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등소평의 결혼 생활과 가족

지식창고지기 2010. 2. 27. 11:54

<아내 탁림과 함께(1974)>

등소평은 개인적으로 세 번이나 결혼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정치무대에서 '3전 3기'와 함께 결혼생활에서도 세 번의 파란이 있었다. 그가 세 번째 복권으로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성공적인 정치가가 되었다고 한다면, 세 번째 결혼으로 화목한 가정을 이룩한 성공적인 가장이 되었다. 등소평의 첫 번째 아내는 장석(張錫, 또는 장천원<張천元>)으로 하북성 방산현(房山縣) 출신이다. 그녀의 아버지 장경해(張鏡海)는 철도 노동자로 1922년 '2.7 대파업' 때 노동자 대표로 지명수배를 받기도 하였다.

1925년 장석은 모스크바 중산대학 유학생으로 추천되었다. 이때 그녀는 프랑스에서 경찰의 지명수배를 피해 모스크바로 와서 유학하고 있던 등소평을 만났다. 1927년 두 사람은 중국에 돌아가 상해의 중앙 비서처에서 함께 근무하면서 사랑이 싹터 28년 초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불행히도 2년 후(1930) 장석은 난산으로 상해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때 등소평은 광서에서 한창 '백색봉기'를 조직하고 있었다. 장석의 사망으로 등소평의 첫 번째 결혼생활은 불과 3년도 못되어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등소평의 두 번째 결혼도 비극으로 끝났다. 비극의 여주인공은 김유영(金維映)으로 사람들은 그녀를 아김(阿金)이라 불렀다. 그녀는 절강성 대산(岱山) 출신으로 등소평과는 동갑내기였는데, 두 사람은 상해에서 서로 알게 되어 1931년에 함께 강서(江西)로 간 후 결혼을 하였다.

김유영은 소비에트구의 도현(都縣)과 승리현(勝利縣)에서 현위원회 서기를 역임한 당시에 많지 않던 여성 간부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1933년 등소평이 강서 회창현(會昌縣) 현위원회 서기로 있을 때 김유영도 함께 타도되어 신변에 위험이 닥치자 그녀는 그만 등소평과 이혼하고, 당시 등소평을 책임지고 조사하던 조직부장 이유한(李維漢: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중앙 통전부장<統戰部長> 역임)의 품에 안겼다. 이유한과 김유영은 그 이듬해에 결혼을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국무위원을 역임한 이철영(李鐵英)이다.

1935년 등소평은 김유영과 함께 홍군장정에 참가하여 같은 부대에서 활동하면서 대단히 난처한 입장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철영은 1936년 장정(長征) 후 연안에 도착하여 출생하였기 때문에 등소평의 혈육은 아니다. 그런데 이철영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유영은 정신병에 시달리다 못해 모스크바로 가서 정신병 치료를 받았다. 그후 1941년 그녀는 모스크바에서 독일군 비행기가 폭발했을 때 실종되었다.

 

등소평의 세 번째 결혼 상대자는 그의 마지막 동반자 탁림(卓琳)이다. 탁림의 본명은 포경영(浦瓊英)으로 1916년 4월 운남성 선위(宣威)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936년에 북경대학 물리과에 입학하여 운남성 최초로 북경대학에 입학한 여성이 되었다. 등소평의 딸 등용(鄧榕)의 말에 의하면 등박방, 등남과 등질방이 모두 어머니 탁림의 영향으로 북경대학 물리과에 들어갔다고 한다.

1937년 7월 일본군이 북경을 점령하자 탁림은 그녀의 언니 석영(石英)과 함께 혁명성지 연안(延安)으로 도피하여 간부를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섬북공학(陝北公學)에 들어갔다. 1939년 여름에 다른 사람의 소개로 등소평을 알게되어 9월 초에 결혼을 하였다. 모택동(毛澤東), 강청(江靑), 유소기(劉少奇), 장문천(張聞天) 부부, 왕명(王明) 등 중국공산당 군정 핵심 요원들이 모두 그들의 결혼식에 참석하였다. 당시 등소평은 36세, 탁림은 24세였으며, 탁림은 등소평이 이끄는 북방국(北方局) 부녀촉진회에서 일하고 있었다.

등소평과 탁림은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는데, 장녀 등림(鄧林), 장남 등박방(鄧樸方) 아래로 차녀 등남(鄧楠), 3녀 등용(鄧榕: 모모<毛毛>라고도 함)과 막내 등질방(鄧質方)이 있다. 등소평의 자녀들은 모두 산아제한 정책의 옹호자들이다. 등박방은 불구의 몸이 되어 후사가 없지만, 그 나머지 네 사람은 모두 한명의 자녀만 가지고 있으며, 그 중 등질방만 아들이 있다.

문혁시기에 등소평은 당시 국가 주석 유소기의 당내 주자파(走資派) 2인자로 지목되어 모든 당직에서 파면된 후 강서성의 트랙트 공장으로 추방되어 육체노동에 종사하였다. 이때 그는 아내 탁림과 계모 하백근(夏伯根)만 데리고 갔으며, 그의 다섯 자녀들도 모두 각지로 추방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남아서 갖은 고초를 겪었다. 그 중에서 장남 등박방의 운명이 가장 비참하였다.

1944년에 태어난 등박방은 1962년 북경대학 물리과에 입학하여 문혁 초기에 어떠한 활동도 하지 않았지만, 1968년 등소평이 비판 받은 후 그도 반대파에 의해 방사성 물질에 심각하게 오염된 실험실에 갇혔다. 그곳에 오래 있다가는 꼼짝 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다급한 상황에서 그는 4층에서 수도관을 따라 탈출하려 하였지만 불행히도 땅에 굴러떨어져 그만 척추에 중상을 입고 말았다. 그러나 등소평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그는 당시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여 결국 반신불구의 몸이 되었다.

1981년 캐나다로 가서 유명한 정형외과 전문의로부터 치료를 받았지만 하반신이 완전히 마비되어 있던 상태에서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귀국한 후 등박방은 중국의 장애자 복지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1983년에 '중국장애자 복지 기금협회'를 설립하였다. 중국 장애자의 사회적 지위를 제고시킨 그의 공헌은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현재 등박방은 흉부 이하가 완전히 마비되어 휠체어에 의존하고 있으나, 다행히도 정형외과 전문의 고소녕(高蘇寧)이 그와 결혼하여 함께 가정을 꾸려가고 있다.

등질방은 형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조한 편이다. 그는 북경대학 물리과를 졸업한 후 뉴욕 맨체스터대학에서 양자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미국에서 2년간 근무하다가 88년에 생물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아내 유소원(劉小元)과 미국에서 태어난 아들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가 중신(中信)의 부사장을 역임하였다. 92년에 상해 사방부동산 실업공사(四方房地産實業公司)를 설립하여 부동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장녀 등림(登林, '林'은 원래 '琳'이었음)은 수묵화 화가이면서 중국 '동방미술교류협회' 회장이다. 1941년 산서 태항산(太行山) 군부대에서 태어났으며 후에 북경 중앙미술대학 중국화과에 입학하여 화조도를 배웠다.

문혁시기에는 남창(南昌)으로 추방되어 남편 오건상(吳建常)을 만났으며, 그후에 등소평을 따라 북경에 돌아가서 '동방미술교류협회'를 설립하고 회장이 되었다. 등림은 여러 차례에 걸쳐 해외 전시회를 가지기도 하였으며, 그녀의 남편 오건상은 중국 유색금속 수출입회사와 여러 개의 상장회사를 관리하고 있다.

등남은 현재 국가 과학위원회 부주임으로 92년 등소평의 남방 순시를 기획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등남은 64년 북경대학 물리과에 입학하여, 문혁시기에는 안휘성 황산(黃山)으로 추방되었다. 등소평이 정권을 장악한 후에 그녀는 다시 과학위원회 과학기술 정책국 부국장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남편 장굉(張宏)은 국가 과학위원회 과학기술개발국 국장이다.

지난 수년 동안 등소평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자녀는 셋째 딸 등용(鄧榕: 즉 소용<蕭榕>)이다. 그녀는 등소평의 개인 비서이면서 등소평의 귀와 입 역할을 하였으며, 등소평을 대신하여 정보를 듣고 지시를 하달하였다. 아명이 모모(毛毛: 마오마오)이기도 한 등용은 어릴 때부터 성격이 명랑하고 영리하여 부모로부터 각별한 사람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혁시기에 북경사범대학 부속여고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녀는 섬서성 부현(富縣)으로 추방되었다. 당시에 그녀는 갖은 냉대를 받았으나 현재의 남편 하평(賀平)만은 그녀를 잘 대해 주었으며, 얼마 안 있어 두 사람은 결혼하였다.

등소평이 두 번째 복위되었을 때 등용은 북경의과대학에 입학하였으며, 77년 졸업한 후에는 해방군 총정치부로 발령 받았다가 79년에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파견되었다.

4년 후에 귀국하여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정책연구실 부주임에 임명되었다. 88년 제6기 전국 부녀회의 집행위원 선거에서 그녀는 15명의 낙선자 명단에 오르기도 하였다. 등용은 등소평의 개인 비서를 충실히 이행하였으며, 그녀의 남편 하평은 해방군 최대의 무기회사인 보리공사(保利公司) 사장을 역임하였다. 최근 그녀는 ≪나의 아버지 등소평 - 문혁세월(我的父親鄧小平-文革歲月)≫이란 책을 출판하여 국내외의 많은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