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역사시대-당의 기틀을 다진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

지식창고지기 2010. 2. 19. 13:37

[당태종 이세민]

당(唐) 태종(太宗)은 이름이 이세민(李世民: 599 ~ 649), 고조(高祖) 이연(李淵)의 차남이다. 태자를 죽인 후 고조를 협박하여 황위를 선양받았다. 23년간 재위하다가 이질에 걸려 5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장지는 소릉(昭陵: 지금의 섬서성 예천현<醴泉縣> 동북)에 있다.

이세민(李世民)은 서기 617년에 유문정(劉文靜) 등과 이연을 부추켜 거병을 하여 관중(關中)으로 진격하였다. 당왕조가 수립된 후 진왕(秦王)에 책봉되었으며 상서령(尙書令)을 역임하였다. 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국 각지를 전전하며 전투에 임하여, 설인고(薛仁), 유무주(劉武周), 왕세충(王世充) 등의 할거세력을 소탕하고, 유흑달(劉黑), 두건덕(竇建德) 등의 농민봉기군을 진압한 후, 점진적으로 전중국을 통일해 나갔다. 그는 바로 당나라의 실질적인 창업자였던 것이다.

이세민은 업적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인재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무관으로는 울지경덕(尉遲敬德), 진숙보(秦叔寶), 서세적(徐世勣), 이정(李靖) 등과 같은 명장이 있었고, 문관으로는 방현령(房玄齡), 두여회(杜如晦) 등 18학사(十八學士)가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그는 태자 이건성(李建成)과 치열한 황위 쟁탈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건성은 태자라는 합법적인 신분을 이용하여 많은 종친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관중(關中)을 지키면서 경성 장안(長安)에 튼튼한 기반을 마련하여 궁궐의 금위군(禁衛軍)까지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고조 이연이 그를 마음에 들어하였고, 고조의 애첩 장첩여(張婕妤)와 윤덕비(尹德妃)도 그와 관계가 밀접하였다. 그는 이러한 이점을 이용하여 황위를 순조롭게 승계하기 위해 여러 차례 이세민을 제거하려 하였다.

어느날 저녁 그는 이세민을 집으로 청하여 술을 마시자 해놓고는 술에 독약을 탔다. 아무 것도 모른 이세민이 그대로 잔을 받아 마시자 갑자기 배가 꼬이는 듯 아파왔다. 그들의 숙부 회안왕(淮安王) 이신통(李神通)이 마침 마당에 있다가 이세민을 업고 서궁(西宮)으로 돌아갔다. 이세민은 한 바탕 구토를 하고 많은 피를 쏟아낸 다음에야 비로소 이건성이 술에 독을 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황급히 의원을 불러 치료를 받은 후 서서히 회복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이건성은 넷째 동생 제왕(齊王) 이원길(李元吉)과 합세하여 이세민 제거에 더욱 열을 올렸다. 그는 거금을 들여 몰래 진왕부(秦王府)의 울지경덕 등의 장수를 매수하려 하였으나 거절 당했다. 그는 또 고조 이연에게 이세민의 심복 책사들이 진왕부를 떠나도록 종용하였다. 서기 626년 5월 돌궐족이 중원을 침입하였다. 이 때를 틈타 이건성은 고조에게 이원길을 돌궐족 토벌의 총사령관에 임명해 달라는 상소를 올렸으며, 고조는 그것을 윤허하였다. 이원길은 울지경덕과 진숙보, 정교금(程咬金) 등 세 명의 뛰어난 장수를 자신의 휘하에 두게 해달라고 건의하였다. 그리고는 진왕부의 정예병을 자기의 심복으로 만들어 이세민의 병권을 박탈한 후에 그를 죽일 계책을 꾸몄다. 이러한 위기에 직면하여 이세민은 처남 장손무기(長孫無忌), 울지경덕 등과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 두 사람이 이세민에게 선수를 치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자 이세민은 잠시 머뭇거리면서, "아무래도 형제끼리 서로 죽이는 것은 좋지 않소. 저들이 먼저 손을 쓰면 그때 우리가 다시 반격을 가하는 것이 좋겠소."라고 하였다. 다급해진 두 사람은 만약 지금 손을 쓰지 않으면 저들이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지는 않을 것이라 말하고, 이세민에게 선제 공격을 결심하도록 종용했다.

6월 3일 이세민은 고조 이연에게 이건성과 이원길의 죄상을 폭로하고, 그들이 후궁에서 못된 짓을 일삼으며 장첩여, 윤덕비와도 미심쩍은 관계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란 이연이 "그들이 감히 그런 짓을 해?" 라고 하자, 이세민은 "그들은 여러 차례 저를 해치려고도 하였습니다. 만약 소자가 곳곳에 방비를 해두지 않았더라면 벌써 부황을 뵐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말을 이었다. 사안의 중대함을 인식한 고조는 시비를 분명히 가린 후에 처리하기 위해 그들 세 형제를 다음날 아침에 등청하여 대질하기로 하였다.

다음날 아침 이세민은 직접 장손무기 등을 데리고 현무문(玄武門) 주위에 매복해 있었다. 현무문의 수문장 상하원(常何原)은 이건성의 심복이었으나, 이 때 이세민은 이미 그를 거금으로 매수해 둔 터였다. 이 소문을 들은 장첩여는 급히 이건성에게 사람을 보내 그것을 알렸다. 이건성은 이원길과 상의를 하였다. 이원길이 말하였다.

"서둘러서 군사를 배치한 후 병을 핑계로 등청하지 말고 사태를 관망하다가 다시 의논합시다."

 

"걱정하지 마라. 궁안에서는 장비(장첩여)와 윤비(윤덕비)가 호응하고, 밖에서는 내 군대가 현무문을 지키고 있는데, 이세민이 나를 어쩌겠느냐?"라고 이건성은 대답하고 이원길에게 그와 함께 등청하자고 했다. 그의 부하들은 이건성에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호위병을 데리고 등청할 것을 권했으나, 그는 그것을 거절하고 이원길과 함께 말을 타고 현무문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말을 타고 임하전(臨河殿)에 이르렀을 때,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급히 말머리를 돌려 돌아갔다. 갑자기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태자 전하, 제왕 마마! 어째서 등청하지 않으십니까?"

 

이원길이 머리를 돌려 보니 그는 이세민이었다. 이원길은 급히 활을 들고 연속으로 화살을 세 발 쏘았으나 맞히지 못했다. 그러나 이세민은 단 한 발에 이건성을 적중시켜 말에서 쓰러뜨렸으며, 화살에 맞은 이건성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이를 보고 깜짝 놀란 이원길은 서쪽으로 달아났으나 울지경덕이 이끄는 70여명의 기마병과 맞부딪혀 다시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화살이 빗발치는 가운데 그는 말에서 굴러떨어져 숲속으로 숨었지만 바로 이세민에게 발각되었다. 치열한 격투 끝에 이원길이 이세민을 올라타고 활을 빼앗아 이세민의 목을 조였다. 절박한 순간에 이원길은 울지경덕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다시 황급히 달아났으나 울지경덕이 쏜 화살을 맞고 죽었다.

현무문에 변고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동궁(東宮)과 제왕부(齊王府)의 병사들은 2만여명이 즉시 출동하여 진왕부에 맹공을 가했다. 이세민은 한편으로는 부하들을 지위하여 방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울지경덕을 궁안으로 들여보냈다. 이때 고조는 마침 후궁, 대신들과 함께 호수에서 뱃놀이를 하고 있었다. 울지경덕이 보고하였다.

"태자(이건성)와 제왕(齊王: 이원길)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진왕(秦王: 이세민)은 폐하께서 놀라실까 걱정되어 신을 보내어 호위하게 하셨습니다."

 

고조는 크게 놀라 물었다.

"태자와 제왕은 지금 어디 있느냐?"

 

"이미 진왕에게 처형되었습니다."라고 울지경덕이 대답했다.

이 말을 듣고 매우 난감해진 고조는 그를 가까이 오라고 한 다음 신하들에게 어찌해야 좋을지 물었다. 이때 옆에 있던 재상 소우(蕭瑀)가 말하기를, "진왕의 공덕이 세상에 두루 미쳐 인심을 많이 얻고 있습니다. 지금 이건성과 이원길이 죽어 버렸으니, 마땅히 진왕을 태자로 삼으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울지경덕이 "아직 바깥이 완전히 평정되지는 않았으니, 폐하께서 각 부대에 진왕의 통제에 따르라는 성지를 내려주십시오."라고 하자, 고조는 그의 말에 따라 성지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3일 후 이세민은 정식으로 태자에 책봉되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사건을 역사에서는 '현무문의 변(玄武門之變)'이라 일컫는다.

이 '현무문의 변'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진 학자들도 있다. 특히 최근 TV극 <<진왕이세민(秦王李世民)>>의 방영으로 그들은 이연이 결코 멍청이가 아니며, 이건성도 몹쓸 악당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세민과 이건성의 쟁탈은 황위 승계를 놓고 벌인 황자들 간의 참극이다. 그들은 이 극을 비롯한 일반 문학작품들이 현무문의 변을 묘사하면서 이연과 이건성을 깎아 내리고 이세민을 치켜세운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