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는 사람이다”
주희가 편찬한 책은 80여 종, 남아 있는 편지글은 2천여 편, 그의 대화를 기록한 대화록이 140편에 달하며 그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 학자들이 467명에 달했다. 그는 늘 연구하고 글을 쓰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는 은거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곳, 즉 정사(精舍)를 복건 지방에 세 곳 세웠다. 서원 두 곳을 재건하고 여섯 개 서원에서 강의했으며, 열세 개 서원의 현판 글씨 또는 그 연혁에 관한 글을 썼다. “나는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는 사람이다. 병이 심할 때도 앞장서서 늘 일하려 한다.” 그가 제자에게 한 말이다.
주희는 그 이전 시대까지의 유학을 집대성(集大成)했다는 평가를 받곤 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북송오자(北宋五子)라 일컬어지는 북송 시대 유학자 다섯 명의 사상을 종합했다. 다섯 명의 유학자들은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 그리고 소옹이다. 그렇다면 주희의 업적은 선대 유학자들의 사상을 종합하고 부연한 것에 지나지 않는 걸까? 그렇지 않다. 예컨대 주희보다 앞서 정호, 정이가 리(理)를 강조하여 부각시키기는 했지만, 주희는 리와 태극(太極)을 사실상 동일시하면서 리와 기(氣)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시켰다.
“리와 기라 불리는 것들이 각기 다른 성격을 지니기는 하나, 사물의 측면에서 그 둘은 온전히 하나가 되어있다.” “우주에서 리 없이 기가 있었던 적은 없으며, 기 없이 리가 있었던 적도 없다.” 논리적 측면에서는 리가 기에 앞서지만 사실적 측면에서는 리와 기 가운데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앞선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태극에 관해서 주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근본적으로는 다만 하나의 태극이 있지만, 만물 각각이 태극을 부여 받아 각자가 온전한 태극을 갖추고 있다. 하늘 위에 뜬 달은 다만 하나지만, 그 빛이 수많은 강에 비추면 결국 수많은 달을 보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달이 여러 개로 나누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탄압과 질병의 고통 속에서 학문에 정진하다 붓을 놓다
절동제거로 봉직하던 53세 때 주희는 악행과 불법을 일삼은 당중우의 파면을 조정에 요청했다. 그러나 당중우는 조정의 실력자 왕회의 인척이었다. 이로 인해 주희는 중앙의 기득권 관료들로부터 견제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희가 54세 때(1194) 즉위한 영종 황제는 재상 조여우의 추천을 받아들여 주희를 임안으로 불러들였다. 하지만 영종을 옹립하는 데 공을 세운 한탁주가 주희를 파직시켰다. 그리고 이듬해부터 주희의 학문을 정도에서 어긋난 거짓 학문, 위학(僞學)으로 지목하여 탄압하기 시작했다. “최근 우리의 도(道)는 세상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세력도 약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도를 향한 후학들의 열의가 대단한 것은 하늘의 뜻이라 하겠습니다. 늙고 병든 제가 삶의 막바지에 이르고서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황간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희는 탄압 외에도 많은 질병에 시달렸지만 학문을 향한 열정은 잦아들 줄 몰랐다. 예학(禮學)을 집대성하는 작업에 몰두한 것도 이 시기이며, 66세 때는 한유의 전집을 교정한 [한문고이]를 완성했고 69세 때는 [초사집주]를 완성했으며, 70세 때 [후어]와 [변증]을 완성했다. 1200년 3월 9일 새벽, 주희는 제자들을 곁으로 불러 가까스로 붓을 들었지만 붓을 움직일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낮이 되어 주희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주희의 사실상의 유언은 세상을 떠나기 전날, 병문안 온 제자들에게 한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괜히 여러분을 먼 곳에서 여기까지 오게 했구나. 하지만 도리(道理)라는 게 본래 그런 것이기는 하지. 여러분 모두 힘을 모아 열심히 공부하라. 발을 땅에 굳게 붙여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