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역사시대-주(周)의 성군 무왕(武王) 희발(姬發

지식창고지기 2010. 2. 19. 13:28

무왕(武王)은 이름이 희발(姬發)이고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문왕(文王)의 둘째 아들로 문왕이 죽은 후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재위기간은 3년, 93세에 병으로 죽었다. 장지는 필원(泌原)에 있다.

희발(姬發)은 문왕의 큰 아들 백읍고(伯邑考)가 상(商) 주왕(紂王)에게 피살됨으로써 문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위에 오른 후에 강태공(姜太公)을 국상(國相)에 그대로 연임시키고 동생 주공단(周公旦)과 소공석(召公奭)의 보좌를 받으면서 더욱 내정을 정비하고 군사력을 증강시켰다. 그리고 문왕의 유지를 받들어 상 주왕의 토벌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 이듬해에 희발은 맹진(盟津: 지금의 하남성 맹현<孟縣> 남쪽)에서 제후들을 모아놓고 군용을 가다듬었다. 이 모임에서 800여명의 제후들이 참가하여 상나라를 토벌하기 위한 예행 연습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아 무왕은 상나라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2년 후 봄,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희발은 전차 300대, 무사 3000명, 병사 45000명을 직접 이끌고 주변 소국의 병력과 연합하여 정월 초하루에 출정식을 갖고 맹진에서 상나라로 공격해 들어갔다.

결국 목야(牧野)에서 상나라 군대를 크게 무찌른 후 상왕조를 멸망시키고 서주(西周)를 세웠다. 수도는 호경(鎬京: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西安市> 서남)에 정하고 이름을 종주(宗周)라 하였다.

무왕이 주왕을 토벌한 것은 중국역사상 획기적인 의미를 갖는 대사건이다. 그러나 그 사건이 발생한 시점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의 의견이 분분하다. 한대(漢代)의 유흠(劉歆)으로부터 현대의 사학자와 천문학자에 이르기까지 약 20여종의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관해서 ≪회남자(淮南子)≫「병략훈(兵略訓)」에 기록되어 있는 독특한 견해를 하나 소개해 보겠다.

거기에는 "무왕이 주왕을 토벌할 때 세성(歲星: 목성)이 동쪽 하늘에 나타남과 동시에 혜성이 나타나서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1910년 헨리혜성의 출현과 그것의 지구 순환 주기에 근거하여 40번의 순환 주기를 역으로 추산하면, 기원전 1057년에 헨리혜성이 지구를 지나갔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회남자≫「병략훈」의 기록과 부합한다. 따라서 무왕이 주왕을 토벌한 연대는 마땅히 기원전 1057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현대의 학자들은 많은 동조를 하고 있다.

희발은 상나라를 멸망시킨 며칠 후에 작은 산에 올라가서 상의 도성 조가(朝歌)의 웅장함을 내려다보고, 이렇게 강성한 상왕조도 수백년이 지난 뒤에 민심을 잃음으로써 일순간에 멸망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서주의 건국 초기에는 희발의 반대 세력이 많아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근심을 지울 수 없었다. 주왕실의 세력을 공고히하고 확대하기 위해서 희발은 작위를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 5등급으로 나누어 친족과 공신들을 책봉하고 그들에게 제후국을 세우도록 했다. 이에 강태공은 영구(營丘: 지금의 산동성 치박시<淄博市>)의 제(齊)나라에, 주공단은 곡부(曲阜: 지금의 산동성 곡부현)의 노(魯)나라에, 소공석은 계구(丘: 지금의 북경)의 연(燕)나라에 각각 분봉되었다. 그리고 상왕조의 잔여 세력을 위로하기 위해서 희발은 주왕의 아들 무경(武庚)을 은후(殷侯)에 봉하여 은(殷)의 도성에 살도록 하고, 형제 관숙선(管叔鮮), 채숙도(蔡叔度), 곽숙처(叔處)를 '삼감(三監)'으로 파견하여 그를 감시하게 하였다.

서주가 건국된지 3년째 되던 해에 희발은 천하가 안정되지 않은 가운데 호경(鎬京)에서 병사하였다.

희발이 죽은 후에 시호를 무왕(武王)이라 하였다. ≪상서(尙書)≫의「태서(泰誓)」와 「목서(牧誓)」, ≪시경(詩經)≫의「소남(召南)」과 「감당(甘棠)」 등 20여편의 문헌에 무왕의 언행에 관한 기록이 전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