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湯)은 성이 자(子), 이름이 리(履)이며, 무탕(武湯), 무왕(武王), 천을(天乙), 성탕(成湯), 성당(成唐)이라고도 칭한다. 갑골문 속에서는 당대을(唐大乙), 고조을(高祖乙)이라고 일컬었다.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상(商) 부락의 장으로 하(夏)를 멸망시키고 상을 건국했으며 13년간 재위하다가 100세 때 병으로 죽었다. 장지는 6곳이 있다고 전해오는데 그 중에서 박(亳: 지금의 하남성 상구현<商丘縣> 북쪽)에 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탕은 제곡의 후손 설(契)의 자손으로 상(商) 부락의 장이었다. 하(夏)왕조 말기에 상족(商族)이 점점 강성해지고 하의 걸왕(桀)이 폭정으로 민심을 잃자 탕은 하를 멸망시키기로 결심하였다. 강대해진 탕의 세력에 위협을 느낀 걸왕이 그를 하대(夏台)에 가두자, 상족은 걸왕에게 황금을 바치고 측신들을 뇌물로 매수하여 탕을 석방시켰다. 탕의 아내에게는 시집올 때 데려온 이윤(伊尹)이라는 몸종이 있었다. 탕은 그를 주방에서 일하게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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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은 자기의 재능을 탕에게 인정받기 위해, 어떤 때는 요리를 그의 구미에 맞게 하고 어떤 때는 조금 짜거나 싱겁게 했다. 한번은 탕이 그를 나무라자 그는 때를 놓치지 않고 탕에게 자신의 치국관을 피력했다. 탕은 크게 놀라면서 그가 비빔한 인물임을 알아보고는 그를 우상(右相)에 임명했다. 이로부터 탕은 이윤의 지략을 바탕으로 하를 멸망시킬 준비를 차근차근 해 나갔다. 탕은 어진 덕망으로 민심을 얻어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한번은 그가 밖으로 놀러 나갔다가 한 농부가 나무위에서 그물을 펼쳐 놓고, "하늘에서 온 것이든 땅에서 온 것이든 사방팔방에서 온 새들은 모두 그물안으로 들어오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보았다. 탕은 그에게 말했다. "그대는 정말 너무하는군. 어째서 그렇게 다 잡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그물을 한쪽 면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전부 걷어 버리게." 농부는 탕의 말대로 했다. 그러자 탕은 이렇게 기도하였다. "새들이여! 왼쪽으로 가고 싶으면 왼쪽으로 가고, 오른쪽으로 가고 싶으면 오른쪽으로 가라. 내 말을 듣지 못한 새만 그물안으로 들어오라." 탕이 세 면의 그물을 열어 새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 후, 사람들은 모두 그가 너그럽고 인자하다고 칭찬하면서 한결같이 그를 따랐다. 탕은 걸왕의 포악무도함을 낱낱이 들추어내어 하나라에 종속된 작은 나라들을 불러모아 걸왕을 배반하고 상에 복종하게 하였으며, 그의 권고를 듣지 않은 갈(葛: 지금의 하남성 수현<睡縣> 북쪽), 위(韋: 지금의 하남성 활현<滑縣> 동남), 고(顧: 지금의 산동성 견성 동북)는 무력으로 공격하여 걸왕의 날개를 제거하였다. 탕은 다시 박으로 천도하여 전진 기지로 삼고 하를 멸망시킬 최후의 공격을 준비하였다. 탕은 이윤의 건의를 받아들여 하나라에 바치던 조공을 중단하고 걸왕의 반응을 살폈다. 걸왕은 구이족(九夷族)에게 상의 토벌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걸왕이 여전히 구이족의 병력을 움직일 힘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탕과 이윤은 즉시 걸왕에게 용서를 구하고 조공을 계속 바치기로 했다. 1년 후 구이족도 더 이상 걸왕의 폭정을 견디지 못하고 배반하자 걸왕의 힘은 크게 약화되었다. 탕과 이윤은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렸다가 하나라를 공격하여 단번에 멸망시키고 상나라를 세웠다. 탕은 상의 도읍을 박에 정한 후 세금을 줄이고 백성들을 위로하면서 나라를 잘 다스려 그 세력을 황하 상류까지 확대시켰다. 탕임금은 17년간 부락의 장을 지내고 13년간 상나라의 왕으로 재위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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