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舜)은 성이 요(姚), 일설에는 규(女+爲), 이름은 중화(重華)이며, 역사에서는 그를 우순(虞舜)이라 칭한다. 전설상의 유명한 성군의 한 사람으로 50년간 재위했다. 남쪽으로 순행하던 도중에 창오(蒼梧: 지금의 호남성 영원현<寧遠縣> 동남)에서 100세의 나이로 죽었으며, 그 시신은 구억산(九嶷山: 지금의 호남성 영원현) 기슭에 묻혔다. 일설에는 우(禹)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창오로 추방되어 죽었다고 한다. 순은 유우씨(有虞氏) 부락의 장이자 염황(炎黃: 염제와 황제) 부락연맹의 장이다. <<맹자(孟子)>>「이루(離婁)」편에 의하면, 그는 제풍(諸馮: 지금의 산동성 제성현<諸城縣>)에서 태어나 동이족에 귀순하여 우(虞: 지금의 하남성 우성현 <虞城縣> 북쪽)에서 살았다. 순은 평범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 고수는 장님이었다. 순이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 어머니가 병으로 죽자 그의 아버지 고수는 재혼하였다. 순의 계모는 남동생 상(象)과 여동생 과수(과手, 과=果+칠 복)를 낳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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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는 어리석고 멍청하여 후처와 그녀의 자녀만 좋아하고 순을 좋아하지 않았다. 계모는 속이 좁고 악랄하였으며, 남동생 상도 성격이 거칠고 흉폭하였다. 그들은 항상 순을 학대하였다. 순은 성인이 된 후 더 이상 집에 있을 수가 없어 역산(歷山: 지금의 산서성 예성<芮城> 서북, 즉 중조산<中條山>, 뇌수산<雷首山>이라고도 함) 기슭에 혼자 초막을 짓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살았다. 순은 사람들에게 상냥하게 대하고 남을 도와주기를 좋아하여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와 이웃이 되려고 찾아와 얼마 안되어 그곳은 사람들의 집거지가 되었다. 이때 요임금은 나이가 너무 많아 각 부락의 장들을 불러놓고 그들에게 자기의 후계자를 추천토록 했다. 모두들 순의 미덕을 칭송하면서 순을 추천했다. 요임금은 일단 순을 한번 살펴보기로 하고, 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순에게 시집보냈다. 그리고는 그에게 창고를 지어주고 양떼를 주었다. 순의 계모와 남동생 상은 그가 단번에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 것을 보고 질투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이에 고수를 설득하여 순을 죽이고 그의 재산을 탈취할 계략을 꾸몄다. 한번은 고수가 순을 불러 창고의 지붕을 수리하게 했다. 순이 지붕에 올라가자 상은 사다리를 치워 버리고 불을 질러서 그를 죽이려고 했다. 순은 그의 아내가 준 두 개의 삿갓을 양손에 들고 팔을 펼쳐서 새처럼 날개짓하여 땅으로 내려와서 위기를 벗어났다. 상은 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다시 새로운 계략을 꾸몄다. 하루는 고수가 또 순을 불러 우물을 치게 했다. 순이 공구를 가지고 밧줄에 몸을 묶어 우물 아래로 내려갔다. 그가 우물 속으로 들어가자 고수와 상은 곧바로 밧줄을 끊어 버리고, 우물속으로 돌과 흙덩이를 퍼부어 우물을 메웠다. 그리고는 그들은 순의 집으로 달려가서 순의 재산을 차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순은 안전하게 우물밖으로 빠져나왔다. 고수와 상은 크게 놀라 머뭇거리다가 슬며시 물러갔다. 이때 순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우물 아래로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우물벽에 바싹 붙어 있다가 구멍을 뚫고 나왔던 것이다. 며칠 후 상이 순의 집으로 찾아와서 이르기를, "지난 두 번의 일은 정말 형에게 미안하게 됐소. 오늘 특별히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 용서를 청하고자 하니 자리에 참석해주시오."라고 하였다. 순의 이복 여동생 과수는 부모와 상이 이처럼 악독하게 순을 해치려 하는 것을 보고 순을 매우 가련하게 생각했다. 그녀는 이번에도 상이 순에게 술을 먹인 다음 그를 베어 죽이려는 계략을 꾸미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러한 사실을 순과 순의 아내에게 몰래 일러주었다. 그러자 순의 아내는 즉시 약 한첩을 가지고 와서 순에게 그것을 먹고 그 자리에 참석토록 하였다. 술자리가 시작되자 그들은 순에게 계속 술을 권하였으나 그때마나 순은 한번에 술을 쭉 들이켰다. 술과 안주를 다 먹은 후에도 순은 아내가 준 약 덕택으로 멀쩡할 수 있었지만, 상은 그만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에 만취하여 순을 빤히 쳐다보면서 어쩌지도 못하고 나갔다. 비록 이런 일이 있었지만 순은 결코 원한을 가슴에 담아두지 않고 여전히 옛날과 마찬가지로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 동생들을 사랑으로 돌봐주었다. 요임금은 순이 이러한 가정환경 속에서도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 동생을 사랑으로 돌보는 것을 본 후, 그가 반드시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으리라 믿고 그에게 왕위를 선양(禪讓)하였다. 순은 왕위를 물려받은 후 즉시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를 뵙고 상을 유비(有鼻: 지금의 호남성 영릉현<零陵縣>)에 봉했다. 그 후 고수와 상은 자신들을 이토록 극진히 대하는 순을 보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개과천선하여 순과 화목하게 지냈다. 순은 왕위를 이어받길 전후하여 사방을 순행하여, "사흉(四凶)"이라 일컬어지던 곤(鲧)과 공공(共工), 환두(驩兜), 삼묘(三苗)를 제거하였다. 그는 각 부락의 우수한 인재를 등용하여 천하를 다스렸다. 그리하여 우(禹)에게는 치수를, 설(契)에게는 백성 관리를, 익(益)에게는 산과 연못의 관리를, 고요(皐陶)에게는 사(士)를 각각 맡곁다. 그 후 순은 우(禹)를 자신의 후계자로 추천하였다. 순임금이 만년에 이르렀을 때 남방의 묘인(苗人)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친히 대군을 이끌고 아황과 여영을 데리고 남하하여 반란을 평정하였다. 상수(湘水)에 이르러 그는 아황과 여영을 거기에 남겨두고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계속 전진하였다. 창오(蒼梧)에 도착했을 때 순은 갑자기 병이나서 일어나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었으며, 구억산 아래에 안장되었다. 아황과 여영은 이 비보를 접하고 통곡을 그치지 않았으며, 상수를 따라 내려가면서도 계속 피눈물을 흘렸다. 이때 피눈물이 대나무에 뿌려져 대나무를 얼룩얼룩하게 물들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 대나무를 상비죽(湘妃竹)이라 일컬었다. 마침내 아황과 여영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상수에 뛰어들어 죽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 강가에 사당을 짓고 그녀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두 여인은 모두 상수의 신이 되었는데, 아황은 상군(湘君)이 되고 여영은 상부인(湘夫人)이 되었다고 한다. 순임금의 남동생 상은 순임금의 죽음을 접하고 먼길을 달려와 무덤 앞에서 슬피 울면서 참회를 했다. 그후 그는 큰 코끼리로 변화여 그 주위에서 논밭을 갈았다. 후세 사람들은 순의 무덤 부근에 "비정(鼻亭)을 짓고 그를 기념했다. ≪사기≫「하본기(夏本紀)」와 ≪맹자≫「만장(萬章)」에서는 순임금이 만년에 옛날의 영명함을 잃어 버리고, 놀기만 좋아하는 아들 상균(商均)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며, 우는 여기에 불복하고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순을 창오(蒼梧)로, 상균을 양성(陽城)으로 추방한 다음 왕위를 찬탈하였다고 하였다. ≪맹자≫「이루편」에서는 순이 명조(鳴條: 지금의 하남성 등봉현<登封縣> 부근)에서 죽었다고 하였다.
순의 사당(舜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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