 다섯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문장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지적으로 매우 조숙했다. “나는 5, 6세부터 생각에 잠겨 괴로워했다. 대체 천지사방의 바깥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사방은 끝이 없다고들 사람들이 말하지만 나는 꼭 끝이 있을 것만 같았다.”

 

주희가 11세 때인 1140년 아버지 주송은 금나라에 대한 화친 정책에 반대하다가 중앙 관계에서 추방당해 건안의 환계정사에 은거하기 시작했고, 주희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았다. 주송은 주희가 14세 때 세상을 떠났고, 주희는 유언에 따라 호적계, 유백수, 유병산 세 사람의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


 

18세 때 지방의 과거 예비시험 해시(解試)에 합격하고 이듬해 수도 임안에서 본시험에 합격했으며, 1151년 22세 때 이부(吏部) 임관시험에 합격하여 종9품 좌적공랑이 되어 천주 동안현 주부(문서처리담당직)로 임명되었다. 24세 때 임지에 부임한 주희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면서 동안현의 학교행정도 담당했다.

 

 

여조겸과 함께 [근사록] 편찬, 육상산과의 ‘아호의 논쟁’


주희는 28세 때 동안현 주부직 임기를 마치고 귀향한 뒤로 다양한 관직에 간헐적으로 임명됐지만, 그 대부분은 실권 없는 명목상의 관직이었다. 주희는 임지에서 기근을 구제하고 학교를 재건하는 등 최선을 다해 일했고 인정도 받았지만 관료로서보다는 학자로서의 주희가 진면목이었다. 특히 그는 동 시대의 많은 뛰어난 학자들과 활발하게 교류했다. 예컨대 그는 여조겸(여동래. 1137-1181)과 함께 1175년 [근사록](近思錄)을 편찬했다. 주희와 여조겸이 두 달 간 함께 지내며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의 글과 말에서 622개 항목을 가려 뽑아 14개의 주제 별로 분류, 정리한 이 책은 이후 성리학자들이 가장 중시하는 텍스트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여조겸은 주희보다 일곱 살 아래였지만, 선비들 사이의 사귐에서는 학덕과 인품만이 진정한 교유(交遊)의 기준이었다.

 

[근사록] 편찬을 마친 주희와 여조겸은 강서성 연산현 동북쪽의 명승지 아호(鵝湖)를 유람하면서 당대의 저명한 유학자 육상산(육구연)과 만나 학문적 토론을 벌였다. 주희는 ‘천리에서 부여 받은 본성(性)이 곧 이치’(性卽理)라는 입장을 취했고, 육상산은 ‘마음이 곧 이치’(心卽理)라는 입장을 취했다. 훗날 주희에서 비롯된 이학(理學)과 육상산에서 비롯된 심학(心學)의 갈라짐이 이 논쟁에서 비롯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이들은 치열한 자세로 논쟁에 임했지만, 주희는 나중에 육상산을 백록동서원 강의에 초빙했고 육상산은 형 육구령의 묘지(墓誌)를 써줄 것을 부탁했다. 그들은 학문적 입장을 달리하면서도 서로를 깊이 존경했다.

 

 

오경(五經) 중심의 유학에서 사서(四書) 중심의 유학으로


유교 경서와 관련한 주희의 중요한 혁신적 업적은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을 1190년에 사자(四子)라는 이름으로 한데 모아 새롭게 간행한 일이었다. 한당(漢唐) 시대 유학을 오경 중심의 유학, 송대(宋代) 이후 유학을 사서 중심의 유학이라 하는 데, 이는 주희의 업적에 따른 것이다. 주희는 사서를 집주(集注)하면서 자연적인 올바른 이치(理)와 그것이 인간 본성으로 내면화된 성(性)을 중심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이른바 성리학(性理學)의 기반을 다졌다. 1313년부터 1912년까지 사서는 중국의 학교 교육과 관료 선발시험에서 공식적인 기본 교재였다.

 

주희는 이들 문헌들을 하나로 묶으면서, [대학]이 근본적인 큰 틀을 제시해 주고 [논어]가 견실한 기반이 되며, [맹자]가 보다 세세한 부분들에 이르기까지 지도해 주고 [중용]이 미묘하고 심원한 철학성을 제공해 준다고 보았다. 주희는 사서 주석을 집필하는 작업에 40년 동안 몰두했다. 심지어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까지도 그는 [대학]의 주석을 다듬는데 몰두했다. [맹자]의 양혜왕상(梁惠王上) 첫 부분에서 맹자는 올바름(義)과 이익(利)의 차이에 관해 말한다. 주희는 올바름(義)을 하늘의 이치(天理)와 동일한 것으로, 이익(利)을 사사로운 인간의 욕구(人欲)와 동일한 것으로 해석했다. 이러한 해석은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해석, 성리학적 해석이었다.

 

  

나는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는 사람이다”

주희가 편찬한 책은 80여 종, 남아 있는 편지글은 2천여 편, 그의 대화를 기록한 대화록이 140편에 달하며 그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 학자들이 467명에 달했다. 그는 늘 연구하고 글을 쓰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는 은거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곳, 즉 정사(精舍)를 복건 지방에 세 곳 세웠다. 서원 두 곳을 재건하고 여섯 개 서원에서 강의했으며, 열세 개 서원의 현판 글씨 또는 그 연혁에 관한 글을 썼다. “나는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는 사람이다. 병이 심할 때도 앞장서서 늘 일하려 한다.” 그가 제자에게 한 말이다.

 

주희는 그 이전 시대까지의 유학을 집대성(集大成)했다는 평가를 받곤 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북송오자(北宋五子)라 일컬어지는 북송 시대 유학자 다섯 명의 사상을 종합했다. 다섯 명의 유학자들은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 그리고 소옹이다. 그렇다면 주희의 업적은 선대 유학자들의 사상을 종합하고 부연한 것에 지나지 않는 걸까? 그렇지 않다. 예컨대 주희보다 앞서 정호, 정이가 (理)를 강조하여 부각시키기는 했지만, 주희는 리와 태극(太極)을 사실상 동일시하면서 리와 (氣)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시켰다.

 

“리와 기라 불리는 것들이 각기 다른 성격을 지니기는 하나, 사물의 측면에서 그 둘은 온전히 하나가 되어있다.” “우주에서 리 없이 기가 있었던 적은 없으며, 기 없이 리가 있었던 적도 없다.” 논리적 측면에서는 리가 기에 앞서지만 사실적 측면에서는 리와 기 가운데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앞선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태극에 관해서 주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근본적으로는 다만 하나의 태극이 있지만, 만물 각각이 태극을 부여 받아 각자가 온전한 태극을 갖추고 있다. 하늘 위에 뜬 달은 다만 하나지만, 그 빛이 수많은 강에 비추면 결국 수많은 달을 보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달이 여러 개로 나누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탄압과 질병의 고통 속에서 학문에 정진하다 붓을 놓다


절동제거로 봉직하던 53세 때 주희는 악행과 불법을 일삼은 당중우의 파면을 조정에 요청했다. 그러나 당중우는 조정의 실력자 왕회의 인척이었다. 이로 인해 주희는 중앙의 기득권 관료들로부터 견제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희가 54세 때(1194) 즉위한 영종 황제는 재상 조여우의 추천을 받아들여 주희를 임안으로 불러들였다. 하지만 영종을 옹립하는 데 공을 세운 한탁주가 주희를 파직시켰다. 그리고 이듬해부터 주희의 학문을 정도에서 어긋난 거짓 학문, 위학(僞學)으로 지목하여 탄압하기 시작했다. “최근 우리의 도(道)는 세상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세력도 약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도를 향한 후학들의 열의가 대단한 것은 하늘의 뜻이라 하겠습니다. 늙고 병든 제가 삶의 막바지에 이르고서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황간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희는 탄압 외에도 많은 질병에 시달렸지만 학문을 향한 열정은 잦아들 줄 몰랐다. 예학(禮學)을 집대성하는 작업에 몰두한 것도 이 시기이며, 66세 때는 한유의 전집을 교정한 [한문고이]를 완성했고 69세 때는 [초사집주]를 완성했으며, 70세 때 [후어]와 [변증]을 완성했다. 1200년 3월 9일 새벽, 주희는 제자들을 곁으로 불러 가까스로 붓을 들었지만 붓을 움직일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낮이 되어 주희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주희의 사실상의 유언은 세상을 떠나기 전날, 병문안 온 제자들에게 한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괜히 여러분을 먼 곳에서 여기까지 오게 했구나. 하지만 도리(道理)라는 게 본래 그런 것이기는 하지. 여러분 모두 힘을 모아 열심히 공부하라. 발을 땅에 굳게 붙여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법이다.”

주제로 인물 엮어보기학문을 집대성한 학자들

주희 주희
성리학을 확립시켜 유학사와 동아시아 사상사에 불후의 영향을 미친 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
(BC 384~BC 322) 논리학, 수사학, 자연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집대성함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
(1225-1274)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바탕으로 스콜라철학 체계를 세우고 집대성함
허준 허준
(1539~1615) 동아시아 의학을 집대성한 <동의보감>을 완성함
갈레노스 갈레노스
(129~199) 고대 그리스 의학의 성과를 집대성해 방대한 의학체계를 세움

 

 

 

표정훈 / 저술가, 번역가
글쓴이 표정훈씨는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번역, 저술, 칼럼과 서평 집필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2만 권의 장서를 갖춘 서가를 검색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한국 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했으며 [중국의 자유 전통],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 등 여러 권의 책을 번역하고 [탐서주의자의 책],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