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국의 야망은 왜 좌절되었을까?-수양제(隋煬帝)
수나라를 세운 양견
수나라를 건국한 문제(文帝) 양견(楊堅, 541-604, 재위 581-604)은 홍농화인(弘農華陰: 지금의 산시성(陝西省) 화인현(華陰縣)) 출신으로 북주(北周, 557-581)의 관리였다. 그의 아버지 양충(楊忠)은 서위(西魏, 535-557)와 북주시대 요직에 있던 자로, 북주 당시 수국공(隋國公)에 봉해졌는데 양충이 죽자 아들 양견이 아버지의 작위(爵位)를 이어 수국공이 되었다.
수국공 양견은 그의 딸 여화(麗華)를 북주 무제(武帝)의 아들 선제(宣帝, 578-579)의 비(妃)로 출가시켜 선제의 궁정에서 외척으로서 세력을 잡았다. 더욱이 황제자리에 별 관심이 없던 선제가 불과 8살밖에 되지 않은 태자 정제(靜帝, 579-581)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자신은 상황(上皇)으로 물러앉게 되자 양견은 외손자인 어린 황제를 도우며 외척으로서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를 눈치 챈 선제는 양견의 권세가 거대해지는 것을 꺼려하면서 양견을 지방관으로 좌천시키려 하였으나 양견은 병을 이유로 부임을 꺼리고 있었는데 마침 선제가 갑자기 병사하였다.
이 때에 양견의 행동은 기민하였다. 선제가 거의 임종 직전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양견은 궁중으로 들어가 선제의 죽음을 공표하지 않고 조칙을 위조하여 정제의 후견인으로서 실권을 장악했다. 물론 양견의 정권 장악에 반대한 번왕과 지방 호족들도 있었지만 모두 교묘하게 계략을 써 평정하고 말았다.
선제가 죽자 양견은 선제의 아들인 정제로부터 선양의 형식으로 제위를 양도받았다. 이런 일은 중국에서 흔히 있는 일로 이것은 정치를 그럴듯한 사람에게 맡겨서 국가의 안정을 되찾으려는 백성의 소망을 배경삼아 자신의 권력을 확대 강화하려는 궁정 신하들의 야심에서 나온 결과이기도 하다.
이리하여 양견은 수나라의 문제(文帝, 581-604)로 즉위하여 연호를 개황(開皇)으로, 국호는 수(隋, 581-608)라 하였다.
질투심이 많은 독고황후
문제는 중국 황제로서는 보기 드문 일부일처주의자(一夫一婦主義者)였다. 오직 독고황후(獨孤皇后, 文獻皇后, 543-602)사이에서만 5남 5녀의 자녀를 두었다. 이는 한민족과는 달리 많은 후비를 거느리지 않는 유목민족의 풍습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독고황후의 심한 질투 때문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독고황후는 수문제의 정부인으로, 원래 이름은 독고가라(獨孤伽羅)이다. 그녀는 명문가문 출신으로 서위(西魏, 535-557)의 대장군 독고신(獨孤信)의 7녀로 태어났다. 14세에 양견의 정부인이 될 당시 양견에게 자신 이외의 여자한테서는 절대로 자식을 낳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고 결혼하였다. 이와 같은 서약은 오늘날에는 당연한 일이겠으나 일부다처가 일반화 되었던 당시 귀족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한 번은 문제가 조정에 나간 사이에 그가 총애하던 후궁을 독고황후가 죽인 일도 있었다. 천하를 통일한 천하대장부였던 문제 양견도 그녀가 두려워 감히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주지 못했다. 이처럼 독고황후는 질투심이 강한 여성으로 알려졌지만 정치적으로는 백성들에게 인자하고 존경받는 황후였다고 한다.
황태자가 되다
문제의 차남 양광(楊廣)은 수서(隋書)의 기록에 의하면 “자태와 거동이 아름답고 민첩하며 총명하여 여러 자녀 중에서 특히 부모가 총애하였다. 학문을 좋아해 글을 잘 지었으며 침착하면서도 엄중하여 조야(朝野, 조정과 민간)에 촉망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장자 상속제 의해 형인 양용(楊勇)이 태자가 되었으나 양광은 600년에 어머니 독고황후의 덕택에 형을 밀어내고 대신 황태자가 되었다. 독고황후는 신하들마저 정처(正妻) 외에 다른 여자를 곁에 두는 꼴을 그냥 두지 않았다.
황태자였던 형 양용(楊勇)이 정처 원씨(元氏)가 있는데도 운씨(雲氏)를 총애한 것, 태자비가 죽었는데도 방종과 사치에 놀아나면서 행실이 좋지 않은 것들이 모두 어머니의 눈 밖에 나 있었다. 이에 비해 양광은 청렴하고 여자를 탐하지 않아 어머니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결국 독고황후가 문제에게 건의하여 황태자 양용을 폐위시키고 대신 차남 양광을 황태자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개황(開皇) 20년(600), 양광의 나이 32세에 황태자에 올랐으니 일설에는 그 혈기왕성한 나이까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던 것은 그가 황태자 자리를 겨냥하고 계략을 꾸민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피가 병풍을 물들이고
태자에 오른 양광은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602년 8월 어머니 독고황후가 죽자 그는 더 이상 금욕적인 생활을 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문제는 602년 12월 다시 장자 양용을 황태자로 삼으려는 마음을 먹었다. 그러던 차에 양광이 평소 사모하던 아비의 후궁인 선화부인(宣華夫人) 진씨(陳氏)에게 욕망을 채우려다 실패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문제는 당시 병이 위중한 상태에 있었지만 아들을 문책하려 궁으로 불러들였다.
양광은 이에 대처하기 위해 상서 우복야(右僕射) 양소(楊素)와 결탁하고 시종무관장 장형(張衡), 장군 우문술(宇文述) 등을 대동하고 수문제의 측근 신하를 납치하였다. 그날 밤 병사들을 시켜 궁궐을 포위한 후 아버지 문제를 시해하게 하였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피가 병풍을 붉게 물들였고, 원통한 비명소리가 담장 밖까지 들렸다”고 한다.
뒤이어 양광은 형 양용에게 자결하라는 조작된 유언장을 보내었으나 겁을 먹고 자결하지 않자 사람을 보내 죽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양광에게 복수하기 위해 거병한 5남인 한왕 양량(楊諒)을 무찔러 죽였다. 당시 4남인 양수(楊秀)는 이미 죄로 인해 황자에서 폐해져 있었고 3남인 양준(楊俊)도 병사한 상태였다.
수문제는 자식들이 동복(同腹)형제들 이므로 다른 왕족처럼 골육상쟁(骨肉相爭)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였지만 최고 권력을 추구하는 처참한 권력 투쟁 앞에서는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이리하여 살부살형(殺父殺兄)의 패륜을 저지른 양광이 604년에 제위에 오르니, 그가 수의 제2대 황제인 양제이다.
수양제의 치적
수양제 양광은 즉위하자마자 대대적인 토목 공사를 일으켰다. 그는 뤄양(洛陽)에 새로 거대한 도성을 축조하여 동도(東都)로 삼아 현인궁(顯仁宮)이라는 장대한 궁전을 건설하였다. 매월 2백만 명의 백성을 동원하여 도성을 짓고 궁전을 세웠다. 현인궁에는 서쪽에 서원(西苑)이라는 큰 정원을 건설하였는데 그 주위가 200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각지에서 희귀한 석재와 목재를 수집하여 뤄양으로 보냈으며 그 과정에서 수십만 명의 백성들이 죽어갔다. 서원 속에 10여 리 되는 큰 바다를 건설하고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州) 등 신선이 산다는 3개의 인공 산을 만들었으며 그 외 여러 정자와 누각을 지었는데 그 모습이 가히 장관이었다고 전해진다.
그 바다의 북쪽에는 용인거(龍麟渠)라는 수로를 만들고 물줄기를 따라 16개의 정원을 또 만들었다. 정원에는 각종 희귀 동물을 사육하여 양제가 즐길 수 있게 하였고 밤에는 미녀들과 같이 어마어마한 연회를 베풀었다. 이로 인하여 백성들의 노고는 늘어만 갔다.
한편 화려한 도성을 지은 양제는 선왕 문제의 운하개통사업을 이어 받아 중단됐던 공사를 재개시켰다. 이미 선왕 때 완성된 창안(長安)과 황허(黃河)를 이은 광통거(廣通渠)와 회수 (淮水)와 창장(長江)을 잇는 산양독(山陽?)을 기초로 뤄양을 중심으로 남북을 연결하기 위해 추진되었다.
뤄양-황허-회수를 잇는 통제거(通濟渠) 운하는 반 년 만에 완성되었고 이어 회수와 창장을 잇는 한구(?溝)가 개착되었다. 양제는 대운하를 건설할 때 40여 개의 행궁(行宮)을 지었으며 운하 옆에는 대로를 건설해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심었다. 대운하 건설에는 1억 5천만 명이나 되는 백성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605년 여름, 양제는 뤄양에서 배를 띄워 양저우(揚州)로 행행(行幸)하였는데 양제가 탄 배는 높이 45척(尺), 길이 200장(丈), 4층(層)으로 된 용주(龍舟)였다. 금옥(金玉)으로 장식된 100여 개의 방이 있는 움직이는 궁전이었다. 황후와 후궁, 대소신료, 승려 등은 그 뒤를 잇는 화려한 배를 타고 함께 수행하였다. 당시 이런 호화로운 배는 수천 척에 이르렀고 수행 인원만도 20만 명이 넘었으며 배안에서는 음주와 가무가 끊이지 않았다. 배는 모두 사람들이 줄을 묶어 끌었는데 배를 끄는 사람을 전각(殿脚)이라 불렀다.
운하 양쪽에서 배를 호위하는 기병들의 행렬도 가관이었는데 병사와 깃발이 숲을 이루었다. 배가 도착하는 곳마다 지방관이 나와 온갖 진귀한 물품과 산해진미를 제공했는데 잘 바치면 상급이 내려지지만 그 반대일 경우에는 죄를 면치 못하였다. 이 때문에 지방관은 백성들을 쥐어짤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배가 지나는 곳마다 백성은 시달림을 당하였다.
608년에는 뤄양에서 지금의 베이징의 남쪽인 탁군으로 통하는 영제거(永濟渠)를 만들었고 610년에는 창장-치엔당장(錢?江)-위저우(余州, 지금의 항저우(杭州))를 잇는 강남운하(江南河)를 잇따라 개통시켰다.
당시 대운하 건설은 황제의 유희를 위한 행차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 원정 시 군사물자 수송을 위한 것으로 경제적, 군사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남쪽의 창장과 북쪽의 황허를 연결시켜 남방과 북방의 물자교류가 가능케 되어 남북융합과 중국의 일체화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러한 대대적인 국토개조 사업은 황제의 권위와 지배력을 입증해 주는 동시에 역사상 보기 드문 독재 권력의 소산이다.
무리한 고구려 원정
양제는 서북방에서 중국을 넘보는 돌궐(突厥)과 토욕혼(吐谷渾)을 공략하여 영토를 넓혔다. 북방으로 동돌궐을 복속하고 서돌궐을 회유함으로써 위세를 떨쳤으며 이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장성(長城)을 구축하였다. 서쪽으로 토욕혼을 정복하여 칭하이(靑海)를 합병하고 서역교통로를 확보하였다. 남쪽으로는 임읍(林邑, 베트남 남부)과 유구를 정복하고 적토국(赤土國, 수마트라)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그러나 양제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고구려와 유목 민족인 돌궐과의 연합을 막기 위해세 차례의 고구려 원정을 시도하였다. 먼저 612년에 아버지 문제가 축적해 놓은 부를 바탕으로 113만 대군을 요동으로 출동시켜 제1차 고구려 원정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활약(살수대첩)으로 수군이 크게 패배하였다.
양제는 613년에 다시 침범하였으나 예부(禮部尙書) 양현감(楊玄感)이 후방에서 학정(虐政)에 불만을 품은 농민을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회군(回軍)하였다. 그 후 다시 614년에 제3차 고구려 원정을 단행하였으나 별 소득 없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국력을 고려하지 않고 전개한 각종 대사업과 3차례에 걸친 무모한 고구려 원정은 백성의 부담을 가중시켜 민심이 이반(離反)하고 집권층 내부에서도 양제의 통치를 반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이런 급박한 때에도 양제는 사치와 방종을 일삼고 미녀들에 둘러싸여 유흥에 젖어 있었으니 국운이 쇠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수 말기의 여러 반란군 중에는 양제의 이종사촌형인 이연(李淵, 후의 당고조)도 포함되어 있었다. 617년 이연은 양제를 태상황으로 만들고 황손 양유(楊侑)를 황제로 잇게 했다. 그러나 양제는 여전히 국난(國難)을 외면하고 향락에 빠져있었다. 결국 그는 근신 우문화급(宇文化及, 고구려의 원정군 장군인 우문술의 아들)에게 피살되었고 손자 양유도 이연에게 황제의 자리를 내줌으로써 수는 통일한 지 30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멸망을 재촉하고
이렇게 해서 수나라는 3대(代) 38년 만에 멸망하게 되는데 그의 묘호가 양제(煬帝, ‘양(煬)’은 ‘잔인하고 악랄함’을 뜻함)로 되어 있듯이 사서(史書)에 의하면 그는 역사상 폭군으로 악명 높은 망국의 군주라는 평과 함께 두뇌가 명석하고 시문(詩文)에 뛰어나며 문무(文武)를 고루 갖춘 인물이었다는 평도 있다.
하지만 주변 현신들의 충고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고 자기 재능을 과신하며 향락에 빠져 독재를 일삼던 그는 결국 근신들에 의해 살해되는 비운을 맞이하고 말았다.
현재 장쑤(江蘇)성 양저우(揚州)에 가면 수양제 능(陵)이 있다. 이곳은 양제와 황후 소씨(蕭氏)가 합장되어 있는 능묘로 원래는 양저우에서 살해된 수양제의 유체가 발견되지 않은 채 제사를 지내오다가 청대에 고고학자들에 의해 초라한 토장이 발견되면서 그것이 수양제의 것으로 밝혀져 오늘날의 능묘가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수양제만큼 인생의 격변이 많았던 인물도 중국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군주로서 과단성 있는 정치와 야심찬 정복사업의 추진은 역사상 치세의 업적을 남겼지만 독단성과 현인의 진언과 충고를 멀리한 그의 태도는 결국 왕조를 몰락으로 이끌었고 패국의 망주로 오명을 낳았다.
자신의 무능과 상황의 불리함으로 패주가 된 다른 황제들과는 달리, 현신의 충언에 귀 기울일 줄 몰라 역사적 오명을 쓰게 된 수양제는 그러한 점에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귀감이 되지 않을까!
전순동/ 본지 집필위원, 충북대 역사교육과 교수
출처/ 중국어문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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