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렴한 관리, 공정한 재판관으로 추앙 받는 송대(宋代)의 포증(包拯)
중국 안후이(安徽)성은 유명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성으로 알려져 있다. 춘추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재상이었던 관중(管仲),유방(劉邦)을 도와 한나라를 세운 장량(張良),삼국지의 조조(曺操)와 주유(周瑜), 중국 한의학의 명의로 알려진 화타(華陀), 송대의 성리학적 전통을 세운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 성리학을 완성한 주희(朱熹),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朱元璋), 청말 개혁에 앞장섰던 이홍장(李鴻章), 중국 5ㆍ4운동을 주도했던 문학가 호적(胡適), 중국공산당 창당의 주역인물인 진독수(陳獨秀) 등이 모두 안후이성 출신이다.
그런데 특별히 세인(世人)들에게 존경을 받는 인물이 있는데 바로 북송(北宋)시대 청백리의 대명사로 불리는 포증(包拯)이다. 포증은 한국에서도 이미 TV드라마를 통해 ‘포청천(包靑天)’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중국 사람들은 지금도 청렴한 공무원을 보면 “저 사람은 포공이다”라고 말한다.
효성 지극한 포증
포증(999~1062)은 북송 진종(眞宗) 함평(咸平) 2년(999)에 루저우푸(廬州府) 허페이현(合肥縣:지금의 안후이성 허페이)에서 태어났다. 부친 포의(包儀)는 조산대부(朝散大夫: 종5품)라는 관직을 역임한 학자로, 그의 집안은 전통적인 학자 관료 집안이었다. 포증의 자는 희인(希仁)으로 흔히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는 뜻에서 ‘포공(包公)’, ‘포대제(包待制)’, ‘포청천(包靑天)’, ‘포대인(包大人)’ 등으로 부르고 있다.
송대의 역사서『송사(宋史)』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공평무사(公平無私)한 인물로 고관에 대해서도 겁을 내지 않는 인물로, 절대로 웃지 않았는데 그가 웃는 날은 황하가 맑아지는 날로 비유하고 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두뇌가 명석하였다. 그는 28세(1027) 라는 젊은 나이에 과거 시험에 급제하여 대리사(大理寺)의 평사(評事)에 임명되었다가 곧 젠창현(建昌縣: 지금의 장시성 용시우(江西省 永修))의 지현(知縣:현의 우두머리, 종8품)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향을 떠나 노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것을 늘 마음 아파했다. 그래서 그는 관직에 오른 지 오래되지 않아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해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하였다. 몇 년 후 양친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게 되자 그는 무덤가에 초막을 짓고 3년 상을 치르며 효성을 다하였다.
부모님이 소천 한 후 그는 고향에서 정직하고 소박한 생활을 보내다가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인종(仁宗) 경우(景祐) 4년(1037)에 톈창현(天長縣)의 지현에 임명된다. 후에 그는 단주지주(端州知州), 감찰어사(監察御使), 삼사호부판관(三司戶部判官), 전운사(轉運使) 등을 역임하였고, 수도 카이펑(開封)으로 들어가 삼사호부부사(三司戶部副使), 지간원(知諫院) 등을 지냈다. 1062년 그는 추밀부사(樞密副使, 정2품) 직임을 수행하던 중 병을 얻어 향년 64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
그가 죽은 후 조정에서 그를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추증하고 시호를 “효숙(孝肅)”이라 했다. 현존하는 그의 문집으로는 『포증집(包拯集)』『포효숙공주상의(包孝肅公奏商議)』 등이 있다.
지혜로운 판관 포증
그의 지혜로운 재판에 대해서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그가 톈창현 지현으로 있을 때, 특이한 소송사건 하나가 발생했다. 한 농부가 밤에 소를 외양간에 매어두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 소가 땅바닥에 드러누워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농부가 소의 입을 벌려보니 누군가가 소의 혀를 잘라 놓았던 것이다. 분통이 터져 참을 수 없었던 그는 즉시 관청으로 달려가서 고소하고 포증에게 소의 혀를 자른 사람을 잡아달라고 부탁하였다.
미궁에 빠진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심하던 포증은 생각 끝에 그 농부에게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곧장 집으로 돌아가 소를 잡아 팔아버리라고 일렀다. 개인이 사적으로 소를 도살할 수 없는 것이 당시의 법이었지만 관가에서 허락하였고 또 혀가 잘린 소는 얼마 살지도 못할 것이라 생각되어 포증이 시키는 대로 하였다.
다음날 아침, 한 사람이 관청으로 찾아와 아무개가 임의로 몰래 소를 도살했다고 고발해 왔다. 포증은 그 밀고자에게 사실 내용을 자세히 물어본 후, 즉시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네 이놈! 네가 남의 소의 혀를 잘라놓고 도리어 그 사람이 소를 도살했다고 고발하느냐!”그는 겁에 질려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죄를 실토하였다. 자신은 그 농부에게 원한이 있어 소의 혀를 잘랐다는 것이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포증의 지혜로운 판결에 대해 크게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후 포증은 여러 곳의 지방관을 역임하는 동안 백성의 억울한 사건을 해결해 주고 과중한 세금을 감면하여 생활을 안정시켜주었다.
염라대왕과 포증
1056년 12월, 인종(仁宗)은 부패하고 혼란한 정국을 해결하고자 포증을 카이펑부의 지부(知府)에 임명했다. 카이펑부는 황실의 내외척과 권문세족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관직에 있는 그 누구도 뇌물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부패했다.
카이펑부의 지부에 임명된 포증은 당시 대리인을 거쳐야 했던 소송과정에서 일어나는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관청 앞에 북을 걸어 놓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은 대리인을 거치지 않고 직접 와서 북을 치도록 했다. 북소리가 울리면 관청은 문을 열어 백성을 맞이하여 억울한 사정을 고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되자 관리들은 더 이상 중간에서 백성의 재물을 갈취할 수 없게 되었고 또한 포증의 법집행이 엄격하여 카이펑의 권문세족들도 함부로 부정부패를 저지를 수 없게 되었다.
포증은 카이펑부에서 재직하는 30여 년 동안 비리 있는 수많은 관리들의 관직을 박탈시키거나 강등시켰는데 포증에 의해 탄핵된 사람들 가운데 특히 강서전운사(江西轉運使) 왕규(王逵)와 송상(宋庠), 장요좌(張堯佐) 등의 탄핵은 전국을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그의 강직한 성품 때문에 염라대왕에 비유되면서 ‘포염라’, ‘철면대인’ 등과 같은 별명이 붙었고 민간에서는 “청탁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염라대왕과 포증 이다.” 라는 노래가 전해졌다고 한다.
포증은 친척과 친구들에게도 매우 엄격하였다. 친척들이 그의 후광을 입으려고 해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세월이 갈수록 친척과 친구들도 그의 강직한 성품을 파악하고는 더 이상 개인적인 일로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
1061년, 인종은 포증을 중용(中庸)하여 그를 추밀부사(樞密副使)로 승진시켰다. 그는 고관이 된 후에도 일반 평민과 같이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던 중 1062년 5월 그는 중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임종 시에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후대에 자손들이 벼슬을 하여 부정부패를 저지르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그들이 죽은 이후에도 우리 포씨(包氏) 집안의 선산에 묘를 쓰지 못하도록 하라.”
그가 남긴 시 가운데 두안저우(端州: 지금의 광둥성 쟈오칭(廣東省 肇慶))의 관청 벽에 씌어진 시가 있는데 그의 인격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청심위치본(淸心爲治本) 청심, 곧 맑고 깨끗한 마음은 다스림의 근본이요
직도시신모(直道是身謀) 직도, 곧 바른 도는 자기 자신을 위한 도모이다.
수목종성동(秀木終成棟) 곧게 잘 뻗어 자란 나무는 마침내 건물의 동량재 되고
정강불작구(精鋼不作鉤) 좋은 강철은 굽혀진 갈고랑이로 쓰이지 않는 법이다
창충서작희(倉充鼠雀喜) 창고가 가득차면 쥐와 새, 곧 탐관오리가 좋아하고
초진토호수(草盡兎狐愁) 풀이 다 말라 없어지면 토끼와 여우가 슬퍼하게 된다.
사책유유훈(史冊有遺訓) 역사에는 교훈이 있으니
무이래자수(毋貽來者羞) 앞으로 올 후세에 부끄러움을 남기지 말지어다.
아시아를 뒤 흔든 포청천, 왜 인기 있을까?
포증을 주인공으로 삼은 인기 드라마로 ‘포청천’이 유명하다. 포청천은 대만과 홍콩의 합작으로 제작된 드라마지만 대만, 홍콩, 중국은 물론 한국, 일본, 말레이시아에서도 대 인기를 모았고 인도네시아에서도 포청천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이 드라마는 아시아 전체를 뒤 흔들며 대단한 인기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포증은 송대 행정관이지만 청렴한 관리, 공정한 재판관으로 널리 추앙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그를 소재로 한 소설과 희곡이 유행하였다. 남송(南宋)과 금대(金代)에 이미 포증을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과 희곡이 출현하였고, 원대(元代)에는 포공희(包公戱), 포공전설(包公傳說), 설서화본(說書話本) 등 그를 이상적인 재판관으로 찬양한 작품이 크게 성행하였다. 명대에는 각종 전기(傳奇) 지방희(地方戱)와 수백 권에 이르는 재판 소설 『포공안(包公案)』,『용도공안(龍圖公案)』으로 더욱 발전하였으며 청대에는『삼협오의(三俠五義)』소설을 써 내었다. 이 소설은 그동안 명 재판관으로만 다루어 오던 포증을 협객들과 함께 등장시켜 놓았다는 것이 특색이다. 이『삼협오의』는 후에『칠협오의(七俠五義)』라는 무협 장편소설로 발전하였다.
지금도 중국의 지방희는 물론 희곡과 소설 속에서 포증을 주제로 한 작품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1993년부터 그를 주인공으로 한「포공」극집이 계속 쏟아져 나오면서 약 500여 편의 영화가 제작되었다고 하니 포증에 대한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중국인들은 포공을 신으로 숭배하면서 사당을 찾아가 그를 참배하고 있다. 그의 공평무사한 판결, 청렴결백한 생활과 예리한 통찰력은 오랜 세월동안 많은 대중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신적인 인물로 승화된 것이다.
포공에 대한 숭배는 마카오에서 가장 성행하고 있다. 지금도 마카오에서는 매일 포공의 사당을 찾아가서 복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숭배는 포공이 선한 사람을 보호해주고 악한 사람을 징벌해 주며, 재앙을 없애주고 복을 내려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포공에 대한 숭배는 사회 정의와 바른 정치의 실현을 기대함에서 나온 숭배라고 할 수 있다.
포증의 고향 허페이에 가면 시가지 남쪽의 빠오허(包河) 공원 내에 포증을 모신 사당, 곧 ‘포공사(包公祠)’가 있다. 이것은 명의 홍치 원년(1488)에 여주지부 송감(宋鑑)이 포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포공서원’을 세운 데서부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포공사’가 된 것이다.
이처럼 포증은 시대나 지역을 막론하고 변함없이 인기를 끌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현실적으로 정치가나 관료들의 부패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권력자가 징계를 당하는 일이 드문 일이기에 그만큼 서민들은 포공의 활약에 쾌재를 부르는 것이다. 이 세상에 포증과 같은 청렴결백한 관리가 나타나길 절실히 바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바른 정치를 행한 지도자가 없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청렴한 관리, 공정한 재판관으로 널리 추앙 되고 있는 포공의 이야기는 이상적인 정치가 실현되지 않는 한 영원히 계속될지도 모를 일이다.
전순동/ 본지 집필위원, 충북대 역사교육과 교수
출처/ 중국어문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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