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족이 세운 명나라는 몽골족의 지배하에서 억압당했던 한민족의 문화를 회복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자연히 전통적인 시문이 다시 그 중요성을 되찾았다. 그러나 과거시험에 사용되었던 팔고문은 그 형식이 너무 까다로워서 시문의 자유로운 발전에 장애가 되기도 했다.
명대의 문인들은 시·사·산문의 방면에 있어서 대부분 복고적인 성향이 매우 강하여 '문은 반드시 진·한을 따르고 시는 반드시 성당을 좇는다'(文必秦漢詩必盛唐)는 의고주의(擬古主義)가 팽배했다. 이러한 복고운동은 모방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창의성이 결핍되었기 때문에 그 성취는 사실상 당·송대의 고문운동에 비해 보잘 것 없었다. 이른바 '전·후 칠자'(前後七子)를 중심으로 한 의고주의 문학은 대체로 진·한의 문학을 숭상하는 진한파와 한유의 '문이재도'(文以載道)의 주장을 강조하는 당송파로 대별된다. 이러한 의고주의 문학사조는 명대 전체를 휩쓸다가 명대 말엽인 16세기에 이르러서야 원씨(袁氏) 3형제(袁宗道·袁宏道·袁中道)가 주도한 공안파(公安派)의 반대에 부딪쳤다. 그들은 문학의 진화성을 주장했으며 훌륭한 작가로서 갖추어야 할 조건으로 '성령'(性靈)을 강조했다. 공안파와 그뒤를 이은 종성(鍾惺)·담원춘(譚元春)이 중심이 된 경릉파(竟陵派)의 영향으로 명말에는 청신하고 미려한 소품문(小品文)이 창작되었다(→ 수필).
명대 문학의 진정한 가치는 통속문학인 희곡과 백화소설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희곡은 '전기'(南曲이라고도 함)가 매우 성행했는데, 전기는 송대의 희곡인 '희문'으로부터 발전해온 것으로, 북곡(北曲)인 잡극과 구성상 많은 차이가 있다. 전기는 원래 민간에서 생겨난 것이지만, 그후로 점차 문인들의 지지를 받아 잡극을 누르고 희곡문학의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초기의 전기 작품으로는 고명(高明)의 〈비파기 琵琶記〉가 가장 유명하다. 〈비파기〉 이후로 전기는 잠시 침체하기도 했으나 곧 다시 성행했다. 이러한 전기의 부흥은 여러 지방의 서로 다른 곡조를 개량하여 '곤강'(崑腔)이라는 새로운 곡조를 만들어낸 위양보(魏良輔)와 곤강을 사용하여 우수한 작품을 창작하고 이를 널리 유행시킨 양진어(梁辰魚)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음악, 곤곡). 곤강은 감미로운 노래와 섬세한 음악성 때문에 그후 18세기말까지 중국 극단을 지배했다.
명대 중엽 이후에는 소설 창작도 크게 진전되었다. 우선 장편 백화소설의 대표작으로 오승은(吳承恩)의 〈서유기〉와 작자 미상의 〈금병매〉를 들 수 있다. 〈서유기〉는 당나라의 승려 현장(玄)이 천축국(天竺國:인도)에 가서 불경을 가져온 고사에 근거하여 100회의 장회체 신마소설(神魔小說)로 확대·부연한 것이다. 〈금병매〉는 100회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인공인 서문경(西門慶)과 그 처첩들의 음탕한 생활을 적나라하게 묘사하여 일찍이 음서(淫書)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통속소설과는 달리 철저하게 현실사회를 다룬 사실주의적인 묘사수법은 중국소설사에서 주목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밖에 단편 백화소설도 크게 유행했는데, 송대의 화본을 모방했다 하여 '의화본'(擬話本)이라 부른다. 그 대표작품에는 풍몽룡(馮夢龍)의 3언(三言:〈喩世明言〉·〈警世通言〉·〈醒世恒言〉)과 능몽초(凌濛初)의 2박(二拍:〈初刻拍案驚奇〉·〈二刻拍案驚奇〉)이 있다.
'역사의 숨결 > 역사(중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문학(Britannica) - 현대의 중국문학 (0) | 2010.02.11 |
---|---|
중국문학(Britannica) - 청대의 중국문학 (0) | 2010.02.11 |
중국문학(Britannica) - 원대의 중국문학 (0) | 2010.02.11 |
중국문학(Britannica) - 송대의 중국문학 (0) | 2010.02.11 |
중국문학(Britannica) - 당·오대의 중국문학 (0) | 2010.0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