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왕(桀王)은 이름을 계(癸) 또는 이계(履癸)라고도 한다. 생몰연대는 미상이며 발(發)의 아들이다. 발이 병으로 죽은 후 왕위를 계승하여 중국역사상 유명한 폭군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었다. 53년간 재위하였으며, 나라가 망하자 추방되어 굶어죽었다. 장지는 남소(南巢) 와우산(臥牛山: 지금의 안휘성 소현<巢縣> 와우산)에 있다. 힘이 장사인 걸왕은 언제나 그의 야만적인 힘만 믿고 백성들을 아무 이유없이 괴롭혔다. 그는 포악한 정치로 농업생산을 파괴하였으며, 대외원정을 남발하여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약탈하였다. 그는 즉위한지 33년째 되던 해에 병력을 동원하여 유시씨(有施氏)를 정벌하였다. 유시씨는 화의를 청하는 뜻에서 그에게 매희(妹喜: 말희<女+末 喜>라고도 함)라는 미녀를 바쳤다. 그는 매희를 매우 총애하여, 특별히 그녀를 위해 옥으로 장식한 화려한 집(瓊室), 상아로 장식한 회랑(象廊), 옥으로 장식한 누대(瑤台), 옥 침대(玉床) 등을 만들어주었으며, 이곳에서 그들 두 사람은 황음무도한 향락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것들을 마련하기 위한 부담은 말할 것도 없이 모두 백성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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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은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면서 분노하였지만 누구 하나 감히 말을 끄낼 수 없었다. 걸왕은 아첨하는 신하들을 중용하고 충신을 배척하였다. 조량(趙梁)이라는 사람은 걸왕이 좋아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제공해주고, 걸왕에게 향락의 방법과 백성들을 약탈하고 학살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어 신임을 얻기도 하였다. 걸왕이 즉위한지 37년째 되던 해에 동쪽 상(商) 부락의 장인 탕(湯)이 재덕을 겸비한 현인 이윤(伊尹)을 걸왕에게 알현시켰다. 이윤은 요순의 인정(仁政)으로써 걸왕을 설득하여, 걸왕이 백성들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심혈을 다해 천하를 다스리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걸왕이 더 이상 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자 이윤은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만년에 이르러 걸왕은 더욱 황음무도해졌다. 그는 사람들에게 명하여 '야궁(夜宮)'이라는 큰 연못을 파게 한 다음, 한 떼의 남자와 여자들을 데리고 그 연못에서 뒤섞여 살면서 한 달 동안이나 조회에도 나가지 않았다. 태사령(太史令) 종고(終古)가 울면서 간언을 하였으나, 걸왕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종고를 쓸데없이 남의 일에 참견한다고 질책하였다. 종고는 걸을 구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상(商)으로 가서 탕(湯)에게 투신하였다. 대신 관룡봉(關龍逢)도 걸에게 이렇게 간언하였다. "천자가 겸손하면서도 신의를 중시하고 근검절약 하면서도 어진 인재를 좋아하면, 천하가 안정될 수 있고 왕조도 견고해질 수 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사치를 절제하지 못하고 살륙을 일삼으시니, 백성들은 모두 폐하가 일찍 죽기를 바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이미 민심을 잃었으니 하루빨리 과오를 고쳐야 비로소 민심을 만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걸왕은 이 말을 듣고 격노하여 관룡봉에게 욕을 퍼붓고는 마침내 그를 죽여 버렸다. 이리하여 걸왕은 날로 민심과 지지 기반을 잃고 고립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상(商) 부락은 탕의 통치하에서 나날이 번성해졌다. 걸왕은 상의 탕이 자신에게 위협을 미칠 것을 염려하여 그를 하대(夏台: 지금의 하남성 우현<禹縣> 경내)에 가두었다. 얼마 후 탕은 걸왕을 안심시키는 계략을 꾸며 석방되었다. 그 후 탕은 명재상 이윤의 도움으로 군대를 일으켜 걸왕을 정벌하였다. 탕은 먼저 걸왕의 측근인 위국(韋國)과 고국(顧國)을 점령하고 곤오국(昆吾國)을 격파한 다음, 하(夏)의 요충지 명조(鳴條: 지금의 산서성 안읍현<安邑縣> 서쪽)로 돌진해갔다. 이 소식을 접한 걸왕은 급히 군대를 이끌고 명조로 달려갔다. 양군이 교전을 하고 있을 때 걸왕은 인근의 산꼭대기에 올라가 관전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져 걸왕은 황급히 아래로 내려가 비를 피하였다. 하나라의 병사들은 원래부터 걸왕을 위해 목숨을 바칠 생각이 없었던지라 이때를 틈타서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갔다. 걸왕은 그것을 제지하지 못하고 급히 성안으로 도망쳤다. 탕의 병사들이 뒤를 추격해오자 걸왕은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를 수 없어 매희와 보석을 챙겨서 배를 타고 남소(南巢: 지금의 안휘성 소현<巢縣>)로 도주하였다. 그후 탕의 추격으로 사로잡혀 밖으로 추방되었다. 이때도 걸왕은 여전히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고, "당시에 탕을 하대의 감옥에서 죽여 버리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스럽구나!"라고 탄식하였다. 걸왕과 매희는 사치가 몸에 배여 있었던지라 아무도 시중드는 사람 없는 황량하고 외진 산골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일할 줄도 몰랐다. 결국 그들은 와우산(臥牛山)에서 산채로 굶어죽고 말았다. 일설에 의하면 정산(亭山: 지금의 안휘성 화현<和縣> 서북의 역양산<歷陽山>)에서 죽었다고 한다. 어떤 사서(史書)에서는 걸왕이 탕의 병사들에게 사로잡히지 않고 남소(男巢)로 도망쳐 행적을 감추고 살다가 병으로 죽었다고도 한다. 걸왕의 죄악이 과연 이토록 무거운 것인지에 대해서 후세 사람들은 다소간 논쟁을 한 적이 있는데, 이에 대해 긍정을 표한 사람도 있으나 의문을 제기한 사람도 있다. 그 중에서 송대(宋代)의 나필(羅泌)은 <걸주사다실실론(桀紂事多失實論)>에서, 걸왕의 많은 죄악은 실제로 그가 저지른 것이 아니고, 후세 사람들이 후대 제왕의 죄악을 걸왕에게 둘러씌워 그를 폭군의 전형적인 인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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