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가 멸망한 후 중국은 장기간의 분열상태(220~589)로 접어들었다. 이 시기는 정치와 사회가 불안했지만 문학상으로는 오히려 발전했다. 그 이유는 불교문학의 영향으로 중국어의 음률미가 강화되었으며, 북방 이민족이 세운 북조(北朝)와 한족 중심의 남조(南朝)가 서로 대치하는 상황에서 문학적 다양성이 추구되었기 때문이다.
남방과 북방이 서로 다른 풍격을 띠고 있는데, 남방은 대부분 서정시 위주이고 북방은 전쟁의 강인한 기운이 비교적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이 시기에는 많은 문인들이 배출되었는데, 그중에서 조식(曹植:192~232)(→ 조식)과 도연명(陶淵明:365~427)(→ 도연명)이 대표적이다. 조식은 서정적이고 우아한 5언시에 뛰어났으며, 그의 부친 조조(曹操)와 형 조비(曹丕) 및 동시대의 시인들과 함께 건안문학(建安文學)의 풍격을 창시했다. 도연명의 시는 특히 담백하고 자연스런 특색을 갖추고 있는데, 그의 이러한 시풍은 후세의 많은 시인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가 전원에 은거한 후에 지은 〈귀거래사 歸去來辭〉와 술 마신 뒤에 쓴 〈주 酒〉 12수는 많은 사람들에게 애송되는 대표작품이다.
이 시기의 문학은 정통 유가의 영향에서 벗어나 도가(道家)와 외래 불교문학의 영향을 점차적으로 받았으며, 조화로운 음률과 아름다운 수식을 강조한 변려문이 산문형식의 주류를 이루었다. 동진(東晉) 초기(4세기 중엽)의 시인이자 문학비평가인 육기(陸機)가 지은 〈문부 文賦〉는 문장을 지을 때 창조성을 중요시했으며, 이전 사람들의 작품을 모방하는 인습에 반대했다. 남조 송(宋)나라의 유의경(劉義慶)이 지은 〈세설신어 世說新語〉는 후한말부터 동진까지의 유명한 지식인들에 관한 흥미로운 일화를 기록한 것으로, 당시에 유행하던 청담(淸談)의 기풍이 잘 반영되어 있다. 양(梁)나라의 유협(劉勰)이 지은 〈문심조룡 文心雕龍〉은 최초의 전문적 문학비평서로서 당시에 유행하던 변려체로 되어 있다. 북조의 대표적인 산문작가와 작품에는 양현지(楊衒之)의 〈뤄양 가람기 洛陽伽藍記〉와 역도원(酈道元)의 〈수경주 水經注〉 등이 있다. 또한 후한 이래로 계속된 불교경전의 번역이 이 시기에는 질과 양 면에서 모두 증가하여 중국문학의 발전에 상당한 충격과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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