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禹)는 성이 사(姒), 이름이 문명(文命)이며, 대우(大禹), 하우(夏禹), 융우(戎禹), 제우(帝禹) 등으로도 일컬어진다. 생몰연대는 미상이며, 순의 선양(禪讓)을 받아 왕위를 계승하여 하왕조의 기초를 세운 인물이다. 8년간 재위하였으며 과로로 죽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100세까지 살다가 회계산(會稽山: 지금의 절강성 소흥현<紹興縣> 경내)에 묻혔고 한다. 우는 전욱의 증손이자 곤(鲧)의 아들로 하후씨(夏后氏) 부락의 장이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우의 아버지 곤이 치수의 실패로 피살된 후에 순임금은 우에게 아버지를 대신하여 계속 치수의 임무를 맡도록 하였다. 우는 총명하고 부지런하며 상냥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용을 중시하고 매사에 솔선수범하였다. 그는 치수에 실패한 아버지의 교훈을 거울삼아 철저한 현지 조사를 거쳐 강바닥에 쌓인 토사를 제거하는 방법을 취했다. 그는 직접 공사현장을 감독하면서 동분서주 한 결과 13년만에 홍수의 피해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 13년 동안에 그는 세 번이나 자신의 집앞을 지나갔지만 한번도 집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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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집앞을 지날 때 그는 아기를 낳기 위해 몸부림치는 아내의 신음소리와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우의 부하는 그에게 집안으로 들어가 보기를 권했지만 그는 시간을 지체하다 치수를 그르치게 될까 염려하여 들어가지 않았다. 두 번째 집앞을 지날 때는 그의 아들이 아내의 품에 안겨 그에게 손짓을 하며 부르고 있었지만 그는 손으로만 응답하고 그냥 지나갔다. 세 번째 집앞을 지날 때는 그의 아들이 달려와 그를 끌고 집으로 들어가려 하였지만, 그는 치수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아 집에 들어갈 시간이 없다고 하면서 그냥 지나갔다. 치수에 임하는 자세와 그 성과로 우는 많은 민심을 얻어 염황부락연맹의 후계자로 추대되었다. 순임금이 죽은 후 그는 왕위를 계승하였다. 우의 왕위 계승에 관해서는 또 다른 설이 전해오고 있다. 즉 곤과 우 부자는 동일한 방법으로 치수를 하여 두 사람 모두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곤과 우의 신위를 함께 모셔두고 3대를 함께 제사지냈다. 치수 방면에서는 두 사람의 역량이나 성과의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곤이 피살된 것은 우가 부락연맹의 장으로 추대되었기 때문이라는 정치적인 이유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요순(堯舜) 시대는 부계씨족사회의 말기였다. 당시의 역사적 상황하에서 요순은 보수세력의 대표이고, 곤은 신흥세력의 대표였다. 곤의 모든 행위는 씨족사회의 낡은 전통과 제도를 파괴하였으며, 특히 그는 폭력으로써 "선양(禪讓)"이라는 민주적인 제도를 위협하면서 요임금의 왕위를 찬탈하려고 기도하였다. 이에 요임금은 극도로 분노하여 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곤을 사형에 처했다. 우는 아버지가 피살된 뼈아픈 교훈을 거울삼아 총명하게 처신했다. 그는 매사에 공손하고 신중하면서 순임금의 명령을 잘 이행하여 마침내 순임금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이에 순임금은 곧바로 왕위를 그에게 선양하였다. 우는 부락연맹의 장이 된 후에도 여전히 직무에 충실하면서 근검절약을 생활화하였다. 그는 농사를 중시하여 관개수로 정비에 힘을 쏟았다. 그의 정치세력도 황하유역에서 장강유역으로 확대되었으며, 그는 양적(陽翟: 지금의 하남성 우현<禹縣>)에서 살았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에 이미 군대, 관리, 형벌, 감옥 등의 공권력을 구비하고 있었는데, 이는 이때에 이미 초기 형태의 국가가 출현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홍수의 정복을 기념하기 위해 우임금은 당시에 구주(九州)에서 생산되는 청동으로 9개의 솥(鼎)을 만들고 그 위에 구주를 대표하는 기이한 동물들을 주조하여 국가의 상징으로 삼았다고 한다. 우임금은 만년에 이르러 각 부락장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고요(皐陶)를 그의 후계자로 선발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고요가 요절하자 다시 고요의 아들 백익(伯益)을 후계자로 삼았다. 우임금은 왕위에 있은 지 8년째에 각 부락의 장들을 묘산(苗山: 지금의 절강성 소흥현 경내)으로 불러모았다. 모두들 예정된 시간에 도착하여 우임금에게 각자 예물을 바쳤다. 우임금은 부하에게 명령하여 예물의 수를 확실히 세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후세 사람들은 묘산을 '회계산'(會稽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집회에서 남방의 방풍씨 부락(防風氏部落: 지금의 절강성 덕청현<德淸縣>)의 장이 늦게 도착하였다. 우임금이 크게 진노해 있는데 방풍씨가 자신의 힘만 믿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지라 즉시 그를 끌어내려 죄상을 낱낱이 열거한 후 사형에 처했다. 집회가 끝난 후 우임금은 과로한 탓에 앓아눕고 말았지만 여전히 병을 무릅쓰고 업무를 처리하다가, 이해 8월 회계산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신하들은 평소 검소했던 그의 생활신조에 따라 단지 3벌의 옷과 3촌(寸)의 박관(薄棺)으로 그를 장사지내고 회계산에 안장하였다.
우임금 능 (절강성 소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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