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양무운동 (洋務運動)

지식창고지기 2010. 2. 2. 21:00

출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9세기말 중국 청나라에서 서양의 과학·기술을 도입하여 자강을 꾀하려 한 개혁운동.

'양무'란 말은 청나라와 다른 여러 나라와의 관계·교섭 사무 일체를 지칭하는 말로 아편전쟁 이후 위원(魏源)·임칙여(林則余)·풍계분(馮桂芬)·왕도(王韜)에 의해 주창되었으며, 지방의 유력한 관리인 증국번(曾國藩)·이홍장(李鴻章)·좌종당(左宗棠) 등에 의해 추진되었다. 초기에는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변경방비 등 군사력 증강에 역점을 두었으나, 점차 교육·실업 등 각 방면에 걸친 개혁운동이 되었다.

양무운동의 추진은 청나라 정부가 1861년 베이징[北京]에 총리아문을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 1865년 상하이[上海]에 강남기기총국(江南機器總局)이, 난징[南京]에 금릉기기국(金陵機器局)이 설립되어 총탄·화약·총포 등이 제조되었고, 1868년 강남기기제조총국에 번역관을 설치, 〈기기발궤 汽機發軌〉·〈태서채매도설 泰西採煤圖說〉 등 자연과학·기술·역사·국제법에 관한 외국서적이 번역되었다. 또한 1882년에는 상하이 기기직포국[上海機器織布局]이 설치되고, 1894년 상하이 화성기기방적창, 후베이 방적국[湖北紡績局] 등이 설립되어 방적부문의 확대가 이루어졌다. 교통·운송 부문에서는 1873년 수선초상국(輸船招商局)을 만들어 연해(沿海)·내해(內海)에서 영국·미국의 기선들과 대항했으며, 1880년 탕산[唐山]-쉬거좡[胥各莊] 사이에 석탄수송을 위한 철도가 부설되었다. 이들 실업의 촉진사업에는 자금조달 및 경영에 있어 상인들의 참가가 요구되었던 점이 주목된다.

한편 양무운동의 교육분야는 인재양성을 위한 학교설립으로 두드러진 성과를 나타냈다. 1862년 베이징 총리아문에 외국어학교인 동문관(同文館)이 부설되고 미국인 선교사 마틴이 교장으로 초빙된 데 이어, 1866년 푸젠[福建]에 상정학당(商政學堂), 1867년 상하이에 기기학당(機器學堂), 1880년 북양수사학당(北洋水師學堂), 톈진 무비학당[天津武備學堂] 등의 기계기술학교 및 군관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들 관립학교 외에 상하이 격치서원(格致書院)·정몽서원(正蒙書院) 등 양무운동에 호응하는 사립학교도 등장했다. 또한 1872~84년에 120여 명이 외국에 유학했다. 이러한 양무운동은 중화사상을 유지하면서 서양의 과학기술을 도입하기 위한 양무론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서 절충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 불가피했다. 거기에 청·프전쟁(1884~85)의 패배로 군사개혁에 의한 부국(富國)의 달성이 좌절되자, 1880년대 후반에는 양무비판론과 함께 정치개혁이 주장됨으로써 점차 쇠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