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919년 5월 4일부터 2개월간에 걸쳐 중국 전역에서 일어난 반일(反日)애국운동.
개요
넓은 의미로는 1915년부터 1920년대 초반에 걸친 전반적인 사상혁명이라 할 수 있는 신(新)문화운동을 가리킨다. 두 운동의 지향점은 전자의 경우 정치적 운동을 통해, 후자의 경우 문화적 개혁을 통해 구국(求國) 또는 신(新)중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신문화운동은 5·4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했고, 또 5·4사건을 통해 신문화운동이 확대·발전될 수 있는 대중적인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양자는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5·4사건
■ 배경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뒤(1914), 중국에 있던 독일의 조차지 칭다오[靑島]를 비롯한 산둥 성[山東省] 전역에서 군사행동을 전개했으며, 이어 위안스카이[袁世凱] 정부에 이른바 '21개 조항'을 제기했다(1915.1). 요구의 핵심은 산둥에 있는 독일의 권익을 일본이 계승한다는 것이었고, 1915년 5월 9일 중국은 일본의 최후통첩에 굴복하여 이를 수락했다. 이듬해 위안스카이가 죽은 후 실권을 장악한 돤치루이[段棋瑞] 정권은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차관을 얻어 친일적 성격이 강해졌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해인 1919년 1월부터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렸다(→ 파리 평화회의). 1917년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중국도 이에 참가했다. 중국은 패전국인 독일이 산둥 내에서 차지하고 있던 식민지적 권익을 중국이 돌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은 21개 조항 가운데 산둥 문제에 관한 것과 돤치루이 정권이 1918년에 일본과 교환한 산둥 문제에 관한 공문을 근거로 산둥 문제는 중·일 간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문서상의 증거가 있었던데다가 영국·프랑스 등의 연합국이 1918년의 중일협약을 지지해주기로 일본과 약속했었으므로, 4월 21일의 회의에서 결국 일본 측의 주장이 승인되었다.
■ 전개
산둥 문제에 관한 파리 강화회의의 결정을 알리는 전보가 1919년 4월 30일 베이징[北京]에 도착했고, 이어 5월 1~3일 베이징의 신문에 산둥의 권익을 일본에게 빼앗긴 소식과 그 이유가 보도되었다. 이 소식은 곧 전국으로 퍼져 중국 국민들은 충격과 분노를 느꼈다. 준비모임 끝에 베이징의 학생들은 5월 4일 톈안먼[天安門]에 모여 대시위를 거행하기로 했다. 이들 모임은 신문화운동에 적극적이던 학생들이 주동했다. 학생들 외에 국민외교협회 등의 단체에서도 강화조약 조인거부, 친일파 매국노 처벌 등의 요구를 하고, 외교협회 주관으로 5월 7일에는 국치(國恥)기념대회가 열릴 예정이었지만, 학생들은 5·7대회에 앞서 독자적으로 대회를 개최하기로 한 것이었다.
5월 4일 오후 톈안먼 광장에 모인 약 3,000명의 학생시위대는 각국 외교사절들에게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공사관 구역으로 갔으나, 일요일이라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친일 매국노로 지목되어온 차오루린[曹汝霖]의 집으로 향했다. 그들은 차오루린의 집에 있던 또다른 친일파 인물을 발견하여 구타한 뒤 집에 불을 질렀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정부는 탄압방침을 세우고, 학생들을 대량 체포했다. 5일부터 학생들은 체포학생 석방을 내걸고 동맹수업거부를 했다. 여론은 학생들 편이었고, 정부는 고립되었다. 6일 경찰총감과 베이징대학교 총장 차이위안페이[蔡元培] 사이에 협상이 이루어져 수업재개와 7일의 대회에 불참한다는 조건으로 학생들이 석방되었다. 그러나 7일이 지난 후 정부 내에서는 다시 강경책이 대두되어 차오루린 등을 유임시키고 경찰총감과 차이위안페이를 해임시키려 하자, 9일 이후 차이위안페이의 유임문제를 둘러싸고 다시 운동이 계속되었다. 학생들의 강연활동, 일본상품배척, 국산품애용운동 등을 통해 반일운동의 저변이 확대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가 강경하게 나가자, 학생들은 6월 3일부터 몇 군데에서 수백 명이 집단을 이루어 체포를 각오하고 계속 강연을 했다. 4일까지 체포된 학생은 1,000명 가까이 되었다. 베이징 학생들의 이와 같은 희생적인 투쟁은 운동의 전국적 확대 및 발전을 가져왔다. 전국 각 도시에서 각계 각층이 학생들에게 동조하여 매국노 규탄과 반일운동을 전개했다. 그중에도 상하이[上海]에서의 이른바 3파투쟁(三罷鬪爭 : 학생의 수업거부[罷課], 상인의 철시[罷市], 노동자의 파업[罷工]을 지칭)은 그 규모나 운동 전반에 미친 영향이 매우 컸다. 상하이를 통치하고 있던 돤치루이의 부하 군벌까지도 사태의 해결을 위해 친일 매국노를 파면하도록 건의했다.
■ 결말
돤치루이 정부는 전국 각지의 압력에 밀려 1919년 6월 10일 일단 매국적인 친일파 관리 3명을 파면시켰다. 강화조약의 조인거부를 둘러싸고 운동이 계속되면서 6월 28일 파리의 중국 대표단은 베르사유 강화조약의 조인을 거부했다. 중국인의 여론에 따라 이 조약이 거부된 것으로 보아 5월 4일 이래 약 2개월간에 걸친 학계·상계·노동계 등 각계 각층의 단결된 투쟁이 결실을 맺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문화운동
신문화운동은 신해혁명으로 공화정이 수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교국교화운동(孔敎國敎化運動) 및 위안스카이의 제제운동(帝制運動)과 같은 보수반동적인 운동이 일어나는 데 대한 반성으로 출발했다. 당시 전반적인 보수화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국민이 각성되지 않은 데 있다고 본 진보적인 지식인 천두슈[陳獨秀]가 1915년에 청년의 각성을 목표로 창간한 〈청년잡지 靑年雜誌〉(1년 후 〈신청년 新靑年〉으로 개칭)가 신문화운동의 시발점이다. 1917년 차이위안페이가 베이징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하여 일대 개혁을 단행하고 천두슈·리다자오[李大釗]·후스[胡適] 등의 진보적인 학자들을 이 대학으로 초빙하면서 베이징은 신문화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또한 동인지로 개편된 〈신청년〉지는 신문화운동의 핵심이 되었다.
신문화운동은 신사상운동과 신문학운동의 두 측면에서 전개되었다. 신사상운동은 유교전통 타파와 서구사상 수용을 위한 계몽운동 형태로 나타났다. 신문화운동을 추진하던 신지식인들은 당시의 보수적인 상황이 유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보고, 2,000년 중국 전제정치의 정신적 지주이며, 인간해방을 방해하는 봉건적 정치·도덕·문화의 근간인 유교와 공자에 대한 비판운동을 전개했다. 전통사상을 총체적으로 부정하고, 이를 대체할 대안으로써 민주주의와 과학의 정신에 입각한 서구의 여러 근대적인 사조를 받아들이고자 했다. 구(舊)가족제도의 부정, 봉건적 유교윤리와 가족제도 아래 억압당해온 부녀자들의 인격 회복을 위한 여성해방운동 등은 신문화운동의 주요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전통타파주의자들이 민주주의의 기본으로서 옹호한 개인주의적인 가치는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되지 못하고 구국이라는 민족주의적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전통타파와 유교의 부정에는 일체의 권위를 부정하고 개인의 해방에 관심을 두는 무정부주의 사조가 큰 몫을 담당했다. 무정부주의 사조는 한걸음 더 나아가 전통시대 중국사회에서 비천하게 여겨져왔던 노동의 신성함을 처음으로 주창하고 나서, 지식인과 노동자층을 결합시킬 수 있는 논리적인 토대를 마련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당시 학생들 사이에 노동과 학업을 병행하려는 사조와 노동자 계몽운동이 유행했다.
신문화운동의 또다른 줄기인 신문학운동은, 문학작품 속에는 도(道)가 있어야 하고, 문장에는 문법·운율·문체가 있어야 한다는 구문학을 타파하고 민중이 사용하는 구어체 문장인 백화문(白話文)으로 국민문학, 통속적 사회문학을 건립하자는 것이었다. 이같은 주장은 지식인들의 지지를 얻어, 〈신청년〉은 1918년부터 완전히 백화문으로 발간되었다. 또 백화문을 사용한 신시(新詩), 백화문으로 번역된 근대 유럽 문학작품의 소개, 풍자적인 수필형식, 희곡운동, 근대적 단편소설인 루쉰[魯迅]의 〈광인일기 狂人日記〉 등은 문학혁명의 중요한 성과였다. 특히 신문학운동은 단순한 형식만의 문제가 아닌, 작품의 내용을 통해 전통타파와 유교부정을 널리 선전하는 효과를 낳았다.
전통타파를 내건 신문화운동에 대해서는 물론 그당시 상당한 반발이 뒤따랐으며, 다수의 기성세대 지식인은 전통문화의 우수한 점을 보존하면서 서구화를 채용하여 신문화를 창조하자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서구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던 진보적인 지식층은 신문화운동을 열렬히 지지했다. 〈신청년〉의 영향을 받은 전국 각 도시의 학생과 지식인들은 비슷한 잡지를 발간하여 문학과 사상의 개혁 및 국민에 대한 계몽활동을 활발히 벌였다. 그러나 신문화운동의 추진세력은 5·4사건 이후 신중국 건설의 방법론을 둘러싸고 분열되었다. 즉 천두슈·리다자오와 같이 사회주의 조류에 공감하고 있던 급진적인 지식인들은 정치·경제·사회의 변혁을 통해 중국의 문제가 총체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1921년 공산당을 창당했고, 〈신청년〉은 당 기관지로 개편되었다. 이에 반해 후스를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은 교육을 통해 사회적·문화적 변혁을 추구하고, 나아가 정치개혁을 이룩한다는 전제에서 직접적인 정치활동을 멀리하고 학문연구와 교육방면에 노력을 기울였다. 리다자오와 후스 사이에 있었던 '문제와 주의'의 논쟁, 후스 등의 〈노력주보 努力週報〉 창간(1922)은 양자간의 분열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였다. 신문화운동은 이와 같은 운동추진세력의 분열로 인해 1920년대 초반에 끝이 났다.
5·4운동의 의의
5·4운동은 중국현대사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할 만큼 획기적인 의미를 가진다. 우선 좁은 의미로서의 5·4사건에서 학계·상계·노동계 등 각계 각층의 민중이 연대하여, 군벌정권과 제국주의의 결탁에 정면으로 맞서 자신들의 정치적인 의사를 표명하고 군벌정권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양보를 얻어냈다는 것은 유례없던 사건이었다. 5·4사건은 넓은 의미의 신문화운동으로 인하여 민족주의적인 사조와 지식인·민중 간의 연대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으므로 쉽게 촉발·확산될 수 있었다. 또 신문화운동이 표방한 반전통·반봉건의 사상혁명은 5·4사건 이후 더욱 확산되어 사회적·문화적으로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5·4운동은 민중이 처음으로 역사발전의 주체로 떠오르고 지식층과 민중과의 결합 및 노동운동의 기초를 닦았다는 점, 중국의 국민의식이 형성·확립되어감으로써 근대적 국민국가 형성의 분수령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중국현대사의 시발점으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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