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근대사-청일전쟁(淸日戰爭: 1894)

지식창고지기 2010. 2. 18. 09:09

중일갑오전쟁(中日甲午戰爭: 1894)

 

19세기 70년대 이후 서구의 자본주의는 자유경쟁으로부터 독점 단계로 진입하였다. 당시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및 아시아의 절반 이상의 지역이 이미 서구 자본주의 국가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이에 아직도 식민지가 되지 않았던 중국은 열강들의 쟁탈과 침략의 대상으로 매우 중시되었다.

일본은 '명치유신(明治維新: 메이지유신)'을 거친 후에 발전을 이룩하게 된 자본주의 국가로써 중국에 대하여 매우 큰 야심을 품고 있었다. 1894년 마침내 중국에 대하여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당시에 중국의 군대와 민중들은 용감하게 저항했지만, 청 정부는 부패하고 나약하여 일본에게 타협하고 양보함으로써 일본과 굴욕적인 '시모노세키조약(馬關條約)'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 의하여 일본은 중국의 요동반도, 대만, 팽호열도(澎湖列島)를 차지하였으며, 중국으로부터 은 2억량(兩)이라는 거액의 배상금을 받아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무역항에 공장과 자유통선(自由通船)을 설립하는 특권을 획득하였다.

청일전쟁 이후 다른 제국주의 열강들은 일본이 중국에서 엄청난 이익을 차지한 것을 보고 자신들도 그러한 이익을 확보하고자 침략을 시도했다. 그들은 서로 다투어 중국에 투자를 하여 조계지(租界地)를 만들었으며, 세력 범위를 분할하여 매우 격렬한 쟁탈을 벌였다. 미국은 뒤늦게 중국에 진출하여 제국주의 열강들의 격렬한 쟁탈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1899년 9월 '문호개방(門戶開放)' 정책을 표방하게 되었다. 즉 미국은 각국의 중국에서의 세력 범위를 승인한 동시에 각국도 모두 문호를 개방하여 다른 국가들도 자신의 세력범위 내에서 통상, 통선(通船) 등의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할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에 중국에서의 쟁탈이 갈수록 격렬해지는 상황을 다소 완화하기 위하여 각국은 미국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미국은 '문호개방'을 주장한 결과, 한편으로는 미국의 상품이 기타 각국의 세력 범위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국가들은 잠정적으로 공동 분할의 협의를 달성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중국의 운명은 더욱 악화되어 망국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