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태평천국운동 (太平天國運動, Taiping Rebellion)

지식창고지기 2010. 2. 2. 20:59

출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청대(淸代:1644~1911/12) 말기 홍수전(洪秀全)이 창시한 배상제회(拜上帝會)라는 그리스도교 비밀결사를 토대로 청조 타도와 새왕조 건설을 목적으로 일어난 농민운동(1851~64).


개요
근대사회로의 지향성을 띠고 있어 단순한 농민반란이라기보다는 혁명성을 지닌 농민운동으로 평가된다.


배경
일반적인 배경으로는 왕조 말기적인 현상, 즉 중앙과 지방의 행정이완, 관료와 군대의 부패, 지주제 등 경제적 모순의 심화, 자연재해의 빈발 등과 이로 말미암은 보편적인 사회적 무질서현상을 들 수 있다. 특히 청 말기에는 인구의 급격한 증가에도 불구하고 경작 면적이 거의 늘어나지 않았고 아편유입의 격증에 따른 은의 해외유출로 은가(銀價)가 등귀함으로써, 농민의 가계가 더욱 악화되어 향촌사회 내부의 불안과 갈등은 필연적이었다. 태평천국운동의 진원지인 광시 성[廣西省]은 이런 일반적 현상을 내포하고 있었다. 더욱이 지리적 특성 때문에 종족적·사회적·경제적으로 더욱 복잡했고 아편전쟁 이후 서구열강의 충격여파가 크게 미치고 있었다. 산악지역의 광산노동자와 숯장이 등은 독자적인 무력집단을 형성했고, 광저우[廣州] 삼각지의 해적들은 내륙지방의 비밀결사 천지회(天地會)와 연결되어 있어 치안유지상 문제점이 많은 지역이었다.아편전쟁의 패배 이후 상하이[上海]가 개항되자, 전통적으로 대외무역의 독점을 누리던 광저우와 연결된 교역로가 갑자기 불황에 빠지면서 실업자가 된 운송업자와 전쟁 후 해산된 지방군으로 인해 사회불안의 요소가 배가되었다. 게다가 1840년대에 영국 해군에게 쫓겨 광둥[廣東]과 광시의 내륙으로 들어온 해적들은 천지회의 지도하에 광시 성 내의 수로에서 노략질을 함으로써 사회불안을 가중시켰다. 광시 성의 불안한 상황은 청조를 타도하고 명조(明朝)를 회복한다는 목표를 가진 정치적 비밀결사 천지회의 반란으로 더욱 심화되어 갔다.

이런 상황에서 독특한 방언과 관습을 보유하면서 장기간에 걸쳐 광둥 성으로부터 유입되어온 커자[客家]와 먼저 이주해온 한족(漢族)의 자손인 본지인 사이에 1840년대 중반 이후 집단적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커자들은 대부분 소작인으로 부업이나 전업으로 숯장이·탄광노동·고용노동의 일을 하고 있었다. 향촌공동체에 기반을 둔 본지인들은 신사(紳士)를 중심으로 단련을 조직하여 무장하고 있었지만, 커자는 한족 사회에서 소외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척박한 땅에서 분산되어 살고 있었으므로 응집력도 없었다. 태평천국운동은 바로 이 커자를 배상제회라는 종교결사로 조직하여 출발했다.


전개
배상제회의 창시자이자 태평천국운동의 지도자인 홍수전(洪秀全)은 광둥 성에 이주한 커자의 중농 정도의 집안에서 태어나 몇 차례 과거시험에 낙방한 지식인이었다. 낙방 과정에서 읽게 된 그리스도교 선교 팜플렛을 토대로 독자적인 그리스도교 교리를 형성하여 배상제교의 창시자가 되었다. 홍수전의 친구이자 커자 출신인 풍운산(馮雲山)의 노력으로 광시 성에서 커자 신도가 늘어나면서 1846년에는 새로운 종교결사인 배상제회가 결성되었다. 배상제회의 확산 과정에서 광시 성 출신의 지도자로서 숯 굽는 일을 하던 양수청(楊秀淸), 빈농 출신의 소조귀(蕭朝貴), 지주 출신의 위창휘(韋昌輝), 부농 출신의 석달개(石達開) 등이 등장했다. 이들의 등장으로 운동은 정치성을 띠면서 급속히 성장했다. 배상제회 회원들은 우상파괴와 향촌민의 개종을 적극 추진했으므로 향촌사회 여러 세력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이 과정에서 무장조직화했다.

1850년 7월 진톈춘[金田村]으로 소집된 배상제회 회원들은 가옥과 재산을 처분하여 병영 내의 성고(聖庫)에 넣고 균등하게 지급받을 공동재산으로 삼았으며 남영(男營)·여영(女營)의 군사조직에 편입되었다. 이들은 변발을 자르고 머리를 길렀으므로 후일 청으로부터 장발적(長髮賊)으로 불렸다. 2만여 명의 강력한 무장집단을 이루게 된 이들은 신사층과 연계된 청의 지방군대와 충돌했다. 1851년 1월 11일 홍수전은 태평천국의 수립을 선언하고 3월 천왕(天王)에 즉위했다. 태평군은 청군과의 격전을 거치며 북진하여 9월 광시 성 중부의 융안[永安]을 점령하고 다음해 4월까지 체류하면서 초보적 정권체제를 정비했다. 12월에 양수청을 동왕, 소조귀를 서왕, 풍운산을 남왕, 위창휘를 북왕, 석달개를 익왕(翼王)에 봉하여 군사·정치적 지도체제를 확립했다. 1853년 1월에는 후베이 성[湖北省] 우창[武昌]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는데 그동안 풍운산·소조귀가 전사하고 병력은 50만 명으로 급증했다. 1853년 3월 강남(江南)의 중심지 난징[南京]을 점령하고 이곳에 천경(天京)을 건설할 즈음에는 200만 명의 세력으로 성장했다.

봉기에서 천경 수립까지의 짧은 기간은 태평천국운동이 혁명운동체로서의 내적 역량을 양성한 기간이었다. 태평천국운동의 정치권력은 종교적 권위를 매개로 형성된 특이한 성격을 가졌다. 즉 천왕 홍수전도 상제에게 구속되고 상제의 의사는 정책결정과정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가지면서 군주의 사적 전제권력을 통제했다. 태평천국 내에서의 생활은 엄격한 종교적 금욕주의의 규제를 받았다. 술·담배·아편은 물론 남녀의 접촉 또한 엄격히 금지되었다. 태평천국운동은 융안 점령 이후 반청혁명의 대민선전을 본격적으로 명문화하여 제시했다. 선언문들을 통해 반만(反滿)과 새로운 질서의 도래를 선전했는데, 즉 배상제교의 종교적 이념을 기초로 청의 지배를 타도하고 중국을 해방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전에서 가장 중시한 한족 전체의 통일전선구축이라는 목표는 달성되지 못했다. 농민·광산노동자·유민·비밀결사회원 등 피지배층의 호응을 받은 반면 같은 한족이면서도 기존의 사회지배층인 신사, 지주, 부유한 상인의 호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운동이 단순한 반청민족주의나 종교적 교리보다는 사회경제적 현실모순을 비판하고 새로운 세계상을 제시한 태평군의 대민정책에 힘입어 급속히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1853년 가을에 간행된 〈천조전무제도 天朝田畝制度〉는 태평천국의 새로운 지향점이 될 정치·경제·사회의 체제이념과 정책을 정립한 것이었다. 이에 의하면 태평천국 지도층은 전제적 왕조권력 아래 신분계급질서를 확립하고자 했다. 25가(家)를 사회의 최말단 자치행정조직으로, 1만 3,156가의 군(軍)을 최고급 자치행정조직으로 구성했다. 토지와 생산물을 포함한 만물을 상제의 소유물로 보아 국가가 관리·분배하는 국유 성격이 강해 잉여생산물의 국가귀속과 강력한 통제를 규정했다. 토지분배의 경우 토지등급을 엄격히 조정하여 노동력에 따라 균등하게 분배하되 분배를 위해 기존의 토지소유권을 박탈한다는 규정은 없었다. 이 제도는 대체로 사유권의 강력한 통제를 통한 균등한 경제체제를 지향한 것이다.

난징에 도읍을 둔 이후 태평천국군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일정한 통치영역을 구축하기 위해 난징을 본거지로 했으며, 양쯔 강 상류로 서정군(西征軍)을 보내고 베이징[北京]으로 북벌군을 파견했다. 1856년 중반 무렵까지는 태평천국군이 군사적 우세를 보여 양쯔 강 유역의 향촌을 상당수 지배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향촌질서에 기초한 지방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다. 향관(鄕官) 제도를 도입하여 향촌민에게 향관을 천거시킴으로써 행정기구를 재편성하고자 했는데, 향관직을 기존의 향촌지배층이 장악함으로써 지주제를 토대로 하는 정권으로 변질되었다는 평도 받고 있다. 또 지주제를 토대로 과거와 같은 조세징수제도를 도입하고, 과거제를 실시하여 전통적인 지식층을 광범위하게 흡수하고자 했다.


좌절
태평천국운동이 몰락한 가장 중요한 내적 계기는 지도층의 내분이었다. 난징에 도읍을 둔 이래 천왕은 명목상의 군주로 전락하고 실질적인 통치는 동왕 양수청이 장악했다. 양수청의 전횡에 대한 반발로 1856년 9월 북왕 위창휘가 양수청을 급습하여 그의 친족과 부하 2만여 명을 살해했다. 이는 태평천국군 정예군의 상실을 의미했다. 대학살을 중지하도록 권한 익왕 석달개는 위창휘의 의심과 암살위협을 받고 난징을 탈출했으나 그의 가족과 휘하 관원들이 학살당했다. 석달개는 북왕 토벌군을 모집했고 천왕도 북왕의 핍박 속에 위기를 느껴 잔존한 동왕세력과 천왕의 군대로 북왕세력을 처단했다. 살육전이 끝난 후 난징에 돌아온 석달개는 천왕과 형제들의 의심과 위협 속에 다시 난징을 떠나 운동의 주력으로부터 이탈하여 독자적인 군사행동을 하던 끝에 청군에게 섬멸당했다. 이러한 내분을 분수령으로 하여 태평천국운동은 몰락으로 향하는 후반기로 접어들었다. 태평천국군 병사에서 성장한 진옥성(陳玉成)·이수성(李秀成) 등의 새로운 군사지도자는 또다른 반란세력인 염군(捻軍)과 제휴하여 국부적인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청조와 자신들의 향촌에서의 세력을 보위하기 위해 조직된 한인 관료 및 지주의 무장 자위군은 태평천국에 대한 포위망을 좁혀왔다.

한편 이 운동의 말기에 홍수전의 조카 홍인간(洪仁玕)이 개혁을 시도하여 〈자정신편 資政新篇〉을 간행했다. 이는 중앙집권의 강화, 서양기술과 문물의 도입, 서구열강과의 우호적 외교와 교역관계 증진에 의한 부(富)의 축적 등 개량적인 근대화를 추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홍인간의 개혁을 실현시킬 만한 경제적 근거지의 확보 내지는 정권의 안정성을 획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태평천국운동이 1864년 7월 19일 천경의 함락과 더불어 몰락함으로써 운동의 말기에 등장한 근대적 개혁안도 좌절되었다. 태평천국운동의 몰락을 가져온 외적 요인으로는 열강의 간섭과 지식층의 적대적인 태도를 들 수 있다. 제2차 중·영전쟁을 통해 청조로부터 얻어내고자 한 이권을 모두 얻어낸 열강은 청군에 대한 근대적인 무기와 훈련의 제공, 중국인 용병부대에 대한 외국인 지휘관의 참여, 태평천국운동에 대한 무력간섭 등을 통해 청조를 지원했다. 특히 태평천국군이 상하이를 장악하지 못하게 되어 동쪽으로의 활로타개에서 결정적 타격을 입은 데는 열강의 청조 지원이 크게 작용했다. 또 전통적인 체제의 옹호자인 신사층은 태평천국운동의 혁명이념과 배상제회의 교리에 대항하여 향촌사회에서의 기득권과 전통적인 이념을 보위하기 위해, 증국번(曾國藩)의 상군(湘軍), 이홍장(李鴻章)의 회군(淮軍) 등으로 결집하여 태평천국운동을 몰락시키는 주력군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