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왕(紂王)은 수(受)라고도 하며 제신(帝辛)이라고도 한다. 생몰연대는 미상이며 제을(帝乙)의 아들이다. 제을이 죽은 후 왕위를 계승하여 중국역사상 유명한 폭군으로 기록되었다. 33년간 재위하였으며, 나라가 망하자 조가성(朝歌城) 녹대(鹿台)에서 분신자살하였다. 장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주왕은 신체가 장대하고 외모가 준수하며, 맨손으로 맹수를 사로잡을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 또 총명하고 재치가 있으며 문학적 재능도 뛰어났다. 그는 여러 차례 동이(東夷)를 공격하여 많은 노예들을 포로로 잡아왔다. 그는 또 동남쪽에도 주의를 기울여 중원문화를 회하(淮河) · 장강(長江) 유역으로 전파함으로써 통일 중국의 면모를 갖추는데도 어느 정도 기여하였다. 주왕은 황음무도하고 포악하였으며, 달기(妲己)를 총애하여 하루종일 달기와 함께 궁중에서 술을 마시며 유희를 즐겼다. 그는 궁중에 연못을 파서 바닥에 자갈을 평평하게 깔고 연못안에는 술을 가득 부어두었다.('주지<酒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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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 사방에는 비단을 감은 나뭇가지에 고기를 매달아두고 '육림(肉林)'이라 하였다. 이른 바 "주지육림(酒池肉林)"의 고사가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주왕과 달기는 많은 시종들과 함께 '주지(酒池)'에서 배를 타고 다니면서 즐겁게 놀닐다가 손 가는대로 술을 퍼 마시고 '육림(肉林)'에서 고기를 마음껏 따 먹었다. 여기에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서 그는 백성들을 혹독하게 착취하였다. 그리고 달기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길가는 사람의 목을 베거나 다리를 자르고 심지어는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는 등 그 잔인함이 극에 달했다. 주왕의 이복 형 미자계(微子啓)가 여러 차례 그에게 충고를 하였지만 그는 고집을 꺾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자계는 하는 수 없이 도성을 떠나 숨고 말았다. 주왕의 삼촌 비간(比干)이 그에게 충고를 하자 그는 태연하게, "성인의 심장은 구멍이 일곱 개라던데 당신의 심장은 구멍이 몇 개인지 내가 한번 봐야겠소!"라고 하면서 부하에게 명하여 비간을 죽이고 그의 심장을 꺼내 보았다. 주왕은 달기의 말에 현혹되어 청동으로 속이 빈 기둥을 만든 다음 그 안에 벌겋게 달아오른 숯불을 집어넣어 '포락(炮烙)'이라는 형구(刑具)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그의 폭정에 불만을 품은 신하와 백성들은 옷을 발가벗겨서 청동기둥에 묶어 놓고 무참하게 태워 죽였다. 주왕의 학정에 시달린 신하와 백성들은 원망이 극에 달하여 마침내 배반의 무리가 늘어나고 측신들도 한사람씩 그의 곁을 떠났다. 후에 주(周) 무왕(武王)은 주왕의 주력군이 동남에 있을 때를 노려 대군을 거느리고 그를 토벌하였다. 이때 주왕은 달기와 녹대(鹿台)에서 한창 술을 마시고 있다가 그 소식을 접하고 황급히 병사 70만을 편성하여 전선으로 달려가서 무왕의 군대를 맞이하였다. 양군은 목야(牧野: 지금의 하남성 기현<淇縣> 남쪽)에서 마주쳤다. 무왕의 군대가 용감하게 돌격하자 주왕의 군대는 무기를 버리고 뿔뿔이 흩어졌다. 주왕은 급히 조가성(朝歌城)으로 도망갔으나 명이 다한 것을 알고 자살을 결심하였다. 그는 또 죽은 후에 백성들이 자기의 시체를 꺼내 분풀이할 것을 두려워하여 궁중의 모든 패옥을 가지고 20미터 높이의 녹대로 올라가서 온몸에 패옥을 걸치고 녹대 아래에 마른풀을 쌓아 불을 지르게 하였다. 잠시후 불길이 하늘로 치솟자 주왕은 불에 타 죽었다. 주(周) 무왕은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조가성으로 들어간 후 폐허가 된 녹대로 달려가서 검게 탄 주왕의 시체를 찾아냈다. 그리고는 그에게 화살을 세 대 쏘고 다시 칼로 몇 번이나 찌른 다음, 마지막에 도끼로 주왕의 머리를 베고 장대에 매달아 백성들의 원한을 풀어주었다. 이에 이르러 상나라는 멸망을 고하게 되었다. 주왕의 폭행이 정말 이토록 심했을까? 이에 대해서 후세 사람들은 반신반의하여 의견이 분분하였다. 송대(宋代)의 나필(羅泌)은 ≪걸주사다실실론(桀紂事多失實論)≫에서, 대형 궁궐을 짓고, 주지육림을 만들고, 여색을 좋아하고, 어진자를 구금하고, 충신을 잔혹하게 해친 것 등과 같은 주왕의 만행이 하나라 폭군 걸왕의 만행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도 비슷한 것을 보면 이러한 것이 모두 모방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송대의 이자명(李慈銘)은 ≪도화성해암일기(桃花聖解庵日記)≫에서, 각종 역사 기록을 통해서 보면 주왕의 만행은 비간(比干)을 죽이고, 기자(箕子)를 구금하고, 달기를 총애하고, 숭후(崇侯)를 편애하고, 문왕(文王)을 구금한 것 등인데, 이것은 후세의 폭군에 비해서 그 죄가 더 심하다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은 ≪논어(論語)≫「자장편(子張篇)」에서 주왕의 죄행이 결코 사서에 기록된 것처럼 그렇게 심한 것은 아니고, 단지 후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죄행을 그에게 덮어씌운 것일 뿐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주왕도 걸왕과 마찬가지로 죄악의 상징이자 폭군의 전형이 되었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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