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 주周 ( BC770~BC221 ) 제자백가 - 공자 1

지식창고지기 2009. 5. 31. 21:44

공자孔子 - 1



BC 551 노(魯)나라~BC 479 노나라.

중국 춘추시대의 교육자·철학자·정치사상가, 유교의 개조(開祖).


공부자(孔夫子)라고도 한다.

본명은 공구(孔丘). 자는 중니(仲尼).

그의 철학은 동아시아 전 문명권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유교의 역사는 공자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부처는 불교의 창시자이고 예수는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이지만 공자는 엄밀히 말해

유교의 창시자가 아니다.

공자는 자기 자신을 '옛 것을 살려 새로운 것을 알게 하는'(溫故而知新) 전수자로 여겼다.

공자는 제사·천제(天祭)·장례 등의 의식들이 수세기 동안 존속해온 이유를 알아내고자

하다가 옛 것에 대한 애착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과거로의 여행은 근원에 대한 탐구로 공자는 그 근원은 소속감과 일체감에 대한

인간의 절실한 필요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문화의 축적된 힘을 믿었고, 전통적 방식이 활력을 잃었다고 해서 장래에 다시

되살아날 수 있는 잠재력마저 없어졌다고는 보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역사관은 너무나 투철해서 자기 자신을 주(周)나라 때 꽃피웠던 문화적 가치와

사회적 규범이 존속되도록 전수시켜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공자가 주창한 학자적 전통은 고대의 성군(聖君)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고학에 의해 공식적으로 확인된 최초의 왕조는 은(殷:BC 18~12세기)이지만 공자는

그보다 훨씬 이전의 시대를 유교전통의 시원(始原)으로 잡고 있다.

공자가 유교의 문화적 과정을 주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공자와 그 문인(門人)들은 자기

자신들을 전통의 한 부분으로 여겼다.

나중에 중국 역사가들은 이 전통을 유가(儒家)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전통은 전설상의 두 성군인 요(堯)와 순(舜)이 도덕정치를 펴던 2,000년 전으로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공자가 숭배했던 인물은 주공(周公:?~BC 1094)으로 주공은 '봉건적' 의례제도를 확충·

완성시킨 인물로 여겨진다.

이 의례제도는 혈연과 결혼으로 맺어진 인척관계, 새로 맺어진 계약 및 오래된 협약에

바탕을 둔 것으로 상호의존을 강조하는 정교한 제도였다.

국가가 문화적 가치와 사회적 규범을 통해 국내 질서뿐 아니라 제후국들과의 연합관계를

유지하려면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는 정치이상에 통치의 바탕을 두어야 한다.

그 이상이란 천명에 의해 윤리적·종교적 권한을 갖춘 보편적 왕권을 확립하는 것과 법적

구속이 아닌 예의범절에 의해서 사회적 유대를 이루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주나라는 이같은 정치이상을 실현했기 때문에 500년 이상 평화와 번영 속에서 존속할 수 있었다.


주공의 정치철학에 영향을 받은 공자는 고대의 성현들로부터 배운 정치이상을 실현시킴

으로써 주공에 뒤지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는 평생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공자는 자신의 정치이상을 실현시키지는 못했지만, 정치는 곧 도덕이라는 그의 철학은

후세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주대의 우주론에서 독특한 개념이었던 '천'(天)은 은대의 '상제'(上帝)와 유사한 개념이다.

은대의 왕들이 자신들을 상제의 후예라고 주장했던 것은 그들의 왕권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신성한 것임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주대의 왕들에게 있어서 '천'은 훨씬 의인화된 신(神)을 의미했다.

주의 왕들은 '천명'(天命)은 늘 똑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왕가의 후예들이 언제나

왕이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믿었다.

그 이유는 '민심이 천심'(民心則天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왕권을 유지하려면

필수적으로 덕을 갖추어야 했다.

주대에 인자한 도덕정치를 강조했던 사실은 수많은 청동기에 새겨진 명문(銘文)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은 은나라의 붕괴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했고 도덕정치라는 뿌리깊은 세계관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기도 하다.


활기넘치는 봉건적 의례제도와 주왕가의 도덕적 통치 때문에 주왕들은 여러 세기에 걸쳐

그들의 왕국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BC 77년 중앙아시아로부터 공격해오는 이민족을 피하기 위해 도읍을 옮겨 현재의

뤄양[洛陽]으로 동진하게 되었다.

그 뒤로 실권은 봉건영주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주왕가의 후손들은 명목상으로 왕의 지위를 유지했고 부분적으로 상징적인 통치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공자의 시대에 이르러 봉건적인 의례제도는 근본적으로 붕괴되었고 정치적

위기로 인해 도덕적 타락에 대한 우려가 매우 높아졌다.

상징적 통치의 중심이었던 주의 왕들은 더이상 왕국이 완전 붕괴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한 공자의 대응책은 먼저 인간이 되기 위한 학문에 힘쓴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수세기 동안 정치안정과 사회질서에 기여해온 사회제도, 즉 가정·학교·

향리·제후국·종주국 등을 활성화시키려고 했다.

공자는 금권과 권력이 최고라는 현상태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개인의 존엄성, 사회 연대,

정치질서를 위해서는 개인의 인품과 지도자적 자질의 밑바탕이 되는 도덕심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느꼈다.